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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시 옛집답사(1)...맹씨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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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2/13
    상당산성을 걸으며
    우중산책

아산시 옛집답사(1)...맹씨행단

  • 등록일
    2005/03/06 15:09
  • 수정일
    2005/03/06 15:09

청주에서 천천히 가면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가늘 길이야 많지만

난 청주에서 조치원을 거쳐 1번국도를따라서 천안방면으로 가다가

행정리에서 광덕사 이정표를 보고 가다가 아산시로 넘어가는 길을 택한다.

 

가기전에 광덕사에 들러 절구경을 하고 난 후

쉬엄쉬엄 고개하나를 넘으면 나타나는 곳이 맹씨행단이다.

 

원래는 고려말

황금보기를 돌같이하라고 했다고 어린 시절 누누이 들었던

그 이상한 사람 최영장군이 살던 곳이다.

뭐 황금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면 모를까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런 명언을 남긴 사람의 집이니

검소하리라 생각하지만

널찍한 집터에 작은 성이 연상될 정도로 돌담이 인상적인 집이다.

 

 

 

위대한 사람들 특히, 오랫동안 사람들 입과 귀에 오르내리는 사람치고

이런 저런 야담스러운 전설이 없겠냐만은

최영장군의 이런 말은 약간 거스리는 경향이 아직도 있다.

실제 최영장군은 그 평가가 극과극을 달리는 사람이다.

 

누구는 이성계에 맞서 끝까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절을 높이산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이런 야담 즉, 세상의 명리(이해관계)에 초탈하고 오직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절만이

드높았다는 식으로 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까 ?

 

최영장군은 고려를 위해 끝가지 충절을 다한 것은 맞을 수 있지만

다른 부분 즉, 청렴결백하다는 식의 평가들은 충분히 문제가 있다.

 

최영장군은 고려에 충성을 다하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의 딸을 왕비 자리에 앉혔고

다라서 어떻게 보면 자신의 딸 혹은 사위를 위해 목숨을 다 바쳤다는 의혹을 사기도 하고

이성계가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세우게 되는데

실은 가장 일조한 인물중에 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군사력을 가졌고 그런 군사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딸을 왕비에 앉히고

그리고 모든 권력의 정점에 서려한 것 또한 의혹을 받는 한가지 사실이다.

(아 ! 물론 그런것가지를 포함에서 고려에 대한 충성을 위해

어쩔수 없었다면 뭐...뭐라 할 이야기는 없지만 말이다....?...헤헤헤)

 

 

뭐 여하튼 그런 최영장군이 터를 잡았던 곳이 이곳 맹씨 행단이다.

최영장군이 옆집에 살던 어린 맹사성을 보고 그 영특함이 탐이나 자신의 손녀를 시집보내고

나중에는 이집가지 물려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원래 맹사성은 고려 수도인 개성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온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마도 개성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온 것은 맹사성의 아버지가 당시 개성의 혼란스러움을 피해 이사왔다.

이사 당시 맹사성은 5-10세 사이의 소년이었다.

 

원래 맹사성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에서 관직을 지낸 귀족가문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조선개국후 두문동 72현에 속했을 정도로 고려에 대한 충절이 있는 집안이었다.

두문동 72현 지금의 개성시 인근의 개풍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계곡으로

나중에 이성계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맹사성의 아버지 또한 함께 두문동 72현에 속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하튼 살아남아서 이곳 맹씨행단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여하튼 최영장군이 집을 주었다기 보다

최영장군이 이성게일파에게 집안이 풍지박산 난후 이웃에 살던 맹사성 즉,

손녀사위에게  재산이 이어졌을 것이다.

맹사성이 고려파였던 최영장군 집안과 혼인을 맺은 것도 이러한 집안의 가풍탓일것이다.

 

우선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맹사성 유물전시관이다.

맹사성이 사용하던 옥피리와 기타 맹사성의 글씨들 뭐 그런 것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평소에는 거의 잠겨있어서 보려면 맹사성 고택안에 있는 집에서 사시는  

21대 후손 할아버지에게 부탁하면된다.

 

 

주차장 옆길로 바로 나타나는 것이 높게 솟은 대문이고 이 대문을 들어서면

처음 나타나는 것이 바로 21대 후손 할아버지가 사시는 집이다.

 

 

종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할아버지는 꽤 친절하시다.

다만 할아버지께 이런 저런 설명 듣고나면

할아버지의 은행 좀 사가라는 말을 뿌리칠 수 없어서

5000원 정도라도 투자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뭐 그 정도는 이 집을 감상하는 비용정도로 생각하면 생각보다 많이

듬뿍듬뿍 퍼주시는 그 손길이 더욱더 정겨워 집구경하는 기분이 더 좋아지니

그럭저럭 사가지고 오는 재미도 있다.

(솔직히  집에와서 맥주 안주로 한 움큼 먹으면 그 맛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지만...헤헤)

 

 

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은행나무 행단과 고택이 나온다

와 ! 하는 탄성이 나올정도로 큰 은행나무가 두그루 있는데

두 그루 모두 몇개의 나무가 함게 자란 형국이라 딱히 두그루라 이야기하긴

좀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따지지 않고 보면 와 ! 하는 감탄이 나온다.

다만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때 가면 더욱더 입이 벌어지는 나무다.

이번에 갔을땐 잎도 자라지 않아 좀 그 위용이 실감나지 않지만

언젠가 보았던 가을날의 풍경은 아직도 찐한 여운을 준다.

 


이 은행나무 정면 앞쪽으로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한문으로 공(  )자 형태인데

고려시대 민가양식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양식이다.

오늘날 흔히 보는 ㄷ자형집의 시조격으로 보이는 구조인데

양쪽 날개채와 가운데 대청마루 부분의 처마선이 거의 일직선을 이루어서

그냥 지붕만 보면 정사각형의 ㅁ자형 집처럼 보이지만 평면도 상으로 보면 완벽한

공(  )자형 집이다.

 

 

 

그리고 양 날개채는 구들방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양날개채는 맞배지붕이고 뒤쪽으로 높게 굴뚝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한옥집을 구경다니면

이런 굴뚝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특히 어느 집이나 거의 대동소이한 집의 구조에 반해

굴뚝은 그 집주인의 취향과 그 집의 집터에 영향을 받아 제각각인 경우가 많고

특히 그 높이나 장식은 마치 절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탑처럼

예술적 감흥을 나에게 준다.

 

                               < 굴뚝의 지붕 >

 

또한 이렇게 날개채가 앞뒤로 약간씩 튀어 나옴으로서 옆에서 본 칸살이는

거의 정사면체의 면처럼 느껴지며 정확히 삼등분된 칸살이를 보여준다.

 

 

보통 ㄷ자형 한옥집에서는 옆면의 칸살이가 이렇게 정확한 3칸살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자형의 중심의 칸살이는 대들보의 길이에 좌우되고 날개채는 도리의 칸살이에

맞추다 보니 생기는 약간씩의 변형인데

이집은 중앙부분의 대들보에 의한 칸살이 길이를 양 날개채로 튀어나감으로써

묘한 안정감을 갖게 된 것 같다.

  

 

고택 뒤로 세덕사라는 사당채가 있고 이런 고택과 사당채를 둘러싸고 돌담이 한 겹 두르고

그 한겹 두른 돌담 밖에 오래된 나무들이 있으며

그 밖으로 또 한 겹의 돌담이 두르고 있다.

 

21대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안쪽 돌담은 싸은지 오래되지 않았고

바깥쪽 돌담은 옛날부터 있었던 돌담이란다.

 

 

바깥 돌담으로 짐작해 보는 집의 규모는 상당해서

청백리의 표상이자 지붕이 세어도 고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고불 맹사성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 어려워 보인다.


이 부분에서도

실제 잘못 알려져 있는 부분이 있다.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서울에서 관직을 갖게되면

서울 도성안 혹은 남산 근처에 자신이 거주할 집들을 구입하였다.

물론 경제적인 차이로 그 크기나 장소가 정해지기는 하지만

한번 이렇게 도성안에다 집을 마련하면 아예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할때까지는 수십년동안 기거를 해야 했기에 요즘같이 전세집을 얻는 방식이아니라

아예 집을 샀다는 것이다.

 

특히 맹사성같이 48년이나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했던 정승들은

당연히 집을 구입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맹사성은 가족 대부분을 자신의 세거지인 이곳 아산시에 남겨두고

끝가지 서울에다가 주거지를 마련하지 않은 모양이다.

따라서 서울의 거쳐는 언제나 요즘 전세살이 처럼 허름한 집을

그때그때 옮겨다니며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맹사성이 이렇게 당시의 관료들과 다르게 자신의 주거지를 서울로 옮기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집안의 내력때문이리라

 

맹사성의 할아버지가 두문동 72현의 한분이고

아버지는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끝까지 따르지 못한 죄책감과

여전히 조선을 인정할 수 없었던 마음이 남아 있었고

누구보다도 이런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맹사성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의 관직에 나아갔지만 언제라도 미련을 버리고

자신의 세거지로 내려갈 생각으로 서울에서의 그런 궁핍한 삶을 살았으리라.

 

실제 이곳 맹씨행단이 있는 곳은 광덕산의 서쪽 줄기에 해당한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조선을 반대하며 죽어갔던 곳이

개성의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문동이고 보면

같은 지명의 서쪽 기슭에 세거지를 정하면서까지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려한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세거지를 서울로 옮길 수 는 없었지 않았겠나 ?

 

이런 맹사성네 3부자의 관계는 당시 매우 유명하여

조선전기에 제작 배포된 효에 관련된 삼강행실도에 삽화와 일화로 소개되었을 정도이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집이 누추했던 것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던 곳이니 애써 고칠 이유가 없어 그냥 살은 탓일게다.

다만 청백리였던 것은 사실로 보이는데

이는 그 스스로 할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져버리고 조선의 관직에 나간 이상

성리학자로서의 실천에 입각한 활동이외에

스스로 부귀공명을 꾀하기엔 스스로의 모순된 행동이며

주변의 따가운 시선들을 의식해서라도 감히 부정을 탐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여하튼

고려에 대한 충절과 조선에 대한 충절 사이에서 언제나 고민했던

한 지식인의 삶을 엿보게 해주는 곳이 이곳 맹씨 행단이다.

 

이 돌담 넘어로 쪽문을 지나면 구괴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원래는 황희정승과 독수 권진이라는 정승, 그리고 맹사성이

이곳에서 서로의 생각과 국정운영방안등을 논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나무 3 그루씩 9그루를 심었었는데 지금은 2그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이 2그루에다가 소마누가 대여섯개 높게 자라있어서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마치 맹씨 고택의 부속된 정원처럼 바로 인근에 있어서

고려시기의 원림 즉, 정원의 조경에 대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 듯 보이나

실제 이에 대한 연구나 조사된 바가 없으니 나같은 초짜가 뭐라 말할 순 없겠다 싶다.

 

다만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돌담과 그 인근의 산책로를 겸한 정가가 있는 곳이

언젠가 답사했던 의성군 산운마을의 한 민가의 잘 조성된 원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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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옛집기행(2)

  • 등록일
    2005/02/25 07:54
  • 수정일
    2005/02/25 07:54

칠성을 뒤로 하고 쌍곡 계곡을 거쳐

화양동으로 해서 청천으로 나아갔다.

 

원래는 중간에 화양계곡에서

만동묘며 암서재며 여하튼 우암 송시열 관련 유적을 볼까도 했는데

내가 워낙 송시열을 좋아하지 않다보니

입장료 핑계 시간 핑계대며 그냥 지나쳤다.

 

그리곤 곧바로 청전으로 갔다.

 


청천은 매우 작은 면소재지다.

 

소재지를 통과하는데 차로 2분도 채 안걸리는

그야말로 지천에 널려있는 그 작디작은 마을이다.

속리산 화양계곡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그럭저럭 먹고 사는데는 무리없어 보이지만

살기 힘든 사람들의 속내야 나같은 떠돌이가 알 수 없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 곳에서도

참 힘들겠구나 하는 전국 어디서나 볼수 있는 평균적인 삶이

언듯 보인 것은

청천 시장에서 벌어지는 이 공사를 보면서다.

 

이젠 전국 어느 시장을 가도 다 이 모양으로 바뀔 모양이다.

아마 재래시장이 망해가는 것을 막기위한 마지막 몸부림처럼

다들 시장마다 이런 시설물로 다 바꾸는 모양이다.


청천에도 옛날집이 있다.

 

여기서 잠깐 퀴즈.....??

 

위 사진에서 문화재 이름은 ?????

헤헤헤 충북 양로원이다.

 

그럭저럭 때려 맞춰도 갈색 이정표면 문화재 아니겠나 싶다.

이 이정표를 보고 골목으로 쭉 따라 들어가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건물이 나온다

양로원 건물이냐구 ?? 글쎄...그것이.....헤헤헤

 

 

이 골목 정면으로 보이는 기와지붕위로 태극기가 휘날리는 건물이 중요민속자료이다.

 

 

 

이 건물은 조선말 충청가사를 지낸 송시현의 별당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인 1944년 충북양로원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문화재 이름이 충북양로원이 되었단다.

지금도 이 건물은 옆의 새로 지은 충북양로원 건물의 마당에 위치해 있다.

 

난 가끔 이런 것을 보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대개의 문화재 특히

가옥의 경우는 현 소유자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동방오현 중 한 명이라는 일두 정여창 고택도

문화재 명은 정경호 가옥이란다.

이유는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소유자 이름이 정경호씨라서 그런단다.

이 얼마나 웃긴 말이냐

누구 말대로 가옥 소유주가 청주시면 문화재 명도 청주시가 되는 거란다.

중요민속자료 청주시....우하하하...웃기지 않나 ?

 

송시현이라는 사람이 지었으면 차라리 송시현 가옥이라고 하지

충북양로원이라고 하니 누가 한옥집인 줄 알고 찾아 오겠는가 ?

참 한심한 공무원 편의주의다.

 

여하튼 각설하고

이 건물은 사랑채 안채가 옆으로 병렬식으로 지어진 것 같다.

지은지 100여년 정도 되었고

최근까지 사람이 살아서 그런지 관리는 매우 잘된 편이다.

건물은 민도리집에 ㄷ자형 집인데

골추녀를 쓰지 않고 서까래를 그냥 겹친 방식으로 지었는데

충청도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오히려 강원도 강릉이나 고성 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의 집이다.

솔직히 골추녀를 쓰지 않은 곳은 그곳 이외에

거의 본적이 없기도 하다.



 

 

이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서

한옥이 가지는 중첩의 이미지 즉, 아늑하고 정돈된 느낌보다

왠지 개별적이고 횡한 느낌이 더 많이 드는 곳이다.

뭐랄까 .......좀 사람의 정취가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

 



 


 

그래도 좋았던 것은

안채 마당에 늘어진 이 장독대였다.

아마도 양로원에 거주하시는 어르신네들을 위해 사용되는

장독일 것 같은데 이렇게 쳐다보니 나름대로 정겹기는 했다.

 

이 건물들은 건물 개개별로는 잘 지어진 건물이다.

 

 

특히 위 사진처럼

추녀 서까래의 곡선이

최근 청원군이나 괴산군에서 본 것 중에서는 제일이지 않나 싶게

운취가 있었다.

 

서둘러서 충북양로원을 구경하고

(?? 거봐...도대채 문화재명이 양로원이니 글을 써도 뭔가 이상하지 않나....에구구)

청주로 오려다가 우연찮게 하나 더 보았다.

급하게 사진만 찍고 제대로 보진 않았는데

그건 우암송시열의 묘소와 신도비 그리고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한옥집이었다.

 

 

저 길로 올라가면 묘소가 나온단다.

뭐 송시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써는

굳이올라갈 이유를 못찾아 이렇게 묘소 입구에서 사진한장 찍는 것으로 끝냈다.

 

 

송시열 신도비가 있는 건물이다.

기록에 의하면

송시열의 신도비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때면

눈물인가 핏물인가 뭐 여하튼 그런 것을 흘린단다.

아마도 송시열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신도비에 남아 있어서 그런 거란다.

난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가 무슨......?....헤헤헤

 

난 솔직히 송시열은 성리학자로서나 조선의 정치가로서나

전혀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단지 처세에 능하고 편협하고 자기당파의 이익이외에 거들떠도 보지 않은

그야말로 한국사 최고의 불한당이라 생각한다.

 

오직 송나라 주희만을 유일무이한 스승으로 받든 철저한 사대주의자고

주자와 다르게 성리학 사상을 전개했다하여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죽이고...

 

특히 윤휴가 죽으면서

나와 사상이 다르면 관리로 쓰지 않으면 될 일이지 죽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에도

눈하나 깜짝안하고 죽인 그가

관리도 아니면서 병자호란중에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 사람보고

관리이면서도 자신은 남한산성 임금 품안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싸워보지도 않은 사람이

포로로 잡혔던 윤선거를 비겁자겸 군자가 아닌 졸장부라 욕하던 사람이

무슨 죽어서까지 국가를 걱정했겠는가

아마도

죽어서까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거짓 눈물을 흘리는 듯하여 더 짜증이 났다.

 

여하튼 괴산군 청전면은 그야말로 송시열의 고장이다.

송시열관련 유적지가 있고

묘소가 있고

신도비가 있고........

 

그런 송시열을 뒤로하며

담배를 입에물고 추운 옷깃을 여미며 부리나케 청주로 향했다.

어두워지기전에 돌아올 요량으로.........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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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옛집기행(1)

  • 등록일
    2005/02/25 07:09
  • 수정일
    2005/02/25 07:09

드디어 갔다.

 

멀지도 않고

맨날 근처를 지나다니면서도

멍하니 벽돌공장 굴뚝만 쳐다보다가

오랫만에 찾아온 겨울날의 봄날씨속에

근질대는 몸뚱아릴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거의 떼쓰다시피 해서 다녀 왔다.

 

괴산군이다....^^...

 

청주에서 증평을 거쳐

새로 뚤린 4차선 도로를 따라 휭하니 달리면 괴산이다.

새로난 길을 가다보면

괴산읍내를 거치지 않아 좋긴 하지만

가는 길 언저리에 눈이 선한 홍명희 생가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쉬웠다.

 

다만 함께 간 친구의

작은 아버지(?)가 홍명희 생가 옆 한옥집에서

몇년 살았었다는 (에구구)

별루 도움 안되는 이야기로 대신하며 내쳐 달려 도착한 곳이 칠성이다.

 

 

 

괴산군 칠성면이다.

난 언제나 칠성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 벽돌공장 굴뚝이다.

멀리서도 한눈에

우뚝 솟은 것이 확연히 돋보이는 이 굴뚝만 쳐다보며

칠성을 지나친 것이 몇해나 된다.

 

지나가던 학생(? 한 고등 아니면 대학생 ???)들에게

율원리 김기응 고가를 물었더니 아마도 둔율리라 하기에

이 벽돌공장 이 있는 마을로 찾아 갔더니

아무리 돌아봐도 김기응 고가가 나타나질 않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김참판댁이라고 하시면서 갈론계곡 방향으로 다시가야 한단다.

 

에구구

역시 문화재든 옛날 집이든

하다 못해 이웃동네 이름도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관심밖인가 보다

당당히 이 동네에 산다고 밝힌 친구들인데도

타지 사람들에게 이리 엉뚱한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을 보면.....^^;;

역시 다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길을 묻거나 어떤 곳을 찾을땐

우리에 일꾼 할머니들 만한 안내자가 없는 듯하다..............................헤헤

 

 

      <사진.. 괴산군청 홈피 > - 전경사진을 못 찍어 이것만 퍼옴

 

김기응 가옥이다.

1900년 전후에 지어진 건물이다.

김기응이 누구인지 기록해 놓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나 보다

그럼에도 김참판댁으로 불리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지역의 대지주 거부였을 것 같다.

어느 동네나 딱히 불를 이름 없으면 부르는 것이 참판댁이니 말이다.

 

 

한 100여년 정도된 한옥집이라서 그런지

벽체나 건축양식들이 많이 화려하고

또한 다른 고가처럼 옛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특히 충청도 양식이라 불리는 이 지역 양식이 아니라는 것이 흥미로운 집이다.

 

구조 자체도 대문을 지나 행랑채를 지나 사랑채, 안채가

매우 독특하게 배치되어 있고

특히 집을 둘러싼 흙담이 매우 독특한  집이다.

 




 

불행이도

집이 안으로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보진 못했는데

밖에서 담장 너머로 기웃기웃 거리며 보는 재미가 그런대로 잼났다.

 

집은 야트막한 소나무 동산을 배경으로 남쪽을 보며 자리잡았고

앞으로는 높은 산이 안산 혹은 조산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보통 집을 지을때
사랑채의 대청에서 바라 보이는 안산 혹은 조산은

그집에 거주하는 사람의 심성을 반영한다하여

너무 높고 뾰족하거나

아니면 너무 밋밋하여 있는 듯 없는 듯 한 산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매일 바라보게 되는 앞산이

너무 뾰족하면 그 사람의 심성이 흉폭하게 되고

너무 밋밋하면

그사람이 우유부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높으면서도 모나지 않은 산을 선택하는 데

이집은 매우 높고 뾰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

이런 집 터를 고르는 안목도

기우는 조선의 국운 만큼이나 잊혀져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런 집터 선정방식이 고리타분할 수 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요즘 아파트를 지을 때도 조망권 이야기가 있듯이

교육환경을 이야기 할때 누누이 거론되는

아이들의 시각적 중요성 이야기와 상통하지 않을까 한다.

 

즉 삭막한 아파트만 쳐다보고 자란 아이들이

삭막해 진다는 이야기다.....헤헤헤

 


앞산이 지붕을 닮은 듯하여 찍어 보았다.

 

참고로

이 김기응 가옥이 있는 마을은 칠성댐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칠성댐은 정식 명칭이 괴산댐 혹은 괴산 수력발전소인데

우리나라 기술진이 만든 최초의 댐이란다.

50년대에 만들었대나....?..하여튼 오래된 댐이다.

 

근데 잼나는 것은

이 댐이 생기기 전에 이미 댐이 생길걸 사람들은 알았단다.

 

그 유명한 우암 송시열이 노수신이 기거하던 곳을 찾아

풍류를 즐기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 곳은 산이 막혀 강이 될거라고 예언하고는

자신은 속리산 화양계곡에다가 거처를 정했다는 거다...

거참 ..용하기도 하다 ???...헤헤헤

아 그리고 댐이 들어선 마을중에

두천리가 있는데

그 마을 이름이 막을 두(杜),  내 천(川) 두천리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댐이 들어설 당시에

감탄했단다.

그들도 왜 마을 이름이 이렇게 생겼는지 몰랐는데

아하 !!하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내를 막았으니 두천리요 곧 댐이라는 거다.

그러니 앞으로 이름도 잘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헤헤헤

 

솔직히 김기응가옥은 닫혀 있는 관계로 참 아쉽다는 생각을 해서

담에 꼭 한번 다시 찾아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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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그리고 아픔2....(청원군 옛집기행3)

  • 등록일
    2005/02/13 23:15
  • 수정일
    2005/02/13 23:15

다음으로 들른 곳이 낭성면 호정리다

가덕면에서 미원쪽으로 가다가 낭성 혹은 상당산성 방향으로 가다보면

낭성면소재비 바로 못미쳐 이정표가 나오고 한 500미터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 호정리다

 

이곳엔 과필헌 고가라는 옛집이 있는데

솔직히 좀 쪽팔리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난 이곳이 과필헌이라는 사람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옆자리의 형님이 "아니 '과'씨라는 성도 있어 ?"

라고 물을때

"그런가봐여...!!" 했다.

근데 알고 보니 과필헌은 호이고 이름은 신후라는 사람의 집이란다.

에구구 쪽팔려.....?...헤헤헤

 

이 곳 호정리를 오기전에 한 음식점이 있는데

그 곳 근처에도 한국전쟁당시의 민간인 학살지가 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충북 대책위에 참여하시면서

많은 도움을 주시는 분 중에 경상대 교수이신 신경득 선생님이 계시다.

이분도 아버님이 국민보도연맹가입혐의로 학살되셨는데

아마 이곳일 거라고 생각되어진다고 한다.

 

우리가 2번인가 청주에서 가까운 곳의 민간인학살지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곳에서 제수용품을 준비해서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적이 있는데

신경득 선생님이 이 곳에서 갑자기 울먹이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신경득 선생님은

시력이 나빠 이젠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실 정도다

그런 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을 풀기위해

아니 한을 풀지 못할망정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라도 알고 싶어

평생을 노력하신 모습을 보면서

당시 함께간 사람들이 숙연해졌던 것인 눈에 선하다.

 

이런 학살지를 지나서 처음으로 나오는 동네가 호정리다.

 

과필헌 고가는 앞의 두 곳보다 그 관리나 보존 상태가 가장 잘된 곳이다.

비록 사랑채가 한번 불이나서 나무 부재들이 시커머케 그름에 그을려 있기 했지만

멀리서 한눈에 보기에도 버젓한 모습이

한옥이 가지는 호젓함과 위용이 자연스럽소 옛스러운 집이다.

지금은 안채나 사랑채엔 사함이 살지않고 건너채에만 사람이 기거하는 듯했다.

 

가장 전형적인 민도리집으로

아마 청원군 지역의 대표적인 민가집이 아닐런지 싶다.

 

 


  <사랑채 모습>

 

집을 짓는대 쓰인 나무 부재들이 큼직큼직한 것이 이집을 지을 당시의 경제적인 부가

상당했으리라 생각이 돤다.

 

아마 근처의 귀래리 신채호 사당과 귀래리 한옥촌(한옥촌이라기에는 왠지 좀 그런 동네다)과

더불어 보면 옛 스러움의 감동을 쉽게 느낄 수 있지 않을 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3시간 정도의 여행이 아닌 소풍을 다녀왔다.

좀 따스한 겨울날 일요일 오후

한적하니 짧은 시간에

휑하니 돌아본 이런 저런 옛집들과

그집 들이 디딛고 서있는 땅에 서린 사람들의 아품과 사연들을 생각하면서

나른하니 좋았던것 같다.

 

함께 했던 좋아하는 형님과 충현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곳에 언제나 오롯이 서있는 그 마을들의 그 아품들이

올올이 가슴속에 남아있는 듯해 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다들 시간 있으시면

주변의 많은 사연들에 관심 있으시길.....^^!

 

 

   < 안채의 날개채 맞배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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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그 만큼의 사연들...(청원 옛집기행-2)

  • 등록일
    2005/02/13 21:08
  • 수정일
    2005/02/13 21:08

다음에 들른 곳은 이웃해 있는

고은리에서 차타고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가덕면 인차리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원래는 인차리의 신형호 가옥과

구봉영당(?)인가 해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영당이 있다는 곳으로 갈려고 했는데

마침 근처 동네인 계산리 5층석탑부터 보게 되었다.

 

보물 511호로 고려초기 석탑인데

절은 사라지고 오직 탑만 하나 덩그라니 남아 있는 곳이고

왠지 횅하니 사람들 떠난 서글픔만 잔뜩 담고 있는 쓸쓸한 석탑이다.

 

 

뭐 여기저기 금가고 깨지고 파이고

꼭 이동네를 닮은 탑이다.

 

이 동네가 지금 딱 그런 모습이거든

근처에 천주교 신자들의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고

청주근교라는 이유로 근처가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는

뭐 하여튼 쓸쓸한 그런 시골도 도시도 아닌 그런 곳이다.

 

뭐 여하튼

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곳은 이 정도만 보고

옛집으로 향했다.

 

신형호 고가는

새로 단장된 문화재 알림판에 비해 왠지 좀 안스러운 아니 왠지 초라한 옛집이다.

조선말기 고종 18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엔 집안의 많은 부처럼

안채에 사랑채에 건너채에 행랑채까지 딸린 큰 살림집이었단다.

 

하지만 일제시대 초기

당시 집주인이었던 신장식이라는 사람이

의병들을 집에 재우고 그들의 모임을 도왔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들이 불살라 버려

어렵사리 지금같이 안채만 덩그라니 남아 있는 집이 되어 버렸단다.

 

이 집은 신형호 선생이라는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생가로 더 알려져 있는데

혹시들 아시나 ?

 

헤헤 물론 저도 모르지요.

뭐 여하튼 신형호 선생님이 독립운동가라니 그렇게 알뿐

더 자세히 알진 못한다. 이 모두가 이 무식한 놈의 짧은 지식때문이니

다들 너그러이 이해하시길....헤헤헤

 

참고로 이동네 주변인 

가덕면, 미원면, 낭성면 일대는 고령 신씨 들이 많이 산다.

그 유명한 그래서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신채호 선생님도

이 고장의 그 무수한 신씨들 중의 한명이었으니  

이 신씨들의 자긍심과 애국애족정신은 익히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헤헤헤

 

솔직히

나같은 일자무식이 무슨 애국애족을 알겠는가 ?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그래도 나의 자랑스런(?) 인생에서

이 곳 고령 신씨들 중 한 분과 매우 친하다는 개인적인 연분 정도가 있다고나 할까 ?

 

달우 아저씨라고

미원면에서 닭을 키우시는데

농민회 일도 열심히 하시고

민주노동당 일도 열심이 하시는 그야말로 열성분자(?)이신데

지금처럼 이름날리기 전의 민주노동당 충북도당을 맡아서

몇년동안 고생고생하셨던 분이다 .

이분은 시골분 답지 않게 또한 산악자전거의 대가이시기도 하다....??...헤헤

 

한번은 내가 속한 단체에서

미원근처의 폐교에서 행사를 하는데

닭을 10마린가 주셔서 다들 행복한 적도 있었고

우리가 미원면에서 대안학교 활동을 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아 그리고 지역 운동(?) 선배들 중 아저씨라 부르는 딱 두분중의 한분이다.

율동이 아저씨랑 달우 아저씨 ......!!

 

이런 훌륭한 달우 아저씨가

이 고령 신씨이니

달리 뭘 더 바랄 것인가 ???? 헤헤헤

 

신채호 선생의 후손 중 이런 훌륭하신 달우 아저씨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이 지방의 고령 신씨는 충분히 훌륭한 가문의 사람들이다...헤헤헤

순전히 개인적이지만...뭐 내가 이런 생각한다고

손해 볼 사람도 없고 하니

뭐 어떻겠는가 .......헤헤헤

 

 


 

 <신형호 고가 정문 >

 

고령신씨 이야기를 마저 더 하자면

이 곳 신씨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무래도

신숙주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세종때에 집현전 학자가 되어

세조를 도와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

 

그러면서도

맛이 변하기 쉬운 숙주나물과 비교되어

변절자의 대명사로 묘사되는 이가 신숙주다.

즉, 같은 집현전 학자들인 성삼문이나 박팽년, 유응부 등과 같은 사육신이나

김시습으로 대표되는 생육신등과 비교당하면서

변절자로 낙인찍힌 신숙주가 바로 이 곳 신씨들의 조상이다.

 

뭐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 할 것은 없지만

이런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집현전 학자라고 해서 다들 같은 생각들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고

필히 성삼문 등의 사육신처럼 단종에 대한 충성만이 곡 올바르다고 보지 않기때문이다.

난 솔직히 당시 사회에서 오히려 단종보다는 세조의 정치가

당시 조선사회에 더욱더 필요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기도하고

속직히 신숙주에 대한 평가도 상당부분 조선 후기 집권세력인 서인들의 일방적인 평가가

더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숙주를 단순히 자신의 안위를 변절을 택했다고 보기엔

이후 그의 주요 업적으로 보이는 경국대전 편찬사업이나 기타 율령반포의 업적은

오히려 신숙주가 자신의 조선사회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확신에 찬 선택이 아니었나 싶기 때문이다.

 

뭐 뭘 모르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신숙주는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것을 사실인듯 싶다.

다만 유학자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여하튼 나의 짧은 여행은

이렇게

항일의병의 유적지 겸 한옥 옛집의 감상으로 가덕면을 떠났다.

그래서 원래는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영정은 보지도 못하고

또다른 보물인 계산리 석탑으로 대신하고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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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그리고 아픔...(청원군 옛집 구경 - 1)

  • 등록일
    2005/02/13 20:35
  • 수정일
    2005/02/13 20:35

오늘은 일요일

아직 익숙치 않는 교회 예배를 보고

교회 아이들과 헉헉대며 농구 한판하고...그러고도 왠지 심심해져 오는 마음 달랠길 없어

집에 오는 길에 얻어 탄 형님 차안에서 갑자기 나들이를 결정했다.

 

뭐 거창하게 답사니 여행이니 하기엔 왠지 좀 미진해서

그냥 소풍이나 나들이처럼

편안히 훝어보고 올 심산으로 부리나케 떠났다.

 

뭐 솔직히 부리나케 떠났다는 것 자체가 좀 그런 것이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인 남일면인데다가

바로 이웃동네인 가덕면, 낭성면 정도라서

꼭 떠났다는 표현이외에 적당한 말이 없어서 그렇지

꼭 그 말 그대로로 받아들이기는 어폐가 있는 듯 싶기도 하다.

 

뭐 여하튼

사진찍길 좋아하셔서

아트(art)를 할 주변머리는 없고

그저 아트(art) 근처에서 머뭇거리길 좋아하는 천상 주변인인

그저 그런 심미안의 내가 보기엔

대단한 사진작가처럼

못내 부럽기만한 사진실력을 가지신

내가 넘 좋아하는 형님과 함께

그 형님의 아들로 왠지 꿍시렁 거리는 투가 나와 닮은 충현이와 함게

그렇게 떠났다.

 


   < 사랑채 지붕>

 

처음 들른 곳이

남일면 고은 3리에 있는 이항희 가옥이다.

한 100년이 좀 더 된 가옥이다.(윗 사진)

집에서 출발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으니

출발하자마자 도착했다고나 할까 ?

 

뭐 어디 한옥이나 비전문가 눈엔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도 이 가옥은 좀 다른 게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로 지정되면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되기 쉬운데

다행이 이 곳은 이돈희(?)라는 사람의 조형연구실인가 뭐 하여튼 미술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사는 집으로 바뀌어 그럭 저럭 사람사는 맛이 나는 집으로

보존되고 있으니

주변의 내 눈엔 몇 백년되어 보이는 향나무와

소나문진 뭔지 하는 하여튼 큰 나무와 어울려 포근한 집이다.

 

그 집 앞에 최근에 지은 마을정자가 하나 있고

(졸작이다...관에서 하는 짓이 다 그렇지만 여러 마을의 정자를 도매급으로 업자에게 넘기고

 업자는 업자대로 볼품없는 싼 낙엽송과 천장엔 싸구려 합판을 대서

그야말로 졸작으로 지은 정자 )

그 옆에 어디에나 있는 마을회관 겸 노인회관이 있다.

 

한 3년 전인가 이 회관에 온 적이 있었다.

 여러 사회단체들과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충북대책위(?)라는 연대단체에서

공동사무국장이라는 이름만 사뭇 거창한 직위에 있으면서

실제로는 뺀질뺀질 일도 안하면서

(그덕에 함께 일한 모단체의 상근자가 무척 고생했다...미안하구려...헤헤헤)

가끔 놀러다니곤 했는데

이 곳 고은 3리 노인회관에 당시 상황을 증언해 주실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당시 청주시내 사람들이 자무시 트럭으로 실려와

학살된 곳이 이 마을 바로 앞이었고

근 일주일동안 쉴새없이 많은 사람들이 실려와 학살당했다는 증언 이었는데

그 중엔 큰 푸대자루에 어린 아이들이나 아기들이 들어 있었데

자루채 개울가에 던져 놓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걸 본 분도 있었다.

 

이 곳이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국도 변이라 국군이랑 경찰이

퇴각하면서 이런 만행들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참 !!......참내...!! 

 

이렇게 고풍스러운 옛집이 포근하게 자리잡은 곳에 우리가 전혀 모르는

그런 아픔들이 산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분단사회에서 사는 것 만큼이나

어쩌면 우리 피부 가까이에 있는 서글픔 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가볼 곳 대다수가 이런 죽음에 관계된 곳이니

참 이런 우연도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한참 흙담과 따스한 겨울날을 사진에 담는 형님과

곁에서 이런 저런 이야길 귀담아 듯는 충현이를 보면서

씁쓰레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역시 여행(?)엔

담배만한 동행자가 없으이....헤헤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의 걸쇠>

 

 

여하튼 그때 그 아품이 있던 마을앞 개울은 이미 4차선 도로가 되었고

그 당시 그 일들을 목격한 마을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거나

아니면 영원의 침묵속으로 떠나고........

 

오직 남은 것은

이렇게 양반집 가옥으로 보수된 멋드러진 옛집이 있는

문화재 알림판이 떡하니 자리잡고

새로 만든 마을 정자가 동네 한가운데 떡하니 폼잡고 있는

그런 흔한 마을만 남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다 기억하고 있진 않은가 보다

오직 기억하고픈 것들만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도 사람사는 세상이니 오죽하겠나 싶기도 하고.......!!

 

<참고로 이항희 가옥은 철종12년에 만들어진 집인데 그때 당시 건물로

남아있는 것은 ㄱ 자 형태의 안채다.

사랑채랑 행랑채는 근년에 새로 지은 집이다.

뭐 그럭저럭 폼나는 학술용어로 이야기 하면

쾌 큰 여러 칸살이 집이고 쪽소로가 쓰인 초익공 겹처마 집이고...뭐 그렇다.

장연(긴 서까래)은 옛거이나 부연은 최근에 보수하여

맨질맨질한 것이 보수흔적이 역역히 남아 있다.

 

집주인이 미대 교수라나는 소릴 들은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집의 구석마다 내가 도저히 감상할 능력이 없는 이상 야릇한

한마디로 형이상학(??)적인 조형물들이 놓여져 있어서

혹여 미술학도나 미술에 대한 대단한 심미안이 있으신 분들은

주말 오후 한가한 시간 때우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다.

 

가가운 곳에 사시는 분들은 한번 찾아가 보시길....?...헤헤헤

갑자기 무슨 청원군 관광도우미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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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성을 걸으며

  • 등록일
    2005/02/13 18:19
  • 수정일
    2005/02/13 18:19

토요일 저녁때 쯤

무료하게 집에서 뒹굴뒹굴대다가

휭하니 바람 쐴 생각으로 상당 산성을 갔다.

 

뭐 워낙 자주 오는 곳이라서 무슨 특별한 감흥이

새롭게 생길리 없다지만

그래도 마지막 겨울을 자축하듯 추운 저녁 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그럭저럭 샌티멘탈한 감흥정도는 느껴지도록 한적하니 으스스하니 좋았다.

 

통일신라 시대때 만들었고

조선시대 대대로 새롭게 축성했다는 것이 실감나도록

 선조니 숙종이니 영조니 하는 임금님들의 이름들이 나오고

요즘 칼의 노래에서 때아닌 호황을 맞는 원균이라는 사람이 축성했다는 설명도 나오고

한때 유명했던 이인좌의 난도 나오고

그럭 저럭 오래된 유물임을 한껏 뽐내려는 듯

우리가 알수 있는 여러명의 사람들이 거론되는 거창한 설명문을 읽으며

해지는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남쪽 성벽으로 다가갔다.

 

뭐 항상 오는 산성이지만

올때마다 나는

무료로 배포하는 산성 설명 리플렛을 받아다가

어디 오타라도 난데 없나 하는 심정으로 꼼꼼이 읽고 또 읽곤 한다.

 

저번에 친구 녀석과 올땐

이런 나를 보면서

넌 뭐 볼게 있다고 항상 일고 또 읽곤 하느냐고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뭐 ! 그렇든 말든

항상 챙겨서 읽고 집에다가 잘 모셔두곤 한다.

 

워낙에 문화유적에 관심이 많긴 하지만

유독 연대니 아니면 특정 인물들의 이름 특히, 임금님들의 찬란한 이름들을

외우는데 상당한 곤란함을 겪는 놈이라

이렇게 읽고 또 읽곤 해야 잊어먹지 않는 게 나다.

 

여하튼 헉헉대고 춥고 배고픈 몸을 끌고 산성을 오르면서

한 눈  팔지 않고 설명서에 눈독을 들이며 걸어 올라가서

멀리 떨어지려는 해의 밑에 뿌옇게 앉아 있는 청주를 쳐다보면서

아 !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도시에나 있는 매한가지인 산성에다가

문화재보수라는 거창한 이름하에 허여멀건한 대리석인지 화강암인지

모르는 비싼 돌로 흉하게 땜질된 산성 성벽위에 있다보면

보기 흉한 땜질 만큼이나 보기 흉한 도시의 풍경들이

아른하게 마음을 시리게 하고

그런 아른한 시린 감정에

아 ! 저녁때 소주나 한잔 해야 겠다는 간절함이 들어서 좋다.

 

술먹고프면

무슨 핑계를 못대겠냐만은

그래도 이런 도시의 냉정함과

세월을 무시하는 인간들의 추함을 안주 삼아

씨팔개팔하면서 술한잔 하는 것 만큼 복된 술자리도 없지 않는가 ?

 

맨날 모여서

맨날보는 사람들과 노무현이니 열우당이니 하며 욕하기도 지겹고

민노당이니 민주노총이니 성토하는 것도 그렇고

그 잘난 시민사회단체를 안주삼아 떠드는 것도 지겨운 요즘이면

차라리 무슨 고고한 학자나 된 듯

맨날 저리 우뚝 서있는 산성이나 욕하며

술한잔 하는 여유로움도

가끔은 몸보신 삼아 누릴 수 잇는 즐거움이 아니겠나 싶다.

 

 

 

이 노을 밑에 청주가 있다.

 

뿌연 도시의 스모그 아래 바삐 움직이는

그저 그런 도시들중에

전혀 특별하지도 않은

그저그런 도시가 하나 있다.

청주라는 이름하에....

 

솔직히

이 밑에 충주가 있든 대전이 있든 전주가 있든 대구가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그안에서 만들어 가는 무엇인가가 뭐 얼마나 다르겠는가

보이지 않는 저 어둠처럼

어쩌면

사람들은

그만큼의 어둠이라는 무게에 눌려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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