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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26
    무의식이 나에게 보내는 사인(2)
    푸른들판
  2. 2006/12/18
    판의 미로-용기/ 인내/ 희생/(3)
    푸른들판
  3. 2006/12/13
    운동사회 성폭력, 아니 여성을 이야기하다(17)
    푸른들판
  4. 2006/12/12
    오늘5시, 운동사회성폭력토론회(3)
    푸른들판
  5. 2006/12/09
    성적지배와 그양식들
    푸른들판
  6. 2006/12/07
    여성단체활동6년차, 안식년을 보내다(5)
    푸른들판
  7. 2006/12/07
    매매혼적국제결혼예방전략회의를다녀와서
    푸른들판
  8. 2006/12/07
    '어둠의 왼손'속의 세상(2)
    푸른들판

무의식이 나에게 보내는 사인

난 인간의 삶 속에 거대한 크기를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 물론 그렇게 쉽게 자신의 무의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의식의 세계에서만 산다고 생각할지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세계, 세상이 있다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인데, 꿈 속의 세계가 도저히 납득이 안갈 때가 많다. 꿈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실체이기도 하고, 현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어렸을 때부터 반복되는 꿈의 패턴이 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쫓기거나 죽을 위험에 처해지는 꿈.

일주일 전에도 반복되는 유형의 꿈을 꾸었고, 생생히 기억이 난다.


하늘하고 맞닿아 있는  높은 곳에 내가 있다. 나는 성폭력관련(내가 일하는 곳과 연관된 자료였던 것 같다.) 자료, 기사를 받아서 줄사다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줄을 타고 내려간다. 중간에 홍진경을 만난다.

요새 어떻게 지내냐는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홍진경이 나를 피하면서 먼저 가겠다고 한다. 나는 이상하게 느껴지나 알았다고 하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까 받았던 자료가 내 손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놓고 왔구나.’ 다시 올라간다. 그런데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힘이 빠지고, 줄사다리의 맨 꼭대기 줄 몇 개가 끊어져버려 한꺼번에 올라가기 매우 힘든 상태가 된다. 이제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거의 줄에 매달려있다.

그냥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면 힘이 덜 들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그 자료는 꼭 찾아야 하는 자료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다리를 높이 들어올려 그 곳에 가려하지만, 줄만 흔들거린다. 바로 아래는 낭떠러지다. 한 번의 실수로도 나는 죽는다는 느낌이 더 땀을 흘리게 한다. 하지만 내려갈 수는 없다. 다시 힘을 회복하고, 올라가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다.


 

    

  




 

그렇게 삶이냐, 죽음이냐를 왔다갔다 하다 잠에서 깨었다. 그날 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쁘고, 내가 찾아야 할 자료는 없었음을 깨닫고 안도를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이런 꿈을 어릴 때부터 자주 꾸었다. 뭔가 해낼 수 없을 듯한, 죽음으로서만이 가능한 일을 맡게 된다. 예를 들어 홍수 앞에서 그 물을 헤쳐나가는 꿈이라던가, 거대한 파도로 집과 건물이 무너지는 데 나만 꼭대기 층에 있어서 겨우 살아있는 상황, 그런데 계속 아슬아슬하게 파도가 친다. 아주 어렸을 때는 누군가 나를 자꾸만 쫓아와서 도망치면서 그 사람한테 붙잡히기 전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꿈이 많았다.


그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음. 사실 꿈속엔 통증은 없다. 다만 숨이 턱턱 막힐 뿐이다. 계속 되는 긴장감과의 싸움. 그리고 꿈에서 깨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건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사인일까? 어릴 때(고등학교 때까지) 꾸었던 것처럼 무언가 대상에게 쫓겨다니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연현상(파도, 홍수, 공중에서 끊어질듯 한 사다리 등등)과 마주쳐 그에 필사적으로 살아보려는 내 욕망이 더 강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걸까?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감상도 없이 그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 그럴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난 항상 계획하고, 예상하고 사는 사람이니까. 예외나 갑작스런 전개를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대학 4학년 때 에니어그램을 한 적이 있는데 5유형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했을 때도 5유형이 강하게 나왔다. 5유형은 관찰자형, 나서기보다는 주변 상황을 판단하고 섣불리 행동하지 않으며, 감성보다는 사고가 발달한 유형이란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는 그런 이미지에 걸맞는 사람이다.

하지만 꿈은 나에게 넌지시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아무리 준비하고, 계획해도 사람의 삶이란 건 그 계획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오히려 뜻하지 않는 곳에 복병이 숨어 있고, 우연하게 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걸. 또 죽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척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넌 죽음에 대해 그렇게도 공포스러워한다는 걸.

근데 그걸 알아서 나에게 무슨 변화가 온다는 걸까? 음... 혹시 죽음에 대해, 죽음의 공포를 진정으로 만나라는 걸까? 지금까지의 나는 회피, 무시해왔기 때문에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없다는 걸까? 아니, 이겨낸다, 아니다의 의미가 아닌 공포를 공포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삶에 대해 그 그림자(죽음)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거만하게 내 의식의 흐름만을 쫓지 말라는 메시지인 듯...

내가 밝은 곳만을 향해 가는 듯 보이는 그런 위선을 벗어던지라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워낙 빛과 어둠은 한 몸인 것을~~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난 꿈 속에서 죽음의 그늘 가까이는 가보지만, 죽지는 않았다. 겨우 겨우 숨을 헐떡이며 살아남는 것. 어쩌면 그만큼 나는 죽음을 피하고 싶고, 살고 싶나보다. 하지만,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선택하라고 무의식이 말해주는 것 같다.

가끔 꿈을 꾸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정말 꿈에서 죽음을 선택했다면, 위로 오르려다가 공중에서 떨어져 죽었다면 어땠을까? 그래, 어쩌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신나고 혹은 음울한 세상이 펼쳐질지도 몰라. 죽음이 끝,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 바로 미지의 탐험인 것이다.

최근에 영화 ‘판의 미로’를 보았는데, 주인공이 죽음으로서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죽음은 혹은 현실적이지 않음은 또 다른 길을 위한 열쇠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식세계가 그걸 계속 막으려고 하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의식이 아닌 내 몸이 가는대로 내 욕구가 가는대로 나를 맡겨보는 시간을 늘이고 싶다. 어쩌면 내 무의식은 현실의 나와 함께 그 여행을 기꺼이 하고 싶어 계속 나에게 꿈으로 나타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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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용기/ 인내/ 희생/

 

끔찍하리만치 현실적인 우리들의 이야기.

전쟁 속에서 인간이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세상의 악 속에서도 용기. 인내. 희생.

(그리고 사랑, 모험정신, 정의 등등등)을 잃지 않는다면,

세상은 살아볼만한 것이라고 그리고 있다.

 

특히 난 전쟁 중에 스페인독재 정권에 대한 반란을 꿈꾸며, 

적의 가장 가까이에서 유모 비슷한 역할을 하며,

바란군을 돕는 메르세데스(마리벨 베르두)의 기지와 힘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힘을 몰라보는 남성들, 무시하는 군인들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이 위험에 처해질 각오를 하고 묵묵히 거사(?)를 수행하는 그녀의 힘은

누구보다 위대하다.

다만, 영화 끝에 독립군이 이기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 이후 메르세데스가

반란군 애인의 한켠에 남아있는 역할로 위치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다, 환타지가 아니라 라고 말하지만,

난 지독히 현실적이었다고 느꼈다.

전쟁 속에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그야말로 최악의 삶을 산다.

그 처참함 속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전쟁 속에서 거센 고문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지켜내는 사람들의

위대함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나를 겸허하게 한다.

지난 역사 속에 가혹한 삶과 위선 속에서도 희망의 불을 끄지 않는 그녀(그)가 있었다.

우리네 삶은 그녀들에게 빚지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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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사회 성폭력, 아니 여성을 이야기하다

어제 있었던 '운동사회내 성폭력, 다시 묻다'토론회에 다녀오겠다는 인사 후

다녀오고나서 오히려 더 복잡해져서 왔기때문에 후기를 안올릴려고 했다.

근데, 은근히 후기를 기다리는 한 분이 있어 왠지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ㅋㅋ

역시 관심있는 주제라는 생각~~ 근데 왜 이렇게 어려운지??

 

우선 토론회는 늦은 5시반부터 시작해서 8시까지 이어졌다.

사실 발제와 토론자가 총 8명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알겠지만,

전체 토론은 20여분가량? 그것도 단 3명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어떤 토론회에 가도 참 아쉬운 것은

전체 토론시간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발제, 토론이 늦게 끝나

나중엔 그냥 형식적으로 두 세 질문 받고 그에 대해 짧게 답하는 형식이 된다는 거였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토론 문화에 익숙치 않은 것 같다.

토론회 끝나고 나서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토론회 형식을 바꾸지 않는 한 발전적인 논의는 나올 수 없다는 결론을 짓게 됐다.

공개적으로 열려진 토론회 후에 질문나온 부분, 발제. 토론자가 던진 이슈에 대해

더 심도깊은 웤샵형태(둥그렇게 앉아 관련 주제에 고민하는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자리)를 기획하여 이슈를 생산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자리가 필요할 것 같다.

 

우선, 토론회 진행순서를 보자면

1. 평화- 인권운동, 성폭력 문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웠나?

  발제: 윤정은(여성주의저널 '일다' 기자, 평화운동가)

  토론: 최정민(평화인권연대 활동가)

          권김현영(언니네네트워크 운영위원)

2. 성폭력에 대한 운동사회 문제점과 해결과제

  발제: 오매(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토론: 지은(경계를 넘어 활동가)

3. 성폭력 사건 대책활동 과정과 평가

  발제: 보경(운동사회내성폭력근절을위한 활동가모임)

  토론: 염창근(운동사회내성폭력근절을 위한 활동가모임)     



이번 토론회에서는 주로 평화-인권운동영역에서 성폭력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운동사회내의 성폭력 자체를 문제제기하면서 대안을 모색한 부분도 있었지만(권김현영, 오매, 지은) 주된 이야기는 최근 평화운동권 안에 일어난 성폭력사건과 연관지어 이뤄졌다.

(전체 발제 내용과 토론내용을 다 다루기에는 내용이 많아 관련자료가 필요한 사람은

한국성폭력상담소나 운동사회내성폭력근절을위한활동가모임에 자료를 요청하면 좋겠다.)

 

윤정은은

평화인권운동안에서 과연 일상의 평화, 비폭력은 이뤄져왔는지 반문하면서

평화운동은 여성들의 인권을 비롯하여 보다 사회,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들의 권리에 대해 얼마나 인권감수성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최정민은

지난 2000년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 100인위원회 활동속에서 소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들에 의해 100인위와 피해자가 순결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소녀부대로 매도되는 상황 경험. 현재도 달라진 바는 없음. 성찰권력(운동사회 남성들이 여성억압에 대해 성찰했다고 하며서 새롭게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 그리고 그 권력을 남용)에 대해 돌아볼 필요를 언급했다. 

 

권김현영은

운동사회 안에서 폭력, 비폭력에 대한 개념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하며, 그 안에서 성폭력의 문제도 풀어 나갈 수 있음을 시사했다. 또한 성폭력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운동사회 안의 연애(사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어떻게 공적인 의사 결정과 행동들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매는

최근에 많이 알려진 두 사건(평화운동 건,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건)에 대한 여론 분석을 통해 운동사회 속에서 피해자. 여성, 문제제기자인 개인의 목소리가 얼마나 과소평가되어 왔는지 성찰이 필요하고, 성폭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자, 피해자의 발의를 통한 운동사회내의 토론이 활성화되어야 함을 지적했다.

 

지은은

운동사회 전반의 성폭력에 대한 무지와 남성활동가들의 오만을 지적하면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위한 교육,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보경은

평화운동사회 내 성폭력사건 대책활동에 대한 과정과 평가를 하면서, 당시 사건을 지원하면서 겪은 어려움과 이에 대한 보완방안등(반성폭력네트워크, 사건지원경험 전수,실명공개) 을 이야기했다.  거기에 보태 성폭력이라 단언할 수 없으나 '연애'를 이용한 성적착취에 대해서도 문제제기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였다.

 

염창근은

남성중심 운동사회안에서 여성과의 관계와 연애는 성폭력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 있음을 말했다. 운동사회에서 많은 남성활동가들은 활동의 중요지점을 차지하면서 인맥을 통한 권력을 만들어 간다면서 '평화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남성운동가들이 '남성되기(남성역할)'를 포기하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가해자의 실명공개는 꼭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것자체가 폭력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운동가가 갖는 사회적 공익과 영향을 고려할 때 실명공개는 유효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휴!~ 글을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는데, 이 사람들이 다 자기 이야기를 10분, 5분내에 발표해야 했으니 상황이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되리라.

 

이런 상황이었기에 많은 이야기들은 나왔지만 정리되지 못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논의를 모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폭력에 대한 개념정의부터 다시 해야되는 것 아니냐, 운동사회라고 지칭되는 것이 불편하다,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한 것 아닌가 등등의 다양한 질문이 나왔다.

 

나도 한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기본적으로 윤정은이 언급한

평화를 비롯한 운동은 과정이고, 현재진행형이라는 부분에 동의하면서

성폭력논의에 있어서도 어떤 정해진 절차와 가해자 처벌이 중요한 것이기보다는

운동사회내에서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일상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느리더라도 공동체의 문제로 성폭력을 바라보고 다같이 해결하고자하는 토론과정이

중요함을 말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몇몇 발제자, 특히 염창근이 언급한 실명공개는 필수적이라는 등의

논의 과정보다 해결방식을 먼저 만들어 놓는 방식은

성폭력 해결에 있어 토론되지 못하게 하고, 

성폭력과 관련한 다양한 논의들을 묻히게 만들 수 있음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이에 대해 염창근과 윤정은은

운동사회활동가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사안에 따라 논의는 필요하겠지만

실명공개는 하나의 절차로 받아들여야 함을 말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내 질문의 의도를 잘 전달하지 못해서 그런지

발제자들은 내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중에 뒤풀이에서 염창근과 대화를 하면서

그도 논의과정이 중요하고 토론문화가 중요하다는 부분에 동의하면서

토론에서는 일부러 강하게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여러 상황을 보건데, 논의가 소통되지 못한 점, 이후 대안을 위한 논의에 대한 상이 보이지 않는 점 등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동사회내의 남성성, 남성활동가가 가진 권력을

거기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성폭력, 여성차별 등등)을

운동사회내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가  일상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한 

비폭력을 지향하든, 인권을 지향하든, 그 운동사회는 이미 자체적으로

그 지향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성폭력을 무슨 특수한 사건, 특수한 사람들의 일로 볼 것이 아니라

바로 운동사회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주요한 이슈로 보아야 한다.

 

폭력반대, 성폭력반대, 여성이슈에 민감하기.

이는 일상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내부. 외부에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단체안에서 구성원이면 누구나 참여하도록

여성소설읽기 모임, 여성관련 스터디를 정기적으로 꾸리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휴~~ 대충 이정도로 마치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내 생각도 정리하기 힘들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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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5시, 운동사회성폭력토론회

 오늘 서울여성플라자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에서 기획한

'운동사회성폭력토론회'가 열린다.

 

'운동사회내의 성폭력', 그리고 일상 속의 여성활동가의 차별

 운동사회내에서 어떤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색해보는 장이라 하여

 나도 참여하려고 한다.

 

 대안사회를 향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변을 그리고 스스로를 항상 돌아보면서

 자신의 무지와 아집을 깨뜨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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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지배와 그양식들

이종영이 쓴 '성적지배와 그 양식들'을 읽어본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 같이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주로 3,4장을 중심으로 글은 씌여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회원소모임 '토닥'스터디에서 나눌 글을 올려본다.

그 곳에서는 여성문제, 계급문제 관련한 단행본이나 자료를 읽고 모여서

각자의 활동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거기서 나오는 많은 이야기를 다 쓸 수는 없지만,

관련된 고민들을 여기서도 나눴으면 좋겠다.

여성과 여성간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경계(계급, 성적 취향, 종교, 인종, 국가 등등)를 허물고 새롭게 만드는 작업에 같이 하고 싶다면 누구든 덧글 달아주셔용~~  



 

★ 제 3장부터는 국가 형성이후 남성지배적 친족 공동체의 권력이 일정하게 해체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해체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변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가족유폐적 성적지배양식’이라는 것. 가부장들이 자신의 아내와 딸들을 가족 속에 고립, 유폐시켰던 것은 그러한 책임수행에 위협이 되는 사랑의 힘을 사전에 철저하게 봉쇄하기 위해서이다.

 ▷ 여기서 나는 최근에 본 영화 ‘막달레나 시스터즈’가 떠올랐다. 부모의 동의 없이 아이를 가졌다고 수용소로, 성폭력을 당해도 수용소로, 남자들에게 대꾸를 했다고, 성적 관심을 나타냈다고 수용소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엄격한 규율/ 외부인과의 접근통제/ 감금/ 순결강조... 이런 일이 1900년대에까지 있었단다. 그러나 우리사회도 물리적 감금은 아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막달레나 집’을 만들어 사회가 그녀들을 주시하고 있다. 

125p. 인간 내부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사랑을 발현시켜주는 매개체에 불과한 대상은 결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 음... 일정부분 동의. 특히 사랑도 가시적인 조건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보면... 하지만, 수많은 사람중에 누군가를 어떤 장애에도 불구하고 만났다는 그런 감정을 여전히 로망스로 품는 나는 뭘까?


★ 129p. 내가 ‘문화적 후진성’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는 ‘문화상대론’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 자연적 소여들과 역사적 우연들에 의해 규정된 문화적 다양성은 물론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타자의 사물화로부터 타자성의 존중으로 이행하는 문화적 발전이 한편에 있어서는 관철되는 것이다.

  ▷ 여기서 소여란

       1 주어진 바. 또는 부여된 바. 2. 논리>연구 따위의 출발점으로서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나 원리.

       3 <철학>사유에 의하여 가공되지 아니한 직접적인 의식 내용

     기본적으로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어떤 사회에 대해 그 사회의 억압적인 문화(내가 판단할 때)를 다양성에 빗대어 어떤 대응도 하지 않으려는 안이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 그러나 저자가 사용한 ‘문화후진성’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관찰자적인 용어를 계속 쓸 것이냐는 고민된다. 난 번에도 논의가 되었던 ‘이슬람여성의 베일문화’, ‘아프리카의 여성할례’를 무조건 후진성, 억압이라 볼 것인가?      즉, 나는 언어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력, 차별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원시, 후진’이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쓰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그 용어는 그 사회에 있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 아니라 소위 선진국에서의 연구자, 운동가가 쓰는 용어이다.

    운동을 하는 우리는? 무언가 문제제기를 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운동가 스스로의 한계, 문지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내가 판단하는 해당사회의 문제, 과제를 설득하기도 하되, 나도 그 문화에 가서 내가 보지 못한 어떤 맥락은 없는지 돌아보면서 당사자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는 제 3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문화가 가진 관점을 그대로 잣대로 들이대며 어디는 선진, 어디는 후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지는 맹점이 있다.(물론 나보고 연구하라고 하면 제대로 할 수 있냐는 말을 하면 할 말은 없다. ㅜㅜ) 그렇기에 특히나 용어의 사용 속에 들어간 차별, 권력, 편견은 없는지 더 세심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운동도 마찬가지. 연구자도, 지식인도, 운동가도 아닌, 당사자 운동, 당사자가 주체가 되는 운동이 중요해지는 시대이다.




★ 러시아 10월 혁명이후 실천과제

  1) 가사노동의 공공화

  2) 모성보호와 양육의 공공화(모든 아이에 대해 부모처럼 대해야 한다. 새로운 양육규범)

  3) 자녀교육의 공공화

 ▷ 현실 속에서는 이런 기치를 내걸었던 남성들이 도로 이를 회수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진보이념을 내세운 (남성)혁명가들이 스스로 그 이념들을 부정하는 남성들의 무의식적인 지배욕망으로 실천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여성소설읽기 모임에서 읽은 ‘어둠의 왼손’에서는 비록 허구로나마 이런 현실을 상상했는데, 거기엔 성적으로 활성화되는 시기가 따로 있는 소머-케머주기(한 달에 한 번씩 성이 바뀌기도 한다.)사회가 있다.


* 작가는 글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미래시대에 인간이 소머-케머주기를 실험한 이유를 설명한다

 1. 지속적인 성적 능력을 갖지 않은 인간이 지성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확인해보고 싶어서

  2. 성적 충동을 불연속적인 시간 캡슐에 제한시키고, 남녀동성으로 소위 ‘평준화’를 이룩함으로써 성적 착취와 욕구 불만을 막으려고  

  3. 전쟁의 제거(지속적인 성적 포화상태와 조직사회의 공격성은 불가분한 인과관계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느 달에는 여성이 되고, 어느 달에는 남성이 되기 때문에 임신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런 이유도 양육도 어느 성이 전담한다는 개념없이 태어난 아이는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가 되어 공동양육이 된다. 너무 신나지 않은가?


* 물론 이것도 현실 속에선 이루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210p.에서 저자는 여남간의 서로의 존중이 어떤 영적인 것에서 이루어진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인간적 보편성에 기초한 서로간의 내면적 교류를 통해서 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타자를 배려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글의 전개에 비해서는 왠지 마지막에서는 너무 안이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지 생각이 들었다. 소위 ‘인간적 보편성’이라는 것이 여남의 공통된 부분을 말하는 것일진대, 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라면 여성의 특화된 부분(임신, 출산)을 경험하지 않는 남성들이 여성을 어떻게 배려한단 말인가?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은 인간의 지배욕망과 대치되는 것인데, 그렇게 윤리적으로만 이야기한다고 그런 세상이 오나? 내가 지배하고 싶은 욕망 속에는, 누군가로부터 지배받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존중해야한다는 결론은 나오지만, 그렇게 아무리 도덕교과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실은 어떤가?


   여기서 나는 ‘상생’의 세계가 앞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의 대안이라는 것을 좀 더 실리적으로 대중에게 설득하기 위한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본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라면, 내가 그리고 인류가 더 오랜 기간 잘 살기 위한 것이 무엇인지 연구하다보면 그것이 바로 ‘더불어 삶’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주여성의 삶이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어떤 영향을 앞으로 미칠 것인지, 타인의 가난이 현재 중산층으로 살고 있는 나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폭력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들...) 그 사회로의 이행 중에서 사회주의가 있을 수도 있고, 자연환경과의 조화가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느린 발전을 지향하는 사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만 잘 살면, 미래는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죽었을 때 일이고, 나는 지금 가족들 잘 살게 하는데도 바빠!’라는 말들을 당연하게 한다.

그런 상황 속에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빠르게 바뀔 수 있는 유혈혁명? 느리더라도 계속되는 일상의 혁명? 아직까지 이상주의자인 나는 후자에 꽂혀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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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활동6년차, 안식년을 보내다

 

안식년, 내 안에 비워지는 것들. 그리고 쌓여가는 것들에 대해

 



누구에게나 돌아봄, 휴식, 여유가 필요하겠지만,

이번 휴식을 통해 단체활동가들에게 쉼은 정말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모 활동가가 말한 대로 3년을 일하면 1달 정도의 휴가는 꼭 마련해야 할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활동 공간 속에서의 일상적인 휴식과 여유가 자리 잡혀야 할 것이다. 더 멋진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마음과 몸에서 나오는데

그 몸과 마음이 피곤에 절어 있고, 원래 하던 일의 쉼 없는 반복이라면

그 안에서 나올 것은 뻔한 것 아닌가?

휴식의 당위성은 이 정도에서 멈추고, 이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이제 어언 두 달이 되어간다. 충전을 했다고 하기엔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기간인가? 아니, 난 사실 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달여의 방학을 일 년에 두 번씩 경험한 것 외에 한 번도 과업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지 않은 채 내 멋대로 지낸 적이 없다. 학교 공부를 마치자마자 일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5년을 상담소에서 보낸 나. 그간의 두 달은 내가 살아온 시간 중에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를 제외하고 가장 긴 휴식이었다. 그래서인가? 나에게는 소리 없이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내 몸과 마음 안에 비워지는 것과 그 비움을 통해 쌓여가는 것들이 생기고 있다.

 

첫 번째 변화. 상담소 식구를 비롯해 나를 아는 많은 사람이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한다. 사실 난 상담소 활동을 하면서도 항상 건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그래서 난 쉬더라도 별 변화가 없을 줄 알았는데, 첫째 피부결이 달라졌다. 그리고 많이들 알고 있을 나의 탈모증상(^^)이 좀 기세가 수그러들고 있다. 쉼은 우선 몸이 말해준다. 쉼을 통해 몸에서 불필요한 것들이 비워지고 있기 때문에 깨끗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몸 안의 노폐물이 조금씩 비워져 간다면, 내 정신 안에 있었던 것들도 서서히 비워져가는 것들이 있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무엇이든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생기는 불안감,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고 있다는 좌절감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 그것은 내가 갑자기 무엇을 새롭게 배우고 있거나 다른 활동을 시작해서는 아닌 것 같다. 워낙 내 안에 있었던 내 안의 힘을, 원함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활동을 쉬고 나서 바로는 주로 집에서 보냈다. 책을 읽고 밥을 해먹고 tv를 보면서. 왠지 이상했다. 지금 이 시간엔 상담소에서 뭘 하고 있었을텐데... 상담소에서의 내 모습에서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며칠씩 짬을 내어 간 남도 여행, 부산국제영화제, 몇몇 외부 토론회를 다녀오면서 조금씩 변모하고 있는 내 모습을 스스로 느끼기 시작했다.

 

나에게 온 새로운 변화는 먼저 명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아니 명상은 좀 거창하고 멍하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해야 할까? 그동안 일하면서는 멍하게 있으면 안된다는 약간 강박증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 재빨리 판단해서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바로 다음 일을 계획하는,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여 스스로를 질타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아마 나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리라.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사람들을 그렇게 조바심 나게 하며 재빠르게 변화에 적응하도록 이끌고 있고 이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멍하게 있으면 그 멍함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것을 떠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혹은 그저 마음이 말할 수 없이 평온해지기도 했다. 그런 경험은 묵당(그리스도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카톨릭 피정의 집입니다. 강원도 태기산 산 중턱에 있답니다)에서 열하루를 보내면서 더 깊게 다가오며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지금도 그 때의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 난 그곳을 가기 전에 지루할 것을 염려하는 친구들의 조언으로 책 여러 권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갔다. 물론 책들을 그렇게 차분하게 읽은 적도 없었지만, 읽은 책들보다 홀로 고요하게 자연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나에겐 감동이었고 깨달음이었던 것 같다. 그 안에서 느꼈던 많은 것들을 글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그 때 썼던 일기 몇 구절을 옮겨 적는다.


‘볼펜 한 자루, 촛불 하나, 맛있는 식사, 깨끗한 방.. 새가 지저귄다.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이 흐린 날이다. 새들은 뭐라고 하는 걸까? 이곳에 있는 것이 이렇게 감사하고 고맙고 경이롭고 행복할 줄 몰랐다. 그러나 내가 가야할 곳은 더 오래 있어야 할 곳은 여기 이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래서인지 나가서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살아야 할 지 고민한다. ...

이 곳에 오면서 느끼는 것이 많다. 무엇보다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인간위주의 생활에 내가 익숙해있었다는 것. 여기는 산 정상과 가까워 낮에도 추운데 난방은 하루 3시간만 되고, 따뜻한 물은 밤에 한 번만 나온다. 매번 필요할 때마다 따뜻한 곳에서 산 나로서는 고역이지만, 그동안의 풍족하다 못해 낭비였던 삶을 돌아보게 된다. ... 지난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은 진보는 이상을 향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이상을 이루기 위한 끈질긴 시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둘째 날 낮에 쓴 일기


‘... 그동안 나는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열정과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다. 정해진 수순을 따라야 망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진정 내가 추구할 바, 가야할 바가 놓쳐지는대도 어쩔 수 없는 과정으로 느끼며 견뎌오기도 했다. 나의 무능력함을 탓했고 바쁨을 핑계로 주변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을 외면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여성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료들과 진심으로 함께하기 위해 내가 많이 애썼다는 것을. 많이 애썼기에 더 실망하고, 더 많이 좌절했음을. 

   나의 방황, 고뇌, 좌절은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이제는 가슴으로 안다. 그런 상황이 나에게 잠시 쉼을 선택하게 했고, 나의 활동, 이상, 욕구를 되돌아볼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고통을 통해, 방황을 통해, 되돌아봄을 통해 삶의 더 깊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음을 믿는다.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고 명상하는 것, 나와 상생하는 이들을 위해 일하는 것, 그러기 위해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과감히 버리는 것.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나 자신 항상 깨어있기를 바란다.’

- 셋째 날 밤에 쓴 일기


‘새벽 5시. 밤하늘을 빛내는 수없이 빛나는 별! 이렇게 많은 별을 방에서 보긴 처음이다. 감동!!! 밤하늘에 이렇게 많은 별들이 있다니! 창문을 열고 나가 손을 들어 올리면 바로 잡힐 것 같다. 산이 높아서 그런지 정말 금방 잡힐 것 같다. 새벽에도 내가 모르는 많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일곱째 날 새벽에 쓴 일기 


사실 내가 휴가 기간 동안 느끼고 있는 이런 감정들과 깨달음은 심오한 것도, 뭔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내 안에 오랫동안 숨 쉬고 있었던 중요한 것들을 다시 기억해내는 건지도 모른다. 지난 일요일에는 우연하게 중학교 때 쓴 일기를 꺼내보았는데, 한참을 쳐다보고 웃음을 머금다가 이내 숙연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여러 활동을 통해 깨달았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사실 중학교 때부터 꿈꿔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그 전부터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안식년은 그동안 채워오기만 했던 많은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꺼내보고 비워내는 시간들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중요하게 마음에 담아갈 것들을 다시 찾아가고 쌓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참 귀한 기회를 갖게 해준 상담소를 거쳐 간 많은 선배들, 그리고 지금도 일하는 활동가들, 회원님들, 모든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참으로 감사하다.

 

나.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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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혼적국제결혼예방전략회의를다녀와서

 

 매매혼적 국제결혼 예방,방지 위한 아시아 이주여성전략회의 (11/21)


회의진행순서

* 기조발제 : 아시아와 한국에서의 인신매매성 국제결혼현황과 과제

: 한국염(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 발제 1. 베트남: 카오 타이 홍반(베트남여성연합)

* 발제 2. 중국: 이해응(이대여성학과박사과정)

* 발제 3. 몽골: 소소마 출란바타르(몽골폭력반대센터)

* 발제 4. 필리핀: 플로렌스 메이 비, 코티나(칼루간이주여성센터)

* 발제 5. 대만: 알리스 리(희망노동자센터)

* 발제 6. 일본: 로산나 타피루(나고야 필리핀이주민센터)






 

기조 발제에서 한국염씨는 매매혼적 결혼의 문제를 1. 아시아여성의 상품화, 2. 가부장적 여성이미지 상업화, 3. 인신매매성 결혼중개과정 4. 돈주고 사온 상품으로서의 이미지고착으로 정리하면서 자본의 거래에 결혼이 국제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동아시아 이주여성의 유입국으로서 한국의 과제는 1. 결혼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결혼진정성에 대한 확인 2. 국제결혼 중개업체 규제/ 불법에 대한 강력한 처벌 3. 피해자 재활 플그램 도입을 제시했으며, 장기적으로는 노동을 통한 이주를 쉽게 하도록 하는 것이 거짓결혼이나 매매혼적 결혼을 막을 수 있다고 정리했다.


사실 난 과제로서 한국염씨가 이야기 하신 '결혼하려는 한국 남성의 결혼 진정성에 대한 확인'은 참 모호하고, 가부장제 안에서 결혼제도가 갖는 허구를 보이지 않게 한다고 생각한다. 전에 성폭력전문상담원 강의때도 느꼈지만 도대체 정상적인 결혼과 그렇지 않은 결혼이 어디있는가? 정상적인 결혼이라는 것 속에서 한국여성조차 자유롭지 않고 남성공동체에게 예속되는 현실을 더 직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하지 않나?


이런 나의 의문에 대해 대신 질문을 하신 분이 있었다. 여성학과 김정신님. 인신매매성 국제결혼 논의들이 오히려 국제결혼을 했던 여성들, 그 자녀들에게 '사회적 낙인'이 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부분, 국제결혼유입여성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 위장결혼, 진짜결혼의 개념정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나도 이 부분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주여성을 일방적으로 피해자화할 수도 있는 위험을 매매혼적 국제결혼 논의에서 간과해서는 않될 것이다.


또하나 종이학에서 오신 조영숙님은 발제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이주노동의 문을 더 여는 것이 국제결혼안에서의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을 바로 근절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며, 근본적인 폭력근절방안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기를 요청했다.


나는 매매혼적 국제결혼과 관련하여서는

'세계적인 현상으로 여성의 빈곤화, 이주의 여성화' 현상에 주목하면서 이를 막기위한 반자본주의 운동과 함께 유입된 국제여성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그녀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로 제도의 개선과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단체에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국제회의는 같은 목적을 가진 여성들간의 국제연대의 발판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지게 된다.



다음으로는 각국의 국제결혼실태와 해당 국가의 여성단체활동을 소개했다. 베트남의 경우엔 중간브로커에 의한 매매혼적, 착취적 국제결혼에는 단호한 근절의지를 보였으나, 해당 여성단체에서의 활동은 정상적인 국제결혼을 위한 정보와 지원을 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발제자가 활동하는 단체외에 다른 단체는 없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현재로선 거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국제결혼, 혹은 결혼제도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단체가 과연 없는지에 대한 회의는 들었지만, 현재 베트남의 상황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다른 질문자는 오히려 합법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결혼정보단체에서 여성들이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실태를 느끼고 있는데 이는 어떠한지 질문하였다. 발제자는 본인이 활동하는 단체가 유일하게 국가가 인정하는 결혼정보제공 비영리단체라고 이야기하면서 아직 홍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기층 여성들이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베트남의 상황은 안타까운 점이 많았다.


중국의 상황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는데, 발제자는 여성의 젊음과 남성의 자본이 교환되는 것이 국제결혼의 주된 양상이라고 하면서 이 상황에서 발생하는 여성폭력문제, 이주여성비하문제, 남성국가의 문화만을 강요하는 풍토는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나는 여기서도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매매혼적 결혼을 방지하고 예방하는 국가적 정책적 노력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지만,

빈곤으로 인해 여성의 성이 결혼이라는 도구로 상품화되고 있는 현상, 그러면서 이주를 희망하지만 결국 다시 남성, 혹은 자본에 희생되는 여성의 현실은 국제결혼여성의 폭력을 근절하고, 다문화적 풍토의 변화외에도 전세계적인 반자본주의 국제연대를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었다.

발제자는 내 생각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나 연구자로서 현실 단계에서 해볼 수 있는 예방, 방지에 초점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몽골의 사례에서는 주로 국제결혼으로인한 피해자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브로커의 사기, 폭력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정부가 국제결혼현상에 적극 개입하여 피해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필리핀도 이주여성의 폭력피해가 심각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주여성을 직접 만나 인터뷰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인권침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려냈다. 이주여성들이 한국에 와서 소유물로 취급되고, 가사도우미, 성도우미로 자리매김하는 현상을 방치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베트남, 중국, 몽골, 필리핀의 발제의 경우, 각국의 이주여성들이 겪는 인권침해와 물질적 피해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거시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발제는 없어 아쉬운 시간들이었다.


이후 대만, 일본의 사례를 들으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볼 수 있었다.


대만의 경우 불법적인 중개업소뿐아니라 중개업소자체를 국가에서 사업자 등록을 할 수 없도록 강하게 규제하고 있었다. 즉 결혼에 있어 이윤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강하게 있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대만의 경우 국제결혼을 위한 여성의 송출국이 아니라, 유입국으로서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지점이 많았다. 또한 대만이 한 때 사회주의국가이기도 했음도 결혼 등에 자본이 개입될 수 없음을 강하게 배척한 역사적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발제자는 자유의사에 따른 국제결혼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과연.. 현실적으로 그런 부분은 소수일 수밖에 없을거란 생각이 들긴했다. 아직 이민법이 없어 국제결혼을 한 이주남성, 여성에 대한 권리와 보호방안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최근 제정을 위한 운동을 통해 모든 폭력으로부터의 근절과 선거에 투표할 권리를 시민단체에서는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사례를 발표한 발제자는 발제자 본인이 이주여성정책의 피해자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두 딸 중 첫째 딸은 일본인과 결혼하기 전에 낳았다하여 일본국적을 취득할 수 없었음을 고백하면서 이주여성에 대한 법적, 시민적, 사회. 경제적 권리가 당연시 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국제결혼을 필리핀 여성들이 선택하는 주요요인은 경제적인 부분이나 실제로 결혼 후 경제적 궁핍, 폭력, 시민으로 인정되지 못하는 대로 오는 사회적 권리 박탈 등의 피해를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가로부터 피해를 입고, 비주류로 전락되고 있으며,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국제적인 여성의 연대가 절실함을 호소하였다.


나는 대만과 일본의 사례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었는데,

우선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지 않고 평등하기 위한 노력은 국제적이어야 한다는 것

둘째 국제결혼 관련된 폭력, 차별, 착취를 근절하기 위한 국제사회, 해당국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상업적 국제결혼정보업소근절도 여기에 포함)

그리고 세계적으로 가난한 계층이 계속 가난해지는 현상,

여성들의 빈곤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상 속에 경제적 어려움의 탈출구로서 국제결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여기에는 분명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묘하게 결합되어

전세계의 여성을 억압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관심과 고민을 가지고

모여있는 국제여성연대기구가 있는지 혹은 그런 기구를 만들기위해 고민하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 질문할 수 없었다.


사실 그러한 기구와 그러한 활동은 앞으로 나의 몫, 우리의 몫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날 진행되는 전략회의에도 참여하고 싶었지만, 다른 일정으로 아쉽게 돌아왔다. 새삼 열변을 토하며 발표했던 발제자, 그리고 청중들이 앞으로 새 세상을 만드는 동력이 되리라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뛰고 설레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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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왼손'속의 세상

 

* 저자의 말

나는, 단지 좀 특별하고 우회적이며 과학소설에 적합한 사고실험방법을 가지고 어느 시점에선가 당신이 우리를 보게 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진리란 상상의 문제이다.


* 왜 소머-케머주기가 나타났을까? (인간이 실험했다고 하는데)

  1. 지속적인 성적 능력을 갖지 않은 인간이 지성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확인해보고 싶어서

  2. 성적 충동을 불연속적인 시간 캡슐에 제한시키고, 남녀동성으로 소위 ‘평준화’를 이룩함으로써 성적 착취와 욕구 불만을 막으려고 한 것은 아닐까?

  3. 전쟁의 제거(지속적인 성적 포화상태와 조직사회의 공격성은 불가분한 인과관계)

  * 이러한 게센의 사회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남성과 여성이 구분되지 않음, 성적인 충만상태에서는 모두가 쉬는 시기의 존재, 느린 발전이 자연과 상생하는 법을 알게 해주었다는 관점, 아이들에 대한 공동육아, 소유의 개념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공공성을 확립해나가고, 시민사회 개개인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인상깊었다. 엘렌 식수가 말했듯, 문학 형식 자체가 획일성과 단일한 의미 속에 내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전복한다는 의미에 걸맞는 소설이다

    또 소위 논리정연,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지만 막연히 떠오르는 영감, 은유가 가진 진실함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마음도 들게 해 준 책


  * 기억에 남는 구절

311p. 이것은 지구, 헤인-다베낭, 그리고 치워프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음과 양을 가리키지요. ‘빛은 어둠의 왼손....’ 그러니까 빛과 어둠, 두려움과 용기, 추위와 따뜻함, 여성과 남성. 그것이 바로 당신입니다,세렘..둘인 동시에 하나이지요. 마치 눈 위의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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