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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선 투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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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1-29 01:06:19, Hit : 196, Vote :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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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을 넘어선 투쟁(1)
앞서 소개한 Kyaw와 Soe의 이야기처럼 핌이 쓴 책 ‘햇살을 찾아’에 실린 글입니다.

요즘 제가 새로 단체 설립하고 개인정보에 관련된 송사도 있고 해서 좀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글을 자주 못올리는데 만원계 게시판에 각종 스팸이 난무하는게 가슴이 아프네요. 여러분들 침묵을 그치시고 얘기좀 많이 남겨주세요. 그래야 스팸이 사라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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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선 투쟁(1)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버마 민중이 봉기한 이래, 그러니까 1988년 이래 버마의 땅은 피로 칠해졌다. ‘국가법과 질서 회복 위원회(SLORC)’의 잔인한 독재는 ‘국가 평화와 발전 위원회(SPDC)'로 이름을 바꿔서 이미지를 쇄신하려 했다. 풀뿌리 시민들은 희망의 징조가 없는 계속된 봉기에 직면했다.

1948년 독립후에 이어진 내전은 소수민족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현재의 정권은 전국을 파멸로 이끌었다. 버마의 현상은 이웃 국가들, 특히 타이에 넘쳐나는 수많은 난민들의 숫자에서 가장 분명하다. 이들은 국경지대의 난민 캠프를 찾을 뿐 아니라 타이 전역에 이주 노동자로 흩어져 있다. 난민, 난민 노동자, 이주노동자의 눈을 보면 사람은 잊혀지지 않는 고통의 사연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타이내의 백만이 넘는 버마난민의 존재는 캄보디아의 회원자격을 지연시키면서 버마의 회원자격을 인정해준 아세안(ASEAN)의 맹목을 확인시켜준다(동남아시아국가연합인 아세안은 타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네이, 베트남, 라오스, 버마로 구성돼있다). 아세안의 무지는 다음과 같은 한 지도자의 정당화 발언에 반영돼있다. “캄보디아에서는 뭔일이 벌어졌지만 버마에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아, 압제, 종족전쟁에 직면하여 버마의 보통사람들은 고향 바깥에서 운을 찾아야만 했다. 착취와 불안으로 소스라치는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희망을 찾아 떠났고 브로커와 에이전트의 사기에 충동질 당했다. 잠을 자든 깨어있든간에 외국에서의 공포의 삶이 고향에서의 기아와 무기력함보다 나아보였다. 타이는 버마돈으로 고국에서의 자유를 살 수 있을 만한 상당액수를 저축할 수 있는 버마인에겐(희망사항이지만)  희망의 땅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에겐 “불법 이주 노동자”란 딱지가 붙었다. 이 낙인은 고립과 차별을 고무시킬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용어는 이 사람들이 단지 돈을 벌려는 경제적 이주자일 뿐이라는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는 버마에서온 난민 중에서 가장 적은 공감을 받는 이주자이다. 이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으로 도망치지 않은 사람들로 인식된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분투할 뿐이다. 그러나 버마의 경우에, 인권침해와 현재의 내전이 악명높은 곳에서 ‘이주 노동자’, ‘난민 노동자’,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 ‘정치적 난민’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없다. 이들이 어떻게 분류되느냐에 상관없이, 이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 폭력과 비인간적 조건에서 도망쳐나왔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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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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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1-27 15:56:50, Hit : 208, Vote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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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네요
이걸 가을비라 해야할지 겨울비라 해야할지 헷갈리네요. 계절이 뒤죽박죽이라...

아래 게시물들에 스팸댓글들이 잔뜩 달려서 지우느라 좀 손목이 아프네요.

다름 아니라 영화상영회 진행상황을 알려드리려고요.

원래 11월에 상영회를 가지려 했는데, 핌에게서 받은 DVD가 일부 손상된 것이라 다시 연락해서 받고 나니 11월 말이 되버렸습니다. 12월은 학생들 방학이라 성공회대에서 행사하기가 좀 그렇구요.

그래서 새로운 계획이 생겼습니다. 성공회대 인권평화센터에서 Peace Ride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는데 그 프로그램 중에 영화상영회를 포함시키는 겁니다. 이 프로그램은 일종의 평화기행인데 한국에 와있는 동남아시아인들과 그들의 출신국에서 여러 인권문제와 관련된 인권활동가들을 초청하여 좌담, 영화상영 등 문화행사, 한국에서 인권과 평화 관련한 의미있는 곳을 선정하여 방문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될 것 같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아마 내년 초가 되겠지요.

11월도 거의 다갔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겠지요. 그런 마음으로 11월을 떠나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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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찾아6] Kyaw와 Soe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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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1-16 22:53:35, Hit : 177, Vote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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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을 찾아6] Kyaw와 Soe 이야기
[햇살을 찾아 6] Kyaw와 Soe의 이야기

98년 2월, Soe가 Mon족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걸 처음 볼 기회를 가졌다. 그는 우리를 Mon족의 날에 방콕 교외의 한 절로 우리를 초대했다. Soe는 아주 행복해보였고, 우리를 초대한 주인이 될 기회를 가진 걸 자랑스러워했다. Soe는 그전에 일했던 경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사장으로 옮겼고 Kyaw와 그 여동생 가족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나는 Soe가 Mon족 해방 운동을 진심으로 지원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그 운동을 위해 Halokani에 있는 조직에서 일하기도 했고, 같은 마을 출신의 친구이자 Mon족 해방운동의 지도자인 한 사람의 연락처를 갖고 있었다. Soe는 그 사람을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Soe가 거의 굶어죽을 지경일 때 소위 지도자는 어디 있었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Soe를 그의 일터로 데려다 주려 차를 돌려서 갔다. 그러나 거기 도착했을 때 그곳은 비어있었다. 경찰이 모든 이주 노동자를 체포하러 들이닥쳤던 것이다. Soe는 Hua Mark 경기장으로 되돌아갔고 거기서 여동생한테 들었다. 한 노동자가 살해됐고, 경찰이 Soe를 용의자로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Soe가 그곳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전화로 그런 얘기를 하는 Soe의 목소리는 공포로 떨고 있었다. 결국 그는 Kyaw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불행히도 경찰은 그곳에도 불법 노동자를 체포하러 들이닥쳤다. 일자리를 찾으러 경기장으로 되돌아가는 것 말고는 모두에게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얼마 안돼서, 우리가 들은 소식은 Soe의 15살난 조카가 체포돼서 국경으로 추방됐다는 거였다. 모두가 그애에 대해 걱정했다. 왜냐하면 그 애는 정신적 장애가 있어서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애는 버마말도 할 줄 몰랐다. 고통속에서도 Soe의 누이는 조용했고 강인함을 유지했다. 그녀의 다른 아이들은 튼튼하게 자랐고, 똑똑한 억양의 타이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Kyaw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자기 아들은 고향 버마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거였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난 후 난 알았다. Kyaw와 그 가족들은 1살난 아들과 오직 타이말로만 대화하려고 애썼다.

***
“Thin Gyen(버마의 설날, 음력으로 지내는데 4월에 있다) 동안에 우리한테 놀러오세요. 전통 요리를 준비해서 대접할께요.” Kyaw가 우리에게 말했다.
그해 설날이 우리가 모두를 함께 본 마지막 날이었다. Kyaw는 경찰의 단속 위협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버마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진 것 모두를 팔고 Soe와 함께 옮겼다.

“정말 보고 싶어요” Kyaw는 아들의 사진을 응시하며 말했다. “절망적이에요. 일거리를 찾지 못해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뭘 어찌해야 할까요?”

마침내 Kyaw는 택시를 대절하여 그의 모든 친구들이 방콕 남쪽에 있는 이주자 마을인 Mahachai로 가도록 도왔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혼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생선 감미료 공장으로 Soe 일행을 만나러 가서 그들이 일당으로 단돈 80-130바트(약 2천4백원-3천9백원)를 받는걸 알았다. 하지만 그 일곱명은 여전히 강했고 버마군사정권 치하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불행히도 Mon족 일행은 타이 노동자들과 다툼이 있었고 그 결과 옮겨야 했다. 고용주는 Soe의 매형을 때려서 그의 코를 부러뜨렸다. 10대인 Soe의 조카도 막대기로 맞아서 어깨와 목에 멍이 들었다. 98년 8월, Soe의 누이와 그 가족은 국경에 인근한 칸챠나부리 지역으로 되돌아갔다. Soe는 Mahachai 지역의 대대적인 단속 때문에 임시로 방콕에 몸을 숨겼다. 경찰은 생선 통조림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이곳은 이주노동자의 고용이 합법적으로 인정된 곳이다)를 포함하여 모두를 체포했다.

“난 괜찮아요.” Soe는 어느날 저녁 내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버마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알다시피 고향이 무척 그리워요. 하지만 거기에서 살수가 없어요. 이 넓은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곳도 허락되지 않나 봐요.”
그리고 나서 그는 고통스럽게 웃으며 전화를 마쳤다. "저기 그거 알아요? Kyaw가 곧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어요...”
나는 그와 함께 쓰게 웃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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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찾아5] Kyaw와 Soe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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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1-06 23:11:13, Hit : 212, Vote :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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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을 찾아5] Kyaw와 Soe의 이야기
1997년 11월, 그 프로젝트 소유주도 마찬가지로 약속을 저버리고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Kyaw와 아내는 Hue Mark 경기장에서 노동자를 모집하러 온 새로운 고용주를 따라가기로 결심했고, Soe와 그 가족들은 누군가가 그들 임금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거기 남기로 했다. 우리가 Kyaw를 알고 지냈던 기간 중에, 새로운 일터에서 보냈던 2달간이 아마도 그와 가족들에게 제일 형편이 나았던 유일한 기간일 것이다. 거기 노동자들 대부분은 타이 북동부 출신으로 Mon족에게 우호적이었고, 옷가지 등을 나눠주었다.

Kyaw가 타이에서 처음으로 온전한 임금을 받았을 때,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현장 주임에게 부탁하여 아들에게 줄 목마를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Kyaw는 정말 슬펐다. 공사일이 거의 다 끝나갔기 때문에 고용주가 더 이상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친구들을 그리로 데려올 수 없었다. 자기 형편은 좀 나아졌지만, Kyaw는 친구들과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런데 Hua Mark 경기장 건설 계획은 상당기간 유예됐고,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원래 프로젝트 소유주가 다른 회사로 프로젝트를 넘겼다. 모든 사람이 예상한대로 새 소유주는 이전 소유주가 지불하지 않은 임금에 대해 책임지기를 거절했다.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들은 격노했어요. 경기장을 태워버리겠다고 했지요. 타이 노동자들은 집회를 갖고 회사에게 항의하기로 결정했어요. 우리들 Mon족 출신과 라오스 출신 노동자들은 감히 어쩌지를 못해요. 우린 경찰이 두려워요. 우리들은 대개 경찰에게 매달 2백바트(약 6천원)을 내고 있었는데 지금 당장은 돈이 전혀 없거든요. 돈을 주지 않으면 경찰이 우릴 체포하러 올지도 몰라요.” Soe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경찰이 정말 우릴 체포하러 올까요?” Kyaw는 절망적으로 물었다. Kyaw는 텔레비전 뉴스를 봤는데 타이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추방하려 한다는 뉴스였다. “고용주가 우릴 책임질까요?” “경찰이 정말 당신들을 체포하고 추방하려 한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죠?” 나는 그렇게 묻는 것 말곤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Kyaw는 한숨지었다. “내가 들은 소문으로는 우릴 계속 고용하고 싶어하는 고용주가 있으면 당국에 요청해서 국경지대에서 우릴 데려갈 거라더군요. 그렇게 된다면 좋겠어요. 결코 브로커에게 돈을 지불하고 싶지도 않고 지금처럼 경찰한테 도망치며 살고 싶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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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후원금 송금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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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1-01 10:33:18, Hit : 253, Vote :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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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일 후원금 송금내역
11월이네요. 초겨울이어야 하는데 가을의 한복판에 있는 날씨고요. 모쪼록 겨울맞이에 몸도 마음도 넉넉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11월 1일 후원금 송금 내역

9월 잔액 19,931원
10월 2일 이윤* 1만
10월 2일 이민* 1만
10월 10일 연상* 1만5천
10월 31일 구태* 1만
10월 31일 황수* 1만5펀
10월 31일 류은*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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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모금액 7만원
11월 1일 송금액 150달러+수수료 5천원=146,816원
잔액 -56,885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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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찾아 4] Kyaw와 Soe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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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0-30 23:32:10, Hit : 145, Vote :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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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을 찾아 4] Kyaw와 Soe 이야기
그 공장의 Mon족 출신 노동자의 도움으로 Soe와 Kyaw는 그들이 가진 돈의 나머지 전부인 천5백바트(약 4만5천원)에 트럭을 빌려서 Suphan Buri Province의 공사장으로 돌아갔다. 그 공사장의 인부는 Soe와 Kyaw 일행에게 방콕에 가서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하면서 그들을 위해 방콕에서 미터 택시를 불렀다. 11명을 태우기 위해서는 택시가 3번을 왔다갔다 해야 했고, 한 사람당 천5백바트의 요금이 들었다. 하지만 그 택시 운전사는 아직껏 요금을 받지 못했다. Soe와 Kyaw 일행이 임금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고 거의 굶어죽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Mon족 출신인 Soe와 Kyaw 일행 11명이 방콕에 도착한 때는 타이의 경제위기가 터진 97년 초였다. 경제 위기 때문에 건설 일은 드물었고, 임금 지불도 자주 끊겼다. 고용주가 결국은 돈을 주리라고 믿으며, Kyaw와 Soe는 고된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또다른 근심거리만 생겼다. 그들의 노동 일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충분한 돈을 벌 수 없다는 거였다. 이동야채가게 주인은 맘이 좋아서 그들에게 외상을 주었지만, 그것만으론 전체 가족이 먹기에 충분치 않았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공사장 인근의 연못가에서 풀도 뜯고 고기도 낚았다. 때때로 그들은 오이하고만 밥을 먹거나 볶은 쌀만을 먹어야 했다.

그들과 친해진 후에, 우리들은 신선한 음식을 가지고 그들을 방문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크리스챤 조직 출신의 카렌족 사람이 그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그의 주장은 타이인과 버마인(바로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이 자신들의 삶을 위협한다는 거였다. “버마와 거기 출신 사람들한테는 뭔가 수상한 게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진짜 피해자인 Kyaw가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려 했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들을 해요. 그 누구도 어떤 사람도 믿지 않으려 해요.”

Soe가 말했다. “신경쓰지 마세요. 그들이 우릴 돕지 않겠다면 그러라고 하세요. 괜찮아요. 여기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Kyaw는 주장했다. “어쨌든, 난 내 돈을 받을 때까지 기다릴래요. 또 옮기고 싶지 않아요. 어딜 가도 똑같을 거예요. 하지만 경찰이 우릴 체포하려 한다면 떠날 수밖에 없겠죠.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난 떠나지 않을래요. 붙잡힐까 무서워요. 하지만 모든 일이 끝을 보게 될테니 붙잡히는게 나을지도 모르죠.”

Soe가 우리에게 물었다. “근데 공사장이 도망치면 어떡하죠? 그런 소문을 들었어요. 우린 어떻게 해야하죠?”

물론이었다. 공사장은 프로젝트 소유주에게 돈을 받은 후에 실제로 도망쳤다. 전체 노동자들이 최종 임금이라고 받은 것은 겨우 2백바트(약6천원)였다. 프로젝트 소유주는 그들 노동자 전부에게 일을 다시 하도록 재고용하겠다고 했지만 이전 공사장이 가져간 돈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다. Kyaw와 Soe 일행이 실제로 받았어야 할 돈은 만7천바트(약51만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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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찾아 3] Kyaw와 Soe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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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0-27 22:29:12, Hit : 152, Vote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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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을 찾아 3] Kyaw와 Soe의 이야기
브로커는 Kyaw와 Soe 일행을 왕초로 알려진 경찰관 집으로 데려갔다. 그의 부하인 타이 사람과 Mon족 사람은 일행을 사탕수수 농장으로 데려가 한 사람당 7천 바트(약 21만원)에 팔았다. 이 금액은 Kyaw와 Soe 일행에게 여행경비로 합의한 액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Kyaw와 Soe 일행은 그 빚을 갚기 위해 3달 동안 그 농장에서 일해야 했고, 임금은 받지 못한 채 쌀과 야채, 칠리소스만을 제공받았다. 더욱이 Kyaw가 잘라낸 사탕수수의 양을 계산하고 거기서 빚을 빼보니, 고용주가 적어도 1천바트 정도를 Kyaw 부부에게 속여서 빼먹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경찰관의 부하들은 비밀리에 또다른 직업을 제공하겠다고 다시 나타났다.
“브로커들은 우리를 다시는 팔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Soe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한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웃었다. Soe는 두달 동안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 후에야 자신의 이야기를 상세히 우리에게 털어놓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용주는 우리에게 임금을 주지 않으니 브로커들을 따라 갈수밖에...그곳은 Suphan Buri Province에 있는 건설 공사장이었다. 브로커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미 빚을 갚았으니까 이번에는 진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든 우리를 또한번 판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 가격을 높여서 한 사람당 8천바트(약24만원)에 팔았다. 공사장은 우리가 여전히 빚지고 있다고 말했고 임금을 주지 않으려 했다. 공사장은 식비라고 일주일에 25바트(약7백5십원)만 주었을 뿐이다. 난 거기서  두 달 일하고는 그 상황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Soe는 잠시 멈추더니 생각했다.

“그때 우리의 도주를 도와준 Mon족 출신 노동자가 있었다. 내 조카와 매부와 나는 그를 따라 Ratchaburi Province로 도망쳤다. 그때 생각으론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면 나머지 가족들을 데리려 오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어떤 좋은 일자리도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 고용주들은 우리에겐 임금 전부를 주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달 후에 그 왕초라는 경찰관 브로커가 Kyaw에게 나타나서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Kyaw는 우릴 속인 건 그 경찰관의 부하들이지 경찰관이 속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Kyaw는 나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Soe와 Kyaw는 곧 깨닫게 됐다. 그 경찰관이 데려간 공장은 나쁜 곳이었다. 노동자를 위한 숙박시설은 전혀 없고 아이들과 같이 머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새로운 고용주는 그 경찰관이 이미 2천 바트를 자기한테서 가져갔으니 그 돈은 당신들의 부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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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찾아 2]Kyaw와 Soe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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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0-23 22:44:55, Hit : 575, Vote :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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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을 찾아 2]Kyaw와 Soe의 이야기
햇살을 찾아 2

우린 Kyaw와 그 가족을 9달 동안 알고 지냈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니 기쁜 동시에 헤어짐이 슬펐다. Kyaw의 타이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를 잘 알기에 그리고 그가 얼마나 버마의 Mon주에 있는 고향의 푸른 하늘과 푸른 들판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지를 잘 아는 우리는 기뻤다. 또한 슬프기도 했다. 우리가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은 버마의 Mon주에서의 생활이 타이에서보다 결코 쉽지 않으며, 더 억압적이고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Kyaw와 Soe를 처음 만난것은 1997년 9월 초, 방콕의 Hua Mark 경기장 건설지에서였다. 이 경기장은 98년 아시안 게임을 위해 건설되고 있는 많은 경기장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에, 건설업주가 임금을 2달이 넘도록 지불하지 않고 있었고, 임금 주겠다는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좀 더 기다리라고 가끔씩 2백 바트에서 5백 바트(약 6천원-1만5천원)가 주어졌다. 일부 노동자들은 새 일자리를 구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온 불법 이주자여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굶주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선 기관에서 제공한 쌀과 조리용 기름만으로 버텨야 했다.

나는 물었다. “Kyaw, 정확히 받을 돈이 얼마예요?”

“모르겠어요. 그들이 먼저 일부터 하라고 했어요.” Kyaw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타이 농촌 사람들의 그것처럼 정직했다.

“이 일 하기 전에 다른 직업들은 어땠나요? 임금을 얼마나 받았어요?”

“역시 모르겠어요.” Soe는 순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타이에 도착한 뒤로 임금을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Kyaw와 Soe는 같은 지역출신이지만 마을은 달랐다. 둘은 운명적으로 11명의 무리에 섞이게 됐다. 둘은 타이에서 추방된 난민들을 위한 저임금 노동시장인 Halokani(Mon주 바로 안에 있는)에서 만났다. Kytaw의 가족 셋, Soe, 그리고 Soe의 누이의 가족 7명이 한 무리가 되어 타이의 칸차나부리 지역에서 직업을 구해준다는 조건으로 같은 브로커에게 4천5백바트를 지불하는데 동의했다. 그때, 이후로 이들 11명은 서로 헤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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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찾아 1]Kyaw와 Soe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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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0-14 02:20:44, Hit : 638, Vote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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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을 찾아 1]Kyaw와 Soe의 이야기
사무실 이삿짐을 싸다가 몇년간 찾아도 못찾았던 핌이 썼던 책을 발견했습니다. 버마출신 이주 노동자들을 인터뷰하여 핌이 쓴 책으로 제목은 '햇살을 찾아-타이에서 살아가는 버마 이주노동자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책을 소개하고 싶었도, 아무리 뒤져도 안나와서 안타까워했었는데, 이삿짐을 싸다보니 엉뚱한 서가에 꽂혀 있더군요. 앞으로 자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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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에서 전화걸고 있어요’ 친숙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통해 들려왔다. ‘버마쪽에 있어요. 고향으로 가려해요.’

난 물었다. ‘우린 다시 못보겠네요. 그렇죠’

‘모르겠어요. 아내와 아들이 어쩌고 있는지 보러가야만 해요. 내가 여기 머물수 있다면, 다시 볼수있겠지만, 타이는 내가 여기 머무는걸 허용치 않으니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는 잠깐 멈칫거리다 말했다. ‘당신이 보고싶을 거예요.’

‘Kyaw, 돌아가서 뭘 할 작정이죠?’

‘모르겠어요...’ 침묵이 흘렀다. ‘내가 무서운건 버마군부가 철도일을 강제로 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 가족은 굶주리게 돼요. 내가 가장 걱정되는 건 아내가 홀로 고향에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고향에는 남자가 전혀 없기 때문에 군부가 대신에 아내를 끌고가 강제노동을 시킬 거예요.’

Kyaw는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아마도 타이 국경쪽에 살러 올까 싶어요.’

1998년 6월, Kyaw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Mon족 출신으로 15살 나이에 자원하여 Mon족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그일이 있기 전에 그의 부모는 고생 끝에 죽었고, 가족의 땅은 군사정권에 몰수됐다. 4년이 지난 후 Kyaw는 전투지대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그후 그는 10여년을 난민이자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국경지대를 떠돌았다. 결혼 후에 Kyaw는 아내와 생후 4달된 아들을 데리고 타이로 왔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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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은숙  (2006-10-09 17:10:51, Hit : 716, Vote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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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내내 아르바이트하느라 연휴를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책상에 앉는 시간이 없었기에 좀 다른 시간을 보냈다고나 할까요.

오늘 다들 피곤함을 느끼실텐데 빨리빨리 피곤 푸시고 10월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우울한 얘기들로 가득찬 뉴스를 굽어보는 양 오늘은 하루종일 뿌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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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이윤*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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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송금액 150달러+수수료 5천원=150,582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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