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먹는 책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무진장 술을 마셔댔다. 마셔댔는데, 이게 갈수록 양이 늘어갔다. 때 놓쳐 시내로 나가는 퇴근버스를 못타면 그냥 기숙사에 처박혀 술을 마셨다. 기숙사에는 붙박이 장이 있었는데, 이 장 맨 아래 서랍을 열면 허당이다. 깊숙하고 널직한 공간이 있었다. 여기에 두꺼비 한 박스를 넣어놓았다. 40병짜리 박스를 그 안에 낑궈두고서 허구헌 날 소주병을 깐 거다.
그런데 이상한 버릇이 들었다. 뭐냐 하면 소주 박스에 소주가 10병 정도 남으면 그 때부터 갑자기 불안해진다는 거다. 일단 확인된 잔량이 10병을 넘지 않으면 3km정도 회사 밖으로 나가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수퍼마켓에 들려 바리바리 소주를 사들고 들어와 빈 칸을 꼭꼭 채워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재고정리를 하는 날이면 소주박스를 채우고도 남는 양만큼의 소주를 사온다. 박스 채우고난 후 그 뿌듯한 맘에 또 두꺼비 몇 마리 날린다.
기숙사 방구석에서 혼자 술마시는 날도 꽤 됐다. 일주일에 삼 사일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혼자 무슨 맛으로 술을 마시느냐고 하는데 그게 또 쏠쏠한 맛이 있다. 혼자 술을 마시다보면 사춘기의 감수성을 수시로 느낄 수 있다. 가끔은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상당히 위험하다. 행인도 그 증상때문에 한 번 골로 갈 뻔했으니까... 어쨌든 그런 최악의 경우만 아니라면 혼자 술마시기도 거 괜찮은 소일거리다.
하긴 아무짓도 하지 않고 방구석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왠지 처량하다. 이 처량함을 느끼지 않는 방법이 있었으니, 다름 아니라 책을 보면서 술을 마시는 거다. 시집을 펼쳐놓고(당시 박노해의 시집이 걸레가 되도록 읽고 있었다) 시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소주 한 컵(!)을 들이킨다. 아... 그 순간 그 시의 낱말 하나 하나가 나름의 의미로 승화되면서 살갗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격정적인 시를 읽을 때는 격정적으로, 나붓한 시를 읽을 때는 나붓하게... 그렇게 시가 내 혈관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고 온 몸이 시상으로 충족되었을 때면.... 취해서 뻗어버린다...
시도 그렇지만 소설 역시 그렇다. 그 때만 해도 소설책에 푹 빠졌던 행인이라 소설이라면 이것 저것 닥치는대로 읽어제꼈다. 특히 역사 대하소설류를 많이 읽었었다. 이렇게 읽었던 소설 중에 가장 많은 술을 빨아마신 것은 뭐니뭐니해도 황석영의 장길산이다.
행인이 장길산에게 술을 멕이는 순서는 이러하다. 일단 붙박이 장의 문을 열고 맨 아래 서랍을 뽑아낸다. 다음으로 그 안에 고이 모셔둔 소주 박스에서 두꺼비 두어마리를 꺼낸다. 물론 기숙사 방바닥에는 저녁시간에 식당에서 준비해온 김치와 안주거리가 이것 저것 놓여있다. 방정리를 사뿐하게 한 후 장길산 한 권을 꺼낸다. 베개를 한쪽 옆구리에 받친 후 모로 드러누워 책을 펼친다. 그리고 컵(!)에다 두꺼비의 체액을 쏟아 붓는다. 책장을 넘기면서 한모금 두모금,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면 와장창...
묘옥이와 길산이가 같이보낸 큰 굿판이 있던 그날 밤의 장면에서 행인은 두꺼비 한마리를 낼름 집어먹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란 말인가? 아름다운 동시에 슬픈 장면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러나 이루고싶어하는 두 정인의 애틋함이 묻어나는 묘사. 사실 까놓고 이야기하면 장길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야한 장면이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야하다는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참형을 기다리고 있던 장길산이 우대용과 함께 탈옥을 하는 장면에서는 그 박진감과 통쾌함에 또 두꺼비 한 마리가 비명횡사를 한다. 갑송이의 처 도화가 시어머니를 교살하고 난 후 갑송이가 이를 알고 도화를 죽이고 승려가 되는 대목에서는 참으로 숨막히는 그런 갑갑함을 느끼면서 또 두꺼비 한마리로 갑갑증을 달랬다.
마감동은 두 차례에 걸쳐 폭주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김식과의 대결에서 장쾌한 승리를 거두었을 때, 두꺼비 두어마리 그냥 승천했다. 최형기와의 대결에서 포도장 최형기에게 공포를 안겨주면서 숨져갔을 때 가슴을 펑펑 치면서 애꿎은 두꺼비들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최형기는 나중에 장길산에게 한 큐에 끝장이 나는데, 이상하게 그 대목에서는 별로 술이 땡기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행인이 가장 많은 두꺼비를 장사치뤘던 대목은 검계의 혈당 산지니가 일당을 살리기 위해 참수를 자청한 후, 석산진의 누이이자 남모르는 연정을 간직해왔던 석씨가 궁궐을 바라보며 목을 매던 장면이었다. 이 대목은 보고 또 봐도 눈물이 앞을 가리고 한숨이 푹푹 새어나온다. 그 때도 그렇고 지금 봐도 그렇다. 산지니가 참수를 당한 후에 석씨가 느끼는 그 한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어찌 말로 표현하랴. 답답한 마음에 두꺼비 한 마리 잡고, 덮어놓은 책(이 장면이 7권 마지막 장면이었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쉬다가 다시 그 대목을 펼쳐놓고 두꺼비를 닥달하며 또 읽어내려가다가 속이 터질듯하여 달기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두꺼비만 또 집어 올렸다.
구월산이 포토되고 변란을 도모했던 자들이 다 죽은 후 사망한 이경순의 아들을 데리고 온 묘옥과 길산의 마지막 만남의 장에서는 찬 바람 부는 소설의 배경만큼이나 찬바람이 휭휭 가슴을 쓸고 지나가는 느낌으로 두꺼비를 마셨다. 그런 애틋한 사랑. 비련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사랑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하다가 오늘날 요모양 요꼴이 된 듯 싶기도하다. 암튼 아들을 길산에게 맡기고 삼보귀의의 길로 돌아서는 묘옥의 모습에서, 이승에서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길산에게 안아달라 말하던 묘옥의 모습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시린 사랑을 느껴보았다. 그럴 때는 또 가차없이 두꺼비다...
장길산이 퍼마신 두꺼비만도 족히 서너박스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거 말고도 두꺼비와 친교를 거듭한 소설, 시 등등 꽤 많았던 것 같다. 이젠 장길산을 봐도 아마 술을 마시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대목 대목, 장면 장면을 볼 때마다 두꺼비들의 혼령이 살아 돌아와 그 때의 그 기분을 다시 살려놓을 것 같다. 오호... 두꺼비들이여...
가을 바람결에 술 냄새가 나네요. 허이허이..제가 잘 모르는 세계 중 하나가 술세계인데..두꺼비와 놀았던 이야기는 놀랍다는 말 밖에...혼자서...참 궁금합니다.
가을바람은 원래 술을 부르는 바람입니다. 모든 것을 수확하는 계절이니 한 잔 하고싶은 마음이 솔솔 나게 되죠. 쏘주는 좀 힘들겠지만 와인 한 잔 하면서 시를 읽는 것도 괜찮죠. 흠... 넘 부르주아틱한 건가...
그럼 와인은 드시나요? 드시나 보네...그렇구나...와인 중엔 싼놈도 있던데..그거면 좀 덜 부르주아틱하지 않을까요. ^^ 술이 좋은 면도 있나 봅니다. 그런데...그걸 모르니..참..
슈아/ 와인도 안마신답니다. *^^* 알콜이 조금이라도 희석되어 있는 음료는 일체 마시질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술이 입에 닿으면 그 순간부터 절대로 중단이 되질 않거든요. 아예 마시지 않는 것이 낫다는 거죠. 와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문외한이랍니다. 참고로 보졸레 누보 같은 와인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별로 맛이 없는 와인이거든요. 왜 그게 그렇게 인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양주중에서도 왜 있죠. 발렌타인 시리즈. 제가 마셔본 양주 중에서는 중급 정도의 맛이었답니다. 저는 올드파파를 좋아했죠. ㅋㅋㅋ 술생각 나네~~
두꺼비..ㅋㅎㅎㅎㅎ
소설이나 시 평할 때 소주 한 박스, 다섯박스 이런 식으로 평하면 참...술 안 마시는 제 친구가 섭섭해 하겠지만..ㅎㅎㅎ
핫~! bopool님 납시었군요. 백무산의 시를 읽을 때,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는 시 중에서도 두꺼비를 가장 많이 삼킨 시였습죠... ㅋㅋㅋ 지금은 내용도 기억나지 않지만서두... 아마 술퍼먹으면서 읽어서 머리 속에 남질 않았나봐요... ㅠㅠ
ㅋㅎㅎㅎ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를 저도 함 읽어보고 잊어버려봤음 좋겠네요. 술자리에서 느끼는 기분에 따라 맛이 변하는 '술'이란,
참,, 신기한 두꺼비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