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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별팀님의 [‘누구의’ 폭력이냐? _청올] 에 관련된 글.
위 글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을 덧글에만 덧붙여 달다가, 그 글 논쟁이 폭력/비폭력 얘기로 많이 가기도 해서, 물론 꼭 필요하고 동시에 이루어질 만한 논쟁이라 생각하지만, 차별에 관해 좀더 하고 싶은 말을 보강하느라고, 여기에 연결해 와 새 포스팅으로 남기기로 했다.
용산 참사에서 '살인마'라거나 '폭력'을 행사했다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의 입장, 그것을 당한 사람에게 지지하고 연대하는 입장이지, 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런 게 전혀 아니라는 것, 그만큼 폭력이나 살인이라는 것을 누가 생각하고 누가 의미 부여하고 구성하느냐에 따라 사회적으로 폭력, 살인, 이렇게 이름붙여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다.
정도의 차이에 따라 폭력이냐 아니냐, 또는 효율적이고 필요한 폭력이냐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폭력이냐 같은 식으로 얘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연 어떤 행위를 우리는 폭력이다/살인이다, 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기득권을 포함한 사회의 동의/합의를 얻을 수 있느냐 아니면 벽에 부딪히느냐? 할 때 후자라는 것이 답답할 때가 많다. 여기서 '폭력'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주체가 있고 그 주체에서 배제된 대상이 있는데, 그 둘 사이에는 엄청난 권력 차이라는 강이 흐른다는 거다.
우리는 용산 참사를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런 표현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고 보수 언론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까.
'살인'이라는 의미는 그 폭력에 문제제기하는 우리 입장에서, 기득권/힘을 가진 정부/가해자가 허용하지 않은 저항 방식으로, 심지어 대부분의 일반인 중에서 기존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안 된 상태에서, 이름 붙이고 알려 나가는 운동 단계에 있는 것이지, 정부가 마침내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며 살인이었다'라고 참회하고 이후의 그런 일이 없도록 대책을 마련하는 단계(그렇다 해도 이미 일어난 사건 자체를 돌이킬 수는 없지만)에 이르지는 못했다(아직은). 여전히 재개발과 강제퇴거는 계속되고 있고,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며 순응하는 게 그나마 편해서 저항을 포기하는 일도 수없이 많고.
- 연쇄살인범이 한 살인은 모두가 당연히 '살인/범죄'라고 받아들이지만 공권력이 한 살인은 '살인'이라고 ('도발적/선정적으로') 말하는 것부터 벽에 부딪치며 끊임없이 설득이 필요하다는 것
- 우리가 전경의 차를 훼손하는 것은 '폭력 시위'라고 이름붙여지고 보수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이 실리지만 전경이 우리의 신체에 직접 위협과 폭행을 가하는 것은 정당한 진압이라고 정부가 주장하는 것. 그리고 정부의 주장이라 함은 즉 구속하고 벌금을 때릴 수 있는 힘을 의미하는 것
- 노숙인이 '집회 도구'인 판넬을 발로 차는 것은 모두가 폭력이라(또는 '도발'이라고라도 어쨌든 처벌/응징 가능한 것으로) 쉽게 인식/주장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으로 그의 신체에 (그것도 여럿이 달려들어) 직접 폭력을 가하는 것은 '집회 방해자를 제지하기 위한 응당한 권리' 또는 '조금 과잉되고 너무하긴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럴 만했다'는 얘기로 정당화하는 것
그리고 그 건널 수 없는 강에는 공권력과 시민 간의 권력 차이도 있지만, 시민 중에서도 누구나 같은 시민이 아닌 차별의 기제가 작동하는데, 그 당당/뻔뻔함이 마치 공권력이 시민을 대할 때의 그것과도 하나 차이가 없다는 무서움이었다.
그날 판넬을 발로 찬 사람이 허름한 옷차림의 그 사람이 아니라 전/의경 차림의 사람이었더라면?또는 번듯하게 양복을 갖춰 입은 사람이었더라면? 또는 백인이었더라면? 또는 외제 차를 몰고 와서 차로 판넬을 박아 몇 개쯤 한꺼번에 쓰러뜨렸더라면? 과연 그날처럼 그렇게 한 사람을 양쪽에서 잡고 아스팔트 바닥에서 머리부터 7m를 질질 끌고 가서 내팽개칠 수 있었을까?
사람을 똑같은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누군가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생각, 그것이 정부가 사람들을 쥐 잡듯이 몰아쳐서 잡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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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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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판넬을 발로 찬 사람이 노숙인이 아니라 전의경이었다면 과연 질질 끌고 가서 내팽개칠 수 있었겠냐고 물었지만 전의경들도 혼자이고 시위대가 다수일 때는 몰매를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부가 특공대를 투입시켜 철거민을 살해한 "근본적인" 이유는 누군가는 함부로 죽여도 된다는 생각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부가 사람을 죽이는 동기는 가학증환자여서가 아니라 생존권을 위해 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부가 정보
adel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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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정운찬씨같은 분이야 (태생은 잘 모르겠지만) 귀족출신의 귀공자니까 노숙인이 달려와 행패를 부려도 경호원들한테 그냥 놔둬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죠. 하지만 그가 정말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철거민들의 사망원인이 화염병이라고 했을까요. 그 역시 자본의 하수인이 되기로 한 이상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죠. 저는 그런 말에서 훨씬 더 무서운 폭력성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집회인들이 노숙인들에게 저지른 짓이 폭력이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정당한 행위였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분명히 폭력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노숙인들을 함부로 대했다고 해서 정부가 저지른 짓과 뭐가 다르냐고 하시면 저는 비애를 느낍니다.부가 정보
청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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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뭔가 어긋나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다는 점에서 사과와 같다"고 말하면 "사과는 과일이고 원숭이는 동물인데"이라 하지는 않잖아요. 여러 이야기가 섞여 풍부해질 수 는 있겠지만, 적어도 서로 다른 두 개(집합 A와 B)를 비교할 때 그 비교의 기준은 일관성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 둘이 같은 부분(공집합), 두 개가 다르거나 무관한 부분(여집합)은 구별됐으면 합니다.1. 전의경들도 혼자이고 시위대가 다수일 때는 몰매를 맞는 경우도 있는 건 당연하고, 전 그것도 (어떤 예외가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두 사람이 노숙인을 한참 질질 끌고 갔을 때처럼 말입니다.
2. 용산 사건에서 정부가 "누군가를 죽여도 좋다고 생각해서 살해했다"거나 그런 정부가 '가학"증 환자"라서'라는 식의 생각/말을 저는 하지 않았으니, 그냥 덧붙이신 것으로 들어도 되겠지요.
제가 '누군가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좋은가'라든가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노숙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뒤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자 그제서야 자신들의 폭력을 (끝까지 '폭력'이란 인정은 없이) 정당화한 데 대한 얘기였습니다. 문제제기가 지속됨에 따라 점차 정당화 정도가 약화되긴 했어도 문제제기자에 대한 인신공격/위협적인 분위기 조성까지 동반된 방어 논리의 발전 과정은 (최초 글에 있듯) 국가가 폭력을 저지르고 나서 정당화해가는 과정(그리고 문제제기가 강력할수록 슬슬 눈치보면서 뒤로 빠지거나 오히려 더 발끈해서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과 비슷해요. 누군가 문제제기조차 안 했으면 그나마 주춤하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들 중 누군가는 좀 알아서 반성했겠지, 하고 넘어갈 정도로 작은 문제도 결코 아니었다고 보고요.
3. '말쑥한 정장을 입은 사람이나 외제 차가 그 판넬을 쳐 넘어뜨렸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못했을 것'이라는 제 말은, 정장 입은 사람이나 외제 차는 분명히 (언급하신, 제가 했던 비유와는 다른 각도에서 '노숙인 행패'를 설정하신 경우의 가진 자의 '경호원들'처럼) 가진 것들이 있으니 그런 린치를 함부로 안 당했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해요.
당시 집회인들은 (노숙인에 비하여) 경호원 부럽지 않은 자신의 힘과, 그 힘을 어떻게 쓸지 결정할 자유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노숙인이어서) 봐준 거지 아니었으면 가만히 안 보냈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전 그게 진정성이나 일관성이 있는 폭력 수위의 원칙이라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요(그랬다고 해서 문제 없는 방식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 노숙인은 (그 순간 그들에 대하여만큼은) 가진 게 허름한 몸밖에 없고 그것으로 결국 차별/무시받아 직접 신체에 위해를 당한 것인데, 이에 관해 노숙인이 자신이 당한 폭력을 폭력이라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하는 상황을 얘기하고 싶었던 맘이 있어 한 얘깁니다. 폭력을 가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한 건 정당하다고 주장하던 상황이니까요. 주위에서 문제제기한 한 사람을 둘러싸고 그의 입을 막으려는 사후 급정당화에만 바빴고요.
4. 자본의 하수인이 되어 알면서도 우기는 행위를 '훨씬 더 무서운 폭력'이라 하여 다른 폭력들과 구별짓는 게 중요할까요? '유리한 자'가 '불리한 자'에게 마음만 먹으면 우발적으로도, 일방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보다 표면의 다름에만 주목하는 건 아닌지요.
자본의 논리뿐 아니라 그 어떤 (자본/이윤만큼 강력하게 현실 사회에서 어필하지도 못하는) 궁색한 논리라도, '이미 저지른 폭력을 정당화하며 폭력을 폭력이라 하지 않고 정당화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무섭기는 마찬가집니다.
자기보다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고 그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의 행동은 '폭력'이라 강조하면서 자신의 행동은 억지로 온갖 핑계를 끌어다 붙여 정당화하는 논리라면, 가진 자본이나 권력에 따라 얼마든지 -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훨씬 더 쉽고 세련되고 효과적으로 가능하겠지요 - 같은 입장에서 합리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경호원들에게 그냥 놔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나, 사망원인이 화염병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떼잡이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만이) '법치'라고 말하는 사람처럼요.
국가의 폭력, 자본의 폭력이 무서운 것은 그때 쓰이는 논리가 너무나 일상적으로 우리 살갗에 닿아 있어서 당최 새롭지가 않다는 거예요. 권력과 자본을 안 가지고 맨몸으로 때린다고 해서 덜 무서울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가진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과, 가진 게 몸밖에 없는데 몸을 침범당하는 것. 폭력 당하고 사과는커녕 정당화 당하고, 당하는 입장에서 대체 무엇이 다르죠. 날 괴롭히는 사람이 경찰인지 대통령인지 갑부인지 그들을 욕하는 집회자인지 간에 더 잃을 게 없으면 무엇이 중요하겠나요.
어떤 폭력이 다른 폭력보다 중요하고 더 무섭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솔직히 그 순간 노숙인에게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거 보고요, 전혀 남의 일 같지 않아 공포를 느꼈던 것인데... 가령 자신의 애인/배우자에게 어떻게 할까가 상상/우려가 된단 말이지요.
예를 들어 청소년이 부모나 교사 기타 등등 경제적/사회적 보호자의 일상적인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다 자살하거나 일찍 떠났을 때, 부모가 자식에게 '강제퇴거'를 자본의 논리에 따라 명령한 것은 아니라서 국가보다 덜한 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성욕을 제어할 수 없기에/술에 취해 있었기에 실수 좀 했을 뿐...' 이란 말(?)로 아직도 덮이기 일쑤인 성폭력은 어떨까요?
현 정부의 시각에서 용산 참사는 심하게 말해 '(정부가) 웬만하면 덮고 넘어가고 싶은 찜찜한 걸림돌'일 뿐입니다. 재개발이나 이윤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이명박이나 오세훈을 선출한 때에 이미 이루어진 거고요. 물론 같은 정권하에서도 그리고 장기적으로도 그 흐름을 바꾸도록 해야겠고, 단기적으로 진실 규명과 여러 조치들이 따르도록 해야겠지만요. 그러나 아직까지 정부가 재개발 지역 세입자를 보는 시각("순순히 나가지 않은 불온한 자들의 도심 테러에 대한 정당한 진압"), 노숙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그를 본 시각("집회를 하는데 귀찮고 깜짝 놀라게 한 방해꾼에 대한 정당한 반응"), 그저 '나와는 다른 만만한 사람'으로 보고 함부로 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차이를 모르겠습니다. 국가만큼 자신의 정당성을 든든히 뒷받침해주는 권력(무력 공권력)과 자본과 세련되게 포장된 장치들을 갖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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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계급지배의 도구가 아닌 폭력은 덜 나쁘다는 것인지. 하기야 군대에 끌려가 인간성을 박탈당한 이들이 행하는 강요된 폭력과, 입만 열면 자유와 평등을 말하는 자들이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자유 의지로 가하는 폭력이 같을 수야 없을 터.원 글이 자본가 계급의 폭력적 지배를 사인간 폭력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희석시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저들의 비열함과 구역질나는 자기 합리화가 우리 안에서도 반복됨을 말한 것일진대, 어째서 비애를 느낀다는 것인지. 오히려 저렇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의 구조야말로 저들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가 침투되는 회로인 마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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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l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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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지배의 도구가 아닌 폭력은 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계급지배를 사상한 채 두 개의 폭력을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죠. 우리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자기합리화를 한다고 해서 국가폭력과 같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요.부가 정보
adel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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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마지막 문장이 잘 이해가 안가서 한참을 읽었는데 이제 이해했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의 구조가 저들의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다." 그 점을 필자는 지적한 것이다.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의 논리만 가지고 지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지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이 지배계급의 소유여야 하고 그 생산수단을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폭력수단을 지배계급이 소유해야합니다. 지배의 자원을 지배계급이 소유하지 않는한 지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만 가지고 지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배의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타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매순간 폭력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하층계급 남성일수록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층계급 남성은 부르주아 남성들보다 더 폭력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겠죠. 하지만 부르주아 남성들이 더 폭력적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지배의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계급지배를 사상한 채 폭력을 논하게 되면 논의가 굉장히 이상해집니다.부가 정보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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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토론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거리며 많이 배웠구요. 공감되는 내용도 참 많았습니다.그런데요. 부르주아 남성들의 폭력과 하층계급 남성들의 폭력을 누구의 폭력이 더 폭력적이다는 식으로 비교할 필요가 있을까요?(저도 모든 '폭력'이 같지 않고 폭력이라는 행위의 주체와 맥락에 따라 의미는 굉장히 달라진다는 점은 너무*100 동의합니다.) 그런데 비교의 목적은 여전히 가부장적 억압보다 자본주의적 억압이 더 크고 폭력적이란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어떠한 폭력이 더 폭력적인가' 하는 비교는 불필요할 것 같고, 오히려 비교의 결과가 의도하지 않은 별로 좋지 않은 효과를 낳을 것도 같네요.
자본과 자원의 지배와 통제권력은 '자본가'에게만 있는 걸까요? '자본가'라는 주체는 단일한가요? '자본'의 주체와 성격에 따라 자본이 구성되는 양상이나 작동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양한 게 현실인 것 같아요.(근데 보통은 '자본' 혹은 '자본가'라고 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특징지워지는 존재 혹은 주체를 말하기는 하지요)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이주민보다는 선주민에게, 장애인보다는 비장애인에게, 청소년보다는 '성인'에게,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에게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통제권력이 더 있는 것 아닌가요.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집단도 있겠지만, 억압받는 집단 안에서도 작은 권력이라도 경합하고 더 가지려고 경쟁하고 다른 집단을 억압하는 게 현실이라면 그 둘의 억압과 폭력의 경중을 비교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요?
오히려 그 복잡다단한 연쇄의 고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세밀하게 분석해 하나씩 끊어내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치만 저도 참, 논리적 정합과 좀 무관하게(복잡해서..^^;;) 심정적으로는, 함께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동의할 수 없는 폭력성을 발견하거나 그것이 저들의 폭력성과 동일한 것처럼 비교될 때에는 (옳고 그름을 떠나) 어떤 비애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동지'라는 환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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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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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가 배움이 짧아 개념과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지 못해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 점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결국 계급지배에서 비롯된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을 사실상 비교하지 말라는 말씀이시네요. 폭력의 근원이 다름을 역설하고 계시는데, 원 글은 그 근원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근원이 어디든간에 폭력은 당하는 입장에선 별로 다르지 않으며, 불의이긴 마찬가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국가에 의한 피해/사적인 피해를 또다시 위계화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평등하다면요.
더불어 제가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잡설은, 데모꾼에 대한 차별이건, 노숙인에 대한 차별이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건, 그건 지배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조장된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지배에는 지배의 자원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모두 필요한데, 이 사건과 같은 노숙인에 대한 차별은 다른 순간 다른 장소에서 이미 지배의 도구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논의에서 이 폭력은 국가 폭력이고, 저 폭력은 사적 폭력이고, 이런 식의 구분을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지배를 위해 얼마든지 우리 안에 있는 차별/폭력 정당화 구조의 능선을 따라 포지션을 이동할 수 있습니다. 당장 비정규직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들은 언제나 분리 지배를 위해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할 수단을 찾아내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것만, 저것만 하고 가려가며 타파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모든 차별을 타파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았을 때, 위선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거야 당연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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