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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가 우는 아침산

1.

여러번 왔지만, 이곳이 이렇게 좋은지 처음 알았다.

대전 '동구청청소년수련관'

 

▷ 수련원 앞은 가을빛이 무르익었다.

 

이번 수련회는 운수산별노조 건설을 앞두고 각 참여조직의 간부들이 모여 마지막 점검과 결의를 다지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조짐은 좋지 않았다. 2시부터 시작인지라 난 1시 30분쯤 도착하였는데, 넓은 운동장은 텅 비어 있고, 집행부 간부들은 하나도 없다.

 

집행부를 기다리기가 무료하기도 하고 가을 풍광을 놓치기도 아까웠다. 마침 수련원 바로 위로는 '미륵사'가 있다고 한다. 나는 일단 길을 나섰다.

 

 들깨를 수확한 텅빈 밭

 잎새를 모두 떨구고 주황색 감들만 주렁주렁 열려있다.
 

높지는 않아도 몇 겹 산속이어서 그런지 가을은 좀 더 깊은 것 같다. 좁은 골짜기 냇물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는 작은 밭들은 수확을 끝낸  채 텅 비어 있고, 군데군데 서 있는 감나무들은 잎새를 모두 떨군 채 높은 가지에 주황빛 감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미륵사의 탑
 

한참을 오르니 미륵사로 추정되는 사찰이 나온다. 입구 팻말에는 조계종 소속 선원이라고 나는데, 1층에는 슬라브로 생활공간을 지어놓고, 그 위로는 법당을 하나 세운 요즘 개량된 작은 사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볼 것도 없다는 얘기다. 다만 탑이 하나 있는데, 밑의 거북받침돌이나 꼭대기 불상을 죄외한 탑신은 최근에 제작한 건 아닌 거 같다.

 

탑에는 사천왕상과 신선, 이상한 모자를 쓴 부처들이 조작되어 있는 게 전통적인 양식은 아닌 것 같다. (전통적인 양식이 아니기에 약간의 문화재적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미륵사에서 골짜기로 이어지는 길/ 끝까지 가보고 싶은 유혹이...

 

찻길은 미륵사까지다. 이곳부터는 호젓한 산책길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닌 것 같은데도 주변 풀을 깎아 잘 다듬어져 있다. 생각 같아서는 이길을 따라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고 싶다.

 

시간이 한없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조직의 간부들을 챙겨야 하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아쉬움을 달래려고 계곡 물가로 내려가니 반석이 넓게 이어져 있는 게 제법 운치가 있다. 다만 오래된 가을 가뭄으로 물이 바싹 말라 있다.


2.

아침에 일어나보니 7시 쯤이다.

전날 뒤풀이가 12시 넘어 시작되었지만, 난 마음이 무거워 일찍 잤다. 그래도 잠이 들 땐 2시가 넘고 있었다. 다만, 그 좋아하는 술을 조금만 마셨다. 그래도 취했지만, 더 많이 마시면 어떤 말을 할 지 나도 책임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수련원의 아침 풍경

 

일어나니 모두들 골아떨어져 있다. 9시까지 아침식사시간이니 시간은 충분하다. 난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산 윗길로 길을 잡았다.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고, 능선길을 조금 올라가니 택시의 기우석 국장이 내려온다.

 

'15분만 더 가면 경치가 탁 트인 아주 좋은 곳이 나와요.'

 

올라가니 능선 한쪽이 채석장을 하던 곳이라 싹둑 잘려 나가 시야는 탁 트인다. 몇 겹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엷은 안개에 살포시 잠겨있고, 아침 해가 안개 사이로 뿌연 빛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산속 안개 너머로는 까마귀가 연신 울고 있어 어쩜 기괴할 수 있는 분위기였지만, 그 울음소리에 나는 왠지 마음이 안정 된다. 참 독특한 취향 하고는...

 

 엷은 안개낀 아침산/ 저 넘어 어디선지 까마귀는 계속 울고 있었다.

 

난 사실 전날 수련회에서 속이 많이 상해 있었다. 김연환 위원장이 화물의 김종인 위원장을 몰아부쳤고, 자신이 상임위원장 자리에서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침묵하거나 사임을 선언한 상임위원장의 사임 반려를 주장하는 여러 간부들과 달리 홀로 수련회를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데 대하여 유감을 표현했다. 물론 에둘러 표현했지만 말이다.

 

아침 산행을 하면서도 기분이, 아니 화가 풀리지 않았다. 김연환 위원장 말대로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그걸 모르는가? 다만 상황과 방법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버스, 화물, 택시 이른바 고무발통 노동자들과 철도, 지하철 등 궤도나 항공 노동자들은 여건 자체가 너무나 다르다. 고무발통 노동자들은 영세한 사업주에게 고용되어 있거나 아예 노동자로 인정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해고와 징계가 남발된다. 그러한 고용조건은 그들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고무발통 노동자들에게 해고란 대부분 가정의 파탄으로 귀결된다. 해고에 이르기까지 회사에서는 징계를 반복하여 내리고, 따라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가뜩이나 적은 연봉에 남들보다 몇백만원 덜 받으면 그게 고스란히 빚이 된다.

 

난 그들과 오래 살면서 3백만원, 5백만원이 얼마나 큰 돈이며, 그 빚을 갚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그런데 해고까지 당하면 그야말로 대책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발통 노동자들 중 투쟁하는 동지들은 의식이 대단히 높거나, 아니면 어떤 위치, 어떤 집단에 가도 적응을 하지 못하는 부적응자이기 십상이다. 폅하하자는 차원이 아니다. 존재 자체가 대단히 기회적이라는 얘기다.

 

  능선길/ 길만 보면 끝까지 가보고 싶은 유혹이..

 

따라서 발통조직의 활동가들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데에서 조직활동의 출발을 삼는다. 기회주의자든 심지어 출세주의자든 조금이라도 움켜질 여지가 있으면 매달리고 본다. 왜?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강화 발전시켜야 하는 목/적/이 있으니까!

 

운수산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일사분란하게 건설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건설작업을 중단해야 하는가? 책임지고 사퇴해야 하는가? 그것이 책임성인가?

 

아니다. 난 아니라고 본다. 안 되도 되게 해야한다. 운수산별노조 건설이 우리의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의 짧은 상상력으로는 말이다. 책임지고 사퇴한다고 하지만 난 배부른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비겁한 이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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