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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관련 메모

반도체 산업 종사노동자들의 행정소송 결과를 듣고, 좀 울컥했다.

반올림 활동가들이나 직접 소견서 작성하니라 고생한 산업의학 샘들에 비하면 뭐 그리 애쓴 것도 없지만, 웬지 손톱만큼 기여를 했다는 생각도 들고, 또 예상보다 우호적인 판결 결과에 약간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판결문을 살펴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호적인' 판결을 환영하기만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또 어영부영 넘어가게 될 것 같아 메모를 간략히 남겨둔다.

 

#.

우선 '인과성'에 대한 판단이 학술적 논의가 아닌 법적 논의를 통해 확정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질판위라는 전문가 기구에서의 결정은 차치하더라도, 산보연의 역학조사 보고서는 작업과의 백혈병 사이의 인과성을 확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었다. 그런데, 바로 그 보고서를 근거자료로, 법정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물론, 통계적 검정력이 낮기 때문에 신뢰구간의 폭이 넓어 유의한 차이를 확정할 수 없다는 점이나, 건강근로자 효과 때문에 전반적으로 초과사망의 효과가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충분히 언급하지 않은 보고서에 대해 우리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또한 통계적으로 유의하지는 않지만 일관성 (consistency)있는 point estimate 의 상승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이 반론이었고, 이러한 논거가 이번 법정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

과학적인 차원에서 인과성을 확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개는 광범위한 회색지대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학술적인 논쟁과 재현 속에서 인과성은 최대 가능성으로 그저 추정될 뿐이다. 

인과성 판단에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최대한의 근거를 종합하여 그 사회가 수긍할 수 있을만큼의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과학의 역할은 informed decision 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

그러나, 하물며 '순수한 (?)' 것으로 여겨지는 학술적 판단도 정치적 이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진대, 과연 법정에서 인과성을 판단하는 것은 과연 정당할까?

이러한 우려는 비단 학술적 판단 뿐 아니라, 대법관들이 우리사회의 중요한 가치와 인권의 기본을 확정하고 재단해버리는 것에도 해당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이 학술적으로 ( 혹은 철학적으로) 논의되거냐 확정되어야 할 주장들에 결론을 내버린는 것에 대해 우려하지 않아도 될까?

 

#.

이번의 우호적 판결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다.

실제로, 이번 다섯 건 사례 중 두 건은 나름 전향적인 해석과 함께 원고승소의 결과를 낳았지만, 나머지 세 건의 사례들에서는 원고와 피고 (실제로는 진짜 피고말고 보조참고인!!!)의 팩트를 둘러싼 주장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피고측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인과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드물지만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도 생길 것이고, 많은 경우 사법부의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정보에 기반한" 판단에 따라 여태까지 그래왔듯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판결들이 내려지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호적 판결결과만을 두고, 사법부의 결정을 환영하게 되면, 그 결정에 권위를 부여하게 되면, 후자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

이 문제에서 보다 본질적인 것은 산재인정을 개인 수준의 인과성과 연계시키고 그것을 특히 노동자 입증책임으로 정해놓은 제도, 그리고 학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인과성에 대한 판단을 법원이라는 정치적 기구,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맡기고 있는 현행 제도가 아닐까 싶다.

 

 

#. 사족이지만....

 

내가 산보연 역학조사팀의 일원이라면, 이번 판결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내가 쓴 보고서를 가지고, 소위 '비전문가'가, 나와는 다른 결론을 내리는 이 상황.....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역학조사가 '엉터리'라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가용한 최선의 자료를 이용하여, 현재 가능한 최선의 분석을 했다. 

이를테면 진보진영의 연구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리는 만무하다.

문제는 분석 그 자체라기보다 자료 특성과 한계를 고려한 세심한 해석과 고찰의 부족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자료 확보와 관련해서는 연구자들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을 거라 짐작은 된다. 압수수색 영장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없다고 안 내놓는 자료를 어디서 확인한다냐... ㅡ.ㅡ ( 역학조사 자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니 따로 논문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듯!) 

어쨌든, 연구결과가 나왔을 때, 그것이 선별적으로 법원에 의해 인정되거나 부정되는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연구자의 바람직한 역할은 무엇일지 고심이 필요하다. 

 

 

#. 또다른 사족이라면...

기밀이라며 역학조사보고서를 여태 공개도 안 하더니만, 얼마 전에 학술지에 떡 하니 영문으로 실렸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영업기밀이라며 작업환경조사 보고서를 공개하지 못하게 하는 업체도 황당하지만 (그거 공개하도 그 보고서보고 우리 반도체 못 만든다... ㅜ.ㅜ), 꽁꽁 싸맨 역학조사 내용을 낼름 학술지에 내놓는 산보연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자기네 논문 쓰려고 그 자료를 기밀로 했던 건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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