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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레디앙에서 청탁을 받았는데... 게을러터져서 미루고 미루고 전자우편, 문자메시지로 재촉받길 수십회. 아주 늦게 쓴 글이다.
    나는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회주의자,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라고 제목을 붙여 보냈는데... 짧고 과격해졌다.



   "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세계의 사회주의자-28] 영성 깊은 목회자 블룸하르트


    비행기 한 번 타지 못한 터라 다른 나라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이 나라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두 가지 오해
    첫 번째 오해는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는 이른바 영적인 신앙인들은 결국 보수적(친미적이든 친한나라적이든) 입장을 가지게 되고, 기도도 하지 않고 룻이 여자인지 롯이 여자인지도 모르는 신앙인들은 결국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색과 구도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세상만사에 대해 '감사'하게 되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황희처럼 네 말이 옳구나, 네 말도 옳다, 허허, 당신 말도 옳소, 라는 식으로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맞장구칠 수 있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투캅스의 안성기처럼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돌아다니다가 일요일, 수요일에 예배당에 앉아서 눈물 찔끔 흘리고 십일조 봉투를 내미는 사람을 예수께서 장하다고 하실까? 전두환을 앞에 두고 하늘이 내린 영도자라고 칭송했던 목사들을 예수께서 충성했다고 칭찬하실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까닭은 성경 자체를 제대로 모르고, 스스로 고민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모범으로 삼을만한 신앙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블룸하르트의 성장 배경, 영적 경험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1842~1919)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는 대단히 유명한 목회자였으며 치유자였다.
    아버지 블룸하르트가 1844년 카타리나라는 여자 교인의 병을 고치고 난 후, 참회운동이 온 마을을 휩쓸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모여 죄를 고백하고, 알콜중독자들이 술을 끊고,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으며, 병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도 아버지 블룸하르트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열려져 있는 서재 창문을 통해서 병이 낫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1852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괴핑겐 근처로 이사했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도움받길 원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자기 자신의 부족한 면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양친과 그들을 늘 가득 채우고 있던 영적 온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나는 늘 소외감을 느꼈고 그러한 생활은 나와는 거리가 먼 뭔가 거룩한 것이었고 내 영혼을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의 내적 확신보다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유명한 신앙인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1872년 고트리빈 디투스(카타리나의 언니)의 영면을 지켜보면서 당시 30세이던 블룸하르트는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 사도들이 어떻게 설교했는지 이해할 정도로 "이상스러운 탄생"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후 블룸하르트에겐 모든 의심과 불확실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에게 오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맡아 썼고, 목회일도 대리했다. 1880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블룸하르트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회의감
    더 많은 사람들이 블룸하르트를 찾아오는데, 정작 블룸하르트는 회의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블룸하르트는 병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더럽혀 놓은 온갖 것을 다시 깨끗하게 해 놓아야 한다는 식으로,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취하는 방법으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면 거기엔 허위가 남게 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늘 이기적 성향이 깃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향한 구걸을 그만두고 어떻게 죄를 인식할 것인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하느님의 정의를 따라 노력하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에게 용납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으시오."
    개개인의 고난을 중요시하지 말고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기적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하느님 나라와 그 의에 봉사하는 것을 원했다. 블룸하르트는 개인 뿐 아니라 교회의 이기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교회를 향해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라고 했다.


    보다 넓어진 시각과 공개적인 '편들기'
    이후 블룸하르트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 사회운동을 벌였다. "예수는 많은 대중, 프롤레타리아 등 자기를 주장할 수 없는 자의 편이었다. 기쁜 소식이란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얻어야 할 내용이다.
    블룸하르트는,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과 함께 사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당시 교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블룸하르트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거룩한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운동을 반교회적인 태도,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몰아붙였다.
    밧볼에서 조용히 지내던 블룸하르트가 공개적으로 사회 문제를 거론하게 된 계기는 이른바 '교도소 법률안'이었다. 이는 '기업의 노동관계 보호를 위한 법'의 초안인데 1899년부터 작성된 것이었다.
    당시 교회는 파업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했다. 문제가 있으면 기업주의 양심에 호소하거나 최악의 경우 자선 사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룸하르트는 자본이 갖는 악마적 속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 법안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노동자들 편에 서기로 했다.
    그는 1899년 9월 19일, 괴핑겐에서 열린 항거대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나는 지금 알려진 법안이 제국의회에 상정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정된 후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공중 앞에 나서서 거기에 대한 반대입장을 천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의에 반하는 범죄입니다."
    그의 등장은 위축되어 있던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블룸하르트는 1899년 10월 2일 두 번째 집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오늘날 노동계급의 편에 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극히 적은 자들에게 속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리와 죄인들을 자기의 친구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이 되고 내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한다고 비난할 사람이 있습니까? ...... 1900년 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제 우리가 다시 실천하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왜 우리가 그것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되어야 합니까?
    민주주의적 신문인 「호펜스타우펜」은 그의 연설을 "사회민주주의의 신봉자 블룸하르트"란 제목으로 뽑아 호외로 발간했다.
    이때까지 블룸하르트는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그가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사람들은 블룸하르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블룸하르트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특별한 해명없이 공식적으로 입당했다. 그러자 교계와 정치계의 신문들이 본노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블룸하르트는 천대받는 개개인을 돕는 것보다 멸시받는 계급의 편에 서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 때문에 그때까지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그렇게 됐다.
    비템베르그주교회는 그에게 목사직과 그 외 다른 직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해왔고 그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라고 했으나 블룸하르트는 교회와 싸우지 않았다. 이후 블룸하르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종교적, 정치적 강연들을 했다. 비템베르그 지방의회에 사회민주당 후보로 추천되고 당선되기도 했다.


    여전히 깊은 영성을 지녔던 블룸하르트
    블룸하르트는 1906년 지방의회 의원 임기를 마치자 재출마 권유를 물리치고 팔레스틴(이스라엘) 여행길에 오른다.
    그는 1888년까지 대전도운동을 전개하고 병자들을 고쳤으며 그후 약 10년 동안 명상과 피정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하느님 나라'를 강조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블룸하르트의 여정이 왔다갔다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정작 블룸하르트의 생각은 초지일관 '하느님 나라를 기다림'이었다.
    그에게 기다림의 공동체는 곧 이 세상에서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교두보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예수가 승리한다!'는 확신 가운데 살았다. 여동생 안나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주름살 투성이의 손을 가슴에 얹고 조용히 누워 있거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하고 속삭였다."
    1919년 8월 2일 영면한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예수가 승리했다는 것은
    영원히 남으리라.
    온 세계는 그의 것이 되리라.
 
    ※ 이 글은 『혁명적 신앙인들』(1987년, 손규태 편저, 한국신학연구소 펴냄)을 주교재로 블룸하르트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서민식 목사 /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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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다

   내가 어떤 자리에 가서 이주노동자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대부분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이주노동자가 뭐냐는 물음과 좋은 일 하신다는 덕담이다.
   노동자는 나이, 성별, 국적에 따라 차별받지 않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설명해야 할 자리라면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흔히 외국인노동자라 하는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라고 답을 한다.
   좋은 일 하신다는 덕담에는 그냥 웃고 말지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정말 예외없이 듣는다) 좋은 일이라는 것이 뭘까, 자문을 던지곤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한 번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들이 누려야 마땅할 권리를, 이게 당신들의 권리라고 알려주고 그 권리를 찾도록 손톱 끝만큼 보탬을 주는 것뿐인데 좋은 일이라는 칭찬까지 들을 자격이 있을까 싶다.


   이미 이 나라에 이주노동자가 필요하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나라 국적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돈을 벌려는 목적 하나로', '불법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일자리까지 빼앗으면서' 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국에서 온 노동자들 여럿이 월급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찾아간 적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똥통을 만들 때 플라스틱으로 형을 떠서 굳히는 줄만 알았다. 플라스틱으로 총도 만들고 차도 만드는 세상이니 강도가 센 플라스틱이련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회사에 찾아가 임금 체불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그 이야기를 하니 웃는다. 그렇게 만들면 백퍼센트 깨진다면서 특정한 틀에 얇은 필름 수백 장을 붙여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야 압력에 견딜 수 있다는데, 이 일을 사람이 직접 한다고 설명한다. 필름을 붙이고 접착제를 바르고, 또 필름을 붙이는 일을 똥통 안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는데, 접착제 냄새가 지독해서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해도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머리가 아프고 어질어질하다는 설명을 한다. 그거 익숙해지는데 육개월, 일년이 걸린단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전국에 있는 정화조 회사에 이 일을 하는 한국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한국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주노동자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이 점이다. 이미 이 나라에 이주노동자가 필요하다.
   심야에 물류센타에서 물건을 내리고 올리는 사람들, 허영만의 식객에 나오는대로 순대공장에서 순대 만드는 사람들, 이들 대부분이 이주노동자들이다.


   이 나라 정부는 미등록을 조장하고 있다
   이른바 합법이라 하는 '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최저임금, 또는 그보다 약간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 이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은 거론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다른 사업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같은 나라 동무들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월급이 적다. 단지 등록 신분이라 단속에 노출되지 않는다 뿐이지(단속할 때는 등록이든 미등록이든 일단 잡아가고 보는 식이지만) 적게 삼십만원 정도 차이나는 처지는 이네들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대체로 삼십만원 정도면 이 나라에 와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본국에서 한 가족이 한 달을 살 수 있다). 노동 강도가 비슷하다면, 처우가 비슷하다면 더 많이 벌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업장을 이탈하여 알음알음으로 돈 더주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 제도는 없어졌지만 최초 이주노동자들이 이 나라에 들어올 때, 이네들의 신분은 산업연수생이다. '외국인등록증'에 E-3라고 기재되어 있는 산업연수생은 '현실적으로' 퇴직금이 없다. 대법원에서 산업연수생도 퇴직금 적용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지만, 노동청에 퇴지금 미지급에 대한 진정을 내면 E-3 기간의 퇴직금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나라 정부에서 하라는대로, 이른바 합법적인 산업연수생으로 있으면 퇴직금이 없다는 말이다. 사업장을 이탈해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일하면 그 기간은 퇴직금 적용을 받는다.
   내가 내 입으로 사업장을 나오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주동무들이 먼저 말한다. 여기 나가서 다른 곳에 취직하면 퇴직금 받을 수 있는 거냐고.


   이주노동자들은 상습적인 욕설과 폭행에 노출되어 있다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 퇴직금 문제만 문제가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나라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고, 일 마치고 술 마신다고, 사장에게 인사하지 않는다고 상습적인 욕설과 폭행을 당한다.
   베트남에서 온 노동자들이 감금되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동지들 몇과 함께 갔더니 무슨 부장이라는 사장 아들이 나와 어떤 새끼가 전화했냐고 난리를 친다. 이주노동자들이 감금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하니 감금은 무슨 감금이냐며 오히려 큰소리다. 지금 그 동무들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방에 잘 있다고, 문을 걸어 잠근 것도 아니고 밖에서 못질을 한 것도 아닌데 무슨 감금이냐며 가서 보란다. 숙소에 가보니 방 안에 이주동무들 셋이 누워있다. 그 부장이 대뜸 이 새끼들 누가 누워있으래, 소리 지르며 눈을 부라린다. 같이 간 동지가 어따대고 이 새끼라고 하냐며 싸움이 시작됐는데, 조금 지난 후 부장 말이 자기는 나오지 마라고만 했다면서 감금이 아니라고 한다.
   사장을 만나서 한국 노동자들에게도 이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이게 감금이지 뭐냐, 당장 경찰을 불러 고발하겠다라고 하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사정을 한다. 자기들도 참을만큼 참았다고, 아주 형편없는 놈들이라고.
   얘기인 즉, 밥을 주면 반찬 투정을 한다는 것이다. 일요일에 술 마시고 병들을 제대로 치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업복을 제때 빨아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릇 고치려 조금 때렸다는 말을 한다.
   조금 때리다니. 그 나라에선 훌륭한 인재라 해서 기술 배우러 온 노동자를, 버릇 고친다고 때리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우리 단체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돌린 적이 있다. 한국에 와서 일하면서 욕을 들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백퍼센트 있다고 답했고, 한 두 대라도 맞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구십퍼센트 이상이 맞은 적 있다고 답했다. 때리는 도구도 다양해서 막대기, 스패너, 빗자루 등이었으며 심지어 망치로 어깨를 맞은 이주노동자도 있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이주동무들과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저 새끼, 이 새끼 하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봤다. 그거 나쁜 말이라고, 그러니 쓰지 마라고 했더니 회사에선 자기들에게 항상 이 새끼 저 새끼 한다는 것이다. 그걸 무슨 호칭으로 알고 있는 이주동무도 있었다. 인사하면서 씨발놈 하지 않는 게 다행일까?


   단결, 연대는 원칙이다
   다소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자본은 항상 노동자를 분열시킨다. 힘을 합치면 자본에 대항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하게 한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직군을 나누고 관리자와 현장노동자를 나누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자본은 이주노동자들이 이 나라 국적을 가진 노동자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가르친다. 월급이 적은 것도 당연하고 등록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불법이며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근로기준법 제5조엔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하여 남녀의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며 국적,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라고 나와 있다. 당연히 법만 그렇다.
   민주노총 강령엔 "우리는 전세계 노동자와 연대하여 국제노동운동 역량을 강화하고 인권을 신장하며, 전쟁과 핵무기의 위협에 맞서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실현한다."라고 나와 있다. 솔직히 강령만 그렇다고 보일 때가 있다.
   이주노동자 문제가 현재 이 나라의 모순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다. 그러나 우리 운동의 한 방향이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여성, 장애인, 어린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이주노동자도 사회적 약자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주노동자들의 집회에 가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
   사람다운 대우도 받지 못하고, 노동자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대우와 보장을 해주는 것이 이주노동자 운동의 출발선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노동자의 권리가 뭔지 알려주고 그 권리를 쟁취하도록 연대하며, 이들이 자기네 나라에 돌아갔을 때 그 나라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전파할 수 있다면 "전세계 노동자와 연대"하는 일, "국제노동운동 역량을 강화"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가능할 것 같다. 그러고보니 내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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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규 형님이 글 하나 쓰라고 해서 쓴 글.
   어디에 올린다고 했는데... 요즘 정신없어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최정규 형님 블로그

   ※ 우연찮게 알게 됐는데, '정세와 노동'(제22호, 2007년 3월,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발간)에 실렸다. 내 글이 어디에 실렸는지도 모르니... 이런 한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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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정직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운동의 정직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백 사람이 대답한다면 백 사람이 모두 다른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제가 생각하는 답을 하려 합니다.

 

   이천사년에 민주노동당이 원내 열 석을 차지하면서(지금은 아홉 석으로 줄었지만) 이천삼년과 현저하게 다른 상황으로 변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 '국고보조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돈은 인민의 세금으로 "정치를 제대로 하라"고, 또는 "더러운 돈을 받아 정치하지 마라"고 주는 돈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국고보조금'도 '국고보조금'이려니와 이천사년 총선이후 당원의 수도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그 이전의 완만한 증가에 비하면 놀라울만큼 많은 수의 당원들이 생겨났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진보 정치'에 목말라 하던, 또는 '진보'에 부채 의식을 갖고 있던 인민들이 입당을 한 것이라 봤습니다.



   잠깐 닭, 달걀 논쟁을 생각해 볼까요?
   돈이 생기니 돈을 쓸 곳이 생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돈을 쓸 곳이 생기니 돈을 마련하게 되는 것일까요.

 

   최소한 민주노동당에선 돈이 생기니 돈을 쓸 곳이 생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민에게 가까이 가겠다는 생각 좋고, 바닥부터 정치 사업을 벌이자는 생각 좋습니다.
   그러나, 준비위원회로 조직되더라도, 하여간 깃발이라도 세운 지역위원회(당시는 지구당이었죠)가 있다면 각 지역위원회별로 상근자를 한 명씩 두겠다는 '발상'은 "돈이 생기니 쓸 곳이 생기더라"는 발상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각 지역별로 당원 백 명만 있으면 준비위원회 깃발을 세울 수 있고, 그렇다면 중앙당에서 상근자 한 명의 상근비를 내려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 판단'이 있었습니다. 이 '판단' 때문에 지금 민주노동당엔 수많은 지역위원회들이 생겼고, 결국 수많은 지역위원회들의 상근자들이 당의 재정을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각 정파 별로 특정 지역위원회를 장악하면 자기네 사람 한 명을 월급장이로 앉혀 놓는 일이 비일비재했을 겁니다.

   대전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실'이 '정당법'에 딱 걸리는 일이라는 겁니다.
   현 정당법에는 지구당이라는 '조직'이 없으며 당 조직은 광역시도당에서만 운영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당의 이름으로 상근비(그게 월급이든 활동비든)를 받는 상근자도 광역시도당에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 숫자도 정확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어떤 당이든 대전광역시당 이름으로 당 운영을 하고 있다면 대전시당 내에서 상근비를 받는 당 상근자는 다섯 명을 넘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걸 어기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배짱이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요?

 

   상근자가 있으면 지역 사업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 맞습니다.
   그러나 상근자가 없으면 지역 사업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다. 이건 틀렸습니다.
   특히 우리 당처럼 인민에 대한 헌신과 봉사를 원칙으로 삼고 있는 당은 "상근자가 없으면 지역 사업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됩니다.
   누군가가 굳이 돈을 받아야만 당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다른 곳에 가서 돈을 벌으라고 말해야 합니다.
   꼭 당 일을 하고 싶다면 가능한 시간을 내서 당 일을 하면 됩니다.
   아무리 많은 상근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같은 당은 돈을 받지 않고 자원활동을 하는 당원들이 꽤 많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상근자를 유지하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당 간부들은 이 부분에 대해 정직하게 답을 해야 합니다. 채용해 놓고, 형편이 이러니 그만 하라고 말 할 수 있냐고도 합니다. 말 할 수 있죠. 왜 그 말을 하지 못합니까?

 

   제가 답답해 하는 부분은, 정당법을 어기는 것도 어기는 것이려니와(지방 선거가 됐든, 총선이 됐든 선거를 앞두고 우리 당이 정당법에 규정된 재정 운용 규정을 어겼다는 기사가 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 사무총장이, 혹은 광역시도당 사무처장이 검찰에 소환되고 경찰에 잡혀가고 그게 텔레비젼 뉴스에 나오고... 그런 거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선거는 끝입니다) 이 문제가 결국 당원들에 대한 배신으로 이어진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당원들이 당비를 낼 때, 무슨 생각으로 당비를 내겠습니까? 당 상근자들 먹고 살라고 내겠습니까? 아니면 당 사업을 하라고 내겠습니까? 일을 하려면 일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렇다면 일할 사람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하는 것은 영 아니올시다, 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일부 지역위원회들이 하고 있는, 지역위원회별로 상근자를 두는 문제는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대전의 어떤 지역위원회는 상근자 한 명, 또 다른 상근 당직자 한 명, 또 다른 반상근 당직자 한 명이 상근비(또는 활동비)를 가져가고 있습니다. 그 지역위원회는 매달 중앙에서 내려오는 당비를 다 합쳐도 그 세 명의 상근비를 대지 못합니다. 무슨 사업을 하고 무슨 활동을 합니까? 그 세 명의 상근자(또는 활동가)가 일당백의 활동을 하고 있더라도 일반 당원들이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아무리 뭐라해도 그건 몇몇의 생활비를 가지고 가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형식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운동의 정직성은 돈을 제대로 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돈을 투명하게 쓰고, 누가 보더라도 뒷말이 없게 쓰는 것으로 확보됩니다.
   지금은 몇몇 당 간부들만이 돈의 쓰임새를 알고 있고, 그 보고서도 보고 후에 회수해가는 판입니다. 혹이라도 외부로 유츌되면 안 된다는 건데, 언제부터 우리 당이 이런 식으로 운영되었습니까?

 

   당장! 하루 빨리! 정당법에 걸리지 않게, 당원들에게 볼펜 한 자루 산 것까지 알릴 수 있게 돈 씀씀이를 바꿔야 합니다.

 

   ※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썼습니다. 우리 당 내에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지역위원회도 있을 겁니다. 확대해석하지 마시고... 한 당원의 투덜거림으로 받아들이셔도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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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당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저와 관련된) 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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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 서민식이는 가위로 자기 혀를 자르면서 살려 달라고 애걸하더라.......

   - 글쓴이 : Pink Lady

   - 내용 :
      여기는 민주노동당이지 공산당이 아니오.
      얘는 더이상 쓸모가 없어졌으니 파견했던 부대는 본대로 소환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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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래 글에는 오자가 있었는데 바로 잡았습니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피식~ 웃음이 나오더라구요. 곧바로 댓글을 올렸습니다.

   "서민식이 아니구요, 최민식이거든요?" 운운...

   이런 식으로 다소 가볍게 댓글을 올렸는데 잠깐 생각해 보니 댓글을 다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댓글을 지웠습니다.



   제가 속해 있던 '곳'이 다소 과격하게 싸움을 벌이던 터라 상당한 '물량'이 날라갔고 이쪽에서 '물량'이 딸릴 때쯤 '백골단'이 치고 나왔습니다.

   대충 치고 받다가 밀리기 시작했는데 저는 종로서적 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삼십미터 정도 달아났다 싶은데 바로 뒤에 백골단 한 명이 따라붙는 겁니다. 딴엔 열심히 뛰었는데 손을 뻗으면 잡힐만큼 뒤따라왔습니다. "이제 잡혔구나" 그런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는 순간, 그가 그냥 저를 앞서서 달리는 겁니다. 흑~

 

   그 날 밤 늦게 버스를 타고 학교 기숙사로 들어갈 때, 제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적들도 나를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그 날의 기억과 맞물려 위 글을 다시 읽었을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위 글은 두 문장이고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다소 넓게 해석하자면, 제가 공산주의자라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어디선가 파견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맑스가 과학적 공산주의를 주창하기 시작한 이래, 어느 나라, 어느 상황에서든 공산주의자라는 말은 그 호칭이 부여된 사람에게 영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역사적으로 자본가들은, 기회주의자들은, 개량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경멸조로 사용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호~ 기회주의자들도, 개량주의자들도 내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았구나!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다른 조직에서 파견되었다는 것은... 다소 희화적으로 따져서 적진에 홀로 침투하는, 또는 선발대로 공격하는, 마치 해병대같은 공수부대같은 자로 봤다는 건데, 이 역시 기분 좋은 이야기이지 욕하는 말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어떤 군대이든, 가자마자 죽을 녀석(부대)을 보낼리 없고 부여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녀석(부대)을 보낼리 없으니 위 글을 쓴 사람은 역으로 제 능력을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찌 언짢겠습니까?

 

   그러나... 마치면서... 사실을 밝히자면...

   저를 공산주의자로 인정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저는 아직 그런 영광된 호칭을 받을만한 자격도 없고, 그만한 활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파견한 조직도 습니다. 흑흑...

 

   참 '시당'은 민주노동당 대전광역시당을 말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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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글이'의 추억


     아마 천구백팔십육년이었을 겁니다. 읽어야 할, 읽고 싶은 책들이 밀려 가진 돈을 털어 밀린 책들을 샀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밥 사 먹을 일이 걱정인 겁니다. 남아 있는 돈으로 다음 달 생활비가 생길 때까지 밥을 먹긴 글렀기에 생각해 낸 것이 '뽀글이'였습니다. 당시 저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군대에 갔다온 선배들이 '뽀글이'를 만들어 권하곤 했었고 그다지 맛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어울려 먹긴 먹었던 터입니다. 그저 달랑 라면 한 봉지 값으로 한 끼 식사가 해결되는, 지극히 저렴한 방식이었으니 잘만하면 한 달을 버틸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뽀글이'로 먹든 그냥 생으로 부숴먹고 뜨거운 물을 한 잔 마시든(경험을 말하자면 그냥 라면 한 봉지를 부숴 먹으면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뜨거운 물을 한 잔 마시면 그 라면이 속에서 '뿔'어 배가 부릅니다) 오직 라면 한 봉지로 한 끼를 버틴 것이 거의 보름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낮에 학교 앞 분식 집을 지나는데 그 집에서 마침 라면을 끓였나 봅니다. 그 냄새에... 멀쩡한 대낮에 바로 토했습니다.
     가로수를 붙잡고 토하는데 지나가던 선배가 등을 두들겨 주면서 "야! 너 밥 안 먹어서 그렇지?" 하는 겁니다. 제가 밥 먹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땐 읽고 싶은 책은 밥을 먹지 않더라도 사서 읽었어야 했고, 읽어야 할 책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화장실에 가서 똥 쌀 때만 책을 읽습니다. 그것도 (당연하지만) 심각한 내용은 아니고 그저 짧막한 글들일 뿐입니다. 읽고 생각할 책을 전혀 읽지 않습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 피씨를 켜고 웹 서핑이나 하면서 드라마 종영 소식이나 읽고 그럽니다. 제가 생각해도 제가 뭘 하고 지내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고, 예전에 읽었던 내용도 모두 잊었습니다.

 

     좋은 습관을 들이는 일은 삼 년이 걸려도 쉽지 않고 나쁜 습관은 삼 일만에 익숙해 진다는 말이 맞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사는지... 하루하루를 돌아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책 읽는 모임을 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이 읽고(다소 강제성이 있으니 어느 정도 읽긴 읽지 않겠습니까?) 같이 토론하고(기능적인 소재를 두고 지지재재 떠들어대는 거 이제 지쳤습니다) 같이 고민하면 그나마 책을 읽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번 주엔 무조건 모여야겠습니다.

 

     ※ 뽀글이는 지금도(아니 지금은 더욱) 잘 해 먹습니다. 군에 갔다온 이후 그 맛을 알았다고 할까? 아주~ 맛있습니다.

     ※ 그 선배, 등 두들겨주던 선배가 그날 제게 밥을 사 주면서 밥 먹을 돈 없으면 언제라도 밥 사달라고 하라, 고 했습니다. 저는 제 후배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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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 하다가 겪은 일

     제가 게임을 꽤 합니다. 저 어릴 때 갤러그라는, 지금 보면 지극히 단순한 '전자오락'이 있었습니다. 기억하기로 고등학생일 때 오십 원인가 했드랬는데, 오십 원을 넣고 모든 판을 다 깨고(쉰 판인가?) 다시 새로운 판이 시작되면 또 모두 깨고... 그 오십 원으로 세 시간 넘게 놀곤 했습니다. 그때 동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처럼 오십 원으로 세 시간 넘게 노는 '놈'들에겐 오락실 주인이 백 원 주면서 가라고 했다는데, 저는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이후 오락다운 오락을 찾지 못하다가 스타 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꽤 재미있다 싶었는데... 제가 이미 '노땅'이 되어 버린 탓인지 키보드 버튼을 찾아가며 하는 게임은 영 익숙해지지 않습디다. 그래서 그냥 재미만 있는, 때때로 시간 때우려 하는 정도만 했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카트라이더를 접하게 되었을 때(이미 꽤 유명해진 뒤였지만) 눈이 번쩍, 아니 반짝반짝거렸습니다.



     집 피씨로 카트를 하는 제게 아내가 한 말입니다.

     남자들이란, 그저 운전에... 총 쏘는 것이면 뒤집어진다는 겁니다.

 

     이제 막 파란장갑을 끼게 된 저는 이 게임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껏 모아 놓은 루찌를 딸애 차 사는 데 다 써버려서 막상 저는 아직도 연카(처음부터 제공되는 연습용 차량)를 쓰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차에서 밀리다보니 기술이라도 제대로 익혀서 '시간 안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카트 사이트에 들려 온갖 비법, 나만의 기술 등을 읽고 연습하곤 했습니다(허허~ 매일같이 게임이나 하고 있는 것 같구만).

     그러다가 발견한 글이 있습니다.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자... 어쩌구 저쩌구... 아이디를 신고해 주시고... 어쩌구 저쩌구...

     뭔 얘긴지 몰라 네이버에서도 찾아보고 그랬더니 무조건 일등으로 들어오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나 봅니다. 뭐...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어제 카트를 하는데, 바로 그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한(것 같은) '놈'을 봤습니다. 분명 저랑 어떤 사람이 앞 서거니 뒤 서거니 하면서 끄트머리에 다 다다랐는데 난데없이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면서 '웬 놈'이 일등을 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이등을 했고 저랑 다투던 사람이 삼등을 했는데, 게임을 마친 후 '준비'할 때 저랑 삼등한 사람이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불법 프로그램 사용하는 거 아니냐? 이상하다.

 

     그런데...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한(것으로 추정되는) '놈'이 나가면서 방장이 바뀌고, 새로 방장된 사람이 저랑 삼등한 사람을 강퇴시켜 버렸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그냥 게임이나 하자"는 글들이 떴고... 그랬습니다.

 

     제가 사소한 일에서 좌절감을 느낄 때가 이런 때입니다.

     잘못한 사람과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같이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

 

     카트 한 판에 너무 심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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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성건성...

     이 나라에 와서 생활하던 외국인이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인사처럼 하더라구요. 처음에 그걸 몰랐을 땐 누구라도 내게 밥 한 번 먹자고 하면 언제 먹나, 왜 안 부르나 하며 기다리곤 했어요. 그런데 이젠 그게 인사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인터뷰어가 이렇게 물었다.

     "이젠 누가 밥 먹자고 해도 기다리지 않겠네요."

     그 외국인이 답했다.

     "지금도 기다리긴 해요."

     그렇게... 분위기 좋게... 웃으며 마무리...를 했던 거 같다.



     밥 한 번 먹자거나 소주 한 잔 하자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의 두뇌 구조, 또는 오묘한 인사성을 무시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누가 밥 먹자고 하면 언제 먹자고 하나 기다린다.

     뿐 아니라 누가 내게 밥을 먹자고 하지 않고 내가 누구에게 밥을 먹자고 한다면, 그리고 상대방이 그러자고 한다면, 당연히 밥을 같이 먹을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린다.

     만약 내가 약속한 날짜에 같이 밥을 먹을 수 없다면, 같이 먹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그 시간에 전화를 하든지 문자를 보낸다. 상대방이 나랑 밥을 먹으려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부분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런데... 지금 나랑 어울리는 꽤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 예의가 없다.

 

     같이 밥을 먹자고 했는데, 밥을 먹고 온다. 와서는 먹었다 먹지 않았다는 말도 없다.

     같이 소주 한 잔 하자고 했는데 약속한 그 날짜에 아무런 연락도 없다. 내가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지 않았어도 다시 전화를 하지 않는다(내 주변에서 발신자 표시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나 뿐이다). 나는 그냥 기다릴 뿐이다.

     정말 예의가 없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일과 맞물려 보자고 한 사람이,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오후에 전화 통화를 했고 만나서 상의하자는 말도 했는데... 나 있는 건물에 왔다가 자기 일 마치고 그냥 간다. 어찌 이런 경우가... 있나.

     정말, 정말 예의가 없다.

 

     이 빌어먹을, 이 짜증나는 생활을 하다가 나도 그 두뇌구조에 그 오묘한 인사성에 물들지 몰라서 더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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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 가라사대

     2005년 5월 27일(금) '한겨레 책, 지성 섹션 18.0'에 보니 가수 전인권 씨와 인터뷰 한 기사가 있었다. 인터뷰어는 최보은 씨.

 

     최보은 씨가 이렇게 물었다.

     "이미지나 음악이나 그런 것들은 퇴폐, 방종, 자유인데 성실한 모범생의 철학을 갖고 계시네요."

     전인권 가라사대,

     "모범적이지 않으면 절대 아름다운 퇴폐를 가질 수 없어요. 질서를 모르면 자유를 알 수 없어."

 

     백 번, 천 번, 지당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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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아무개

 

     이승만이 왜 친일파를 기용했을까요?

 

     첫째, 친일파는 독립군 출신에 비해 일을 잘 합니다.

     애비라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듣자하니 만주에서 말이나 타고 다닌다고 하고. 그 자식들은 돈도 벌지 못하는 애비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그러니 독립군 후손이라는 놈들 데려다 쓸 일 있겠습니까? 동네 이장을 시키려 해도 기본적으로 아는 게 있어야 시키죠. 그렇죠?

 

     둘째, 친일파는 권력에 순종적입니다.

     자기들을 배척하는 권력에 대해서는 죽기살기로 덤비지만 자기들에게 이익을 주는 권력에 대해서는 간이라도 빼줄 듯 합니다. 곧 조중동처럼 상업주의(이익만 추구한다는 점에서)가 체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려 먹기도 좋습니다.

 

     셋째, 이승만은 친일파 말고는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한 자리 차지했었다고도 하지만 하여간 문제가 많았던 인간인지라 임정 세력 내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회주의자들 그룹에서는 더군다나 인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정권을 잡은 후 손 잡을 자들은 친일파 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뭐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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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불나불

 

     모든 '주의'나 '주장'이 그렇듯 이론적으로는 극단적인 곳까지 가지만 실제로 적용할 때는 필요한대로 다른 '주의'나 '주장'과 섞이곤 합니다.

     혹시 아실런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남자가 입만 열면 남녀평등을 말하고, 주장한다고 합시다. 그 남자를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난다거나 그렇게 만나는 자리도 공식적인, 또는 준공식적인 곳뿐이라면 그 남자가 실제로 남녀평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실천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라면, 저는 그저 이 남자가 남녀평등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보다 뭐 그 정도로만 인정합니다. 그의 말을 다 믿지도 않고 모두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아주 자주 만나거나(사실 만나는 횟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이의 생활까지 알 수 있다면 이야기가 아주 달라집니다.

     사실 어떤 남자가 남녀평등에 대해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실제적인지 그저 입만 나불대는 것인지 알아보려면 부부가 같이 있는 것만 보면 됩니다. 단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아내가 유모차를 끌고 애를 업고 가는데 그 뒤에서, 또는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유유히 걸어가는 남편. 그가 남녀평등을 말한다면 필경 나불대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상당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나 봅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가 아니고 "받나 보다"라는 투의 표현을 쓴 것은, 실상 저는 그다지 열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제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하는 말이 "열 받았죠?"이고,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요즘 무슨 일이 있길래..."입니다. 그렇게 보이나 봅니다.

     그렇지만 상당히 많이는 아니더라도 정수리에서 스팀이 나긴 납니다.

 

     자주 말한대로, 자주 주장한대로 저는 다른 사람이 저와 견해(정치적이든 뭐든)가 다른 것을 진지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다게처럼 자기는 자꾸 옆걸음질 하면서 곧장 가고 있다고 '주장'(대체로 이런 것은 주장이라기보다 우기는 것입니다만)한다면 곤란합니다. 더군다나 그가 옆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누누히 지적하고 강조했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더욱 곤란한 경우는, 자기 입으로 옆으로 가는 것은 틀리고 곧장 가는 것이 맞다고 하면서 지금 자기가 옆걸음하는 것을 모를 때입니다.

 

     요즘 제 고민이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내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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