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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1/21
    '애정결핍'(2)
    나르맹
  2. 2010/01/21
    순천 도서관탐방
    나르맹
  3. 2010/01/18
    발바닥 내 발바닥(10)
    나르맹
  4. 2010/01/13
    이봐, 힘을 아껴봐
    나르맹
  5. 2010/01/11
    영어점수(2)
    나르맹
  6. 2010/01/10
    2010/01/10
    나르맹
  7. 2010/01/10
    핀란드 : 감옥으로 가는 첫번째 여성 완전 거부자
    나르맹
  8. 2010/01/05
    Judith Butler’s carefully crafted f**k you
    나르맹
  9. 2010/01/04
    눈 오는 날 딴 생각(8)
    나르맹
  10. 2010/01/03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나르맹

2010/02/01

*ㅈㅅㅁ가 '벌목후유증'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두세번 곱씹어보니 표현이 참 그럴 듯 하다. 한 두달 만에 다시 찾은 도장리. 찬우물 막걸리는 역시나 맛있었다. 산마을학교가 인가학교이기 때문에 교생실습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에 혹했다. 학교를 찾아가보니 교생실습 신청서도 있다. 부속 초등학교로 교생을 나가서 함께 수업듣는 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하는 것도 즐거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깝깝한 정장 입고 한달을 왔다갔다 하는 것보다는 공기좋은 곳에서 한달 살면서 부대끼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어찌될랑가.. 참,,

 

* 그냥 생각없이 보려고 <연애의 목적>을 다운받아 봤는데, 보고나선 또 심란해져버렸다(영화 스포일러 있으니 감안하세요). 흔히 말하는 '성폭력 사건'이 떠올라서 보는 동안 힘들었다. 사실 박해일 이름을 보고 본 영화였는데 특히나 영화 초반부에는 박해일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여성에 대해 '유부남 홀리는 가정파괴범'이나 '성폭력 피해자'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뭔가 불편한데 그 불편한게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한 여성이 그 공간의 물을 흘리는 불결한 존재로 되어버리는 건 뭐 이제 놀랍지도 않지만, 그 같은 여성이 어느 순간 갑자기 또 성폭력 피해자라는 지위를 획득하면서 갈등의 양상이 뒤바뀌며 종결되는 모습에서 계속 찝찝함이 남는다.

박해일이 선생 자리를 짤리고 나서, 강혜정이 도시락 통을 설거지 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한 2,3년 전의 나는 이해를 못 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여성의 감정노동이 선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믿던 시절과 그렇지 않는 지금의 차이랄까. 강혜정이 박해일을 다시 찾아가 박해일의 기분을 맞춰주고 함께 자는 장면을 다른 친구는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하다.

나이를 먹을 수록 세상에 항상 옳은 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가치판단은 더 모호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기분. 그렇다고 모든 게 맞다는 식의,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렇게 무르게 사는 것 같진 않은데. 머리가 커질 수록 맘에 안 드는 것은 더 강렬해지고, 그래서 하나 잘못 걸리면 그거랑은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근데 반대로 딱히 싫은 게 아니라면 그냥 이 말도 맞고 저말도 맞는 것 같고, 논쟁에 섣불리 뛰어들질 않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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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구호의 방식

마침 "Haiti Untold: Nonviolence and Humanization at the Grassroots"란 제목의 포스팅을 발견했다. "아이티에 관해 얘기되지 않는 것들-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폭력과 인간성"? 제목을 번역하기가 쪼끔 어렵긴 하다. 포스팅 전체를 다 번역해볼까 했는데 뚝딱 해버리기엔 약간 부담스러운 분량이라 포기.;;

 

전반적인 문제의식은 이런 거다. 뉴스에서는 지진 이후에 발생하는 약탈과 같은 혼란스러운 모습에만 집중을 하기면서 결국은 군대의 점령을 정당한 것으로 몰아가지만, 아이티에서 보여지는 실상은 오히려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한바탕 난리가 났을때도 구호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필자에 따르면,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 돕는 경향을 보이며 이번 아이티 지진사태에서도 서로 도우며 난국을 살아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고 한다.

 

지진의 근원지인 Leogane는 도시의 90% 이상이 파괴되었지만, 무너진 가게에서 사람들이 종종 음식들을 빼가는 것을 빼고는 바깥 사람들의 상상처럼 폭력이 발생하진 않는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구호단체들은 아이티 현지에서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을에 직접 들어가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건을 받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떠할까? 자신들이 마치 동물원 우리 안의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 같다. 구호단체라고 들어간 사람들이 그 마을에서 움직일 땐 늘 무장한 군인들을 대동하고, 차의 창문을 꽁꽁 닫아놓은채 주민들과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다니..

 

"비폭력을 실천함에 있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과 상대방의 존재를 비인격화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하이티에서는 지진의 생존자와 이들을 도우러 찾아온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장벽이 존재하고 있기에 이 양 집단 사이의 교감이 이루어지기가 힘든 상황이다. 이는  "인도주의적"인 목표를 가지고 들어온 구호단체들의 활동의 진정성을 느끼기 힘들게 만든다. (많은 구호단체들이 하이티의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았더라면) 진정으로 인도적인 구호활동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진이 있기 전부터 하이티에서 그간 전개되어온 지역의 활동의 방점은 바로 하이티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상호간의 신뢰를 쌓는 거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도 우리처럼 복잡한 감정과 욕구를 지닌 인간들이라는 점을 자각함으로써 그들과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없애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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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6

 

 

제발 좀, 어깨에 힘빼고 숨 깊이 들이쉬면서 찌든 영혼을 잠시 치유하는 시간.

예전에 몰랐는데 여자 보컬 목소리 쫌 짱인듯..

깊은 밤 안개 속.. 봄밤 싱숭생숭 센치해질 때 귀에 꼽고 들어야지. 어서 봄아 와라..

 

 

<깊은 밤 안개 속>

 

추억을 말할 때 이 밤
이별을 말할 때 이 밤에

사랑을 말할 때 이 밤
미움을 말할 때 이 밤에

과거를 말할 땐 이 밤
내일을 말할 때 이 밤에

사랑을 말할 땐 이 밤
모든 걸 말할 때 이 밤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때
절벽을 넘어서 바다로 흘러가는
작은 불빛 따라 날개를 펼치네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더 깊은 안개 속 더 깊은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사랑을 노래해
이 밤
이 밤에 -

사라지면 안돼 -

추억을 말할 때 이 밤
사랑을 말할 때 이 밤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때
절벽을 넘어서 바다로 흘러가는
작은 불빛 따라 날개를 펼치네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더 깊은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더 깊은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더 깊은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깊은 밤 안개 속 사랑을 노래해
이 밤
이 밤-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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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제가 플로랑스에게 수영장이 큰지 작은지, 두 가지 선택을 제시했을 때 플로랑스는 제3의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제가 술이랑 콜라 중에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플로랑스는 제3의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플로랑스는 꾸밈없이 자연적인 방식으로 응답을 하는 어린아이입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어른들은 플로랑스처럼 행동할 수 없을까요?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만이 주어졌을 때 우리도 플로랑스처럼 제3의 길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3의 길을 창조하는 데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날마다 죽음과 맞댄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 아이티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이런 방식으로 생존해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좀 거슬리는 발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가난에 대한 해결책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나라들의 원조나 도움 덕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대한 생존 능력 덕에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아이티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의 가난한 사람들, 그들이 살아온 역사는 일종의 인간애의 박물관입니다.

- 세번째 편지 '나는 주스가 더 좋아요', 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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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에 관한 진실-아리스티드 전 대통령

출발은 인권연구소 '창' 류은숙씨의 <아이티:역겨운 부채를 갚기 위한 인도주의적 원조인가?>를 읽은 것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이 글에 소개된 책 중 한 권인 <가난한 휴머니즘: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를 공교롭게도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티의 전 대통령이었다는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Berrtrand Aristede를 알게 되었고 구글링을 해보니 역시나 뜨는 글이 많았다. 그래서 찾게 된 글이  Achievements Under Aristide, Now Lost 이다.

 

한 때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그의 정치적 성향이나 미국에 맞서는 당당함 등을 이유로 이쪽에서 주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종류의 관심이라면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 역시 충분한 이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1990년(91년?), 아이티 최초의 민주적 대통령 선거에서 67퍼센트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이 되었던 아리스티드는 91년 9월의 쿠데타 때 실각하여 망명길을 떠났다. 94년에 자국으로 돌아와 남은 대통령 임기(16개월)를 마쳤고, 2001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으나 2004년 군부쿠데타의 과정에서 납치되어 남아공으로 쫓겨났다. 어찌보면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것이, 아리스티드의 이러한 일련의 과정 배후에는 미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리스티드 재임기간 중 '혁명적'-사실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하는- 조치들이 단행되었고, 이를 못 마땅해했던 글로벌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여 미국이 정치개입을 했던 것이다. 2004년 쿠데타 이후 아이티에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섰고, 아이티 민중들은 (아마도) 미군이 대부분이었을 '유엔 평화유지군'과 폭력적인 경찰력의 치하에 놓여있었다. (2004년 당시에 나온 오마이 기사도 이번에 발견했다).

 

위에 인용한 영문 글에 따르면 아리스티드 집권 시절에 의료개혁, 교육, 인권, 정치적 자유 등의 측면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아이티 군대를 해산한 것이 무척이나 도드라져 보인다. 그간 세계에서 군대 없는 나라 하면 코스타리카 밖에 몰랐는데.쩝

 

이번 지진으로 아이티에서 몇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 숫자가 사실 감이 잘 안 온다. 숫자가 너무 큰 게다. 집계 자체를 믿기도 힘든 것 같다. 어쨌든 순식간에 전 세계의 주목(동정)을 받고 있는데, 9시 뉴스에선 아이티의 정치적 맥락이나 역사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기에, 류은숙씨 글을 보기 전까지는 나도 그냥 저 나라 사람들 참 안타깝다 하고 그쳤을 것만 같다. 난 심지어 아이티가 아프리카 어느 곳에 있는 줄 알았지 쿠바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_-;; 부끄럽다.

 

지금도 지진 직후 미군이 대거 개입을 한 것 같던데, 어떻게 될런지 지켜봐야겠다. '위헙사회' 얘기도 많이 하는데, 천재지변이 나도 먼저 죽고 고통받는 것은 약자들이라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지진으로 죽어간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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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결핍'

'애정결핍'이란 표현은 너무 단정적인 것 같아서 말하기가 꺼려지지만, 그렇게 보이는 친구들이 가끔씩 눈에 들어온다. 전국 상위 3%학생들이 온다는 외고여서, 중학교 때 난다긴다 하는 아이들이 모여서 그런 학생들이 더 많다고, 다른 교사들은 말한다.

 

한 아이의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서 '쟤는 애정결핍'이구나 평가/판단을 내린 뒤, 그 아아에게 일부러 더 데면데면하게 반응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덜 씻긴 나의 몸은, '애정결핍증상'을 보이는 상대를 맞닥뜨리자마자 곧바로 스스로를 관계에서의 강자로 위치시킨 것이다. 마치 연애에서도 매달리는 쪽이 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그 학생을 이번 겨울방학 단어시험을 들어가면서 알게됐는데 이상하게 호감이 잘 가지 않는 친구였다.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 왠지 밉긴한데, 막상 돌이켜보면 왜 미운지 '관찰'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관찰'도 못 하면서, 다시 말하자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이 맘에 안 들었는지도 잘 말하지 못하면서 그냥 그 학생 일반에 대해 으레 선입견을 거쳐 판단하는 내가 무서워졌다.

 

비폭력대화의 눈으로 보면 학교는 정말 온갖 '평가'가 난무하는 공간이다. 비단 성적이나 서열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화소재로 삼으며 걔는 착하고 걔는 하는 짓이 참 이쁘다는 식으로 칭찬을 하는 표현들이 자꾸 내 레이더망에 뭔가 찝찝한 감정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걔는 싸가지가 없어, 걔는 늘 저래, 이런 식의 비난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나의 에너지를 모든 관계에서 불편부당하게 쏟아붓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그냥 더 친해지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한편으론 괜히 비호감인 사람들이 있다(외모가 주는 영향도 상당할 것 같은데 단순히 외모라기보다는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포스라고 말하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호불호는 더욱 굳어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나의 '편향'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다만 내가 어떤 사람을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할 때, 나의 이런 생각뒤에 어떤 느낌과 욕구가 있는지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스스로가 타인을 마냥 평가하고 재단하며 관계를 맺는데에 어느새 익숙해지고 경직되어 버릴 것 같은 경각심이 번쩍 들었다.

 

'애정결핍'이구나 생각을 들게 만든 그 학생은 아마도 관심과 사랑, 인정, 보살핌, 친밀함 등을 원했을 것 같다, 라고 추측을 해본다. 하지만 난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고 적절한 거리(자기보호)를 두고 싶다. 나로 하여금 괜히 얄미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구체적인 그 학생의 행동이 뭔지 주의깊게 관찰을 해보면 내 마음이 그나마 좀 가벼워질 것 같다.

 

이렇게 쓰긴 했지만, 속 편하게 쓰자면, 그냥 편애는 하되 공정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유능함(얄팍함?)을 가지고 싶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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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도서관탐방

 

 

 

 

 

 

평화도서관모임에서 순천 도서관 탐방을 다녀왔는데 정작 도서관 사진이 없다,,-_-;

폰카로 찍긴했는데 컴퓨터로 연결을 못하겠다;;

현주가 보내준 순천만 갈대밭 사진,,

봄날처럼 따뜻했었다. 얼른 봄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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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내 발바닥

"저는 대안을 말하지 않아요. 아니 못합니다. 왜냐면... 천성산을 뚫는다는 말에 이미 너무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대안이라는 건 결국 천성산 대신 다른 데를 뚫거나 다른 곳을 지나가라는 소리잖아요. 제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 상처를 다른 누군가한테 안길 수가 없어요."

스님이 계속 말씀하신다.

"천성산은 정말 아름다워요. 고속철도 분들도 막상 오셔가지곤 '이 산을 뚫어야 하나' 하고 영 못 내켜 하세요. 그런데, 간혹 도로나 철도의 경제적 가치를 말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과 산과 늪의 가치를 비교하시는데요, 저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천성산이나 천성산 속의 늪만이 귀한 게 아니고, 산이든 늪이든 들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우리 주위에 있는 무수한 존재들이 다 귀해요. 그런데, 어떤 한 존재의 가치는, 단 한사람이라도 이게 정말 귀하구나, 하고 그 숨은 가치를 알아본다면, 그 한사람이 알아본 가치를 어느 누구도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또 그 어떤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그런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는 어떤 사소한 존재라 해도 우리가 그 숨은 가치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해요. 그러니 사소한 존재라고 할 게 아니라, 그 숨은 가치가 드러날 때까지, 아니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죠. 저는 고속철도가 천성산을 뚫지 말고 우회하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천성산이 살겠다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면, 어느 누군가에게 너무도 귀할수 있는 어떤 숨은 가치를 훼손시키라는 말이잖아요."

-김곰치, <발바닥 내 발바닥>, "생명의 대안은 없다" 中, 53-53쪽.

 

 

* 주로 녹색평론에 그간 실린 글들의 모음집인데, 문장이 길단 생각이 들면서도 읽는데에 이상하게 읽는 호흡이 끊기진 않는다. 문장을 길게 쓰면서도 쉬 읽히도록 만드는 것도 하나의 능력인 것 같다. 난 그래도 짧은 문장을 써버릇하며 연습을 해야할 것 같다.

한동안 기억에서 잊혀져가던 새만금과 천성산 얘기를 다시 읽게 되니 좀 부끄럽기도 하고 내 삶의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반추해보는 계기도 되는 것 같다.  KTX는 정말 타지 말아야겠단 생각.

 

*바이오리듬이란 것이 진짜로 존재하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몸상태가 차분하지 못하고 뭔가 불안하며 부웅 떠있을 때가 있는 것 같다. 약속이 많아질 때,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거나 교류가 뜸하던 사람들의 연락이 공교롭게 몰릴 때, 제대로 쉬지 못하고 무리를 좀 했을 때 그런 느낌들이 찾아든다. 좀 쉬려면 주말까지 버텨야 할텐데, 내일 연습모임에 참석해서 기운도 받고 차분함을 찾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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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힘을 아껴봐

대학병원 밖을 나와 소아재활원과 루스채플을 거쳐 청송대나 우중의 노천극장을 지나기도 한다. 폭양 뒤에, 마치 전쟁과 같은 빗속을 지나 맑게 개인 저녁 하늘의 신선함, 혹은 무거운 청어(靑魚)의 은빛과 검정빛의 칼날 같은 비늘, 그것을 연상시키는 구름들과, 그 구름 위에서 빛나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너는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요즈음은 온통 불명확한 것 투성이다. 나의 생, 혹은 문학, 진로, 학업, 관계, 사랑, 미래, 시간, 공간......모두가 알 수 없는 실체들로서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 불명확한 것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어떠한 극복들을 내가 마주서야 할 때 나는 비틀거리는 층계 어디쯤에서 불현듯 위기감을 느낀다. 어떤 확실한 것, 즉 사소한 '확실함'이 하나라도 나에게 다가온다면 나는 요즈음의 전 생애를 그것에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우울해 하곤 하였다. 편지 잘 받았다.

(....)

위대한 정신들이란 순수한 관념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신성에 있을 것이다. 이번 여름은 가장 위험한 경험들로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것이 예감이므로 나는 조금 안심할 수 있고 멀리서 보고 차라리 '기다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산에는 아마 7월 20일경 갈 것 같다. 내려가면 연락하마. 아직도 나는 작은 충격들만으로 충분히 그곳의 추억들을 호출할 수 있다.

1984.2.7

<기형도 산문집>, '편지 13'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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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점수

작년부터 잊을만하면 날아오는 입영영장을 그때그때 연기하는게 귀찮아서 올해 있는 각종 국가고시들을 좀 찾아본적이 있다. 내 주변에 한 다리만 건너면 안 보는 사람이 없는 행시 사시 외시 접수 날짜도 덕분에 알게 되었다. 임고도 있는데 난 졸업을 못 했으므로 패스. 사시 역시 법 관련 수업을 일정 정도 들어야 한다고 하므로 패스.

 

병무행정을 추측해보건데 조만간 또 영장이 날아올 것 같아서, 아직 실제로 영장이 날아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5급 행시를 접수하려던 참이었다. 시험분야도 많던데 아무거나 골라서 신청을 하려는데 웬걸 영어점수를 입력하는 란이 있는 것이다. 그냥 옵션이겠거니 하고 작성완료 버튼을 눌렀더니 넘어가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시험시행공고문을 두번쯤 읽어보니, 행시 5급과 외시는 일정 점수 이상임을 증명하는 영어 성적표가 필요하다고 적혀있었다. 2008.1.1. 이후 시행된 시험 점수만이 유효하다고 한다. 근데 난 몇 년 이후 시행된 시험이든 애당초 그런 시험을 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 참 허무했다. 영어 점수도 없는 내가, 간만에 철저한 준비성으로 꿈에도 없던 행시 접수를 하려고 했더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따로 없다.

 

아직 영장이 나온 것도 아닌데 나는 괜히 또 잠깐 불안해져서 병무청 홈페이지에서 내 정보를 쳐넣고 영장이 나왔는지 확인을 했다. 참 걱정도 팔자다. 국가가 이런 식으로 나를 통제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짜증이 난다.

 

7,9급 시험 접수는 한 달 뒤 2월에-. 이 지긋지긋한 스트레스를 얼른 하루라도 빨리 헤치워버리고 싶다. 엉엉

 

 

덧,

종종 가보는 박노자 쌤 블로그에서 최근 포스팅 중에 무척 공감이 가는 글을 발견했다. 제목이 "믿지 마라, 겁내지 마라, 구걸하지 마라" 이다. 이계삼 선생님 글에는 '슬픔'에 대한 언급이 유독 많았는데, 이번엔 '외로움'이다.

 

진실로 판명되기 전까지는 권력자들이 하는 말은 아마도 거짓말이라고 전제하면서 살면, 일면으로는 편합니다. 온갖 "월드컵 열풍"이니 "노풍"이니 "신종플루 패닉"이니 집단 광기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일면으로는 이게 좀 외로운 생활태도이기도 합니다. 한데, 내면의 외로움이야말로 진실에 제일 근접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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