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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과 실용에 대한 질문 [경계도시2]

 

주변의 너나할 것 없는 강추가 있었으나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불현듯 나서 보게 되었다.

 

홍현숙 감독의 다큐 [경계도시2]

 

 

작품을 보면, 나-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송교수의 부인만이 예외)

어떤 이들은 국가안보가 위협당할까봐 진심으로 걱정하고, 또다른 이들은 민주화 운동이 위기에 처할까봐 걱정한다. 생뚱맞게 박홍 총장 같은 이는 송두율 교수을 걱정해주며 그가  사도 바울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축원하고, 심지어 기자라는 작자들마저 어떻게하면 이 상황을 잘 돌파할 수 있을지 검찰의 '조언'을 김형태 변호사에게 일러주기마저 한다. 

 

또한 송교수의 잠재적 아군이었던 이들은 '전술'을 이야기했다.

이건 그저 전술일 뿐이다 (전략이 아니라) - 그저 사죄성명에 준법서약서 한장....,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이걸 문제 삼으니 어쩌냐, 일단 비는 피해야지....

 

이러한 전술적 접근은 좋게 표현하면 유연성이고,  ('~주의'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리하자면) '실용주의', 혹은 약간 폄훼해서 '정치공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대가 개인의 발견과 함께 시작된 것아라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아직 전근대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집단적 대의명분 앞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양심이란 편의에 따라 잠깐 유보할 수 있는 생각의 한 단편일 뿐.... 

(송교수가 준수선언을 강요당했던 그 잘난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는 개인의 양심과 사상이 좌와 우에 의해 그리도 손쉽게 재단될 수 있다는 것에 새삼 (!) 놀랐다.  하긴 주위를 둘러보면, 일상에서 드문 광경도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양심과 사상을 개떡같이 취급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멀리 국가보안법까지 언급할 것도 없이, '일단' 반성문 쓰기, 종교 강요 같은 예는 수백가지도 들 수 있다.

 

이런 일들의 특징이자 위험성은 그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억압을 가하는 측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조차도 내적 괴로움 없이 실용주의적인 혹은 유연한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주변의 신심어린 조언자들과 지지자들이 이러한 선택을 충고한다. 그것도 진심어린 애정으로부터.....

 

파시스트 독일에서, 히틀러-나치스에 경례를 붙이고 싶지 않았던 한 저명 과학자는 집밖을 나설 때면 항상 양손에 무언가를 들었다고 한다. 경례를 붙이는 사람들이 모두 진심으로 파시스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손짓만 따라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만 열렬하게 파시즘을 미워했어도 괜찮았다.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이 과학자는 스스로에게 용납이 안 되었기에, 수 년 동안을 외출 때마다 짐꺼리를 만들어야 했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에 보면, 전향서를 쓴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깟 전향서, 형식적으로 쓰고 마음 속으로만 전향 안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걸 차마 할 수 없어서 수십년을 영어의 몸으로 지내버렸다.

 

스스로를 돌아본다.

(아무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나의 존재 근거를 뒤흔들 수 있는 상황들에 나또한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했었는지.....  나의 양심 혹은 다른 이의 정체성을 얼마나 손쉽게 '그 따위'로 만들었는지....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는

국가보안법 따위를 떠받드는 야만적 우파에 대한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근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뱀발

영화에 현재 건강보험공단 정형근 이사장이 몇 번 등장한다.

역시 그곳이 더 잘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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