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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에 갔었던 남원 몽심재

  • 등록일
    2007/03/04 18:35
  • 수정일
    2007/03/04 18:35

컴의 문서들을 정리하다가

2년전에 조카와 갔다왔던 남원 여행의 사진들을 발견했다.

언젠가 정리해야지 하는 생각에 모아 놓았던 것이 벌써 2년이 흘러갔다.

 

여행자체가 그렇기는 하지만

원래는 가벼운 마음으로 조카와 남원의 광한루나 보러가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갔다가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몽심재에 들렀다.

 

몽심재가 있는 마을은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마을에 있다.

 

뭐 누구나 예상하듯이

유서깊은 마을이란다.

죽산박씨 집성촌으로 남원 4대 명당터로 호랑이 턱 부분에 위치한 집이 몽심재다

과거에는 만석군의 집이었고 그 만큼 당시 유명한 동네였다고는 하지만

막상 들어서고 보면 퇴락한 우리 주변의 마을처럼 아늑하기고 하고

왠지 쓸쓸하기도 하고.........뭐 그랬던 것 같다....

 

 

동네 곳곳의 담들이 정겨운 반면

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서러운 과거의 기억들이 아닐까 ?

 

 

 

 

 



 

몽심재 사랑채에 앉아서....

 

실재 다른 한옥집에 앉아 있는 것 보다는 시원한 느낌이 들진 않는다.

다만 아늑하다고 해야 할까 ?

 

몽심재는 구경은 몽심재 자체보다는

몽심재가 자리한 마을 구경이 더 값진 것 같다.

지금은 어쩐지 몰라도

마을이 말해주는 시간과 그 곳 사람들의 삶들이

고즈넉하다고나 할가 ?

실재 마을 구경당시에도 마을 사람들은 거의 만나뵙지 못했었던 것 같다.

 

 

 

 

참고로

이 동네는 원불교의 성직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단다.

지금도 원불교 신자들사이에선

그 인품이나 황동들에서 교훈이 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한단다.

 

 

 

집성촌의 특성상

한 종교가 전파되면 자연스레 동네 전체가 열심으로 믿게 된다더니

이 동네도 그러한가 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다들 좋은 일들 많이 하신다니....크크크

돈 많이 번다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

 

 

 

이런 마을을 거닐땐

막걸리 몇잔에 알딸딸한 마음으로

흐느적흐느적 걷는 것도 좋은 것 같은데....헤헤

 

 

 

 

 

아 ! 여행 가고 싶다.....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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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답사 계획

  • 등록일
    2007/02/22 16:31
  • 수정일
    2007/02/22 16:31

보은을 가야겠다.

선병국 가옥도 보고

동학유적지도 보고

시간이 되면 상주 남장사도 잠깐 들르고.......크크

 

언제 ?

3월이 되면.....크크

 

누구랑 ...?

혼자서........!!

 

왜...?

최근에 돌아다닌 적이 없어서 좀 지쳐간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던 측면도 있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일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어느새 나를 채찍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좀 놀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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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고 싶은 집....(성주군 한개마을답사..2)

  • 등록일
    2005/03/27 07:50
  • 수정일
    2005/03/27 07:50

한옥을 배우고 나서

어느 마을에나 가면 한옥을 유심이 보게되고

그러다가 보면 아 !! 저런 집을 짓고 살아 보았으면 하는 집이 한두채는 있다.

 

한개마을도 몇번 가보면서 아 !! 하는 집이 있다면

아마 한주종택일거다.

이곳 마을의 종가 집으로 마을의 가장 위쪽에 위치해 있어서

마치 종가집 밑으로 다른 집들이 고개숙이듯 자리잡고 있는데

그런 종가댁으로써 떡하니 마을을 지키고 있는 곳이 한주종택 혹은 종가이다.

 

종가집은

어느 집처럼 솟을대문이 있고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그 옆의 행랑채가 붙은 형식으로 보이고

그 가운데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간 대문이 있다.

중간 대문을 들어서면

다시 안채가 나오는 방식으로 집은 ㅁ 자형 집으로 되어 있다.

 

솟을 대문채와 사랑채 옆으로 작은 길이 나있고

그 길로 들어서면

산쪽으로 사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이 보이고

옆으로는 쪽문이 보이는데

이 쪽문이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이집의 숨어있는 비경을 볼수 있는 별당채 혹은 정원 혹은 원림이 있는 곳이다.

 

 

한주 종택은

다른 여타의 경상도식 집들 혹은 신라계의 집들처럼

 ㅁ 자형 집이고 사랑채와 행랑채가 붙어 있으면서

그 사이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는 등

특별한 점이 있거나 사람들의 문을 끄는 구석이 없지만

이 별당채 혹은 원림만은 거의 이 동네 집들에서 독보적일 정도로

빼어나다.

 

우선 사랑채쪽으로 난 작은 쪽문을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것이 울창한(?) 나무들이다.

소나무와 은행나무, 향나무들이 제각의 위용대로 서있고 그 사이로

이층루각을 가진 별당채가 보인다.

 

 

이 별당채는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이층 루각을 지음으로써 매우 인상적으로 높아 보이며

따라서 이층 루각에 앉으면

마을 전체뿐만아니라 눈 앞에 떡 하니 펼쳐진 자연경관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루각과 잇데어져 있는 방들은 역식 단을 쌓아서 일층으로 지었으나

그 높이는 앞의 이층루각과 같은 층을 이룸으로써

일층의 집에 이층의 루각을 붙여 높았어도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이 방들의 기능으로 이 별당채는 4계절을 모두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별당채가 가진 매력은

실제 집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별당채를 둘러싼 자연일 것이다.

 

 

 

우선 별당채 앞에 서 있는 작은 화단과 그 화단에 서있는 소나무의 위용과

그 옆으로 다양한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그야말로 작은 산속에 들어 온 듯 연출한 모습.

 

 

별당채 옆으로 두개의 연못을 파고 이들을 연결지어 놓은

그리고 연못의 한가운데에 작은 섬을 조성한 모습.

 

 

그리고 연못의 섬과 연못가를 다리로 연결해 놓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모습

그리고 연못 주위를 따라 산책로가 있고

산책로 옆으로 작은 시내가 조성되어 있다.

 

 

이 시내를 넘어서 담장들이 둘러쳐져 있고

이 낮으막한 담장 넘어로 대단한(?) 암석군과

그 암석군을 둘러싼 소나무 군락들

 

 

소나무 군락들보다 좀 앞쪽으로 담을 따라 내려오면

또한 대나무 군락이 파도소리를 내며 별당채를 마주보고 있다.

 

처음 이집의 별당채를 무심코 들어 왔다가

아 !!  비밀의 화원이닷.....!!

 

놀랬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별천지에 놀라기도하고

별당채가 가진 그 고유한 멋에 몰라기도 하고.....!!

 

처음 한옥에 관심을 갖고

한옥에 재미와 동경을 가지게 되고

그러다가 직접 목수일을 배우면서

나름대로 진화한다고 느낀 점은

나 스스로 건물에서 건축으로 옮겨 간다는 것이다.

 

즉, 한옥 한채 한채의 생김새와 기법이니 양식이니를 주되게 보다가

각각의 한옥들이 어우러지는 모습들에 재미를 느끼게 되고

이후에는 그 집이 위치한 마을이나

그 집이 속한 주변들 혹은 자연들을 느끼게 되었다는 거다.

그러면서 느껴지는 건

어떤 한옥집에 갔을때 왠지 불편하거나 하면

거의 그 집이 가지는 어떤 인상들때문이다.

즉, 지나치게 가식적으로 보여지는 혹은

지나치게 자연을 혹은 그 속에 속한 사람을 거느리고 있는 듯한 모습에

나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실제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집은

그 건물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이 속한 어던 환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집이라는 것이 바라보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면

어느날 찾아와서 사진한장 찌고 사라질 것이 아니면

건물이 아름답기 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 중요할테고

그러다면 자연스레 그 위치지어진 형국이나 사람들의 어우러짐이 중요하지 않을까 ...!!

 

그런 의미에서 이 집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이나 화단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멀리 보여지는 안산과 들판들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담장 밖의 암석군,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숲들이

오히려 이러한 인공적인 조형물마저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준

그야말로 황홀한 원림이 되어버린 집이다.

 

최근 한옥답사를 다니면서

눈에 그리고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원림이다.

소쇄원과 서석지를 구경하고나서는 더욱더 그런 멋들에 빠져든다고나 할가 ?

명옥헌도 그렇고

의성의 소우당도 그렇고

상주의 대산루도 그렇고

이집 한주종택도 그렇고............!!

 

집이 자연의 일부가 되고

그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마저 자연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이 원림의 특징이 항상 가슴에 진한 여운들을 남겨주곤 한다.

 

 

요즘 한주종택의 이별당채를 보면서

조금 아주 조금 안타까운 것은

상대적으로 잘 관리되어진 안채에 비하여

별당채가 점차 퇴락해 가는 것의 안타가움이다.

이곳저곳이 무너지고

집도 나무들이 이곳저곳 부식되어 떨어져 버린

한 몇년후면 무너지지 않을까 할정도로 관리가 되어지지 않은 모습이다.

 

아마 집주인이 안채는 사람이 사니 관리를 하는 모양이지만

이 별당채는 아무도 기거하지 않다보니 관리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것을 보면 옛 조상들의 풍류와 그 조상들이 후손들을 위해 조성한 이 풍류들이

이젠 각박한 세상만큼이나 후손들에게 즐길만한 여유도

그런 것들에 흥미를 느낄만한 감수성도 남겨주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그저 자기가 누운 곳의 작은 공간들이나 죽어라 고나리할 뿐

그 공간들이 속한

확대된 영역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현대에 살아가는 도시인의 감수성이

어느새 이런 산촌벽지가지 몰려와서는

자신들이 가진 멋스러움들마저 잊고 지내게 만들어버린 듯 해서

조금..아주 조금...서글퍼지기도 한다.

 

아 ! 물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에

관리관청에서 조금 더 신경 써주면 좋으련만

관리관청마저 그런 것들까지 신경써주지 않기는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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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담에 새겨진 세월이란.....!!(성주군 한개마을답사..1)

  • 등록일
    2005/03/23 18:49
  • 수정일
    2005/03/23 18:49

성주군 한개마을을 갔다.

 

이번이 벌써 네번째 정도 되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지역도 자주는 가지만

이곳 성주군은 워낙 지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멀어보이는 관계로

선듯 답사를 나설 길이 아님에도

왠지 그런 잡다한 이유들을 무시하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벌써 4번째나 오게 되었다.

 

 

한개마을은 멀리서 보면

어디서나 볼수 있는 그런 시골마을이다.

간혹 보이는 기와지붕이 고풍스럽기는 해도

차도에서 휙하고 지나가도 아쉬울것 없어 보이는 동네다.

 

특히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쳐지는 동네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주위깊게 보지 않으면

마을 찾는 것도 쉽지않은 그런 동네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을 끌어드이는 묘한 매력이 있을까 ?

 

나에게 한개마을은 우선 담장과 골목길이 가장 선명하게 남는다.

 


 

마을 어귀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쉽게 눈에 들어오는

이 낡디낡은 담장들의 무게란........에휴.....?...헤헤헤

 

마치

내가 살았던

그 고향집들의 구석구석들이 보이는 듯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다.

특히, 성주군이 군비가 적었던지

거의 방치하다시피한 한옥들과 담장들은

고스란히 세월의 무게들을 따스한 햇살아래 들어내 놓으며

방문객들을 한없이 나른하게 만들어준다.

 

 

담장들이 지붕만 새로 한것이 있고

흙을 다져서 쌓은 담장이 있고

고운 흙과 돌을 섞어 만들 담장이 있고

그저 주변의 막돌들을 주워다가 만든 담장이 있고

이미 허물어져 담장인지 아닌지 구분가지 않는 담장도 있고

그저 돌무지기만 쌓여 있는 곳도 있고......

 

한 마을안에 살면서도

이렇게 각자의 모습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담장들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한옥들을 구경하면서

아 ! 역시 오길 잘했군...하는 생각에 빙그레 웃어 보이기도 했다.


 

어찌 안그렇겠나.....!!

이 길을

이 인적없는 길을 허우적 거리며 걷는 기분을

어디가서 다시 맞이해 보랴......크크크

 

 

담장의 돌과 흙의 미소들이 알알이 마음 속에 새겨지는 듯.......

 


 

겹겹이 쌓인 마음의 생각들이 햇살과 부는 바람에 씻기듯 날아가 버리니........

 

 

아 ! 담에 집을 지으면

내가 살 집을 지으면

난 꼭 담장을 쌓고 싶다.

꼭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이 가진 그 정겨움만을 느낄 수 있도록

별도의 담장 구경이 가능한

그런 담을 지어보고 싶다.

 

 

짓다가 말아도 그런대로 정취가 있을테고

어리버리한 내 성격에

무너져 버려도 그런대로 좋을 듯 싶은 그런 담을 짓고 싶다.

 

담장 처럼

담장이 품고 있는 길의 이미지처럼

아니 담장이 만드는

사람을 위한 안전한 그리고 새로운 길들에 대한 좋은 감정들을

쌓고 쌓고 또 쌓을 수 있는 그런 담장을 ....................................!!


 

지금은 담장위에 자리잡은 이끼만큼도

하늘 거리는 길의 삶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아는 가 ?

살아가다보면

마을에서 동네사람들과 살아가다보면

나도 그 동네사람들이 꾸는 새로운 길에 동참할 수 있을지...?............!

 

 

굳이 정돈되어지고

치장되어질 이유가 있으랴 ?

 

그저 덤덤이 자기 자신이 가진

자신만의 그림과 모양으로

자신이 품었던 것들에 대하여 책임질 수 만 있다면...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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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아품들......(선산지역답사...2)

  • 등록일
    2005/03/20 17:37
  • 수정일
    2005/03/20 17:37

탑을 뒤로하고 선산읍내를 들어가 다시 나오면

좀 뜨악해 보이는 성문이 하나 나오고

그 성문앞을 지나 조금만 가면 금오서원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논들 사이 일직선으로 난 포장된 농로를 따라 달리면 삼거리가 나오고

삼거리 끝에 갑자기 나타나는 동네에 금오서원이 있다.

 

금오서원은

선산지역을 갈때마다

아니면

선산은 아니더라도 다른 지역을 답사갈때

시간남은며 꼭 들러보는 서원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그러나 고스란히 세월의 흐름을 집 전체가 안고 있는

그야말로 퇴락한 서원이다.

 

여기저기 무너지고 깨지고 나무들이 들뜨고  구멍나고.....

같이간 형님이 성질낼 정도로 보존이나 보호와는 담쌌다는 듯이

그야말로 퇴락한 채 쓸쓸히 서 있다.

 

 

하지만 비록 건물이 퇴락했다고 해도

그 건물이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사연마저 없어지지는 않는다.

 

금오서원도

비록 건물은 누추하지만 그 사연은 깊은 곳이다.

 

조선의 성리학의 도통설에 의한 계보에서

무려 네명이나 관련된 곳이다.

 

 

도통설에 의하면

목은 이색 - 포은 정도전 - 야은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지는데

이중에서 야은 길재에서 김굉필까지가 이곳과 연관되어 있는것이다.

 

금오서원은

야은 길재를 모시는 서원이고 야은 길재가 선산지역 젊은이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야은은 원래 이곳 선산지역 출신이다.

고려말에 이방원(나중의 태종)과 함께 권근의 제자였다.

 

하지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성립하자

불사이군을 내세우며 선산지역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이다.

한때 친구였던 태종 이방원의 부름도 있었으나 간곡히 마다함으로

태종이 허락하여 이곳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김숙자 등을 가르쳤다.

 

그런 야은 길재를 모신 이 서원은

나중에 그의 제자인 김숙자가 자신의 아들 김종직과 지역의 젊은이들을 가르쳤고

김종직도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서 일두 정여창과 한훤당 김굉필 같은 재자들을

가르치게 된다.

 

서원은

좀 가파른 언덕에 급하게 서 있는데

지금은 정문이 많은 잡초만 무성하고 잠겨 있어서 옆의 쪽문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다.

 

들어서면 강학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고 강학당 앞에 동재, 서재가 뒤로 사당이 있다.

 

강학당에 올라서면

바로 앞에 드 넓게 펼쳐진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강줄기를 앞에두고

거대한 사상의 흐름이 서원에 펼쳐진 것이다.

 

유구한 자연의 흐름속에

유구한 조선 성리학의 흐름이 이곳 금오서원에 넘쳐나는 것이다.

 

다들 알지만 결국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동방오현 중

김굉필, 정여창이 이 선산출신 김종직의 제자이고 김굉필의 제자가 조광조이니

오현 중 3명이 이곳과 관련이 있는 것이요

도통설의 길재, 김종직까지 치면

그야말로 조선 전기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들이 이지역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서원은

지금의 사립 중고교과정과 흡사한데

지금으로보면 선산의 금오서원은 일종의 명문 사립학교인 셈이다.

 

이 금오서원에는 지금도 칠조라는 학칙 혹은 교칙이 있는데

요즘의 학칙으로 사용해도 전혀 무리없는 내용이다.

 

 

첫째, 창과 벽에 낙서하는 행위

둘째, 책을 망가뜨리는 행위

셋째, 놀면서 공부 안하는 행위

넷째, 함께 지내며 예의가 없는 행위

다섯째, 술이나 음식을 탐하는 행위

여섯째, 난잡한 음담패설을 즐기는 행위

일곱째, 옷차림이 단정하지 않은 행위

를 한자는 왔으면 돌아가고

오지 않았으면 오지 말라......!!....헤헤헤

 

완전 요즘 학교에서 교칙으로 사용해도 무방한 내용이면서

지금이나 그 옛날이나 학생이라는 신분은

항상 같은 일들을 벌이곤 한다는 사실이 재미있기도 하다.

 

참고로

금오서원에 배향된 사람은

야은 길재, 점필재 김종직, 신당 정붕, 송당 박영, 여헌 장현광을 모시고 있다.

 

참고로

이곳 금오서원은

한가지 특이한 것이 있는데
무엇이냐면 술이다.

 

선산지역의 민속주인 선산약주는

원래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에서 담가

서원을 찾아오는 손님이나 아니면 제사때 쓰거나

그것도 아니면 제자들을 위해 손수 담가 먹은 것에서 유래한단다.

즉, 스승이 먼저 모범을 보이며 음주문화를 가르치던 노력이

이렇게 몇백년 후에도 서원을 중심으로 남자들이 담가 먹었던 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야말로 모든 것이 자본주의 !! 

재미나지 않나 ?

술먹으면 퇴학인 학교에서

스승이 먼저 술 가지고와 세상을 논하고 세월을 논하고

앞에 펼쳐진 강물과 그 흐름을 논하며 술한잔 한다는 것이 ....?...헤헤헤

 

다들 갑자기 성리학자가 된 기분인 저를 용서하시길....?

 

헤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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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꾸는 꿈........(선산지역답사..1)

  • 등록일
    2005/03/20 16:21
  • 수정일
    2005/03/20 16:21

상주에서 내쳐 달려서 간 곳이 구미시 선산읍.....!!

 

원래는 구미는 작은 동네고

선산은 옛부터 이름난 동네였는데

우리의 위대한 (?) 독재자 박정희의 고향이 구미라서

구미가 갑자기 개발붐에 휩싸이고......

그래서 이젠 작은 동네였던 구미가 선산을 통합하여 구미시가 되었다.

 

여하튼 그런 사연때문인지

선산읍은 거의 발전을 하지 못해서 그런지

옛 풍물 그대로 남아 있는 동네다.

 

다만 선산을 휘감아도는 낙동강일대가 온통 모래채취로 몸살을 앓는 것만 빼면......!!

 

선산 톨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나오는 것이 죽장리 5층석탑이다.

 

 

내가 알기로는 5층 석탑중 가장 크지 않나 싶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게

야트막한 산등성이 중간에

따스한 햇살받는 위치에 딱하니 서 있다.

 

새로 지은 법당이 몇 보이기는 해도 워낙 석탑이 웅장하여

절집에 들어서며 석탑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감실에 최근에 다시 안치한 작은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데

그 앞에 재미있게도 말법집이 부처님보다 더 크게 매달려 있다.

 


 

아침 햇살이 탑위에 서성일때

아찔한 현기증 나듯 하늘향해 서있는 석탑을  쳐다보며

멍하니 몇백년을 버텨온 세월의 칸칸을 그려 보았다.

 

 

항상 석탑에서 느껴지는

그 처연덕 스러운 무뚝뚝함이란...............!!...나 같은 가벼운 인생은

흉내조차 내지 못하고 항상 고개돌리게 만드는 신비함이 있다.

딱히 석탑에 대한 감상을 할 줄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탑을 마주하며 하늘한번 쳐다보면

항상 가벼운 나의 삶에 흠칫 놀라곤 한다.

아니 쉼없이 나의 곁을 뺘져 나가는 시간들에 화들짝 놀란다고나 할까 ?


원래 불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래될때만 해도

탑이라는 것이 부처님을 상징했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탑이 절의 중앙에

가장 중요한 곳에 모셔지고

그 탑주위를 돌면서 많은 불자들이 자신들의 욕망들을 구했다고 한다.

 

이런 탑이 몇백년 혹은 몇천년동안

많은 사람들의 그 숨기지 못하는 욕망들을 받아들이면서

굳건히 버티다보면

아마도 탑 스스로도 함부로 몰락하거나

함부로 웃음을 보여줄 수가 없었으리라........!!

 

 

그렇게 덕지덕지 붙은 사람들의 욕망의 때를 혼자서 묵묵히 버티며

그렇게 사람들이 사라져간 공간을 자신홀로 채우다 보면

어느 순간

이 탑처럼

자연의 일부가 되어 누구도 가보지 못한 초월의 궁극을 경험하며 서있을 수 있지 않을까 ?

 

지금 내 눈앞에서도 이렇게 턱하니 서서

나의 욕망들을 받아줄 듯이 서 있는 저탑은

내가 나의 집으로 돌아가

이 탑을 돌며 나의 욕망을 표출했는지도 잊어버리고 아웅다웅 살아갈지라도

그 혼자서 나 떠난 빈자리를 휑한 바람들로 채우며

그렇게 서있으리라.

 

아 ! 아마도 탑은

사람없는 공간에서

자연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마지막 문지기가 아닐지.........................!!

 

선산의 관문에

그런

자연과 동화되어버린 외로운 탑하나가

그렇게 사람들에 무관심한채 사람들의 욕망의 때를 묻힌채 서있다.

멀리서도 보이는 그 따스한 언덕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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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동천을 가다.....(상주시 옛집답사)

  • 등록일
    2005/03/19 21:09
  • 수정일
    2005/03/19 21:09

아침 여명을 받으며

봄날로 달려갔다.

 

온지 한참이나 지난 봄날을

이런 저런 핑계로 외면하다가

불현듯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취해

형님과 함께 새벽부터 서둘러 달려 갔다.

 

그래서 아침공기 상쾌할때 도착한 곳이

상주시 우산리에 있는 우산동천이다.

 

이 곳은 우복 정경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조가 하사한 땅인데

우복 정경세의 5대손인 정주원이 치세를 이룬 곳으로

우산동천이라 불리는 곳이다.

 

멀리서도 한눈에 아 ! 할정도로 외진 산자락에 우뚝 서있는 곳이다.

 

 

몇년전에 이곳에 들렀을때는 한창 보수공사중이었는데

그 공사가 끝났는지 멀리서도 위압감 느낄 정도로 검은 색 새 기와로 단장되어 있었다.

솔직히 옛기와의 정취를 더 좋아하는 나로써는

이렇게 이질적으로 보일정도의 새기와들이 얹혀져 있는 우복동천의 모습이

다소 낯설어 보였다....역시 손을 대면 정취가 사라지는 가 보다.

 

도로에서 아직 일들을 시작하지 않은봄 논들 사이로 난 일직선 포장농로따라

쭉 들어가면 냇가가 나오고

냇가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우산동천의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

 

 

솔직히 몇년전에 왔을땐 이곳 다리 밑에서 라면도 끓여먹고 수영도 했었는데

지금은 따스한 봄날이라고는 하지만 여름정취를 즐기기엔 다소 이른감이 있고

이런 나의 기분을 알아주는 듯

버들강아지가 햇살받은 냇가 주변을 흔들고 있었다.

흔들 흔들....?...헤헤헤...강아지들이란...?.....헤헤헤

 

 

여기서 잠깐 !...?...헤헤헤

 

우복 정경세에 대하여 알아보자면

퇴계의 제자인 류성룡의 수제자다. 그래서 퇴계학파의 거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원래 퇴계 이황의 제자 중에는 류성룡과 김성일이 가장 이름높다.

이들 중 류성룡은 이황의 학문을 김성일은 학통(혹은 세력??)을 물려받은것으로 평가받는다.

류성룡은 제자가 아주 드물어 우복 정경세 정도밖에 없지만

정경세가 퇴계학파 인물들중 독보적인 학문의 성과를 냄으로써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은 성과물을 남기게 되고

김성일은 무수히 많은 제자들을 둠으로써

이후 퇴계학파나 영남학파를 성립시키는 실질적인 태두가 된다.

 

우복 정경세는 류성룡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로 초야에서 학문을 익히는데 전력을 다했는데

그 중에서도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퇴계의 학문을

현실의 세계로 즉, 실천적 철학으로 재정립 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실제 성리학에서 퇴계의 주리론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으로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비해 경쟁관계에 있었던 율곡의 주기론은 상당히 현실적인 실천론을 기반으로 함으로써

주리론 보다 더 현실개혁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에따라

임진왜란이후 세상을 안정시키는 실천론은

율곡의 문인 이었던 김장생, 김집 등의 예학을 중심으로 주기론에서부터 나왔다.

하지만 주리론은 당시까지도(류성룡과 김성일이 활약하던 시기)

아직까지 주리론을 바탕으로 한 실천론적 행동철학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나타난 것이 정경세이다.

정경세는 퇴계학의 심득을 바탕으로 주리론만의 독자적인 실천론(예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런 정경세가

평생을 뿌리박고 그의 후손들이

이러한 조상의 숨결을 간직하며 보존해온 곳이 우산동천이다.

 

 

이런 정경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우산동천에는

정경세가 학문을 수양했다는 초가집 계정과

후손들이 지은 산을 대한다는 뜻의 대산루

그리고 정경세가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에 세워진 우산서원

그리고 정씨들의 종가집이 있다.

 

난 개인적으로

한국의 한옥집들중에서

나중에 내가 따라 짓고 살았으면 하는 건물이 대산루이다.

 

우산동천에 몇번씩 답사를 감행하는 이유도 대산루가 있기 때문이다.

 

아 !....대산루.....산을 마주대하는 정자....?...헤헤헤

 

 

대산루는

특이하게 T자형 집이다.

일자형으로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집이있고

이것과 붙어서 이층으로 된 루각이 다시 일자형으로 붙어서 T자형을 이룬다.

 

 

이층 루각은 철저하게 집주인의 공간으로

루각과 한칸의 취침공간과 두칸의 책방으로 이용된 방이 있다.

이 방들을 빙둘러 난간이 있어서 난간에 앉아 책을 읽기에도 그만인 구조이다.

 

 

난 솔직히 한옥에서

이런 개인도서관 역할을 하는 공간이 계획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도 처음보며

특히 루각의 취침공간이 이층임에도 불구하고 온돌이 깔려 있는 것 또한

처음 보았다.

 

 

 

즉, 이 취침 공간은 아궁이에 불을 서서 자신의 얼굴높이에서 불을 지피는 구조이다.

신기하지 않나 ?.....헤헤

어쨋든 그 다이나믹한 구조나 그 구조의 실제 용도

그리고 정자가 위치하고 마주대하는 자연과 인간의 삶의 공간등

어디하나 나무랄때 없는 작품이 대산루이다.

 

대산루에서 마주대하는 산의 반대쪽 언덕 위에는 종가집이 있다.

대대로 정경세의 후손들이 살아온 유서깊은 종가집이다.

 

전에 왔을땐 사랑채와 안채릐 지붕보수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이젠 모두 말끔히 끝났고

당시 현장사무소였던 곳은 농기계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내가 답사를 다니면서

한옥집의 기와와 흙들을 모두 털어내고 순수하게

나무 골조만 남아있는 것을 본것은 이 우산동천에서가 처음이다.

그때 아!!..하는 감탄이란.......에휴...이후 한옥에 대한 욕심들

내가 내가 살 집을 짓고 싶은 욕구들이 날로날로 샘솟아

결국 한옥학교를 다니게 된 사연을 제공한 뜻깊은 곳이다.....?...헤헤헤

 

 



종가집은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대하는 사랑채가 남다르다.

높은 기단위에 지어진 사랑채를 보노라면

너무나 위압적인 모습에 쉽게 압도되거나

아니면 왠지 심한 거부감을 가지게만든다.

그럴만큼 높은 기단위에 벌덕 서있는 모습이다.

 

 

ㅁ자 튼 집의 형태대로 옆이 터진 채로 들어가는 안채역시

사랑채 못지 않게 높은 기단위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왜이렇게 높이 높이 서있는 것일까 ?

그건 이곳 상주의 집들에서 보이는 흔한 특징이란다.

 

이곳 우산동천뿐만 아니라

양진당, 오작당 등과 같은 민가나

상주향교같은 공공건물까지 상주지역은 온통 높은 기단

혹은 무지막지하게 우겨서 겨우겨우 만든 2층 한옥(?)의 형식을 띄고 있다.

 

이는 상주 지역을 흐르는 낙동강의 영향이란다.

낙동강은 안동과 상주사이를 큰 타원형으로 돌아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래서 상태적으로 원의 안쪽에 위치한 안동은 물난리가 거의 없으나

이 곳 상주는 원의 반대 즉, 많은 힘을받는 부분에 위치하다보니

예로부터 상습적인 홍수피해, 침수 지역이었단다.

이에 그런 자연환경에 대한 대비로써 이렇게 높은 기단과

이상한 이층 건물들이 상주 고건축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지역적 특색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산동천은

여러 부속 건물들의 나름대로의 멋과

그런 모든 멋들을 완결해주는 대산루가 있어서 언제나 답사여정의 즐거움으로 남는다.


 

우산동천하면 떠오르는 또하나의 시샘은

앞의 냇가다

깊지도 물이 많지도

그렇다고 말라버린 또랑도 아닌

그야말로 집앞의 냇가가 가진 운치, 풍취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속에서 여간내기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 !....난 언제나 저런 집 지어볼까 ?....헤헤헤....^^;;

 




참고로

이런 우뚝솓은 건물이 영 내키지 않는 분들에게

몇마디 변명아닌 변명을 말씀드리자면

원래 한옥은 바깥에서 안쪽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을 응시하는 건물이다.

 

따라서 대다수 어줍잖은 답사객들의 오만방자함의 원인은

그들이 한옥을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의식이 없어지고

단지 아는 문화재로, 관광상품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어찌 그 속에 살았던 혹은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삶의 온기들을 느끼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제발 사랑채를 뒷배경으로 열심이 다녀간 사실에 대한 기록만 남기지 말고

잠시 시간내어 대청마루에 앉아  

앞을 여유롭게 쳐다보았으면 한다.

 

 

그러다 보면 아 !...이렇구나 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런 느낌들이 곧 답사의 매력이다.....?....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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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성벽을 걷다.

  • 등록일
    2005/03/08 06:10
  • 수정일
    2005/03/08 06:10

해미읍성을 갔다.

 

갈때마다

그 들넓은 성안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이 만만찮은 곳이다.

 

 

워낙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고

특히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은 곳으로도 유명하여

거의 성지가 되어버린 읍성이다.

 

원래는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인데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내가 살고 있는 청주로 옮겨지면서 도시의 기능이 퇴락하고

따라서 읍성의 기능도 퇴락되었단다.....

 

집이나 도시나 그 운명이라는 것이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무슨 필요에 의해 쓰임을 받다가도

비슷한 놈들끼리의 싸움에서 밀려나면 도태되기 마련이고

그런 도태를 경험하면 이렇게 옹색하게 변해버리니 말이다.

 

원래는 성벽 자체나 성읍이 지금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성의 남쪽문 즉, 진남문만 남아 있었고

성안에도 우체국이니 민가들이 들어와 있었단다.

그러던 것을 70년댄가 부터 지금처럼 복원을 시작하여

지금같이 횡한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복원을 할때 성벽을 복원하더라도 안의 민가들이 그냥 있었다면

이렇게 쓸쓸하거나 허망해 보이진 않을텐데............!

 

한 설명에는 이런 성벽 복원과 관광지화에

천주교가 무척 많은 노력을 했단다.

 

지금도 천주교 신자들을 목매달아 죽였다는 회회나무가 서있고

순교기념비가 옛 감옥터에 대리석으로 서있고 .............!!

 

 

하늘을 향해 묘하게 휘어져 있는 이 나무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 자신의 신념을 위해

처절한 마음으로 세상을 벼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피값으로 이 나무는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입구인 진남문에서 성벽을 바라보는 느낌은

마치 거대한 과거의 벽에 턱하니 숨막히듯 부디치는 느낌이다.

세월을 켜켜히 쌓아 만든 이 돌덩이들의 무늬속에서

언제나 황당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의

여유없는 옹졸함을 비웃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나 할까 ........?

 

 

크고 작은 돌들 사이에서 간신히 자기자리를 차지한 듯 힘겹게 끼어있는 작은 돌들마저도

크기와 상관없이 똑같은 세월을 버티고 이렇게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 아닌가 !

하지만 어디 인간세상이라는 것이 그러한가

 

특히 요즘처럼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세월에 도시라는 공간속에

아님 사람답게 살수 없어

소리소문없이 주위에서 증발해버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어느 누구도 어떤 집단도

작지만 나름의 의미대로 살아가는 누군가를 손잡고

힘들지만 그 위치에서 함게 버티고 살아보자 손잡아 주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한 집단이 있겠는가..............!!

 



 

성안으로 들어가면 어디나 그렇듯 정면에 우뚝 서있는

화려하게 단청된 한옥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왠만하면

무시하고 바로 성벽으로 올라가 성을 성벽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길 권한다.

뭐 한옥이라곤 해도

거의다가 최근 몇십년안쪽에 복원해서

건축적 특징도 없이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크기가 웅장한 기형적인 느낌의

사람 흔적없는 세트장 같은 느낌밖에 없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느니 인간도 어쩔 수 없는 무게를 지닌 성벽을 따라

성안의 횡함과

성밖의 분주함을 지켜보며 유유자적 흐느적 거리며 둘러보는 재미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늦은 오후시간에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느긋하게 저녁의 풍광을 즐기며

산책하듯 걸어보는 것 만큼 읍성의 그리고 성벽의 그리고 세월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어디 또 있으랴.......

 


 

그렇게 점점 더 어두워지는 시간속으로 사라져 보는 것 만큼

자신을 온전히 세월이라는 시간의 흐름속에 맡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으랴....

 



 

그렇게 문루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 하루 아니 이제가지 살아 온 나만의 세월을 한번 반성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

 



성벽 넘어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담배 한대 입에 물고

멍하니 사진기 들이대면서

그렇게 해미읍성을 어둠속에서 빠져 나왔다.

 

읍성을 빠져 나와 시장끼를 느끼면

순대국밥을 한번 드셔 보시길.....................^^

 

뭐 세월의 강을 건너 오느라 많이 들 힘들텐데

이럴때 뜨거운 순대국밥 한 그릇이면

새로운 원기가 보충되어

힘차게 구구질구질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인정이 있어서 살아볼만한

그런 삶을 힘차게 굳세게 살아 가고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을까 ?

 


 


읍성 바로 앞에 식당이 있는데

순대국밥이 맛있다.

 

내 기억으로는 다른 어느 곳 보다도 맛나게 먹은 기억이다.

후르릅 쩝쩝하면서....................헤헤헤

 

아 ! 순대 국밥의 맛에 취해

순대 사가지고 오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을 듯....

국밥은 맛있었는데

사가지고 와서 먹어보니

양도 적고

국밥맛과는 좀 다른

그저 그런 맛이더라......^^;;

 

국밥은 진짜로 맛났었는데......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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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 옛집기행(3)--공세성당

  • 등록일
    2005/03/07 11:30
  • 수정일
    2005/03/07 11:30

내친 김에 들렀다.

 

아산방조제가 보이는 곳의 작은 동산위에 우뚝(?) 서있는 성당이다.

누군가가 이 곳에 피정을 온 적이 있다는 아사미사한 이야기를 듣고

아 ! 피정...음....뭐 이런 적이 있었던 그 성당이다.

 

이 곳 근처에 무수하게 많은 순교 성지중의 한 곳이고

따라서 나 같은 어줍잖은 사람들보단 신자들이 찾으면 더욱더 감회가 새로울 그런 성당이다.

 

 

이 근처 혹은 아마 충청도 에선 제일 먼저 건축된 고딕양식의 건축이다.

워낙 어디 사진에서나 보아오던 고딕양식이니 하는 단어가 생뚱맞아서

건물에 대한 자세한 것을 알아보기 보단

그냥 아 ! 좋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라보는 맛이 좋은 그런 성당이다.

 

 

아직 쌀쌀한 바람 탓인지

하늘이 파란만큼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날씨였는데도

왠지 답답한 마음이 확 열리는 그런 기분으로 멍하니 첨탑 끝을 쳐다보았다.

 

 

아 ! 높군......크크크.....^^

 

원래 이 곳은

공세곶지로

일명 공세조세창이었던 곳이다.

일명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조세미를 보관하고 있다가 바로옆의 뱃길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싣고 가던 그런 곳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세금은 매우 중요했음으로

이곳에는 창고를 중심으로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포구쪽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곳이다.

 

나중에는 박해받던 천주고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런 곳에 숨어 들어 왔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는지 나중에 잡혀가 결국 순교했단다.

 

나중에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이 곳 공세에서 시작되어

결국 청나라가 쫓겨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킨게 된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고...............................!!

사람 통행이 많다보니

이런 저런 아픈 기억들, 사연들이 많은 곳이다.

 

 

 

성당 건물은 1922년(?) 정도에 건립된 것으로

성당과 교육관이 있다.

 

 

작은 동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산 주위를 따라 산책코스도 있고

그 산책코스를 따라서 예수가 본디오 빌라드의 재판부터 못박혀 죽기까지의 일생이 동상으로 재현되어 있다.

 

성당 내부는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엄숙함과 고요함.....그리고 뭔지 모를 이끌림이 있다고 할까 ?

 

 

부는 바람만큼이나 왠지 조용하게 만드는 곳이다.

 

물론 성당에는 당시 순교한 박씨 3형제의 묘와 비석이 남아 있고

언덕 아래로 오즘사람들의 피정을 위한 신축 건물이 있다.

 

성당 앞 마당 지하에 성체조배실이 있는데 그곳을 따라

옛 성채의 일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당 자체가 성벽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 같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직도 옛 성백이 무너지지 않고 쓸쓸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언제나 고즈넉함을 넘어선 뭔가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다.

 

 

난 이런 풍경을 볼때마다

세월이랄가 하는 뭐 그런 무게감을 느낀다.

그 영화롭던 세월은 다가고

이렇게 성벽은 어떤 빈가의 담이 되고

어떤 성당의 담이 되고

온갖 잡목들에 둘러싸여진 음침한 곳으로 물러나 앉아 있는가 하는 생각들이 든다.

 


 

이집 뒤로 보이는 나무들이 성벽위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다.

지금은 이 집마저 폐가가되어

마치 성벽이 폐가를 감싸고 있으면서

같이 폐가가 되어버린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드러낸다.

 

그 길을 다라 조금 더 내려오면 보이는 것이 일부만 남아있는 성벽과 비석들이다.

 


지금은 어떤 집의 담장으로 쓰이는데 담장 높이가 거의 그 집의 지붕만큼 올라가 있다.

 

 

공세 조세창이 있었다는 설명문과

해운판관비석들이 찾는이 없는 어느 담장 넘어에 외로이 서있는 것이

이젠 어느 조그마한 시골동네로 전락해 있는 공세라는 동네 만큼이나

안스럽고 서글픈 표정들이다.

 



둔덕처럼 변한 성벽위에서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저 대나무 처럼

사철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의 인생도, 마을의 풍경도

어느 누구하나 기억못할 정도로

문득 잠에서 깨면 바뀌어 있는 것일까 ?

 

바다나 보러 가야 겠다.........................^^

 

  


바다에 한 발적시고 있는 저 끈처럼

역시 공세에서 봤던

서글픔은 바다를 닮았던 것 같다.

보면볼수록

공세라는 마을이 안고 있는 세월의 풍상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다는 듯

세월의 때가 느껴지는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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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 옛집 답사(2)--신항리 행평윤씨촌(윤보선생가)

  • 등록일
    2005/03/07 08:52
  • 수정일
    2005/03/07 08:52

아산시에서 두번째로 들른 곳이 둔포면 신항리다.

 

보통 이 곳 아산시는 청주에서 1시간에서 2시간 내의 가가운 곳이라서

자주 답사 내지 바람 쐬러 오는 곳이다.

 

특히, 이번 답사에서는 빠졌지만

외암리 민속마을이나 맹씨행단은 1년에 2-3번씩은 오는 곳이다.

 

그런에도 아산시 북쪽에 있는 이 곳은

계속 오려고 눈여겨 보긴 했지만

왠지 멀게느껴지는 심리적 거리감으로 인해 한번도 와보지 못했던 곳이다.

막상 차로 달려보니 맹씨 행단에서 20여분 정도의 시간밖에 안걸리는데도

왠지 멀게만 느꼈던 것으로 보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요상하긴 한가보다.

 

아산시에서 잘닦여진 45번 국도를 따라 둔포방면으로 가다보면

신항리 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이정표를 따라 한 5분이 안되게 들어가면

해평 윤시들의 한옥을 볼 수 있다.

보통 길가의 이정표를 신항리보다 윤보선대통령 생가라는 표지가 훨씬 크게 나와 있다.

이 표지판을 보고 오면 윤보선 전대통령의 생가이자 해평윤씨들이 지은

약 100년이 좀 넘어보이는 한옥집들이 나온다. 

 

마을길을 따라 마을을 들어가다보면 중간쯤에 솟을대문이 나온다.

다른 어떤 마을에서도 본적없는 독특한 솟을대문이

이 마을의 해평윤씨 한옥집들의 특징을 말해준다.

 


이 솟을 대문과 그에딸린 행랑채가 끝나는 왼족에 원래는 담이 있어야 할 곳에

지금은 길이나 있다. 그리고 물론 대문도 잠겨져 있다.

 

 

그 잠겨진 대문 안쪽으로는 지금은 풀만 무성하게 자라 있는데

그 너머에 당연히 나와야 할 사랑채 혹은 안채 뭐 이런

한옥의 일반적인 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잡들이 서너채가 나온다.

 

마치 이 솟을 대문이 이 마을 전체의 대문 역할을 하듯이

덩그란이 독립된 형태로 서 있고 그 안쪽으로 한옥집들이 별개의 대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서원 입구에 서 있는 홍살문처럼

이 문이 해평윤시 일가들이 모여 사는 이 한옥들의 전체 대문 역할들을 하고

안에 있는 한옥들은 일면 평범해 보이는 기능성이 강조된 작은 대문들을 가지고 있다.

 

처음 나오는 집은 대문을 통과하여 계속 진행되는 길을 중심으로 옆으로 늘어서 있다.

 

방향이 거의 서향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납쪽 혹은 동남쪽을 향하지 않고

그저 대문을 통과한 동선에 맞추어 길옆에 요즘의 무슨 가게처럼 늘어서 있는 형국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퇴락한채 쓸쓸히 망가져 가는 듯한 인상이다.

형식은 민도리집으로 조선말 혹은 일제초기의 전형적인 한옥집의 양식이다.

 

 

그 건축의 시대적인 특징인지는 모르지만

집안 곳곳에 이 문처럼 서양양식이 가미된듯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년대가 100년정도 즉, 조선 개항후임을 알수가 있다.

 

 


 

길을따라 늘어섰다는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시원한 마당의 느낌 뭐 이런 것보다는 왠지 답답한 느낌이 주로 들 정도로

전통 흙담이나 붉은 벽돌로 막아 놓아서 공간공간들이 독립적이긴해도

막힌 느낌이 많이나는 편이다.

 

 

다음 집도 비슷하게 길을 따라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 사람이 현재도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는 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현재 살고 있는 집들은 거의 대다수가 문을 잠가두고 집주인이 외출한 관계로

들어가 보지 못해 많은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져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로 걸어갔다.

윤보선 대통령의 생가는 솟을대문에서 시작되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바로 보인다.

높은 담에 둘러싸여 있고 유일하게 별도의 솟을대문을 가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아 ! 저기가 거기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솟을 대문 자체가 이빚이 처음생길때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전체적인 이 동네의 집들을 보아서는 윤보선대통령이 이후 정치적인 출세를 거듭하면서

개축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솟을 대문 옆으로 담장이 이어져 있지 않고 차가 들어갈수 있도록 담의 일부를 헐어버려서

누구나 대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집구경을 할 수 있는 집이다.

한옥집이 아무도 살지 않아도 집이 금방 퇴락하지만

사람이 살면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이정도의 개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냥 대문밖에 주차해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시골동네임에도 꼭 차를 대문안까지 끌고 들어가기 위해 담을 헐어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실제 그 집에서 살지않고

그냥 이렇게 구경만 다니는 관광객의 입장이기에 생기는 감정이리라 자위했다.

 

여기서 참고로 윤보선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면

워낙 최근가지 생존했던 사람이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노파심에서 이야기하면

우리나가 제 4대 대통령이다.

대통령으로만 보면 이승만 다음이고 선거로 보면 4대 대통령이고

헌법의 개정으로 보면 제 2공화국 대통령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내각책임제로 인하여

그 실권을 갖지 못해 사람들이 대통령인 것은 알지만 언제인가 잘 모르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사람이다.

 

4.19 혁명이후 들어선 정권 자체가 단명한 이유도 있지만

내각제 실시로 인해 총리 이름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 정권을 장면정권 혹은 장면내각이라 부르니

당시 대통령인 윤보선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경향인 것이다.

 

여하튼

박정희의 군사구데타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고도

1990년까지 생존했으니 그 뼈져린 감흥이야 어떠했으랴.......


실제 장면 내각이 집권했을 당시 민주당의 신,구파의 분열과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스러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실제 그렇게 크게 잘못한 부분이 없음에도

당시 박정희에 의해 이루어진 정권탈취는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장면과 윤보선 등에게 무능과 무절제, 부패의 이미지를 온통 뒤짚어 씌웠고

이로인해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우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중

솔직히 윤보선이나 장면보다 비리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대통령이 누가 있겠는가 ?

 

실제 박정희는 자신이 집권한 후에도 이들 윤보선과 장면에게 정치활동을 못하게 했을망정

어떠한 비리나 잘못을 처벌하지 못했던것처럼

사실은 이들은 아직 채 자신들의 어떤 정책들을 펴보지도 못한 채로 박정희의 권력욕에

자신들의 모든 것들을 잃어야 했던 것 같다.

 

솔직히 아직 4.19 이후의 상황에 대한 명확한 검증들이 없고

아직도 박정희 망령이 한국사회를 옥죄는 상황에서

그 잘난 노태우니, 전두환이니, 김영삼이니 하는 정치범죄형에 가가운 대통령들의 생가도

복원하고 관광지로 만드는 판에 문화재적 가치가지 있는

또 한명의 전임대통령의 생가는 퇴락한 채로 방치되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윤보선이나 장면은

국민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정책으로 인해 욕을 먹었지만

노태우나 전두환이나 김영삼은

최대한 개인적 이익을 극대화한 공로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

 

당시 박정희의 집권을 바라본 김수영시인이

" 이제 한국은 다시는 자유를 만끽하지도

만끽한 자유에 대한 책임의식을 배울기회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배울 기회도 잃어버렸다 " 고 울면서 이야기 했단다.

 

자유가 지나쳐 다소 방종하기로서니,

민주주의를 실행하면서 다소 혼란스럽다고해서

반만년만에 처음으로 만끽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훼손할 만큼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꼭 이렇게 군대처럼 국민들을 일렬로 줄세우고 무책임하게 강요하고

개패듯이 몰아부쳐야 하는 것인지를 물었던

김수영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어쩌면 제대로 자유니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식이니 하는 것들을 배워보지도 못하고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 요즘에도

어느 한 정치인도 국민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고

어느 한 개인들도 공동체적인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는 것이다.

한국의 국민성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배우려 했는데

총칼로 위협해 배우지 못하게 한 박정희와 그 떨거지들이

이제와서 국민들에게 책임의식좀 가져라 소리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 가 중요한 것이다.

 

자유란 책임이므로.....

 

갑자기 오바를 했다.

뭐 여하튼

이런 것이 답사의 재미 아니겠나 싶다.

잊혀진 것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되짚어보게하는 힘.....!

 

 

새로 지은 솟을대문만이 위로 덩그라니 솟아 있고

왠지 사람들이 사는 집임에도 퇴락해 보이는 윤보선 생가를 보면서

언듯 박정희생가가 떠올랐다.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자신의 친척까지도 밀고했던 박정희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민족까지도 팔아먹었던 박정희를

뭐 기억할게 있다고 생가를 복원하는지 말이다.

 

그곳에 가서 구경하면서

아 ! 나도 친척 팔아먹고

민족 팔아먹고

자유 짓밟아서 권력만 잡으면 된다...뭐 이런 생각하려고 기념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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