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from 우울 2009/12/30 17:17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김상의 아버지께서 손수 쓰신 편지를 김상이 아닌, "내게" 보내셨다.

 

칠순 생신에 우리 집에서 조촐하게 가족 잔치를 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그냥 집에 김상 가족들이 모인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지친 상태였는데

김상 부모님들은 아무것도 준비 못한데다 어쩔 줄 몰라하기만 하는 우리에게 꽤나 서운하셨다고 하신다.

기대가 있으셨을 거다.

보통 생신도 아니고 칠순인데.

나는 그저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리 식구들 생일에 얼굴본게 언젠지 기억도 안난다.

 

내가 생각해도 정상적인 시각에서 우리가 심했다.

나 혼자 음식장만 못한다고,

음식은 김상 어머니가 그 먼 데서 직접 해서 전부 가져오셨다.

딱히 뭘해야 할지 몰라서 우리는 그냥 설겆이랑 청소만 적당히 했다.

 

김상과 함께 산 지, 곧 10년이 된다.  

지겨울 정도로 많은, 결혼에 대한 질문과 질책과 요구, 어이없는 조언들을 다 참아내고

두 사람은 잘 살고 있지만

진짜 전투(?)는 이제부터인가보다.

 

10년이나 같이 살아왔고, 계속 속이면서 사는 게 뭔가 아니다 싶어

지난 여름, 김상 쪽 식구들에게 우리가 함께 산다는 걸 정식으로 알리기로 했다.

 

이제 겨우 6개월도 안되었는데,

결혼 이야기는 내가 졸업할 때까지 안하기로 약속까지 받았는데

벌써부터 나는 정말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내 가족과도 살가운 정같은 건 느껴본 적이 없는데...

편지를 쓰셨으니 답장도 원하실거고 원하는 답장과 이후의 행동들에는 정답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정답형의 인간이 아니다.

 

김상도 그런 살가운 타입이 아니니까, 그 아버지께서는 여자인 내게 그런 살가움을 원하신다.

가족끼리 나누는 그 알 수 없는 것들.

우리가 결혼안하는게 자신들의 무능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양가가 마찬가지다.

아니라는 걸 설명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결혼하는 것 말고는 그게 그들 잘못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없다.

죄송하다, 우리가 너무 몰라서 그랬다, 담엔 더 잘하겠다...그런 걸 써야겠지.

그런 게 진심이어야 겠지.

 

그런 게 뭔지 몰라서, 너무 쉽게 생각했다.

잘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지내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내년이면 결혼 이야기도 나올 거고...

당장 이 편지에 내가 해야하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아무 것도 안해버리는게 가장 현명하게 사람을 길들이는 방법이겠지만,

그럴 걸 왜 굳이 알렸을까.

 

김상과 이야기를 해봐야 겠지만, 내가 어떻게 할 건지 마음을 먹어야 할텐데.

내려놓을 수 없는 돌덩이를 인 기분이다.

 

10년. 참 오래 같이 살았는데.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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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17:17 2009/12/30 1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