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집과 사람이 같이 나이먹는 골목

짝꿍이 '사람'소식지에 실은 글인데,

수원 남문일대를 돌아다니며 골목길을 스케치한 글이다.

 

조만간 우리도 행궁동 주민이 된다. ^^*

----------------------------------------------------------------------

 

[화성, 성안 골목길 산책]

집과 사람이 같이 나이 먹는 골목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가 개혁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성 곽을 따라 형성된 동네들은 도시화의 물결에서 비껴간 듯, 골목길들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고, 한평생을 골목에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화성 성곽 안의 동네들은 신안동, 팔달동, 남향동 등 여러 동네들이 법적 행정동인 행궁동으로 묶여 있다. 도심에선 찾아보기 힘든 오래된 골목길이 야트막한 지붕들과 이어져 정겹고, 광교산에서 시작되는 수원천이 자연형 하천으로 가꿔지면서 성 안 동네 한복판을 흐르고 있다. 지동, 영동, 못골시장 등 재래시장도 가까이 있어서, 야채를 파는 할머니들의 노점에서 대장간, 솜 트는 집 등 도심에서는 그다지 쓰임새가 없어 보이는 점포들도 이채롭다.


남창동 등 일부 동네는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수원에서 제일가는 부촌이 있었고, 상업의 중심이었다. 수원 도심이 개발되면서, 상권의 중심이 신도시로 이동하였고, 돈 줄을 따라 사람들도, 공간들도 움직였다.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루는 신도심지역과 달리, 행궁동 일대 골목은 물기 먹은 목화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동네가 공동화되는 것을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매향여중이 학생 수가 줄어 폐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1980년대 전국 문화예술경시대회에서 상을 휩쓸었을 만큼 수원 최고의 학교였던 남창초등학교의 올해 신입생 수는 고작 17명이었다.

소리 없는 벽처럼 조용하기만 했던 성 안 동네에 최근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다. 팔달산과 화성을 끼고 있는 성 안 동네에 예술가들이 속속 찾아들고 있다. 작업실을 내고, 갤러리 등 문화공간과 공방들, 예쁜 카페들이 생겨났다. 행궁이 복원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도 잦다. 특히 한류열풍도 한 몫 해서,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였던 행궁을 보기 위해 일본, 대만, 중국 등지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들 찾고 있다. 동네 사람들도 200년의 화성 역사와 문화예술을 접목하여 역사문화예술 마을로 만들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기 삶의 속도를 유지하며 돌올하지 않게, 골목에 붙박고 살아가는 사람들, 동네사람들과 소통하고자 찾아드는 예술인들, 시장통 사람들의 활기 넘치는 목소리들이 어우러져, 성 안 동네는 지금, 재미있다. 경쟁과 속도, 이윤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우리 사회에서, 성 안의 골목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속삭일 것이다. 그 속삭임을 따라가고자 한다.

신안동 골목길에서 만난 어르신들

성 안 동네들 중에서 골목길의 정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신안동이다. 화서문에서 장안문을 잇는 성곽 아래 동네로, 행궁과 화령전, 올해로 개교 113주년인 신풍초등학교가 이 동네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자 문인으로만 알려진, 그러나 남녀평등을 온 몸으로 실천했고, 그 때문에 당시의 ‘불순한’ 의식으로 불행했던 삶을 살았던 여성운동의 선지자 나혜석(1896~1948)이 나고 자란 곳도 이 동네다.

한 낮 골목길은 조용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시간인데도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은 50대 중반부터 나이든 어르신들뿐이다. 아침 호수가 햇살에 은빛으로 일렁이는 은결처럼 반짝이는 백발의 할머니, 한쪽엔 목발을 한쪽에 검은 비닐봉지를 덜렁덜렁 들고 가는 할머니, 따릉따릉 자전거 경적을 울리며 지나는 할아버지, 시간이 멈춰 선 곳에 노인들만 유유히 흐르듯이 지나다니는 길 같다. 마치 노인들만 사는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어딘가 수상쩍은 동네다. 대문 앞에서 만난 어르신 두 분도 시집와서 여태껏 40년 넘게 살고 있다고 하신다. 이 동네 어르신들은 이사 갈 생각이 없다. “조용하지, 살기 좋지, (동네사람들이랑) 같이 늙어 가는데,,,뭐 하러 이사 가?” 어지간한 일 아니면 이사 갈 일 없으시단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저 집 아들 하는 사업이 안 됐나봐. 자식 도와줄 재산이 있어 뭐가 있어, 어쩌겠어? 그 노인네 집 내놨지” 자식 뒷바라지에 부모의 정년퇴임은 없는가보다. 부모입장에선 그렇지, 참, 어지간한 일이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를 따라, 또는 직장 등 여러 이유로 보금자리를 옮겨 다니는 현대인들의 정주시간에 비하면, 골목길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다들 터줏대감들이다.

 

정말 노인들이 사는 나라인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동사무소를 찾았다.
“이 동네는 마치 노인 분들만 사는 것 같아요? 몇 분이나 살고 계신가요?” “노인 분들이 많이 계시긴 하죠. 잠시만요.” 행정서류를 찾아서 정확한 숫자를 알려주었다. 신안동 주민은 14,218명, 이 중에 65세 노인은 1946명으로 주민의 13%란다. “정말요? 노인 분들이 13%밖에 안돼요.” 뜻밖의 숫자에 당황했다. 동사무소 직원도 통계치가 의외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통계서류를 들여다봤다. “그럼 55세 이상 분들은 얼마나 사시나요?” 3882명이란다. 통계숫자를 믿어야 하나. 내 눈으로 확인한 바로는, 적어도 주민의 절반 이상이 노인들이다. 노인들이어야 했다. 숫자의 배신감이라니. 정부의 인구조사 통계치 말고 뭔가 다른 설명이 필요했다. 동네 부동산을 찾았다. “이 동네에 노인 분들이 많이 사시죠. 어림잡아도 70% 정도는 어르신들일 거에요. 오랜동안 살아온 분들이 많아서 별로 이동도 변화도 없는 곳이에요.” 인구 통계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부동산 사장님의 말에 속이 시원했다. 

다른 골목길로 들어섰다. 등짝에 삶의 고단함까지 얹어 폐휴지를 짊어진 할아버지가 앞서 걸어가고 있다. 저 쪽에선 반쯤 채워진 폐휴지더미를 실은 리어카를 옆에 놓고, 쪼그려 앉아 종이박스를 줍는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하루에 얼마나 모으세요? 리어카 한 대 채우세요?”
“그러면 좋게...나 같은 늙은이들 모다 줍는통에 삼사일을 주워야 리어카 채울 수 있을까나...”
“그렇게 해서 얼마 받으시는데요?”
“5천원도 안 돼. 그래도 집에 있으면 뭐해. 종이박스, 신문 모으면 반찬값은 벌잖아.”
소일꺼리로 하신다고 하는데, 몇몇 분의 옷폼새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동네 어르신들은 손주들 안 보면 다들 폐휴지를 주워 용돈이라도 벌어요.” 동행한 부동산 사장님이 귀띔해줬다.
대낮 골목길을 차지한 어르신들을 도심의 어느 곳에서 볼 수 있겠는가.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주거문화에서, 이런 살풍경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인가보다. 거주민의 절반 이상이 노인일 거란 착각이 든 것은.

 

사람과 집이 같이 나이를 먹는 골목

또 다른 골목길로 접어드니 ‘담장조심’이란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다. 보기엔 멀쩡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부분 벽돌로 담장을 새로 해 넣었다. 친절한 담장을 지나 걷다보니 코끝이 간질간질하다. 라일락향기가 골목 저쪽에서부터 은은하게 퍼진다. 담장 바깥에 심어놓은 라일락나무는 이 집 사람에겐, 빨래건조대인 모양이다. 겨울옷들을 라일락가지에 걸어 햇볕에 살균한다. 볕 좋은 날 섬유유연제 대신에 자연의 라일락 향으로 겨우내 눅은 내를 털어내는 옷 주인이 불현듯 궁금해졌다. 

둘이서는 나란히 걸어갈 수 없는 또 다른 골목길과 만났다. 참 예쁜 골목이다. 사과궤짝에 심은 상추며 파, 봄꽃들이 골목가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분홍색 작은 자전거를 보니, 이 집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는가 보다. 한 뼘 마당이라도 있는 집은 꽃나무 심고, 사철나무 심고, 자투리땅을 만들어 상추며 파를 심어놓았다. 그것도 부족한 듯, 대문 위 공간에 화분들을 놓아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그 마음이 예술이다, 싶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주는 집주인의 선물 같아, 절로 흐뭇해지는 골목이다.

골목에는 사람의 나이로 치면 반평생 이상을 살아온 집들이 제 자리를 찾아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있다. 집 대들보보다 굵은 오동나무가 마당 한 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있어서, 그 집의 나이를 대충 알 것 같다. 담벼락 곳곳에 금이 간 것이 그 집 주인의 굵게 패인 주름살을 닮았다. 신안동 골목길은 사람과 집이 같이 나이를 먹는 동네다.

 

나지막한 단층짜리 집들이 골목골목에 들어앉아 60~70년대의 마을 풍경을 유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문화재 곁에 있어서 성 안의 동네들은 맘대로 건물을 올릴 수도 없고, 집 보수할라 쳐도 절차가 까다롭다. 다행이겠지만, 성안 사람들에겐 화성이란 문화재가 ‘애물단지’이기도 하다. 화홍문에서 연무대, 창룡문 일대 성 안 동네 일부엔 도시가스도 안 들어가고, 낡은 집을 보수하기도 어려워 겨울 난방비만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수원시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성 안의 개발계획을 잡았는데, 예산 난으로 사실상 백지화됐다. 보상받고 떠날 날만 기다리며 삶의 불편함을 감수했던 주민들은 시청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화성이 애물단지가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지방정부의 정책이 ‘애물단지’다.

 

나혜석의 생가터를 만나다

당당한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뜨거운 가슴의 사람, 나혜석을 만날 수 있는 곳도 신안동 골목이다. 반계길 골목은 소설 「경희」등 여성주의가 투영된 문학작품과 「나부」「화녕전 작약」「자화상」등의 그림을 남겼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자 문인인 나혜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여성의 삶을 옥죄는 낡은 틀을 향해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였고, 그로인해 평생 불운한 삶을 살았던 페미니스트 나혜석이다. 
지나가는 어르신에게 나혜석 생가를 물으니 “그게 누군데? 여기서 얼마 안 살았나보네. 첨 들어보는 이름인데...”하신다. 동사무소에서 확인했더니, 신안동 반계길 골목, 동사무소 옆길로 해서 50미터 들어가면 가건물의 야쿠르트대리점이 있는데, 그곳이란다. 나혜석이 나고 자란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어떠한 이정표도 없다. 나혜석 생가터 비만 신안동사무소 건너편 엉뚱한 곳에 세워져 있다.

“조선 남성의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이 어이한 미개의 부도덕이냐”(『이혼고백서』,1934)라며 사회의 낡은 인습을 통렬히 비판했고,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온갖 사회적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사남매의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랴.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라.”(『신생활에 들면서』, 1935)라며 부조리한 사회 앞에서 당당했던 멋진 사람이 여기 살았다.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온’ 나혜석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불행하다,는 생각이 생가터 앞에서 들었다. “요컨대 제대로 된 나혜석의 연보 하나도 아직 가지지 못한 채 우리는 풍문 속에서만, 무책임한 농담으로만 나혜석을 이야기해왔던 것이다.” (이상경, 『인간으로 살고 싶다』, p43)라고 말할 정도로, 나혜석의 사생활에 대한 온갖 풍문만 있을 뿐, 인간으로서, 문화예술인으로서 나혜석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한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나혜석의 족적으로 볼 때 생가터가 저렇게 방치돼 있다는 사실이 참, 씁쓸하다. 

다행인 것은 수원지역 예술인들과 갤러리들이 올해 처음으로 나혜석생가거리미술제를 오는 6월30일부터 7월5일까지 펼친다. 생가터를 비롯해 성안 골목골목에서 인간 나혜석을 재조명한다. 이곳 사람들도 나혜석이란 빛나는 존재를 알게 되겠지.

 

광장은 삭막하다

골목길을 걷다 보니, 이 동네엔 유난히 점집이 많다. 90년대 수원천이 복개되면서 천변을 따라 즐비했던 점집들이 안동네로 옮겨온 것이다. 골목길들을 돌아 나오니, 행궁 광장에 다다랐다. 작년에 지어진 광장은 팔달산을 품을 정도로 넓고, 또 넓다. 아니, 넓기만 하다. 사람이 앉아 쉴 수 있는 그늘도, 초록의 식물들도 찾아보니 힘드니, 그야말로 삭막하기만 하다. 광장이란 말 그대로 사람들이 모이는 너른 마당인데, 어쩜 저리 만들어놓았을까, 만든 사람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행궁 광장의 썰렁함은 바로 옆에 있는 골목과 무관하지 않다. 수원시가 행궁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광장 옆 신풍초등학교 맞은편 골목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미 보상이 끝나 사람들은 떠났고, 철거예정통지 쪽지가 담벼락이며 대문이며 곳곳에 나붙어 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버려진 자개장롱을 보니, 이 집 주인도 참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살았을 거라 짐작이 간다. 그래도 사람이 떠난 마당에선 개나리며 목련꽃이 피어났고, 연둣빛 새 잎들이 올라오고 있다. 버려진 세간들이 널브러져 있는 골목길을 따라 가다가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순간, 무인도에서 사람을 만났듯 반가웠다. 모두가 떠난 골목 한 귀퉁이에서 아주머니는 뭔가를 열심히 고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재봉질 하는 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 건물에 재봉공장이 있었나 봐요?” “지하에 재봉질 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나가면서 실을 죄다 버렸네. 거의 새 실인데, 필요하면 주워가요.” 이게 웬 횡재냐 싶어 아주머니랑 같이 색색의 재봉실들을 고르며 여기 오래 사셨냐고 물었다. “시집와서부터 살았으니 30년은 넘었네...” 하긴, 만나는 동네 분들마다 다들 40년 이상은 사셨다고 하니. 내년쯤이면 이곳엔 음식점들과 관광상품점이 들어서 있을 것이다. 골목의 수난이 더 이상은 없어야 할 텐데, 휑한 철거예정 골목길을 돌아 나오며 허전한 마음 한 자락을 그 골목에 두었다. 

 

골목길 산책을 마치며

이틀 동안의 신안동 골목길 산책을 마치면서, 집이 사람을 닮고, 사람이 골목을 닮는 어르신들의 터전을 다시 그려봤다. 옆집 이사 가는 줄로 모른 채 살고 있는 아파트생활에서, 골목에서 만나는 처음 보는 어르신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내 모습을 봤다. 골목이 사람들 간의 거리란 생각이 들었다. 편도 2차선, 3차선, 또는 8차선까지 쭉쭉 뻗은 큰 길에 들어서 있는 아파트와 한 사람 겨우 지날 만큼의 비좁은 골목이 있는 집들, 그 사이에서 사람들 간의 거리를 느꼈다.

 

어스름 해질녘 광장을 가로질러 골목길로 들어서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려본다. 일손도 놓고, 집 지키며, 손주들 챙기며 또 누군가의 가족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어르신들이 꿈 많던 그 어느 때의 자신과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동네 어르신들의 자서전을 그림동화책으로 같이 만들어봐야겠다. 어르신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성 안 동네 골목길. 대문 열면 친구네 집이 들여다보이던 그 골목에선 많은 일들이 있었을 거다. 굵게 패인 주름 하나하나에 아픔과 보람이 새겨져 있을 거다. 그 골목에서 시작된 삶을, 자기 자신에게, 자식들에게, 손주들에게, 그리고 개발의 삽날에게 이야기해주면 좋을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