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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 기념 새김돌 앞에서

장준하. 아직은 기억하는 이가 모르는 이보다 많으려나.
광복군 시절 장준하  ▷ 출처 : 기념사업회
장준하. 그가 누구지. 일제시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활동한 사람. 유명한 사상계를 냈던 분. 박정히 정권시절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한 분. 아하, 그 사람. 적어도 그렇게라도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많이 있으리라.

내가 사는 고양시 끄트머리에 그의 새김돌이 있다. 통일로변 고양시와 파주시 봉일천 경계에 흉물로 처져 있는 콘크리트 전차차단막 사이에 그의 새김돌이 있다.
새김돌은 삼면이 전차차단막으로 둘러싸였고, 여름이면 물이 질겅질겅 솟는 땅에 서 있다. 하도 자리가 험해 후학들이 자리를 옮기자는 말에 ‘아직 분단조국이 통일되지 않았는데 선생의 새김돌이 이런 곳에 있어야 한다’는 백 선생님의 일갈에 오히려 숙연해지는 그런 험한 곳이다. 선생이 75년에 돌아가시고, 86년에 새김돌을 세웠다고 한다. 호랑이 형상의 돌에 당시대 최고의 시인 김지하가 글을 비문을 지었다.

이후 알 수 없는 괴청년들이 겨울에 3일간 불을 피워 새김돌을 태운 탓에 호랑이 형상 머리부분이 달아나고,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해괴한 글을 실은 뒤 새겨진 그의 이름이 짓이겨지는 등 시련을 겪었다.


잡초에 둘어싸인 새김돌  

 


내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인 것 같다. 고양시로 이사 와서 새김돌이 있음을 알았다. 당시 돌보는 이가 없어 넓은 공터는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예초기를 구해 새김돌 근처만이라도 벌초를 시작한 것이 새김돌에 매년 들르게 된 시작이다.
나는 사실 장준하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중학교 때 어떤 선생님이(누군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얼핏 했던 이야기가 나중에 퍼줄을 맞춰보니 장준하 선생 얘기였다. 그리고 그를 안 이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무시한 것도 아니지만 딱히 땡기지가 않았다.
매년 한번 벌초하는 것으로 마치 내 임무를 다한 것으로 자위하면서 그렇게 매년 8.15 즈음의 일요일을 보냈다.

멀리 문제의 살림집이 보인다. 

문제가 생긴 건 재작년 겨울이었다. 새김돌 옆에 누군가 콘테이너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전기와 전화도 끌어다 놓고 제법 살림을 하는 집처럼 보였다. 나는 빈집에 쪽지를 남겨두었다. 연락을 해달라고.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의아하기만 하다. 적어도 그들이 거기에 사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내가 뭔 권한이 있다고...

어찌됐던 지난해 여름에 벌초하러 그곳에 다시 들렸다. 이런 세상에나. 새김돌에는 거적이 덮여 있고, 채 5평이 될까말까 한 공간만 남겨두고 온통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몹시 기분이 상했다.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사는 이들은 적어도 새김돌과 무관한 사람들은 아닐 터인데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인가. 더욱이 땅 소유가 백기완 선생 앞으로 되어 있다는데, 성격 까탈스럽기로 소문난 백 선생님이 어찌 가만히 둔단 말인가.
아는 후배를 통하여 백 선생님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벌초하지 말고 그냥 두란다. 또 혼란스럽다. ...

벌초를 마치고 나오는데, 장년의 부인과 딸로 보이는 처녀가 빈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를 침입자처럼 바라보더니 우리 행색을 보고는 이내 차 한잔 먹고 가란다. 누구랑 차를 먹으라는 건지 원. 새김돌에 거적을 덮어놓고, 길도 없이 몽땅 밭으로 써먹는 이들이랑 차를 먹자고.
나는 대구도 하지 않고 나왔다. 처녀는 뒤늦게 뛰어와 누군지 명함이라도 달라고 한다. 난 그녀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냥 왔다. 물론 마음 약한 분들이 명함을 남겨두기는 했지만.

죽은 아카시아와 껍질 벗겨져 드러난 속살  

올해는 나도 새김돌을 까맣게 잊었다. 바쁘다보니 머리가 마비된 것 같다. 지난 토요일 시민회 최태봉 사무국장이 아니었으면 잊고 지날 뻔 했다.
지난 일요일 약속시간보다 15분 늦게 새김돌에 가니 민족문제연구소 이재준 선배가 가방을 메고 나온다. 밭은 여전하고, 그 뒤로 아름드리 아카시아 나무들이 모두 말라 죽어있다. 우선 기분이 상했다.

왜 벌써 나오세요?
매년 벌초를 하고 싸온 술가지를 함께 나눠먹는 게 관례였기에 바로 나오는 게 이상해서 물었다.
벌초 하지 말래요.
누가요?
저기 저 아저씨가요. (장준하 선생) 아들이 곧 새김돌을 옮긴대요.
나는 그래도 새김돌로 갔다. 가면서 죽어있는 아카시아 나무들 사진을 찍었다. 밑둥 둘레로 껍질 벗겨져 드러낸 속살은 죽음의 원인일 것이다.

어이. 이리 와봐. 사진은 왜 찍는거야.
늙은이 하나가 컨테이너 집 앞에서 뒤로 제켜진 의자에 누어 거만하게 외친다.
새김돌 좀 보려고요.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거기는 못 가. 아들이 옮긴다는 데 뭣 하러 가.
여기까지 왔다 새김돌도 못보고 가요?
큰소리로 대꾸하자 대답이 없다. 새김돌에 가지 농작물이 심어져 있고, 잡초가 우거져 있는 게 볼만하다. 방법이 있나. 나는 사진 몇장을 찍고 뒤돌아 나왔다. 늙은이는 처다 보지도 않고 말이다.

잡풀에 묻힌 새김돌  

 

나오는데 ‘백기완이 하고 어울리지 마. 그런 놈들한테 속지마.’라는 늙은이의 목소리와 ‘차나 한잔 하고 가’라는 부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늙으면 죽어야지 노인네들이 뭔 꼴이여.
이재준 선배는 혼자말로 투덜댄다. 노인네들이란 그 노인과 백 선생님을 가리킨 것이리라.
답답하다. 후학들은 새김돌 하나 간수 못하나.
장준하 선생이 실제 어떻게 살았던, 무수히 잊혀져간 훌륭한 선배님들을 대신하여 기려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년에는 나도 이 자리에 오지 않겠지... 그러면 누가 올까. 누가 기억할까. 우리 모두를.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선생의 기일이다.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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