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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7/16
    안성댁(2)
    플뢰르
  2. 2005/06/02
    출산드라(9)
    플뢰르
  3. 2004/12/15
    칭찬인듯 하지만..
    플뢰르
  4. 2004/10/11
    군가산점제(3)
    플뢰르
  5. 2004/10/05
    바니걸과 민토 도우미(6)
    플뢰르
  6. 2004/10/03
    걱정이 앞서는 성노동자 운동.(2)
    플뢰르
  7. 2004/10/03
    장윤정 - 어머나(2)
    플뢰르
  8. 2004/09/22
    여성안의 성적 보수성 - '처녀성을 버리다'
    플뢰르
  9. 2004/09/22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플뢰르
  10. 2004/09/21
    포르노를 보는 것도 성폭력.
    플뢰르

안성댁

해방사 과제로 제출한 것 중 안성댁 부분..

 

 

1) 나이든, 과부로서의 여성 - <안녕 프란체스카> ‘안성댁’
1) 줄거리
<안녕 프란체스카>의 중심은 불행한 사고 끝에 거처를 루마니아에서 한국으로 옮긴 뱀파이어 가족이다. 이들은 사회 어느 곳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직업도 없다.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프란체스카에게 물린 마흔 살 된 노총각 두일이다. 1편에서 이 가족이 살고 있는 집주인이었던 안성댁은 기구한 팔자 덕에 5번의 결혼과 5번의 장례를 치러낸 과부다. ‘박복한 인생살이, 올해나이 44살. 하지만 잦은 성형수술과 화려한 치장으로 실제 나이 분간은 힘들다. 남자는 여자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존재일 뿐이라고 여겨 재산을 노리고 남자를 만나는 꽃뱀계의 멤버이며 닉네임은 이문동 붉은 거미다. 켠을 본 순간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캐릭터의 그녀. <안녕, 프란체스카>가 2부로 넘어오면서 그녀는 어릴 적 고아원에 버렸던 친 딸을 찾게 되고 그 딸의 복수심으로 모았던 재산을 모두 잃고 ‘미친 여자’가 된다. 그러다 단 한번 그녀가 사랑하는 켠을 보고 제정신을 찾고 ‘건방진 금자씨’에 출연해 정상급 연예인이 된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나이를 속인 사실, 성형 사실, 이혼 경력 사실을 언론에 발설한 딸의 두 번째 복수를 당한다. 그녀는 이제 “헤퍼 보이는 화장법”이나 강의하는 F&S(flower&snake 꽃뱀)학원의 원장이 되었다.

2) 이야기 전개 구성 및 그 안의 이데올로기
2)-1. 여성의 젊음을 강요하는 사회
안성댁은 나이를 속이고 연예계에 입문하고 본성을 속이고 순진한 척 내숭을 떨어 톱스타가 된다. 그러다 실제 나이가 폭로되자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젊어 보이는 외모가 사실은 진짜가 아니라 성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그녀가 20대가 아닌 40대의 중년 여성이라는 것에 경악한다. 성형을 해서라도 젊음을 유지하는 여성, 그 여성에 대한 냉소적 시선. <안녕, 프란체스카>의 안성댁이 ‘웃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느 사회에서든 ‘젊은이’들을 선호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다. 활기, 자신감, 빠름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는 나라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건강한 사회는 미래도 건강하다. 그것이 우리가 ‘젊음’을 선호하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이다.
한국 사회 역시 젊음을 선호한다. 그리고 여성의 젊음을 유독 더 선호한다. 여성과 남성 모두 나이를 먹지만 지독하게 여성의 젊음을 선호하는 이 사회에서 나이든 여성은 또래 남성보다 더 큰 손해를 입는다. 어느 회사의 채용 공고를 보더라도 하나같이 29세 미만의 여성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키도 ‘적당’해야 하고 몸무게도 ‘적당’해야 하고 외모도 ‘적당’해야 한다. 반드시 젊어야 할 것, 예쁠 것, 날씬할 것, 키가 클 것, 고분고분할 것, 싹싹할 것. 그동안 여성들에게 사회는 대단히 많은 것들을 요구해 왔기에 그것에 점차 익숙해진 여성들이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진화’했을지도 모르겠다. 억압적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2. 과부
혼자 사는 40대 가량의 여성은 이혼했거나 남편과 사별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불쌍하지만 팔자가 센 여성이다. 그들은 또한 이기적이고 독하다. 가난하면 지지리 궁상이고 돈이 많으면 땅 투기를 하거나 값비싼 보석을 많이 가진 사치스러운 여성이다. 자식들의 결혼문제에 경제적 잣대로 이것저것 따지거나 혹은 안성댁처럼 자식을 아예 내다버리는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다. 거기에 나이든 여성에 대한 혐오까지 겹쳐져 결국 중년의 독신 여성은 경제적 계층에 관계없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안성댁은 5번의 결혼과 잇따른 배우자의 죽음, 그 유산으로 막대한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혼자 사는 40대 여성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남자는 여자의 등골을 휘게 하는 존재’라며 남성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꽃뱀’이 되어 돈을 위해 남성을 만난다. 그녀의 전 남편 5명도 재산을 노리고 만났을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설정이다.
그녀는 20살 연하의 켠(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00살이라지만)에게 반해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관계이다. 연상의 여인이라는 말은 있지만 연상의 남성이라는 말은 없다.(정희진, 2003) 남성에게 나이 권력은 성별 권력과 함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스 킴이 니콜라스 케이지와 결혼한 것은 자연스러운 로맨스지만 그 둘의 나이가 바뀌었더라면 그것은 해외토픽감이다. 부자인 나이 많은 남성이 젊은 여성, 아니 어린 여성을 돈 주고 사는 것이 영화의 흔한 소재가 된지 이미 오래다. 그 반대의 상황은 일반적으로 엽기적이며 다소 충격적인 일이 된다. 켠을 사랑하는 안성댁은 나이 어린 남자 밝히는 돈많은 과부로 압축된다. 또한 그녀가 켠을 사랑하는 방식은 ‘닭피를 먹고 자라 약간 모자란’ 그를 보살펴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년 여성에게 ‘여성’은 사라지고 ‘모성적’인 것만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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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드라

그녀는 뚱뚱교 교주.

그녀가 여신(혹은 여교주)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은 바로 여성들의 몸과 마음, 성애를 신적인 위치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동안 파괴되어온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독교 등의 가부장제의 종교에서 신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남성을 신격화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서구의 가부장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신성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백인 남성들에게는 그들이 하는 일이 신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성들이 만든 법률, 지식, 제도, 문화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니, 운명이니 하면서 강요되어 왔고 특히 유교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왕과 신하의 관계로 유추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이름은 출산드라.

 중국 고대 설화 '도산씨의 설화'에서 하(夏)대를 창업한 우는 도산의 딸과 부부의 정을 맺어 계라는 자식을 보게 되는데 우 임금의 아내였던 도산씨는 야합혼을 했다는 이유로 버림받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하 나라의 임금이 길 가다 만난 여자와 정을 통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유교적 지배계급의 논리에 전혀 맞지 않았으므로. 도산씨는 이후 에로스적 본능을 발산하는 여우로, 요물로 변신하게 되며 부정적인 현상으로 재구성된다. 남성 중심의 성적 욕망은 여성과 여우/요물의 이미지를 결합시키고 완벽하게 자애로운 어머니, 풍요로운 모성과 대립시킨다. 여기서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 아니다. 여성들에게 그녀의 손은 가족을 위해 일하는 손, 그녀의 가슴은 아들을 먹일 젖, 그녀의 질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것이다. '출산드라'에 따르면 여성은 열심히 먹어 '자연분만'을 해야 하고 '모유수유'를 해야 한다. 수천 년 전부터 생식, 쾌락, 자기 실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성을 즐겨온 남성과 달리 여성의 성은 아직까지도 출산의 영역에서 한정된다. 그녀가 등장할 때 나오는 배경음악이 KBS 드라마 '구미호 외전'의 주제곡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재미있는 우연이다.

 

그녀, 여성의 식욕을 말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코너에서 '여성'만의 식욕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식욕의 억제를 강요당해온 것은 언제나 여성이다. 성욕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식욕은 억압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식욕과 성욕은 통제되지 않는다. 남성의 성욕과 식욕은 무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에게 식욕과 성욕은 과도한 욕망이다. 여성에게 식욕은 수치이기에 밤에 혼자 먹는다. 여성의 성욕이 재생산을 위해서만 허용되듯, 여성의 식욕이 찬양되는 시기는 임신했을 때 뿐이다.

 사실 배고플 때 먹고 배부를 때 그만 먹는다면 살이 찌지 않는다. 몸의 신호에 귀 기울여 그에 따라 먹는다면 몸은 알아서 자기 활동량에 맞는 크기로 자란다. 몸의 신호에 따라 먹고 자는데 '살찐' 야생동물을 보았는가. 하지만 많은 여성들은 배가 당기고, 아랫배가 빡빡하다는 등 신체이상이 찾아와야만 배가 고픈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 것이지 배가 고픈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기 앞의 접시를 비웠을 때나 허리 단추가 버거울 때까지 먹고 나면 배가 부르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배가 터질 지경인 것이지 단순히 배가 부른 정도가 아니다. 많은 여성들은 정말로 고픈 곳이 어디인가를 구별하지 못하여 외로움과 같은 감정적 허기가 찾아올 때에도 먹으려 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많이 먹게 되거나, 아예 먹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다. 대범하고 무뎌서 상처받는 일이 흔치 않고 자기 치유가 빠른 사람들은 많이 먹거나 못 먹는 것에 시달릴 위험이 적다. 결국 여성에게 감정의 고삐를 늦출 수 없게 만드는 범인은 누구인가.

 

'재미'라는 이름의 폭력

나는 사실 많은 언론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것처럼 그녀가 남성중심의 개그계에 '여풍'을 불어왔는가, 살이 쪘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폭력을 감내하고 있는 뚱뚱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몸짱'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다이어트'가 복음이 되어버린 요즘, '먹다 지쳐 잠이 들면 축복을 받으리니'라고 외치는 '개그콘서트'의 '출산드라'는 가슴 확 뚫리는 한 판 통쾌함을 선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뚱뚱한 사람을 희화화하고 조롱거리로 삼는 듯 싶다. 몸에 대한 관심이 늘고, 섹시한 몸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이전보다 몸을 과시하는 시대가 됐다. 문제는 오로지 한 가지 정답만이 제시된다는 것이다. 뚱뚱한 사람도 있고 날씬한 사람도 있고 마른 사람도 있다. '뚱뚱교'가 마르고 뚱뚱한 것을 넘어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사랑할 것을 설파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개그'에 대한 지나친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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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인듯 하지만..


 

 

요새 재밌는 개그프로그램.

말투가 재밌어서 즐겨 본다.

도입부에 항상 하는 저 멘트는, 억양이 포인트인데 무지막지한 칭찬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을 얼마나 억압하는 말들인지..

 

느끼지 못하면 모른다.

모르는 건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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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가산점제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본 군가산점제 논쟁 

Manifesto Ⅱ*

1. 국가는 왜 헌법을 어겨가면서 군가산점제를 존속하려 하는가?

- 여성과 군대, 그리고 시민권

1) 군가산점제와 성(性)정치

"헌법소원한 여자들 정신대 보내서 똥꾸녕 찢어지게 고생 좀 시키자"(나우누리 plaza 35492)

"'남자들과는 다른 방법으로도!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도 남자들과 같은 보상을 바란다!'라고... 이것이 완전한 남녀평등 아닌가?"(천리안 열린광장 1658)

"여자들을 군대에 보내다뇨... 떡대 있다마난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던 부모 님이신데 가냘프고 여린 딸까지 군대에 보낸다면 얼마나 우리 부모님들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 까?… 참 제가 정말로 요기 조기 보면서 열받는 건 가산점 폐지나 뭐 그런게 아니구 '그까짓 군 대'니 '나두 갈 수 있음 가겠다'는 식의 일부 몰지각한 여성분들의 문구죠. … 딱 일주일만 데려 다가 한 겨울 새벽에 홀딱베껴서 빵빠레 더번하구 유격이나 시켜줬으면 좋겠군요."(천리안 열린 광장 385)

1998년 10월 19일, 네 명의 이화여대 졸업생들과 신체 장애가 있는 한 연세대 남성이 제대 군인지원에 관한 법률 제8조 제1항, 제3항 및 동법시행령 제3조가 자신들의 헌법상 보장된 평등권, 공무담임권,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면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이에 대해 1999년 12월 23일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들을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하지만 그 로부터 며칠 후 2000년 1월 7일 국방부와 보훈처는 위헌 결정이 난 [제대군인 지원법] 대신 [제대군인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나 [특별법] 형태로 관련 법률을 새로 마련하여 임시국회 에 제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군가산점제'를 둘 러싼 그토록 무성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논란은 사이버 테러의 문제에서부터 군대와 국가, 그리고 시민권에 이르는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 중에서 이러한 논란이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난 곳은 무엇보다도 사이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위헌 판결이 나자마자 수많은 '예비역'들과 '현역'들이 여성민우회와 여성노조를 비 롯한 여성단체의 게시판에 정상적인 논의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의 욕설들을 갈겨 놓으면서부 터 논쟁은 시작되었다. 그 뒤로부터 각종 사이버 공간은 여성에 대한 파시즘적 발언들로 도 배되었고-그 중에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여자들을 정신대에 보내자"라는 잔혹한 것도 있 다-, 이에 문제 제기하는 이, 특히 그가 여성일 경우에는 살의 등등한 메일들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이러한 폭력은 단지 언어적 측면을 넘어서 실제의 폭력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나 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헌법 소원한 여성들에 대한 협박을 들 수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한 집단에 대한 다른 집단의 공격이 이처럼 집요하고 조직적인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 서, 더군다나 공격을 받는 측이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서 이는 가히 파시즘을 방불케 한다.1)

하지만 이 문제는 시시껄렁한 시사토론 꺼리를 넘어서 '여성과 국가'와 '여성의 시민권'에 대 한 다소 심각한 수준의 문제에까지 연루되어 있다. '도대체 왜 국가는 형식적인 수준에서 최 소한의 국민의 기본권리를 명시한 헌법을 어기면서까지 '제대 군인'의 편을 드는가?'

우리는 이러한 총체적인 문제를 '성(性)정치'의 맥락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성의 정치 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이익을 위하여, 혹은 이에 반하여 양성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정치적 실천'을 의미한다.2)

군가산점제를 둘러싼 논쟁을 '성정치'의 맥락에서 본다는 것은 이것이 '남성, 여성 모두 피해 자이고, 이 문제는 결코 남녀간의 성대결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재고'함을 의미한다. 그야말 로 선정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사이버 토론장에서 이러한 주장이 가장 합리적이었음은 인정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러한 논란의 출발점이 억압적인 군대와 강제징병제의 문제점, 그 리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체계의 부재라는 국가정책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러한 지적은 적 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가산점제 문제가 '성대결'이 아니라는 주장은 논쟁이 '결과적으로' 성대 결로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군가산점 문제가 여성뿐 아니라 장애인 문제와도 얽혀있고, 무엇보다도 국가 정책의 실패임에도 불구하고 그 것이 여성 일반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났다는 점,3) 또 그러한 폭력이 무척이나 조직적이었다 는 점,4) 그리고 사이버 공간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남성들의 난동이 결과적으로 국가의 정책 으로 수용되었다는 점등을 살펴 볼 때, 결과적으로 그것은 철저한 '성대결'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군가산점제와 관련된 무수한 논란을 '성정치'의 맥락에서 살펴보려 한다. 그럼으로써만이 이러한 폭력과 국가정책의 함의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시민=유권자=병역을 수행할 수 있는 자=남성'

이를 위해서 먼저 시민권(civil right)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왜 국가가 같은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이해에 반하여 남성의 이해를 관철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결정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에도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의 기초가 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정의하는 시 민권은, 애초에 국민의 경계를 결정하는 역할을 했다. 우에노 치즈코의 논의에 따르면, 근대 화 프로젝트, 즉 국민을 정의하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지정학적, 인구학적인 배제를 수반한 다. 이는 '우리(국민)'를 정의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너희(곧 국민의 자격이 없는 자, 혹은 다 른 국가의 국민)'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프랑스의 '인권 선언les droits de I'homme et du citoyen'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곧 "그것은 글자 그대로 '남자homme' 및 '시민 citoyen'의 권리에 지나지 않으므로 여성과 노동자가 배제되어 있다."5) 따라서 많은 초기 여 성운동가들은 남성이 전유한 시민의 권리를 여성으로까지 확장하기 위해 시민권 운동, 곧 참정권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국민 국가'가 군사력과 생산력 증강을 국가 목표로 '국민'을 '인구', 즉 병력과 노동 력으로 환원할 경우 '병역'은 '국민화'의 열쇠가 된다. 그 때 '국민'은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가진 사람'과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명예를 갖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어, 전자만이 국민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6) 이는 '국민'과 '남성성'의 은밀한 그러나 결정 적인 동맹, 곧 공민성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남성으로 성별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7)

더 나아가 병역은 어느 시대에나 더 가진 자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테네가 자랑하는 중보병의 주력은 인구의 10%도 안 되는 시민들이었고, 로마군단 역시 로마 시민권 소유자 로 징병이 제한됐다. 국가에서 밀을 배급받아야 하는 무산자들은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8) 현재 한국에서 여성과 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병역을 수행할 수 있는 이른바 '신 체 건장한 남성'이 아닌 이들은 그야말로 잔여 범주이다.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되지"라 는 말은 어떠한 이론에 기대지 않고도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처음에 인용한 "남자들과는 다른 방법으로도!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이것이 완전한 남녀평등 아닌가?"라 는 주장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시민권이 언제나 국가에 대해 획일적인 방식의 공헌을 해야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한 공헌의 기준은 물론 병역이다. 이 에 따르면 병역, 혹은 병역과 같은 강도의 노동을 수행하지 않은 어린아이나 노인, 그리고 장애인과 여성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대 군인'과 같은 권리를 누리는 시민이 될 수 없는 것이다.9)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국에서 정말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물론 '돈과 빽' 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이들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도 사회의 엘리트로서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헌법이 규정하는 최소한의 시민으 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장애인과 여성은 '헌 법상 보장된 평등권, 공무담임권,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 없다. 곧 '시민 = 유권 자 = 병역을 수행할 수 있는 자 = 신체 건장한 남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집권 여당과 정부, 그리고 언론의 태도는 이러한 등식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유효한가를 잘 보여준다. 여당과 정부는 위헌 판결이 난 법조항을 얄팍한 방법을 써서 사실상 존속시키기 로 함으로써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이들이 총선 전에 무더기 표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방 법으로 (지역구도를 이용하는 것 외에) 한국 사회를 포괄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체성 집단인 '제대 군인'과 '현역군인'에 눈독을 들인 것은 정치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집단인 20대 여성들을 비롯하여 여성 일반의 정치적 목소리는 극 히 미미할 것이고, 몇몇 시끄러운 여성 단체의 소란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부 가 흘린 고만한 떡고물에 고통과 치욕의 2년 2개월을 보상할 수 있다고 믿는 제대 군인들이 이들의 목소리를 갖은 욕설로 알아서 짓밟아 줄테니, 정부와 여당이 이를 통과시키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적당한 때에 전국구 의원의 30%를 여성에게 할당하는 법안을 통과함으로써 상처받은 여성계를 달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언론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줄 것이다. 며칠 전 "군가산점 폐지 대구 9급 합격자 모두 여성",10) "군가산점 위헌 판결 장병 사기 저하 우려, 국방부 입장 발표",11) "초등교 임용, 군가산점 폐지로 남자 11명 탈락"12)?/a>?외치던 신문은, 바로 며칠 후 비례 대표제 30%를 통과한 진보적인 법정에 박수를 치고, 새로운 여성 정치 시대가 열렸다고 호들갑을 떨 것이기 때문이다.13)
 

2. 여성운동의 딜레마

군가산점 논쟁에 대한 여성들의 대응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차라 리 남성들과 동등하게 소위 '국방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정당하게 국민 대우를 받자는 것이 고, 다른 하나는 남성이 군대에서 경험하는 억압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아이를 낳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강조하며 여성들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은 모두 진정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네티즌을 중심으로 하는) 남성들이 주도하는 감정싸움에 즉각적으로 도출된 대응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왜 여성은 군대에 안 가는가라는 물음에 온갖 구실로 변명을 해야만 하는 현재와 같 은 문제 설정은 본말이 전도된 것임이 분명하다. 실로 한국사회에서 군대문제는 너무나 많 은 문제들이 중첩되어 있어서 쉽사리 거론하기 힘든 부분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여성과 남성의 대립뿐만 아니라 국가의 보상체계, 분단상황, 억압적인 군대 문화, 군대 중심으로 조 직된 사회 등 결코 단순화하기 힘든 여러 현상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성별적인 관점, 이 번 싸움에서도 불거졌다시피 여성과 남성의 적대, 역시 한국 사회에서 군대 문제를 둘러싼 여러 쟁점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 모든 문제가 복합적이며 사회적 관심도가 깊어질수록, 더 욱 중요하게 요청되는 것은 일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폐쇄고리를 넘어서는 여성운동의 대 응논리를 만드는 일이다.

1) 여성은 대신 아기를 낳는다?

먼저 여성은 '아이를 낳기 때문에' 군대는 면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방식에 대해 살펴 보자.

그러나 이는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남성을 위해서, 나아가 국가를 위해서라는 주장과 역 설적으로 통한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여러모로 여성의 출산을 통제해 온 것이 사실이다. 과 거 정권들에 의해 시행된 가족계획정책이나 피임정책 등은 이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 만 약 여성이 정말로 국가를 위해 혹은 남성을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강제 징집에 의한 군복무 수행과 마찬가지로 '의무사항'으로 정해진 것인가? 이러한 식의 주장은 이제까지 여성운동의 정치에서 이룬 성과들, 다시 말해 여성의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투쟁 의 성과들을 모두 무화시키는 논리일 뿐 아니라 페미니즘을 '국가'라는 틀 속에 가둬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성=출산을 위한 존재'라는 논리에 숨어 있는 몇 가지 맹점들을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런 식의 주장은 여성을 다시 자연에 묶어두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여성은 아이 를 낳고 기르는 것이 본질적으로 적합하다는 주장은 여성운동가들이 이제껏 물리치기 위해 노력해온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의 하나이다. 여성은 아이를 낳을 몸이기에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 여성의 음주나 흡연은 아기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주장 등은 바로 이와 같이 여성 은 본질적으로 아이를 낳기 위한 존재라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막 족쇄를 풀어내 고 자신의 몸에 대한 자율성을 찾기 시작한 여성들을 족쇄를 채워 다시 가둘 생각이 아니라 면, 이런 식의 논리는 여러모로 무익한 주장임에 틀림없다.

둘째, 여성의 출산이 국가에 종속된 것이라면, 이는 역으로 출산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정당 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성의 몸은 국가에 종속된 것인가? 여성이 국민 자격을 얻기 위해 반대급부로 출산의 의무를 다해야 한단 말인가? 이는 극단적으로는 2차 대전 당시 독 일이나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여성들이 담당했던 역할, 즉 충성스러운 제국의 신민(臣民)을 낳아줌으로써 국가에 기여했던 여성들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비판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우에노 치즈코는 2차 대전 당시 가해 국가였던 일본이나 독일의 출산 정책을 검 토하면서 출산이 국가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고 자체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발상일수 있는가 를 지적하고 있다. "세계 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찌는 혼인 연령 남녀비의 불균형으로 '아리아 인종' 여성들에게 결혼 난이 일고 있는 것을 우려하면서 인구증가를 위해 '미혼모'를 권장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친위대와 같은 나찌 엘리트와 미혼 여성의 '불륜을 권장하는' 주 장까지 포함하였다 … 나찌는 '열등인종'을 말살시키기 위해 '죽음의 공장'을 만들었지만 논 리적으로 그들의 우생 사상 배후에는 출산 품질관리를 수반하는 '재생산 공장'의 가능성이 상정되고 있다."14)

2) 차라리 군대를 가겠다

한편 남성 네티즌들의 극성 때문에 일각에서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여자들도 군대에 가서 이들의 입을 막아버리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제도적으로) 못 가게 해서 안 간 거지, 가기 싫어서 혹은 능력이 모자라서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의 대부분은 어떤 진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구차하니 차라리', 혹은 '인간은 모두 출발점이 똑같다. 남성과 여성 모두 인간이다. 따라서 여성 또한 남성과 평등하다.'같은 평등 에 관한 일종의 형식 논리15)를 은연중에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다. 따라서 이러 한 여성들의 주장 또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하나의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자. 어쩌면 똑같이 군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도 같 다. 이 참에 혹독한 훈련을 통해 이제껏 계발된 적이 없었던 (때문에 여성 자신과 사회 모 두가 여성을 약자로 살게 했던) 여성의 육체를 단단하게 만들고, 우리도 군대갔다 왔노라고 큰소리 떵떵 치며 당당하게 살자! 술자리에서도 내가 군대에서 짬밥 먹을 때 얼마나 서글펐 는지 남자 후배들한테 설교도 하고 내가 그때 어떤 숫총각 놈을 따먹었으며 드디어 나도 처 녀 딱지 떼게 생겼다고 떠벌리는 거다. 회사 입사해서는 군대 규율이 온몸에 배어있기 때문 에 상사들에 복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고, 상사 및 동료들과 '내통'할 수 있는 술자리 에서는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얘깃거리인 군대 체험담에 동참하는 거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순진하고 비현실적이며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다. 여성 징병을 외치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근거로 강력히 거론하는 이스라엘의 경우를 살펴보자. 먼저 이스라엘이 라는 근거가 제기되는 방식부터 문제 제기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여성들도 군에 가지 않느 냐는 주장은 그녀들의 삶이 실질적으로 남성과 평등한지, 다른 모든 사회에서 자행되는 아 내구타와 같은 가정폭력은 벌어지지 않는지 등과 같은 현실적인 질문들을 모두 은폐한 상태 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질문들이 제대로 답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여성의 군 대행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징병 주장들의 배후에는 다만 '그녀들이 군대에 간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키려는 성급함과 단순함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안타깝게도 군대에 가는 이스라엘 여성들이 실질적으로 평등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주장보다는 오히려 가정폭력이 심각하다, 여성의 가사노동 전담이 가장 철저하다 혹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불평등의 수준에서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이 보다 일반적이다.

또한 이러한 전략은 '군복무'라는 고정불변의 기준에 여성을 끼워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한 계가 분명한 전략이다. 여성의 군대참여를 논하기 앞서 질문해야 할 것은 '군대' 자체가 고 정불변의 기준이냐는 점이다. 이것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수십 년간의 군부 독재를 경험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이었는지 기억하고 있으며, 이 시기를 통해 다져진 군대 문화(절대복종, 상명하달로 표상되는)가 온 사회 곳곳에 스며있으며 청산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불어 우리 사회 어느 부위 어느 조직에서나 지배적인 군대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간접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소 외되어 왔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성이 군대를 가야된다는 주장 역시 올바르 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앞으로 여성운동은 우리 사회의 조직원리로서의 군대 문화 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그렇다면 왜 남성의 폭력은 여성을 향했는가?

군복무 문제에 대해 우리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의 희생이 무척이나 크다는 점이다. 군대라는 것이 사회 전체에서 필요로 하는 공공재(public goods)라면, 그것에 대한 부담과, 그러한 부담에 대한 보상은 국가적인 책임이며, 그것의 결정은 사회적인 합의에 의 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사회의 그 누구에게라도 그러한 의무를 강요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게다가, 군대에서 개개 사병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질적 수준은, "국민"들에 게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만든다. 우리 사회의 징병제도가 단지 애국심 혹은 민족애의 발 로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은, 애초에 군가산점제 논쟁이 제기되었을 때, 많은 남성들이 "군대의 악몽"에 대한 호소의 목소리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런 희생에 대해서는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점, 곧 유린된 청춘 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정부가 흘려놓은 고만한 떡고물에 그들이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 만 현재의 상황은 비유하자면 조선시대에 사또와 임금의 부역과 병역에 시달린 수많은 남성 들이 그것에 대한 화풀이로 아내나 지나가는 동네 아녀자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격이다. 문 제는 신분제와 권력이다. 부역의 고통에 못 이겨 그들이 벌여야 하는 것은, 그리고 실제로 벌인 것은 민란이었다.

현재에도 문제는 본질적으로 같다. 요구는 국가에 해야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2년 2개월 동 안 정당한 임금과 경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또 가능한 한 기간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에 동참할 용의가 있다. 이런 문제 해결은 국가가 해야할 일이다. 국가는 원래부터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에 대 한 해결책의 하나로 내놓은 현재의 군가산점제는 국가 방위라는 공공재에 대한 비용을 비슷 한 연령의 여성들의 희생으로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는 점이 문제다. 그것도 애초부터 기회의 평등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다들 아는 바처럼 평균점수가 거의 비슷한 공무원 시험 에서 가산점은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시험 성적이 좋다하 더라도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락되기 일쑤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불만이 국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군대에서의 경험 자체가 현재의 군대 체제를 자연적인 것으로 믿게 만들고, 국가에 대 한 비판의식을 거세했을 가능성이 있다. 국방의 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그 리고 수많은 반공교육과 정신개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군대에 대해 보다 근 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군대를 말 그대로 "국토를 방위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조직"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가? 남한 역사상 군대는 폭압적인 정권의 가장 효 과적인 동원수단이었다. 군대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들에 대한 물리적인 탄압도구였을 뿐 아니라, 일방적인 상명하복의 논리를 각인시킴으로서 사회적인 문제제기를 할 능력마저 거세시켜 버리는 그러한 공간이었다.

또 하나, 과연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커다란 군대가 필요한가?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도 "북괴 공산당이 쳐들어오면 어쩔래?"라며 발끈할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한 반공, 안보의 논리가 어떠한 집단의 이해에 복무하였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우 리 사회 지배 집단의 비민주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상투적인 논리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도 진행되어온 평화군축운동이라던가, 평화협정체결운동 등은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조금 다른 눈을 보여준다. 게다가, 현대전의 개념은 (물론, 이러한 현상이 단지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군축의 가능성을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다.

둘째, 그러나 이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부과했다기보다는 피해의식에 대한 자발적인 합리화 의 과정일 수 있다. 2년 2개월 동안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희생해야되는 상 황에 놓여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을 정당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 여 그들은 실제로 국방의 의무가 신성하다고 믿고, 사나이의 우월감에 도취된다. 그리고 그 시대를 모 맥주 광고처럼 인생의 한창기로 회고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 록 듣는 수많은 무용담이 그것의 증거이다.

셋째, 이러한 객관적인 상황과 주관적인 합리화는,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국 방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자를 자신과 같은 정당하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군대를 다녀와야 인간이 되지"가 그러한 예이다. 그들은 거대한 남성으로서의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군가산점제가 단지 공무원에게 만 적용됨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엄청난 일체감과 결속력을 보여준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천리안 열린광장에 올라온 글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방위병, 공익요원, 산업 체, 60만 현역, 예비역, 민방위 할 것 없이 우리의 젊음이 꿈틀거리는 그 군번 하나를 내걸 고.... 여성징병 의무화운동에 서명한다"(천리안, 열린광장 186), "1. 군번: 86-7110**** 2. 성 명: ** 3. 군복무장소: (*** 여단 해안산위) ... 내인생인데... 내인생도 똑같이 소중한데... 누 구 맘대로... 공무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저 역시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천리안 열린광장) 군대에 만연하는 포르노, 매춘 등 여성을 비하하는 문화 역시 이에 일조한다.

마지막으로 이는 만연하는 실업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역사적으로 실업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여성혐오증이 만연했다. 영국의 대처 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시기가 그러 했다. 그리고 IMF 이후 우리 사회 역시 그러하다. 그 때 정부와 자본가, 그리고 남성 노동 자들까지도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극성을 부렸다. 그리고 실제로 대량 여성해고 사태들이 벌어졌다. 따라서 군가산점 문제 역시 여성의 취업기회를 구조적, 그리고 조직적으로 막는 것을 찬성한다는 점에서 실업 시기 이러한 여성혐오증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4. 결론

그리하여 이번 군가산점 문제는 공무원 시험을 앞둔 20대 여성들을 제물로 득표에 눈이 먼 정부와 여당이 벌인 굿에 터프가이들이 놀아난 격이다. 그것은 분명 남녀 대결이 아니었음 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남녀대결, 아니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일방적인 테러로 현상하였으며, 이 글의 목적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는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여성운동의 논리가 앞서 언급한 딜레마를 넘어서 그러한 논의의 폐 쇄회로가 시작되고 있는 근본적인 시발점인 군대 제도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고 본다. 사 회적 합의가 결여된 군대 징집은 정당한 것인가? 남북 평화협정 체결은 (달에 우주정거장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요원하기만 한 일인가? 군대 징집을 통해 국가 가 노리는 것은 사회 통합 유지가 아닐까? 또한 이 과정에서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남성 우 위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은 아닐까? 논의의 닫힌 고리를 넘어 근본적 인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이 문제의 본질이 드러날 것이고 거기서부터 모든 해법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대안은 많은 여성 단체들이 제안하는 바와 같이 모병제이다. 여기서 우 리가 정부의 정책 관료들이 그러는 것처럼 세련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출하는 것은 현재로 서는 불가능하다.16) 앞으로 대안을 꾸준히 고민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궁극적으로 해결 은 국가가 해야한다. 문제는 그것이 가능하도록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당화되고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군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그것이 필요한 한에서 의무를 최소화하 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타당한 보상을 하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굶주릴 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이들의 떡을 빼앗아 먹는 것은 그리고 애초에 그들이 굶 주린 것은 바로 이들, 곧 사회적 약자들 때문이라고 우기는 것은 파시즘이다. 지긋지긋한 파 시즘의 장단에 더 이상 놀아나지 말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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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주>


* ManifestoⅡ는 90년대 후반에 서울대에서 대학여성운동을 하던 이들이 졸업 후 작년에 만든 여성운동모임이다.

1) 비슷한 시기에 사이버 공간에서 논란이 되었던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문제나 낙선운동에 대해서도, KBO나 보수 정치권에 대한 공격이 이처럼 원색적이고 파괴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군가산점제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테러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공격받는 측이 사회적 기득권자라는 점에서 군가산점제와는 다소 차원이 다르다.

2) Sylbia Walby, 1988, "Gender politics and Social Theory", Sociology Vol.22 No 2. 이는 한편으로 급진적 페미니즘의 전통적인 입장, 곧 '여성 일반의 공통적 이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낙관적인 동시에 여성 내부의 무수한 차이와 갈등을 봉쇄하는 '보편적 자매애'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3) 이는 헌법 소원을 한 이들 중 폭력적 언설이 유독 네 명의 여성들과 나아가 그들의 출신학교인 이화여대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4) 우리는 '여성이 군대에 가지 않는 문제'에 대한 집단적 위헌 소송, 민우회를 비롯한 각종 여성단체 사이트의 게시판 도배와 크래킹, 군가산제의 위헌여부를 따지는 헌법 소송을 건 당사자들에 대한 물리적 테러 등을 기억한다. 

5) 우에노 치즈코, 앞의 책, 18쪽.

6) 같은 책, 26~27쪽.

7) 이는 프롤레타리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자유주의 사상에서 시민은 '재산을 가진 자'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가 시민이 된다는 것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여성이 시민이 된다는 것만큼 어불성설이 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정치는 이러한 시민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정치가 취해온 전략, 곧 근대적 인간을 '노동하는 인간'으로 재정의하는 전략 역시 노동의 범주를 협소하게 정의함으로써 여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곧 자본주의하에서의 임노동만을 '생산적인 노동'으로 정의함으로써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을, 따라서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고 다만 가장의 피부양자로만 위치짓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과 여성 활동가들은 이러한 생산적 노동의 범주를 확장시키고자 노력해왔다. 대표적으로 레오뽈디나 포르뚜나띠의 {재생산의 비밀}(윤수종 역, 박종철출판사)을 들 수 있다.

8) 김영하, [병역, 성대결이 아니다], 중앙일보 1999년 12월 29일자.

99) 최근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실업자 운동에서 우리는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구조적인 실업에 대해 실업자 운동은 앞서 말한 노동의 인간학(각주 8 참조), 곧 '노동하는 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규정을 더욱 확장시켰다. 노동의 인간학은 자칫하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권리도 없다'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업자들이 느끼는 인간적인 고통과 자괴감은 여기서 기원한다. 하지만 자본주의하의 구조적 실업으로 인해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자' 역시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누려야 한다. 병역의 의무도 마찬가지이다. 곧 국가에 대해 병역과 동등한 수준에서 '공헌'하지 않는 자 역시 동등한 시민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10) {중앙일보}, 1999년 12월 30일자

11) {중앙일보}, 같은 날

12) {조선일보}, 2000년 1월 14일

13) 비례대표 여성 30% 할당제는, 이 글이 씌어지고 난 뒤 치러진 4·13 총선에서 각 정당들의 거짓 해프닝이었음이 드러났다. 이는 '여성의 정계참여'를 여성운동의 진보와 등치시키는 '일부' 여성운동에 주는 교훈이 크다.

14) 우에노 치즈코, 앞의 책, 박종철출판사, 69~70쪽.

15) 이것이 '형식 논리'임은 앞서 누차 얘기된 바대로 현실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형식 논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16) 이에 대한 최근 논의는 {여성과 사회} 최근호, 군가산점제 특집 글들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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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걸과 민토 도우미

바니걸이 뭐하는 사람들인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을 읽고 알게 되었다.

글로리아가 위장취업하여 알아본 플레이보이 클럽의 웨이트리스 바니걸의 모습에서 예쁘게 웃으며 서 있는 민들레 영토의 도우미의 모습이 겹쳐졌다면 내가 과대망상증일까.

 

 민들레 영토 혹은 공간을 채우는 사랑.

 어김없이 한 켠에는 '이달의 도우미'라던지, '미소 천사 도우미'따위의 컬러풀한 글씨들로 그 지점의 도우미들의 한껏 멋진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들은 분홍색의 공주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빨간 머리띠 아니면 작은 반짝이 왕관을 하고는 생긋 웃는 얼굴로 서빙을 하고 음료를 따라준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민토에서 일하는 것이 굉장한 프라이드라고 여겨지고 있다는 것.

 '아름다운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문학을 사랑하고 소비문화를 반대한다는 이 거창한 공간에서 일한다는 지적인 충만감과 '그곳에서 일하는 애들은 다 이쁘고 멋지더라'는 나름의 우쭐함 얻고 있는 듯 하다.(이는 민토에서 1년간 일한 적 있는 본인의 동생을 보고 느낀 것이니 다른 도우미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민토의 도우미들이 하나같이 이쁘고 잘생기고 키크고 날씬한건, 우연스럽게도 그런 것일까, '무엇이든지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설립이념(?)에 따라서인가?

 

 여성의 예쁘고 깜찍한(혹은 섹시하기까지 한) 이미지를 함께 팔아먹는다는 것, 비록 바니걸보다는 그 옷차림에 있어서 덜 노골적이지만 그런 옷차림이 오히려 민토의 주 고객에게 더 잘 '먹히는' 최대의 선택이었던 듯 하다.

 더군다나 여성뿐 아니라 남성직원 채용 시 역시 외모를 일순위로 본다는 것이 어쩜 그리 60년대 플레이보이 클럽과 꼭 닮아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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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앞서는 성노동자 운동.

* 이 글은 헤헤님의 [[펌] 성매매운동의 새로운 모색을 위하여]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성노동자 운동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으나,

 

성매매가 일단 합의되고 인정되는 '성노동자 운동'에 노파심이 생긴다.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성을 어떻게 서비스로 제공하지?

 

성과 노동을 어떻게 똑같이 볼 수 있지?!

 

성적 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 범죄가 아닌 것이 되면, 돈을 주고 성을 사고 팔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의 가부장적 가족구성 체계가 해체될 수 있을까?

 

성적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 범죄가 아닌 것, 그러니까 의료나 교육서비스같은 것과 같이 일반화된다면.....?!

 

포르노의 폭력성과 반여성적 요소가 제거되면 맘껏 포르노를 즐겨도 되는 것인가???

 

.............내가 너무 무지한 걸까..... 아님 고루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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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 어머나



이노래, 멜로디 참 좋다.

젊은 여가수가 트로트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도 신선하다.

대학가요제 출신이란다.

 

그런데 가사가 문제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안돼요 왜이래요 묻지 말아요
더이상 내게 원하시면 안돼요
오늘 처음 만난 당신이지만
내사랑인걸요 헤어지면 남이돼요
모른척하겠지만 좋아해요 사랑해요
거짓말처럼 당신을 사랑해요
소설속에 영화속에
멋진 주인공은 아니지만
괜찮아요 말해봐요
당신 위해서라면 다 줄께요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바람입니다
안돼요 왜이래요 잡지말아요
더이상 내게 오시면 안돼요'

 

 

나참......

동생에게 주저리주저리 얘기했더니, 그럼 언니는 무슨 노래를 듣고 살래.. 하길래 것도 일리가 있지 싶다.

그런데, 일반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노래는 마음이 바람이요 갈대이고 헤어지면 모른척할 처음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의 가슴아픈 사랑이야기다. 그뿐으로 듣자.

 

p.s- 사랑을 하게 되면, 혹은 이별을 하게 되면 모든 유행가 속의 가사가 다 자기 얘기 같다고 한다.

 그런데.. 유행가 속 가사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닐까?

 모든 가요가 좀 다른 방식으로 이별과 사랑을 표현했더라면, 우리의 감정은 좀 달라졌을 거란 얘기다.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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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안의 성적 보수성 - '처녀성을 버리다'

* 이 글은 야옹이님의 [Fat girl]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이름부터 짜증나는 '처녀성'이란 것.

 

fat girl은 아직 못봤지만 야옹이님의 글에 따르면, 그리고 야옹이님의 글을 트랙백한 미류님의 글에 따르면,

 

여성의 욕망이란 것이 남성의 구조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

 

그렇다면, 여성의 욕망이 남성의 구조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여성해방인가..?

 

위험하고 어려운 문제인데, 그리고 좀 다른 얘기인 것 같은데 성폭력문제, 성매매 문제 반대를 이야기하다보면 성 보수주의자라 낙인찍히고 순결이데올로기를 비판하다보면 성 자유주의자라 낙인찍힌다.

 

낙태 반대 캠페인을 하는 고등학생들,

순결 서약을 하고 순결 사탕을 나눠먹는 여대생들....

아..... 난 남성들과 싸우는 것 보다 이런 여성들을 바라보는 것이 더 힘들고 가슴아프다.

 

비몽사몽 쓰다보니 이상한 글이 되어버렸네..ㅡ,.ㅡ

나중에 다시 써야지^^;

 

 

p.s- '처녀성을 버리는 것'이 통과의례가 아니라 '처녀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것'을 깨닫는 것이  성장통인 것 같다... 아.. 평생 성장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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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 이 글은 젤소미나님의 [성폭력 사건, 영원한 되풀이...]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피해자는 성폭력을 당했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드러내는 것 자체가 힘이 든다..

피해자가 이후 모든 고통의 시간이 지나 생존할 때 가해자를 그저 가해자로, 내 옆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을 때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영원히 그렇게 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피해자의 이런 상태 역시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이후에도 계속 받아들일 수 없으면-, 그냥 그런거다.

 

난 당사자주의를 옹호한다는 어떤 동지의 말에 적극! 공감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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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를 보는 것도 성폭력.

* 이 글은 바보님의 [20세기 소년에 나타난 성폭력의 본질과 폭로.]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포르노를 보는 것 역시 성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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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려 수정 버튼을 눌렀으나,

 

'포르노를 보는 것 역시 성폭력이다'

 

이만큼 명징하게 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음.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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