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얘기

가난한 여인, 재벌 2세 남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러나 원래 현실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드라마에서는 뻔질나게 이루어진다. 현실세계에서는 만날래야 만날 수도 없고(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만) 둘이 첫눈에 기냥 콩깍지가 엉겨붙는 일도 없고(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만) 제대로 한 쌍이 되는 일도 없다(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만).

 

이 두 연인은 온갖 간난신고를 다 겪는다. 특히 남자 집의 부모가 극심한 반대를 한다. 이미 정혼자도 있다. 정혼자는 원치 않는 삼각관계에서 악역을 맡는다. 가난한 여인과 재벌 후계자와의 사

이를 갈라놓기 위해 모는 계략을 동원하고 때때로 물리력도 동원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도와주는 사람이라고는 마음 통하는 친구나 뭐 그런 정도다.

 

결정적인 순간, 재벌은 아들을 앞에 놓고 헤어지라고 강요한다. 일장연설을 늘어 놓는다. 뻔한 얘기지만 아들은 반항한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고 이를 보는 아버지는 뚜껑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매우 격렬하게 아들을 꾸짖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뒷목을 잡거나 머리를 잡으면서 쓰러진다. 피가 갑작스레 몰려 혈압 급상승, 그래서 쓰러지는 거다. 뻔한 얘기다.



국가정체성의 수호신 김용갑이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일장연설을 하다가 갑자기 머리를 만지며 쓰러졌다. 왼손을 이마에 올리며 표정을 찡그리는 순간 털석하고 연설대 뒤로 주저 앉았다. 그 장면을  보면서 든 두 가지 생각. 하나는 "저 노인네 저러다 일나는 거 아녀?"하는 걱정(?)과 다른 하나는 맨날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 뻔한 얘기. 달랑 그거였다.

오오... 국가정체성의 수호신이시여...(연합뉴스)

 

첨엔 놀랐다가 그 짧은 놀람의 순간이 지나가자마자 뻔한 드라마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혼자 비실비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 그리 똑같던지. 주변에서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몰려드는 그 장면까지 텔레비전에 나오던 그 장면들과 아주 흡사했다. 이게 국회의 실황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한나라극단의 그 유명한 불후의 명작 "환생 경제"의 후속편이라고 착각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수 차에 걸쳐 이야기한 것이지만 현재 국가보안법 폐지되면 나라가 절단난다고 목청높이시는 양반들 거의 대부분이 낼 모레 밥숟가락 놓으실 분들이다. 그 나이 드시고도 혈기를 못참고 여의도 한 복판에서 자기 배로 칼날의 성능을 시험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정양이나 잘 하시다가 임종을 맞으실 일이다. 특히 혈압 있으신 어르신들 화 나시더라도 꾹꾹 눌러참으시는 것이 좋다.

 

물론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여의도를 채웠던 만 명이 넘는 애국지사 여러 어르신들 중에도 국가보안법 이름만 듣고 오신 분들 태반이다. 아마 그 법 이름이 '정권보안법'이었으면 절대로 그 자리에 나오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분들은 오래 오래 사시면서 잘못된 것들이 하나하나 고쳐지는 것을 보고 가셔야 한다. 그러지 못한채 저승에 가셔서야 몇몇 돌탱이들과 찌라시에 속아 그 땡볕에 피할 나무그늘 하나 없는 여의도 대로변에서 생 난리를 쳤다는 것을 아시게 되면 그 한이 오죽 깊겠는가?

 

뻔한 얘기지만 드라마에서는 노인네가 마음을 돌리면 그 순간 사건이 해결된다. 가난하고 근본도 모르는 여인을 집안에 들여놨다가는 집안이 풍비박산 날 것처럼 설레발이 치다가 기어이 뒷골이 땡겨 쓰러지기까지 하지만, 주인공 남자의 부모가 맘을 돌리면 그 순간 해피엔딩이 되는 것이다. 집안 다 쓰러질 것 같았지만 결과는 해피엔딩. 결국 뒷골까지 잡고 기절초풍해버린 아버지의 심려는 오버 그 자체였고 집안 멀쩡히 잘 살고, 주인공들 행복하게 되고 보는 시청자들 즐거워한다. 한 큐에 돗대 풀고 쿠션 돌리고 가락까지 나버리는 거다. 그리고 행복하게 외친다. "아줌마 났어요~~!"

 

김용갑 아자씨도 뒷골 한 번 잡았으니 이제 맘을 돌려야한다. 뻔한 얘기는 그렇게 끝나야 하는 거다. 그렇지 않고 끝끝내 뒷골 잡은 효과도 없이 죽으나 사나 안 된다고 하면 여주인공은 백혈병으로 죽고 아들은 가업을 버리고 사업은 망하는 거다. 내내 뻔한 얘기만 하니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 같지? 그네공주를 중심으로 하는 한나라당과 노무현의 진두지휘를 받은 열우당이 대충 국가보안법 쇼부치고 얼렁뚱땅 넘어가면 그 순간 용갑아주바이 '팽' 당하게 된다. 그럼 그 때는 뒷골 한 번 땡기는 걸로 이야기 끝나지 않을 거다.

 

뻔한 얘기로 끝낼 수 있는데, 꼭 병풍 뒤에서 향내를 맡아야 정신을 차리는 부류가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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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5 21:24 2004/09/2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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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티븐 스필버그가 김용갑의 연기에 격찬을 보냈다는 뉴스와 일본에서 욘사마 이후 한류열풍의 새로운 주자로 갑사마가 떴다는 뉴스가 도착했군요... 쫍...

  2. 허.. 부은 다리 매만지고 있는 사이 이런 명장면이.

  3. 이러나/ ㅋㅋㅋ 다리 부은 것은 다 낳았나요??? 튼튼씩씩 이러나의 도보여행기록 잘 보고 있어요~~~ *^^*

  4. 아직요. 며칠 좀 걸었다고 이렇다니..청춘이 쑥스럽다.
    행인밖에 없다니까요. 흑흑.

  5. 이런 픽션들은 현실을 판타지로 만들곤 하죠.... ^^;

  6. vahn/ 그게 판타지를 현실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죠. ㅋㅋㅋ

  7. 꿈꾸는자에게는 문제가 없어요- -+ 오바애국자의 비극일 뿐...세상을 보는 눈이 다양하다는 게 신기하고 고마울 뿐...

  8. rivermi/ 다양한 세상읽기는 삶을 풍요롭게 하죠. 그런데 자기의 다양성은 존중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남들에게는 다양하지 말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죠. 오바애국자의 비극이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9. ^^마자요~ 살아온 세월만큼 견고함도 더 단단해지는듯...그가 보는 세상과 다르다는게..신기하다는..모..갑자기 모 그리 심각해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