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from 2007/01/09 00:05

나는 파이프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왜 파이프를 그리고 있었을까?

파이프의 광택때문이었다.

파이프는, 3cm 정도의 부리 부분이 상아로 되어있었고,

13cm 정도의 전체적인 몸통부분은 나무로 되어있었으며,

몸통과 부리가 연결된 부분은 2cm 정도의 무른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무르고 두툼한 은에는

용과 알수 없는 식물의 줄기 혹은 얇은 잎사귀들이 화려하게 새겨져있었지만

오랫동안 닦이지 않아 전체적으로 지저분한 어두운 회색이 되어버려 실제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세가지 소재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각기 다른 형식으로 반사하고 또 흡수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둔탁한 흐름이 일관성있게 파이프를 감싸고 있었다.

오후 3시의 햇빛은, 드라마틱하게 강한 음영을 파이프 아래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 스케치북, 조금 보충해서 말하자면,

독일의 큰 화방에서 산 A4 크기의 Esquisse 프랑스제 스케치북에는

실제크기와 거의 흡사한 크기의 파이프가

파버카스텔에서 나온 6B 1.5cm짜리 흑연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파이프는 3cm 정도의 부리 부분이 상아처럼 그려져있었고,

13cm 정도의 전체적인 몸통부분이 나무처럼 그려져있었고,

몸통과 부리가 연결된 부분은 2cm 정도의 무른 은띠처럼 그려져 있었다.

은띠위에 강한 음영의 대비를 통해 긴 용과, 서로 연결된 긴 줄기들, 잎사귀들이 그려져있었다.

나는 그 위에 연필선을 더 그어 은띠를 좀 바래보이도록 할 예정이었다.

지우개로 몇몇 부분을 찍어내어 밝은 부분을 더 밝게 보이도록 해서

나는 드라마틱하게 강한 빛과 어둠의 대비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손님이 왔어요.]

그가 들어와 내 그림을 5초간 바라보고는, 혹은 보는 것처럼 눈동자와 어깨를 그림쪽으로 하고는

창가로 가서 파이프를 무심코 들어올렸다.

[예쁜 파이프에요.]

그는 파이프를 원래 있던 자리이거나 혹은 다른 자리에

원래 차지하고 있던 공간의 형태대로, 혹은 전혀 다른 공간에 배치했다.

나는 그 동일성, 혹은 차이에 아주 집중해서 정신이 아찔했다.

 

그녀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발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나가 주세요.]

그녀는 그에게 명령했고, 그는 파이프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그녀는 8cm정도 높이에

바닥에 닿는 뒷굽이 직경 5mm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보라색 하이힐을 신고

몸에 잘 붙는 반짝이는 보라색 스타킹에 목까지 올라오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그녀와 아주 잘 어울렸지만,

그녀가 움직일때마다 혹은 그녀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때마다

그녀자신과 그녀의 옷차림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혹은 너무 잘 맞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 동일성, 혹은 차이에 집중하게 되어 정신이 아찔해졌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해주세요.]

그녀는 성급하게 옷을 벗었다.

옷을 벗는 과정은 아주 간단해서,

목부터 엉덩이의 갈라지는 곳까지 연결된 지퍼를 내리자 원피스가 벗겨졌고

보라색 브래지어를 풀자 밋밋한 가슴이 나타났고

스타킹을 벗자 성기를 조이고 있던 작은 보라색 팬티가 나타났고

팬티를 벗자 쪼그라들어있던 둥근 페니스와 음낭이 나타났다.

그녀는 스타킹과 팬티를 벗은 후에 다시 하이힐을 신었다.

그리고 창가에 가서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그녀를 세워둔 채 그녀가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 그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기분이 상한 듯 했다.

그러나 옷을 벗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옷을 벗으려 했지만, 입은 것이라고는 티셔츠와 면바지 뿐이어서

오래 걸리는데 실패했다.

방안은 춥지는 않았지만 따듯하지도 않아서 그의 페니스와 음낭도 역시 쪼그라들었다.

나는 그를 그녀와 내 스케치북의 정중간에 세웠다.

자세는 상관없었다.

공간과 거리가 중요했다.

 

[그리믈 그뤼눈 동안, 브레이두르느그튼 으유기를 흐스여 .]

그녀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내게 명령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녀가 있던 공간은

그녀로부터 벗어나 어딘가에 공룡의 발자국 화석처럼 텅 빈채로 남겨져버렸다.

나는 그 화석으로부터 정신을 뗄 수가 없었지만 화석은 과거의 어느 곳으로 이미 이동되어있었다.

 

나는 새 8B 연필을 다듬었다.

연필을 다듬으면서 블레이드러너같은 이야기를 생각해 내야 했다.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녀의 목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남자가 있었어. 그는 인형을 만드는 사람이었지. 인형은 나무와 실과 쇠조각, 유리알, 털실뭉치, 각종 천, 솜뭉치, 종이로 만들어졌어. 그의 인형들은 주로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들의 생일, 기념일 등을 무마하기 위해 선물되어 졌지. ]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가 비트는 공간에 의해 그녀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다가 다시 이상한 형태로 맞추어졌다.

나는 그녀의 목 아래에 그녀의 눈을 그리고 눈 옆에는 유방과 성기를 그려넣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그가 여느때처럼 인형을 만들고 있을 때,

그가 예전에 만들었던 한 여자인형이 그를 찾아왔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심장에 무언가가 꽂인 것 같아요. 이대로는 더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는 인형의 웃옷을 벗기고 하얀 천 안에 하얀 솜을 가득넣어 만든 가슴을

날카로운 면도날로 갈랐어.

그녀가 몸을 구부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넣어진 철사조각의 끝이 그녀 심장을 찌르고 있었지.

그는 철사를 바로 넣고 목부분의 철사와 단단하게 연결해서

철사가 다시 그녀의 심장을 찌르지 않도록 만들었어.

[자, 이제 일어나봐. 아프지 않을거야.]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어. 왜일까? 그는 알 수가 없었지.

원래 들어있던 솜들은 조금도 빼놓지 않고 다 넣었고

가슴의 상처도 감쪽같이 하얀실로 잘 꼬맸는데,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어.

유리알로 된 두 눈은 변함없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지.

 

그녀는 이제 파이프가 되어있었다.

파이프는 그녀가 되어 그녀를 입에 물고 보라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는 쉴새없이 움직여대서 나는 그를 그릴 수가 없었지만,

어느새 그는 그려져 있었다.

 

또 다른 어느날, 다른 인형이 그를 찾아왔어.

눈이 뜯겨져 나가고 없었지.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아요. 그녀가 내 눈을 뜯어버렸어요. 그녀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내 눈을 돌려주세요.]

그는 가장 근사한 보라색 유리눈알을 찾아내어

그의 눈에 꼭 맞게 다듬고 그가 원하면 감을 수 있도록 눈꺼풀도 만들어 주었어.

그러나 그역시 수술이 끝난 뒤 다시 일어나지 않았어.

 

그녀는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혹은 파이프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연필을 내려놓고 그녀 혹은 파이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내일 다시 오겠어요.]

그녀는 혹은 파이프는 그녀가 옷을 벗은 순서를 거꾸로 짚어가며 옷을 입고,

발자국 소리를 내며 들어온 문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너무나 서글퍼서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그의 어깨를 안았다.

그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따듯하고 부드럽고 단단한 석탄더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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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9 00:05 2007/01/09 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