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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3]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2]] 에 관련된 글.

* 박노자님의 한겨레 글 : 책 읽고 흘린 눈물 (2005.4.10) 하고도 관련 있음

 

한동안 손 놓고 있던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13장 "The socialist challenge" 를 어제(!) 읽었다.

 

앞서의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국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상상초월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연대, 불굴의 의지 또한 장난은 아니었다.

 

1912년, 여기 보스턴 북동쪽에 위치한 로렌스 지역 "아메리칸 방직"이 소유한  4개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난다. 노동자들은 영국, 아일랜드, 러시아, 이태리, 시리아, 독일, 폴란드, 포르투갈, 벨기에 등등 세계 각지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 엄청 후지고 위험한 집에 살면서 죽어라 일하는데 일주일에 겨우 8.7달러 밖에 받지 못했다. 당시 지역 의사였던 (여성!) 엘리자베쓰의 기록에 의하면 소년 소녀들 중 상당수가 노동을 시작한지 2-3년 안에 사망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이 100명 중 36명이 스물 다섯 살이 되기 사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1월 (한겨울, 여기 진짜 추운 곳) 월급 봉투를 열어본 노동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일언반구도 없이 월급을 깎아버린 것이다. 노동자들, 당장 일을 멈추고 공장 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다른 공장의 노동자 5천명도 파업에 가세했고 순식간에 만 명이 파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 소식은 곧장 뉴욕에 있던 IWW 에 전달되었고, Joseph Ettor 가 파업 지도를 위해 이곳으로 급파되었다. 각 인종을 대표할 수 있도록 대표를 뽑고 매일 이 평의회를 통해서 중요한 결정을 해내게 된다. 당시 IWW 에 속한 노동자는 채 천명이 안 되었지만, AFL은 이들 비숙련 노동자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은 IWW 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당시  IWW는 대규모 집회와 행진을 조직했고 파업 참가자들은 5만명 (당시 로렌스 총인구는 8만 6천명 ㅡ.ㅡ)의 생계를 위한 음식과 연료를 마련해야 했다. 물론 전국 각지, 노동조합, IWW 지부, 사회주의자 그룹, 개인들로부터 온정이 답지했다.

 

그럼 그 동안 정부와 자본은 뭘하고 있었을까. 시장은 지역 민병대 소집하고 주지사는 주 경찰을 동원했다. 파업 수 주일 후 파업 노동자들의 행진이 경찰에게 공격 당했고 그 이후 거의 폭동이 벌어졌는데, 이 와중에 한 노동자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허나, 당국은 IWW 간부인 Ettor와 Arturo를 범인이라고 체포했는데.. 당국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 이런 희안한)를 교사하여" 이 살인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들이 투옥된 후 IWW는 또다른 간부를 파견하여 파업을 계속 진행시켜 나갔는데... 당시 로렌스 시에는 민병대 22개 중대, 2개의 기병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계엄령이 발동되고 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조차 금지되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투옥되고 심지어 총검에 찔려 살해되기도 했는데, 파업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Ettot은 "총검으로 옷을 짤 수는 없다"는 뽀대나는 멘트까지 날렸다.

 

2월, 파업 노동자들은 대규모 피켓 시위를 벌였고 7천~1만개의 피켓들이 끝도 없이 늘어섰다. 하지만, 식량은 떨어져가고 있었고, 아이들은 굶주렸다. 이때, 사회주의 신문이었던 New York Call 에서 파업 가정의 어린이들을 다른 도시의 가족들에게 안전하게 맡기자는 제안을 했다. 이는 이전에 유럽에서도 쓰였던 방법이란다. 사흘만에, 아이들을 맡겠다는 4백통의 편지가 신문사에 도착했다. IWW와 사회주의자 그룹은 아이들의 탈출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2월 10일, 백 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로렌스를 떠나 뉴욕에 도착했는데, 뉴욕의 중앙역에는 5천명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이 "마르세이유"와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면서 이들을 맞이했다. 그 다음주에는 또다른 백명이 뉴욕으로, 35명이 버몬트로 옮겨졌다.

로렌스 당국, 아동 학대 법조문을 들이대며 더이상 아이들이 로렌스를 떠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또다른 40명의 어린이들이 필라델피아로 떠나기 위해 2월 24일 기차역에 모였는데... 경찰이 나타나 어린이와 엄마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러 순식간에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한 임산부는 곤봉에 맞아 정신을 잃었는데, 일주일 후 사산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파업을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은 하루를 투쟁가와 함께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메리칸 방직"은 항복을 선언했고 임금인상에 합의했다. 3월 14일 만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광장에 모여 찬반 투표를 통해 이 어려웠던 파업을 승리로 끝냈다. 뿐만 아니라, 9월 말에는 당시 투옥되어 재판을 받게 된 IWW 지도자들 석방하라고 1만 5천명이 참여하여 24시간 한시 파업까지 벌이는 마무리까지..... 결국 이들은 무죄석방되었고 당시 로렌스에서는 만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축하행사를 벌였단다....

 

이 사회에, 이런 시기가 있었다는 것은 다시 봐도 믿어지지 않는데....

 

 

 



민병대와 방위군의 총질보다 무서운 것은 내부의 분열...

 

AFL은 일찌감치 숙련직, 백인, 남성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자리를 잡았더랬다. 이에 비해 IWW 는 "One Big Union"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는데, 하루는 IWW 지도자인 Haywood가 루이지에나 벌목 노동자 투쟁 현장에 가보니 흑인 노동자는 한 명도 없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AFL은 제껴 두더라도, 어쨌든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사회주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이들 사이에도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IWW의  전술인 사보타지와 폭력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지도자인 Haywood를 위원회에서 제명하기도 했다. 당시 헬렌 켈러(!)가 New York Call 에 기고를 통해 이러한 분열상을 통렬이 비판했더랬다. 잠시 샛길로... 헬렌켈러가 사회개혁 운동가에서 분명한 사회주의자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자 그녀를 그렇게 칭찬하던 언론이 발달 과정에 문제가 있어서 그녀의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둥, 별 황당무계한 비난을 늘어놓는데.. 그에 대한 헬렌 켈러의 반격은 진짜 통쾌하다. 너네들이야 말로 "Industrial Blindedness and Social Deafness"닷!!   그녀는 또한 여성 참정권 운동론자들에게, 기껏 해야 이 놈 아니면 저 놈을 뽑는 건데 왜 그렇게 투표권에 목을 매냐. 선거가 우리를 해방시켜주는게 아니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쓰다보니 넘 길어져서 힘들군. 시작은 창대했으나 수습이 안 되는 전형적인... ㅜ.ㅜ

 

W.E.B Du Bois 에 대해서 쓰려고 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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