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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한 운명

며칠 전 하버드 서림 (정식 명칭 : Harvard Book Store)에서 제프리 삭스 (Jeffrey Sachs)의 신간 (The End of Poverty: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Time) 출판 기념 강연이 있다는 공지를 보았다. 오호. 그가 누구던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자문을 맡으며 경제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빈곤 문제,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졌던 자 아니던가. 뭐 그의 저서를 읽어본 적이야 없지만, 일단 내가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가 나쁜 듯이건 좋은 뜻이건 경제학자로서 굉장히 남다르다는 증거. 하여, 오늘 저녁에 거기에 갔었다.

 

사진기를 깜빡해서 현장의 분위기를 전할 수야 없지만, 미국 생활 어언 10개월만에 그런 산소 부족 강의는 처음이었다. 300석도 넘어보이는 홀에 좌석이 꽉 찼음은 물론 바닥에도 어디 앉을 틈이 없었다. 겨우 바닥에 삐집고 앉아서 한 시간 반동안 목과 허리의 통증을 감내하며 강의를 들어야 했는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분위기는 젼형적인 부흥회 분위기.  아저씨, 미모는 남다르지 않지만, 목소리가 예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한석규 식 낮은 목소리... 정확한 발음과 느리고 강한 발성... (크자 님도 저녁 내내 목소리 칭찬을 하셨더랬다)...  

 

근데 말이다........

시작은 정말 좋았다.

 

극단적 빈곤 (특히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지역)과 관련한 본인의 체험 (유엔 개발 기구 등에서 일했고, 특히 Milleneum Development Goal 개발의 당사자기이도 하니까), 그리고 너무나 심금을 울리는 자료 사진들....  미국인이 1인당 보건의료에 6천불을 지불하는데 비해 케냐는 겨우 8불을 지불할 뿐이라면서 보여주는 사진. 한 침대에 엄마 세 명과 아이 세명이 걸터 앉아 있는 모습... 평범한 인간의 심성이라면, 누가 가슴이 아프지 않고, 누가 죄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많은 국제 기구의  공식 보고서들, 경제학 교과서에는 이렇듯 말도 안 되는 처참한 아프리카의 현실이 단지 "부패" 때문이라고 진단한단다. 부패는 이 땅 어디에도 있고, 경제 발전으로 성가를 드높이는 아시아에도 특히 만연해 있다. 과연 부패가 이들 빈곤의 원인일까? 제프리 삭스는 그렇게 물었다. 부패가 아프리카 가뭄의 원인이냐고, 부패가 말라리아의 원인이냐고....

 

그래서 나는 기대했다. 무엇이 그들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지 모범답안을 함 들어보자....

 

 



첫째, 아프리카는 아시아가 1960년대에 경험한 녹색혁명 (혁신적인 식량생산 증대)을 경험하지 못했다. 강수 분포와 대유량의 하천이 없었기 때문. 둘째, 아프키카는 고유한 질병 문제, 특히 말라리아 문제가 심각했다. 셋째, 대부분의 거주지가 해안으로부터 떨어진 내륙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가뭄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한편으로 교통의  장애요인이라 국제 교역에 참여할 기회를 제한했다. 

따라서, 그들의 가난이, 국가 상층부의 부패 때문이라고 희생자를 비난해서는 (victim blaming) 안된다.....

 

흑.

결국, 그들의 불행한 운명을 탓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넷째, 어쩌구..." 라는 설명이 나올 줄 기대했었다. 식민지배가 어쩌구, 신자유주의가 어쩌구 이런 이야기를 기대했더란 말이다. 아프리카야 말로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고, 현재도 엄청난 천연 자원이 넘쳐나는 곳인데... 왜 이들의 터전을 그리 저주받은 곳이라고 이야기하냔 말이다.....

 

그는, 흔히 주류 사회가 이야기하듯, 시장이 좋은 해결 방안이 될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그가 강조한 것은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라 여러 방안들 중 한 가지 (just one of tools) 라는 점이다. 그는 개발 혹은 발전(development),  그것도 지역사회가 중심이 된 개발의 중요성, 그리고 적극적인 원조의 중요성을 매우매우 강조했다.

현재 미국의 원조 실태를 보면, 국내 총생산의 0.7%, 그러니까 100달러 중 70센트가 해외 원조에 쓰이고 있고, 그 중 16센트는 전략 국가들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파키스탄, 콜롬비아 등), 2센트 정도가 이런 최빈국에 투자되고 있는데 그 중 반이 미국인 파견 인력을 위한 인건비란다 (기억이 정확한가 모르겠네?). 어디 이래서야 쓰겠는가... 이게 오늘의 논지였다. ㅜ.ㅜ

그들의 박복한 운명... 이것이 진정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박복한 이웃을 돌보지 않은 지구촌 이웃들... 나쁜 사람들(ㅡ.ㅡ).....

으으......... 삭스 아저씨..... 여기서 끝나면 안 되잖아요....

 

충격을 접고....

몇 가지 드는 생각...

 

우선, 하버드 서림.. 백년 된 서점이라더니만 확실히 저력이 있다. 꾸준한 평론 모임, 저자 특강..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놀라운데, 이런 메가톤 급 인사를 일개 서점 이름으로 불러서 강연을 시킨다는게... 강연료를 떠나 놀랍기 그지 없었다. 안내라고야 자기네 메일링 리스트, 홈페이지, 책방 게시판에 안내문 붙인게 고작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좀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주기 바랐던 나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이런 강의가 나름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것이 정치적 수사이건, 부르조아의 여유이건... 현장을 직접 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그 생생한 울림... 그걸 이제 알았냐 하면서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캄보디아에 여행 갔을 때, 학교와 일반 가정을 둘러보고, 그리고 "one dollar"를 외치며 모여드는 앙코르와트의 아이들한테 받았던 충격...   "least developed country"라는 학술적 호칭으로는 그 현실을 감히 담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다같이 죄의식이라도 갖자는 소리냐...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보자면... 미국인들, 죄의식이라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들이 세계에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누구의 희생을 발판으로 지금의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지 최소한 미안함이라도 느껴야 한다. 그게 시작이다. 미국에서 아무렇지도 배출한 온실가스가 아프리카의 가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그들이 우습게 생각하는 몇 달라, 몇 센트의 푼돈이 이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금액인지..... 미국인은 (세계인들은) 알아야 한다. 거창한 이론을 떠나, 그게 인간의 도리다.

 

하지만, 한국에서 아프리카 어린이가 어쩌구, 에이즈 문제가 어쩌구.. 하는건 웬지 낯설다. 그동안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너무 다급하여, 그리고 단일민족 신화(?)에 사로잡혀 소위 국제 연대, 혹은 지원의 문제들을 등한시했던게 사실이다. 남들을 잘 모르겠고.... 내가 그랬다는 뜻... 아니, 한국이 지금 난리인데 듣도 보도 못한 말라위가 어쩌구, 탄자니야가 어쩌구.. 이건 너무 오바 아니야.. 이게 솔직한 심정... 

잘 차려입은 하버드 교수들, 혹은 국제기구 고위 관료들이 아프리카 문제를 자신의 일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것도 어색하지만, "인간 해방"을 종교처럼 떠받들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1달러가 없어 죽어가는 현실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앞뒤 안 맞기는 마찬가지...

 

뭐 이래저래 고민많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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