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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 중2

아침에 은별이를 데려다주는데 그 짧은 거리인데도 길을 잘못  들어섰다.

은별이가 "엄마, 왜 이리로 가?"라고 할 때쯤에야 나는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걸 알았다.

논두렁 공포증이 생겨서 논두렁을 조심조심 하며 소위 말하는 안전운전을 열심히  하다보니

딴 길을 가고 있었던 거다. 이런 멍청이.

다른 길로 돌아서 유치원버스를 기다려 은별에게 바이바이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한 후에

요즘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하는 물음을 심각하게 던져보았다.

요근래 징징대는 글들을 연이어 올리면서 솔직히 창피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내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나 중에 하나로 본다면 관찰해볼만 하니까.

나는 쓸거다.

자꾸자꾸 엄살부리지 마라..라는 말을 또다른 나한테 들으면서도 나는 지금 분석중이다.

 

약국에서 찾아온 셰일라 커런 버나드의 '스토리텔링'이라는 책에는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며,

관객도 함께 데리고 나아간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틀, 즉 영화의 서사 골격에 대해.... 서사 열차라고 표현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구성을 짤 때 항상, 강박적일만큼 집착하는 '서사열차'.

그런데 오늘 문득 돌아오는 길에 이전까지의 내 시간에도 서사열차라는 것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에 서사열차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흔살까지 살았던 도시에서 내 생활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이뤄졌다.

밤 사이의 무시무시한 일들도 아침의 새로운 태양 앞에서는 음침한 기운을 잃었고

규칙적으로 사무실에 출근을 해서 자리정리를 하고 일거리를 챙겨 앉았다.

아이 때문에 출근을 못할 때에도 일주일에 한 번, 한달에 한 번은 꼭 규칙적으로 사무실을 찾았다.

 

일이 손에 안 잡히면 도서관에  가서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책을 읽거나

하루에 두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기도 했다.

어스름 저녁이면 사무실 동료들과 저녁을 먹으며 술과 수다를 함께 즐기기도 했고.

(가장 그리운 게 바로 그건데....

서울에 자주 가지  못하고, 가끔 가더라도 운전을 해야 해서 밥만 먹고 온다. ^^;)

일상은 그렇게 견고한 선로처럼, 혹은 컨베이어벨트처럼 일정한 패턴 안에 자리했고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가끔 옆길로 새기도 하면서, 하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 가장 당혹스러운 건 몸의 기억이다.

매일  다니던 익숙한  길, 넓어보이던 그 길이 지금 내겐 너무 좁고 옆 도랑이 먼저 보인다.

사고후유중인듯.

그리고 어쩌면 향수병 비슷한 걸 앓는 것같다.

내 신경줄은 그다지 튼튼하지 못한데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지만 나름 힘들었을 것이다.

1주일에 한 번 봉천동에 가면 항상 울적한 것도 그랬고

사무실이라는 공간과, 그 사람들에 대한 의존이

생각보다, 내가 의식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수요일 사고 후, 은별이가 잠이 들자 글을 못 쓸 것같다는 말을 하려고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문대표가 깜짝 놀라면서, 괜찮아? 하는데 목이 매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감정이 제대로 작동을 한 것이다.

그 곳에서 나는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냈다. 오직 그 곳에서. 

요즘은 가끔 사무실에 가면 반기는 동료들 사이에서 손님처럼 이야기를 주고 받다 오곤 하는데...

나의 그 곳이 일상에서 통째로 사라진 게, 지금 내가 이렇게  갈팡질팡 못하는 이유일지도.

 

대학원도... 고민 중.

좀더 알아봤어야 하는  건 아닌지 후회가 된다.

그 곳은 좋은 곳이다.

다만....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뭔지를 어렴풋이 알았다는 게 내게 온 변화다.

그런데 그걸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곳이 과연 있을까?

난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뭔지를 찾는 과정인데 그게 어딘가로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건지

지금의 자리에서 다른 계획을 추가해야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일단 수요일에 m을 만나서 상담을 해야할 듯.

원래는 '스토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뭐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수요일 수업 후에 만나기로 했는데

그 얘긴 빨리 끝내고 (미안~ 그런데 내 코가 석 자라서 ^^;) 

한 번 물어봐야지.

m은 타국에서 한 학기를 지내본 다음에야 '내가 잘못 왔네' 싶었다던데

그래도 꿋꿋이 버티고 돌아왔으니 나한테  뭔가 힌트를 주지 않을까.

진로문제는 몇 사람을 더 만나보고  다음 주 수업 이전에 정리를 해야지

안 그러면 자꾸 산만해져서 앉아있는  게 괴로울 것같다.

 

며칠 전, 남편에게 공부의 재미와, 더 알고 싶어지는 안타까움에 대해 들려주자

자신도 대학원 때 그런 스승을 만나서 좋았다고 깊이 공감해주었다. 

혼자 결정해야 하는 영화 작업처럼

진로 또한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만 달려있는 것같다.

선배 말처럼, 좋은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하더라도 나만의 몫이 있는 거다.

좀더 집요하게 그 몫에 대해서 바라봐야할 시간인 듯.

 

책이 많은 한예종 도서관에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싶다.

지금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은데

오늘까지 마감인 글 한 편의,

들어가는 첫 문장을 잡지 못한 채 계속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다.

집중을 해야해, 집중을....

이 글만 끝나고나면

음악을 낀 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좀더 진척시키면 될 것같다.

집요하게 들여다보니

할 일이 이렇게 가닥이 잡히는구나...

 

그 다음 문제는 다시 그 다음에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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