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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일'이란 어떤 존재일까?

낮에 뻐꾸기 선배랑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며 그녀의 요즘 고충을 들었다.

일, 일터, 동료.... 들에 대한 이야기들...

인간사 많은 공통점들이 있으니, 익숙한 이야기들이지만서도,

또 세부적인 차이점이나 구체적인 맥락 효과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다.

친구들 만나면 이야기의 거의 8할이 '회사' 이야기다. (나머지 2할은 무한도전 이야기 ㅋㅋ)

이자들이 첨 직장생활 시작할 적에는 누구네 상사가 더 일을 못하고 성격이 괴팍한가 배틀을 벌이더니,

한동안 서라운드 비난 시기를 지나,  이제 중간관리자에 이르러서는 하급자들에 대한 성토로 너무나 분주하다.

어쩌면 그렇게 개념없고 일 못하는 인간들이 내 친구 주변에만 몰려있단 말인가? ㅋㅋㅋ

네가지가 없다거나 성격이 이상하다는 건 주요 주제가 아니다.

대개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그냥 일이나 말끔하게 잘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영 채워지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더니, 뻐꾸기 선배가, 담에 내 친구들 만날 때 자기도 끼워달랜다.

자기가 1등할 수 있을 것 같다나? 천만의 말씀이다...  이자들이 얼마나 강력한데 ㅋㅋㅋ

 

대개 그런 자리에서 나는 거의 할 말이 없다.

뭐 쪼그만 연구소에 비슷한 지향을 가진사람이 모인데다 실적, 갑과 을... 뭐 이런 갈등관계의 여지가 적다보니 그렇게 고통을 받을만한 일이 여간해서는 없다. 그래서 주로 이야기를 들으며 '관찰'한다.....

 

그 때마다 도대체 한국의 이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다들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고, 행복과 불행의 근원이 다 일로부터 올 수 있는지...

정말 생활을 '압도'한다고나 할까...?

가정생활이나 기타 사회생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압도'라고 표현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프로젝트, 마감, 실적...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ㅡ.ㅡ

 

예전에 오빠 머리에 동전만한 땜빵 (원형탈모증)이 생긴 걸 보고 깜놀했다. 심지어 역류성 식도염도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나 자기 몸을 아끼고, 운동에 미처있는 사람이지만, 그자 역시 모든 정신은 회사 일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  참여하고 있는 SSK 과제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을 물었는데, 압도적으로 '일' '직장' '회사'가 꼽혔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주변의 '직장인'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중독'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한편으로는 일로부터 좀 벗어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토록 중요한 삶의 가치인 일을 함부로 빼앗거나 혹은 더욱 열악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훌쩍 새 삶을 찾아 떠나거나, 아니면 개척자 정신으로 새로운 일들을 쓱싹쓱싹 시작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문화적/경제적/사회적 자본을 갖지 않은 자에게 이는 더더군다나 어려운 일...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일이 좀더 할만한 것이 되도록, 고통보다는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게 필요할 것이다....

 

* 지난 4월에 노건연과 프레시안이 함께 기획기사를 낸 적이 있다. 그 때 썼던 글 한 편....

 

 

쌍용자동차 주변에서 벌어진 일련의 죽음들은 연민, 분노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철학적 주제를 생각해보게끔 만들었다. 흔히 한 사회의 실업률이 높아지면, 정신건강이 악화되고 자살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개인적인 수준에서도,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살이나 다른 건강 문제를 경험할 확률이 높다는 것도 거의 상식이다.

 

이것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보편적이며 불가피한 현상인 것은 아니다. OECD 국가들을 비교해보면, 동구권 국가들을 제외할 때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포함하는 남부유럽 국가들의 실업률이 가장 높지만 정작 이들 국가의 자살률은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같은 맥락에서, 일국 내에서 실업률과 자살률의 시간적 변동이 모든 나라에서 일관되게 같은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또 자살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망률 측면에서도, 실업률이 상승하거나 경기가 악화된다고 반드시 그에 상응하여 사망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 사회가 겪는 실업의 고통은 다소 남다른 데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진 걸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물질적 보상,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이다.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수억대의 주식부자로 신문에 이름을 올리든가, ‘별볼일 없는’ 상가 건물이라도 물려받지 않는 이상,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해서 벌어오는 돈’은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또한 사회학자 Jahoda는 일이 주는 사회심리적 편익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상에 시간 구조를 만들어주고, 핵가족 바깥의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접촉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며, 삶의 어떤 목표나 목적을 갖게 해줄 뿐 아니라, 개인의 지위와 정체성의 중요한 측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1 학술적으로 표현했다 뿐이지, 사실은 우리가 암묵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어쨌든 이러한 본성 때문에, 실업 혹은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으로도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에는 부정적 영향이 발생한다.23

 

그러나 이런 보편적 설명에 덧붙여, 한국사회에서 일과 실업의 의미는 특별히 각별한 구석이 있다. 우선 이 사회에서 나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줄 이는 우리 자신밖에 없다. 2008년 현재 실업자들의 실업급여 수급률은 40% 남짓에 불과하다. 임금근로자의 고용보험 적용률이 60% 내외인데다 실업율이 과소추정된다는 비판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실업급여 혜택의 범위는 상당히 제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실업급여를 받는다 해도 임금 대체율은 형편없다. 국제 비교가 가능한 2007년 시점에 실업 1년차의 임금대체율은 31%로 미국․영국과 더불어 OECD 국가들 중 최하위권이다.4 일자리를 잃으면, 그야말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돈 뿐인가? 한국 사람들의 근로의욕은 유난해 보인다. 2005-2008 세계가치조사에 참여한 OECD 19개 국가들 중 삶에서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응답한 비율이 51.8%인데 비해 한국은 61.9%로 최상위권에 포함되어 있다.5  강수돌 교수의 보고에 따르면, ‘이혼보다 실직이 더 고통스럽다’는 말에 미국인의 41%, 일본인의 36%가 동의한 반면, 한국인은 65%가 여기에 동의했다.6 

 

하지만 한국인들이 태생적으로 ‘근로윤리’가 유별나다고 보기는 어렵다.

“망국의 운명에 처한 민족이지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자체를 서럽게 생각하며, 마땅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야 할 시간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시간적인 손실이라고 여깁니다. 불필요한 노동은 건강을 해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1904년 한 일본군 대위는 서방의 저널리스트에게 이렇게 조선인을 흉보았다.7  한국인이 원래부터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게다. 그보다는, 앞서 살펴본 대로 일 아니면 살아갈 방도가 없기 때문에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2008년 시점 OECD 국가들의 연평균 노동시간이 1,764 시간인데 비해, 한국은 2,256 시간으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일중독이라고 알려진 일본조차 1,772 시간이니, 그에 비하면 500여 시간, 일일 8시간 근무를 가정하면 무려 60일, 두 달을 더 일하는 셈이다.8  생활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내는 실정이니, 그것이 애정이든 애증이든, 한국인의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에 비해 클 수밖에 없다. 일이, 혹은 회사가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때로는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한국사회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이 남다른 상처가 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노동시장 유연화로 표상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노동자들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는 세계의 여러 연구자들이 반복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논문도 한국의 쌍용자동차 ‘사태’만큼 극적인 사례를 보여준 적이 없다.

노동자들은 그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 날 외국 기업으로 주인이 바뀌었고, 또 어느 날 그 주인은 변심하여 회사를 팽개치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노동자들이 일을 안 해 회사가 어려워지기라도 한 듯, 해고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헬기가 상공을 날고, 투석전과 곤봉이 난무하는 전투가 벌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다쳤다.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 또 그 가족들도 위태롭기는 매한가지다. 파업 참가 노동자들에게 청구된 손해배상 금액은 상상을 초월한다. 필자가 읽었던 논문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올 ‘잠재적’ 영향들을 경고했지, 이렇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효과를 나타난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었다.

 

2000년대 중반 세계최대 유통업체 월마트는 의료보험 문제를 두고 진보진영은 물론 중도 우파에게서도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회사에서 보험을 안 들어주니까 많은 직원들이 무보험자, 혹은 메이케이드 (의료급여) 수급자가 되어 결국 납세자들의 부담을 증가시킨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이 문제를 노동자들의 건강권이 아닌 납세자의 권리 침해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이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기업이 이윤 창출에 드는 비용을 노동자나 다른 시민들에게 전가했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9  도쿄 전력, 그와 결탁된 소수의 관료들의 이해 추구가 현재 일본 시민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어떤 부정적 결과를 미치고 있는지는, 이러한 비용 외부화의 또 다른 생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해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고는 기업이 언제고 택할 수 있는 쉬운 옵션이어서는 안 된다. ‘이윤’을 목표로 하는 기업에게 ‘도덕’을 요구한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 노동과 다른 요소(원료, 기계)들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 노동자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생산라인 가동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지면 가동을 중단하기도 하는데, 이때 기계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지 않는다. 석탄 사용을 중단하고 천연가스를 사용해도 도태된 자원은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기업들이 절감한 비용, 증진시킨 효율성이라는 것이, 창의적인 혁신에서 추가적으로 창출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파괴시키고,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비용을 전가시킴으로써 얻어진 것이라면 사회는 그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는 도덕성 이전에,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소위 ‘기업가 정신 (entrepreneurship)’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명문대 MBA를 자랑하는 경영인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게 고작 물량에 맞춰 노동자 숫자를 조정하는 것밖에 없다는 걸 믿기 어렵다.

 

해고를 사기업의 내부 문제로 생각하여 방치하거나, 고용유연화를 조장하는 정부의 행태 또한 비난받아 마땅하다. 자유시장 원칙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지만, 한편으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장바구니 물가를 챙기고, 한복 차림의 고객을 홀대했다는 호텔에게 국회의원이 호통치는 곳이 한국이다. 또한 이 나라는 정부가 직접 나서 파업 참가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곳이기도 하다. 해고와 비정규화가 구조조정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기업들 앞에서, 국가는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노동자는 기업의 종복이 아니라 국가의 시민이다. 특히나 이번 쌍용자동차 사례에서처럼, 책임있는 경영진의 존재가 불분명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역할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은 착한 소비자가 되어 기업의 양심에 호소하기보다, 그 자신이 노동자로서 연대할 필요가 있다. 매일 당장 때려치우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맡은 일을 해내려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봄날 월차 내기를 꺼려하는 성실한 직장인, 당신들이 바로 노동자다. 생계를 위해서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든, 일이 우리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이라면,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에서 해고와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화는 기업이 너무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되어버렸다. 반면 사회적 안전장치가 전무한 속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유례없는 상처와 고통이 되고 있다. 정부는 팔짱끼고 앉아서 사태를 ‘관람’하거나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세 가지 모두 ‘정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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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hoda M. Work, employment, and unemployment - values, theories, and approaches in social research. American Psychologist 1981;36(2):184-191.텍스트로 돌아가기
  2. Dooley D, Fielding J, Levi L. Health and unemployment. Annu Rev Public Health 1996;17:449-65텍스트로 돌아가기
  3. Ferrie JE, Shipley MJ, Marmot MG, Stansfeld SA, Smith GD. An uncertain future: The health effects of threats to employment security in white-collar men and women. Am J Public Health 1998;88(7):1030-1036.텍스트로 돌아가기
  4. 한국노동연구원. 월간 노동리뷰 2010년 4월호 p.62-65텍스트로 돌아가기
  5. http://www.worldvaluessurvey.org/ 텍스트로 돌아가기
  6. 강수돌. <일중독 벗어나기> 메이데이 2007텍스트로 돌아가기
  7.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책과 함께 2005 텍스트로 돌아가기
  8. http://stats.oecd.org/Index.aspx?DataSetCode=ANHRS 텍스트로 돌아가기
  9. http://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walmart/transform/protest.html 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