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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마을 오일장, 진한 팥죽

굿놀이 마라톤 마지막 주자 터울림의 해보내기굿에서 팥죽과 막걸리가 제공된다고 한다.
팥죽...하면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우리 동네 장터는 매월 4, 9일이 붙은 날은 왁자지껄 질서있게 늘 그자리 그물건으로 장을 연다.
한 귀퉁이에 첩실이면서 알콜중독자인 남편과 자식을 키워야 했던 고달픈 삶의 무게를 진 친구 어머니가 여는 국수집이 있다. 파란 비닐로 벽을 만들고 삐걱거리는 긴나무의자에 마구 짠 테이블. 테이블 밑에는 물을 담아놓는 타원형의 큰 다라이..후후..
기웃기웃 장구경을 하다가 국수집에 들르면 어머님이 여름에는 국수와 묵종류, 겨울에는 국수와 팥죽을 끓여서 내놓는다.
어머님 손이 얼마나 큰지 세알도 큼직큼직하고 짙은 팥색깔이 침이 꿀꺽 넘어가게 만든다.
초등학교 4학년 까지는 세알이 너무 싫어서 요리조리 피해서 팥죽을 먹고는 세알도 쪽~빨고는 뱉어놓다가 엄마에게 빗자루로 맞곤 했는데,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팥죽의 진미는 찹쌀가루로 빚은 세알임을 알게 되었다.
장이 서는 날은 어김없이 점심은 친구네 국수집에 가서 친구랑 국수 한그릇, 팥죽 반그릇을 공짜로 먹었다. 가끔 옆자리의 아주머니나 할머니가 "니, 약국집 딸네미 맞제? 아이구야 우째 지할미랑 똑같노."라며 감탄사 연발이다. 쑥스러워서 입을 꼭 다물고 국수를 건져먹는 나.
우리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찾아서 부산으로 가기전까지 우리 동네 장터에서 콩나물을 팔았으니, 동네 어른신들은 콩나물 아지메로 기억하고 있다. 아..내고향은 우리 아버지의 외가이며 할머니의 고향이다.
요즘도 친구 어머니는 국수집을 하고 계시다. 가끔 얼굴을 뵙게 되면 시집 안가냐고 묻는다. 내친구는 어느새 애엄마가 되었으니까. 지금은 그저 "어머님 건강하시죠?" 엉뚱하게 말을 돌리면서 손한번 잡아본다. '에고..많이 늙으셨네..' 다음에 가도 그자리에 계시려나, 그 진한 팥죽 한그릇 먹을 수 있으려나..
(20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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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의 뜻

 

혼자 홈페이지 만들어 놓고..뿌듯해서 제대로 보질 않고 있었다.
종남언니가
"여기 피플이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피플 맞니?"
"예.."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다.
"풋..그러면 이상한데..peple가 아니라 people겠지"
이럴 수가 한나절 넘게 'o'가 빠진 피플이 설치고 있었단 말인가.
있어 보이기 위해서 영어를 메뉴에 넣은 내가 잘못이지..후후..
포토샵을 얼른 열어서 고치고 나서 혹시나 불안한 나머지 인터넷 영어사전에서 다시 확인했다.
"people 뜻; 인민"
헉..인민이라는 대문짝 만한 글자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당당하게 인민이라는 말을 보여줘도 되는가. 사람, 인민, 민중이라는 뜻임을 알고는 있지만 레드 컴플렉스 투성이인 남한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는 '동무'만큼이나 금기시 되는데 말이다.
이야..정말 놀랐다..그리고 '인민'이라는 말이 낯설어서..한참 인민?인민? 이렇게 평범하게 그냥 써도 괜찮을까..
다시 인민? 인~민, 인민! 좋네..

2001/12/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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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만화전, 쫑 후기


8일을 하자센터에서 보내고 났더니..페닉 상태가 되었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한자리에 고정되어서 멍하니 있다가 사람들 오면 안내하고..또 멍하니 앉아있고..반복되니까..그것도 계속 할일은 못되는 것 같다.
후후..뒷풀이 때에는 심하게 망가져서..생에 처음으로 길바닥에서 잠드는 등...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는 꼴이 되기도 했지만..열심히 준비했고..열심히 진행했다..그렇죠? 여러분?

생각하나!
이번 행사를 하면서 새롭게 보인 사람이 있어서..그 사람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누구냐면..바로바로 도단이 김현숙님.
언니는 구 노문교협 당시 창조와 보급을 만들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내가 처음 노문센터에 들어왔을 때 편집부로 들어왔던 터라, 같이 고민도 해주었고, 잠시 만들었던 월간 노동문화의 편집위원으로 기꺼이 활동도 했다. 즉, 노동문화운동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각별한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이었다.
따끈따끈 신문에 내는 만평에 대한 평도 하기도 했고, 다른 잡지에 연재하는 작품들도 같이 보면서 느낌을 듣기 위해 눈을 반짝이던 언니..
그런데 만화전을 준비하면서 좀더 객관적으로 작품을 봤다. 특히 수시로 틀어주었던 슬라이드로 만든 대우우중과 공...두 작품을 8일동안 1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공은 현숙언니의 그 따뜻한 세계관, 인간에 대한 애정,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제대로 보여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보는 내내, 자꾸 가슴 저 밑은 곳에서 눌러놓은 감정이 쿡쿡 올라와 확 터트리고 내려갔다. 또봐도 그렇다. 전시회를 준비하는 내내 마감과 싸우면서도 내색하지 않고..다른 사람을 걱정하던 현숙언니.. 행복하소서!

생각 둘!
어떤 장르의 어떤 작품이던 현실을 드러냄에 있어서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만화도 피가 터지고 사이코가 등장하고, 영화도 공포영화나 검푸른 조명이 잔뜩 깔린 영화만, 소설도 좀더 감각적인 삶을..지금도 틀렸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행복함을 묘사하고, 희망을 그려내는 것이 강요이고, 위선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단지 노동문화운동의 활동가로 있기 때문이 아니라 두사람의 작품이 내 생각이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영이형...쉽지 않는 농부를 살아내기를 말그래도 버틴 그분은 오히려 그속에서 노동의 사상이야말로 후세에게 전해줄 가장 위대한 철학이라고 말한다. 설명을 하자면 한도 없이 풀어낼 수 있는 이 짧은 문장의 말은 처음 듣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를 사로잡는다. 노동이라는 화두가 케케묵어서 인상을 찌푸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도 내가 하는 이 노동이 어느 누구에게 독점되지 않는 자유와 그만큼의 평등함으로, 정당한 댓가로 돌아오게 될 날을 위해서 보이는,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고 있는데...그것이 내 삶인걸..

또 한사람은 현숙언니..노동이라는 거대한 화두..그러나 뒤짚어 보면 거기에는 모래알 같은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음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공을 보면 아이를 업은 엄마, 좌판의 할머니, 지친 사무직 노동자, 필시 정리해고 당한게 틀림없는 생산직 노동자, 노숙자..복잡한 도시속의 수많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 그들의 고단한 삶속의 작은 희망이 공을 키운다. 그리고 그희망은 어느 한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기를 소망하는 작가의 따뜻한 세계관이 펼쳐지는 순간을 보여준다. 아...정말 나는 이 작품이야 말로, 노동만화, 노동하는 삶의 긍정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주저리 주저리 늘어놨는데..2001년 하반기 만화전에 몸바쳤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많났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작가들인데..이 만화전이 정말 그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활동의 성과로 가져갔으면 하는 마음..여전하다..
준비하는 기간 짜증도 많이 내고..괴롭혔는데..미안하다..여러 사람들에게..다들 정말 고생했고.

<2001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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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밤중의 추격전

버스간에서 신촌 어귀를 지나가다보면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다가 골목길에서의 추격전이 생각이 났다.
3학년때였나..소주한잔 걸치고 친구 자취방에 한잔 더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던 중이었다. 가로등이 없는 골목길을 질러 가면 빨리 갈 수 있겠다 싶어서 새까만 새벽에 열심히 뛰었다. 무서웠다. 인간의 소리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술김인데도 등에 땀이 한줄기 타고 내릴 정도로..
갑자기 뒤에서 나와 똑같이 뛰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봤더니 왠 남자가 열심히 나를 쫓아 오고 있었다.
'헉..이럴 수가..설마..내가 여자로 보여서 쫓아오나..그럴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지만 짧은 커트에 운동화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으면 그냥 쓱 보면 완전히 건장한 총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의심하면서도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싶어서 열심히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저기요! 잠깐만요" 점잖지만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
못들은 척 다시 뛰었다. 다시 그남자가 애처롭게..
"저기요..잠시만요.."
우뚝...멈춰서서 돌아봤다.
"왜요?"(경상도 억양으로 날카롭게..왜자에 힘을 줘야 한다.)
남자가 고개를 푹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술에 맛탱이가 간 정도는 아닌 듯한데..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죄송한데요..술한잔 안할래요..보아하니..저랑 처지가 비슷한 것 같은데.."
순간 스토리가 읽혔다. 이남자가 실연당했나 보다..순간 화가 확 났다..
밤길이 무서워서 막 뛰어가는 나를 보고..자기식으로 해석하다니..멀쩡한 애인이 있는 사람한테..
"지금 친구방에 술마시러 가는 길이고..애인도 있어요." 딱잘라 말했더니..
다시 불쌍하게 고개를 푹 숙이며 "그래요? 죄송합니다." 돌아섰다.
그 꼴이 불쌍해서..나도 한마디 해줬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너무 기운빼지 마소. 술 못마셔줘서 미안해요."
그러자..그남자가 나를 쳐다보면 90도로 인사를 꾸벅했다.
"고맙습니다."
그 새벽의 웃기지도 않은 사연을 가지고 밤새 술마시면서 친구랑 깔갈 넘어갔는데..가끔 그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싶고..그렁그렁 눈물고인 눈이 생각이 난다..

<2001.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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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날카롭게, 더욱 예민하게

사람들이 가끔 날보고 대화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예민하냐, 혼자 열받으면 어떻하냐 등등의 비슷한 지적을 한다.
일부분은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잘 안고쳐져서 나도 내가 싫을 때가 있으니까 반성..
그렇지만 예민하냐? 민감하냐?의 말에는 그야말로 화난 표정을 짓게 된다.(두얼굴의 사나이라는 외화시리즈를 기억하는가? 주인공이 한쪽 눈썹만 찍 올리며 얼굴을 찌푸린다. 나도 똑같다.)
사안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으나, 특히 민감하게 언어와 문장을 포착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성차별적인 내용이다. 그건 뭐, 머리와 가슴과 온몸이 저절로 발견하고, 반응하게 된다. 뭐랄까, 그런 내용의 문장을 들으면 너무나 선명하게 머리와 가슴에 확 내리꽂히면서 욱신욱신 아파온다.
가끔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농담으로 그냥 넘겨 들어도 될텐데라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그냥 쌈닭이라서 즐기면서 덤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한편, 온몸이 반응하는 나를 보면서 거꾸로 어떤 인간이 이렇게 반응하게 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특별히 누구라고 얘기는 않겠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활동가들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식사당번이라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서 기뻤다. 그런데 마지막에 누군가가 "맛있다. 이제 시집가도 되겠다"라고 툭 던졌다.
어이가 없어서, 머리 꼭대기가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바로 "예? 뭔소리요?" 주변의 사람들이 조금 긴장한 듯, 질책하듯 그 선배에게 웃음과 약간의 조소를 보냈다. 그정도 분위기 파악했고, 그말을 뱉은 선배도 미안하고 민망한 표정이이서 ,
"형이 나한테 뭔소리를 들으려고 그딴 소릴를 하는거요."라고 마무리..
이런 비슷한 내용의 문장을 사람들은 별생각없이 던진다. 대학다닐때에도 학습하면서 "미스김, 시집이나 가지"라는 말이 얼마나 성차별적인가를 말하면서 사적인 공간으로 돌아오면 "살빼서 시집이나 가라" 라는 웃기지도 말을 정말 아무생각없이 하는 모습도 신물나게 봤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 단체에 들어와서 만나는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더라.
성차별적인 문장에 대해 반격을 가하면 두가지의 반응이다.
"어이고, 그냥 농담으로 하는 건데. 뭐그리 미감하냐? 그렇게 인간관계 맺으면 곤란하다. .... 피해의식이 너무 강한거 아니냐?"
라는 똥뀐 놈이 성내고 난뒤, 오히려 여성운동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
"..하하하...."
이렇게 그말이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내뱉고 난뒤 알고 나서 민망하게 웃거나 반 농담식으로 미안하다 사과하는 사람.
그래도 두번째는 다행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첫번째 인간, 지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큰소리만 뻥뻥치면서 지적한 사람을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비뚤어진 여성으로 만들어버린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벌렁벌렁 쿵닥쿵닥 뛴다.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난뒤, 곰곰히 생각했다. 뭘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느냐는 말에 구애받지 않기로.
난 더 민감하고, 더 예민하게..그 말들을 짚어내고 아무 생각없이 던진 말이라는 의식에 대해 칼날처럼 싸워야 될 것 같다.
내가 살아야 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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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를 헤매다

터울림의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길다.
따끈따끈 편집해주던 원낭자의 부상으로 꼬실이형 동생인 문정언니에게 부탁해서 밤샘 작업을 했다. 아...언니도 마감 걸려서 정신없었는데..어찌나 미안하고 고마운지 말로 표현이 안된다.
내가 워낙 새벽 2~4시경이 쥐약이라서 꼬박꼬박 졸다가 언니가 물어보면 대답하고...계속 그랬다. 세수도 해보고, 커피를 먹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6시가 넘으니까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을지로로 향했다. 필름 출력을 기다리는데 1시간, 그걸 들고 을지로 인쇄골목을 찾아갔는데...왠걸..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다닥다닥 붙어있는 인쇄소들 사이에서 정말 길을 잃어버렸다. 간판들도 쬐그만 것들이 대부분이고..
날씨는 끝장나게 덥지, 햇볕은 내리쬐고, 땀은 삐질삐질....
까뮈의 이방인인가? 햇볕이 뜨거워서 총을 쐈다고 그랬나? 하여튼 딱 그심정이었다. 한놈만 걸려봐라...방향 감각도 없어지고, 여기가 맞는지 어떤지 몰라서 인쇄소로 전화를 몇통이나 걸다가 결국에는 아저씨가 마중을 나왔다. (핸드폰 밧데리도 나가서 공중전화를 찾아다녀야 했다.)
황당한 것은 맨처음 전화를 했던 슈퍼 옆이었던 것이다.
을지로 인쇄골목, 정신없고 분주한 거리..난 거기에 갈때마다 정말 사람들이 너무 바쁘다는 느낌에 마음이 막 쫓긴다. 종이를 들고, 실어서 움직이는 사람들, 한손에 출력한 필름을 들고 바삐 뛰어가는 사람들, 잉크와 종이에서 나는 묘한 냄새, 우중충한 길과 간판과 건물 색깔(시꺼멓다).
사무실에 도착하니까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한나절을 을지로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아~~원낭자는 대단해..매일매일 그거리에 가서 맡기고 찾아오고, 처리하고..등등..인쇄소도 하나의 공장이라서 기계를 만지는 일들은 거의다 남자들이 하고 있는데 그 틈바귀에서 조금만 밀리면 엄청 바가지를 쓰게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 악다구니도 부려야 하고, 깡다구도 있어야 한다.
원낭자..을지로에 가면 당신이 생각나누만...얼른 병원에서 퇴원해야지.
그리고 푹쉬다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사진공부도 계속 하고..

<200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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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장아저씨의 방송

아침에 부시시 눈떠서 약국(아부지의 일터)으로 나갔더니..오랜만에 듣는 이장아저씨의 방송이 들렸다.
"아~아~안내방송드리겠습니다. 현대자동차의 수련장 관계로 소란스럽습니다. (그다음 잘 안들림)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어....혹시...설마....
어제 밤늦게까지 들리는 엠프소리, 폭축소리에 바닷가에서 누가 장난치는구나 싶었는데..설마..
얼마전 현대자동차에서 엄청난 규모의 가족수련장을 마련해서 캠프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하더니...
조카 손을 잡고 아버지께는 아무 말도 않고 슬쩍 근처로 가봤다.
이럴 수가..낮은 언덕 같은 산이라지만 뭉툭 잘라 도로까지 만들었더라.
동네 뒷산에 보기 싫은 공터, 아니 공사장이 생긴 것 같았다.
너무 높아서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입술을 꼭 물고 집으로 왔다. 도대체 자기들이 필요하면 무조건 깍고 담올리고 그러면 되는 건가..해안도로에, 골프장에, 산을 깎고, 나무를 잘라내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이 눈앞에 보이고 있는 고향마을이다.

(2001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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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바닥에서

피가..血이 아니라 논의 모를 압박하는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홍홍..놀라셨나요?
강화도에서 삽한자루 달랑 들고 농사를 지으며 만화를 그리고 계시는 장진영 선배님 댁에 갔었어요..
주목적은 노동만화페스티발(가안)을 준비하고 있는데 컨셉잡는 것, 기획방향, 방법 등등을 논의하러 간 것이구요..내려간김에 술도 한잔하자는 것이었지요..
강화에 도착하자마자 진영이 형이 단골집이라며 회를 사는 등..찾아간 후배들을 미안하게 하시더니..할일이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아침에 눈을 떠 맛있는 간장게장에 밥을 후딱 먹고 나서 형이 말한 할일을 하기 시작했지요.
제초제를 쓰지 않기 때문에 다른 논과 비교되는 무성한 '피'를 뽑는 일이었습니다.
'피'라는 잡초는 어릴때 뽑지 않으면 나중에 손을 쓸 수 없게 되고 심지어 수확이 확 줄어버린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뿌리까지 뽑은 놈을 그대로 논에 두면 다시 뿌리를 내린다고 하네요.
아주 지독한 놈이죠..
3시간 가량 뽑았지만 논의 반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내년에는 피뽑을 즈음 인천과 서울에서 한차씩 내려와서 확~~다 뽑아버리기로 했습니다. 진영이형 부부가 일주일 동안 하는 분량이라고 합니다.
반쪽을 다하고 나서 옮겨서 반쪽을 하고 나면 다시 저쪽 반쪽을 해야하고의 반복이라고 하네요. 모내기나 추수보다 더 힘든 일이 아닐까 싶어요.

좋았던 것은..일을 하고 나서 보니..금방 성과가 보였습니다. 이렇게 바로바로 성과가 나오는 일이 농사인 것 같았어요.(힘들지만)기분이 무지 좋았어요. 내가 일한 줄을 보면서 흐뭇해 했지요.
피뽑으면서 진영이형이 피는 자라기 전에 제압해 버려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는데 꼭, 잡초에 해당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우리 주변에 '피'같은 잡초가 얼마나 많은데요...혹시..너무 무성하게 자라서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됩니다.
'피'같은 지독한 잡초는 단호하게 타협없이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겠지요.

(2001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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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만났던 그사람들

문득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 만났던 사람들이 기억이 났다.
엄마는 신부전증으로 95년부터 현재까지 투석을 하면서 병과 싸우고 있다. 초반기인 95, 96년에는 자주 입원을 했고 대학생이었던 내가 엄마 병수발을 들었던 기간이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인데 오늘 유난히 기억이 새롭게 난다.
엄마와 같은 병을 앓고 있던 그언니는 나보다 3~4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결혼한지 2년 정도 된 새댁이었고 아기가 있었다.
신부전증 환자들은 노폐물을 일반인들보다 걸러내는 일이 힘들어서 얼굴색이 거멓게 변하는데 그언니는 얼굴색이 우유빛이었다.
남편은 트럭운전사였고 언니와 같은 병실에 2달인가를 있었는데 내가 얼굴을 본 것은 2번이 다였다.
알고보니 언니와의 결혼생활에 진력을 내고 있던 중이었던가 본데 병실에 와서도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잠자기에 바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난폭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 없는 편이었다.
그에 비해 언니는 섬세하고 민감한 성격으로 가끔 혼자 울기도 했고 병수발을 들고 있는 어머니에게 성질을 내기도 했다. 남편이 왔다가 간 날은 더했다. 언니의 어머니는 계속 눈치를 보면서 미안해 했기 때문인지.
어느날 나도 낮잠에 까무라져서 깼더니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모습이 참 잊혀지지가 않는다. 신부전증이라는 병은 행동반경을 조이고 불치병이기 때문에 평생 투석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그언니는 신부전증의 가장 큰 적인 당뇨병까지 있었으니.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을 맛보기도 전에 힘든 몸으로 아기를 낳고 무심한 남편때문에 맘이 상하고 늙은 어머니가 젊은 딸 병수발을 들고 있으니 그 맘이 오죽하랴 싶었다.
퇴원하고 싶다고 보채는 언니때문에 억지로 퇴원을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엄마가 다른 큰 병원에 가는 바람에 6개월 넘게 만나지 못했다.
다시 엄마가 그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 응급실에 실려온 언니를 만났다. 넋놓고 있다가 하루에 4번 해야 하는 투석을 두번이나 빼먹고는 쇼크가 와서 응급실에 들어왔다고 했다. 병실에 올라온 언니를 향해 언니의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 애도 아니고 말이야..여행 못가게 한다고 그러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때 언니는 고개를 돌리고 앉아있었는데 그 표정은 실수가 아니라 세상만사 다 포기한채 투석 안해버릴 거야 라며 때를 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언니가 먼저 퇴원하고 우리도 퇴원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못만났는데 그언니의 하얀 얼굴과 표정이 가끔 떠올라 궁금해진다.
언니의 귀여운 아기(나는 무료함을 아기와 놀면서 지우기도 했다.) 후덕해보이던 언니의 어머니.
그 사람들은 어떻게 또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아니 그 전에 IMF가 터지고 민생고 심해졌을 때 특정한 수입이 없는 언니네는 어떻게 살아냈을까.
궁금해졌다. 사실은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신부전증과 유아당뇨를 가지고 있는 언니는 위태위태한 수준이라서 혹 생명이 다하지는 않았을까, 무심한 남편이 계속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을까, 아기는 학교에 들어갔을까.

(2001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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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고객관리

설 연휴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제각기 사는 얘기들을 풀어놨다. 교통관리공단에 있는 친구, 하나도 하기 힘든 외국어를 2개국어를 마스터하고 불어까지 도전하고 있는 친구, 의상학과를 나왔지만 치과에 취직한 친구..나처럼 단체활동하고 있는 사람. 제각각 직자얘기로 한참 할 무렵 치과에 다니는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왠 치과냐?"의 질문으로 부터 보수가 더 좋다고 하면서 자신이 일하는 파트가 무엇인지 설명하였다.
그 친구는 백화점에서 픽업된 형태라서 다른 간호사들보다 훨씬 보수가 좋다고 한다.
왜? 백화점 경력이, 추천이 그럴까?
3~4층짜리 빌딩이 전부 치과인데 그중에서 고가의 치료를 요하는 층에서 근무한다. 접수부스인데 들어오는 손님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찰해서 상품명까지 적는단다. 심지어 반지의 다이아몬드, 진주알 크기까지.
그렇게 해서 손님이 치료에 관련한 상담에 들어가면 의사가 경제력과 신분을 측정해서 상품을 추천해서 더 비싼 것으로 하게끔 만든다. 상중하로 급을 나누면 상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제일 고가의 상품을 추천하고 중일때는 약간 저렴한 것(안그러면 자존심도 상하고 황당해 하기 때문에) 뭐 이런씩으로...
그리고 두번째 온 손님은 무조건 이름을 외워서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000님 어서오세요!'로 맞이해야 한다. 악세사리가 바뀌었으면 이쁘네요..어디서 하셨어요..이런씩으로 대화를 끌어내서 그전 손님의 스케쥴, 이후 스케쥴까지 알아내서 기록해야 하고 다음에 또 오면 '000님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등으로 대화를 해서 또 알아내고 기록하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고가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리이다.
VIP, 리더스클럽홈페이지(서울대, 연고대, 이대 출신들의) 등 모두 비슷하지만 정말 끔찍하다. 사람을 대할때 그들이 갖추고 있는 상품을 통해 가격을 매기는 것. 골라내는 것도 아니라 시작부터 간추려낸 사람들을 또 급수를 매기는 것..사람사는 방법이 아니다.
내친구는 잘해내고 있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비싼 돈주고 자기를 데려왔으니 단물을 쏙 빼 먹겠다는 병원측의 의도를 알고 있다고도 한다.
사람에게 가격 매기는 사람기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무섭다.

(2001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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