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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풀소리가 세상에 내는 작은 목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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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2
    1박 2일(15)
    풀소리
  2. 2009/09/04
    정운찬(6)
    풀소리
  3. 2009/06/10
    6월항쟁 22주년
    풀소리

1박 2일

1.

 

소비에트가 붕괴되고 나서도

혁명 기념일이 되면 비록 정부의 공식 기념행사는 아니어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는 훈장을 주렁주렁 단 노병들이 혁명을 기념하며 행진을 하였다.

 

작은 텔리비전에 비친 그네들은 그러나 늙고 추레했으며,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은 '자랑스러움' 보다는 '안스러움'의 표식처럼 보였다.

 

그들의 행진을 보면서

'언젠가 내가 저 행렬에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상상을 했었다.

더 이상 다가올 희망은 없고, 단지 기념할 추억만 있는 슬픈 노년을...

 

 

2.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다녀왔다.

정확히 말한다면 전야제 장소에 있는 주점에 다녀왔다.

 

노조를 떠나고 나서 나는

집회에 참석할 '용기'도 '인내'도 함께 잃어버렸다.

그런 나는 될 수 있으면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다만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규정하고,

조그마한 움직임이 주는 작은 반향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전야제에 가서도 집회보다는 주점에서 옛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안부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했다.

 

 

3.

 

될 수 있음 집에 가고 싶었다.

그래도 무슨 미련이 있었는지,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과 함께 잤다.

 

아침을 먹고, 일행들은 청계천 전태일열사 동상에 가 참배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일행 중 몇몇과 독립문에서 경교장을 거쳐 광화문, 청계광장을 지나 열사가 계신 곳으로 갔다.

 

청계천은 전날 온 비를 핑계로 굳게 길이 닫혀 있었다.

난 꼭 천변으로 걷고자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지방에서 온 이들은 말은 안 해도 천변으로 걷고 싶지 않을까 해서 조금 안타까웠다.

 

뚝 윗길도 나름 괜찮았다.

비는 전날 밤처럼 심하지는 않아도 꾸준하게 내렸다.

작은 빗방울에 키작은 이팝나무 노랑 단풍이 하나 둘 떨어졌다.

바닥에는 물에 불어 빛나는 노랑 단풍잎이 참 예뻤다.

 

뚝 담장 위로는 여러 식물들 사이로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심어놓은 것이리라.

어쩌면 흔할 수 있고, 그만큼 심었다고 치켜줄 이 없으련만,

이곳에 이런 꽃들을 심은 이가 있다니, 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태일열사 동상/ 그는 여전히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4.

 

전태일열사 동상에도 처음 갔다.

동상에는 일본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전진(前進)이라는 제호가 붙은 그들의 기관지를 우리 일행에게 주었다.

오랬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곳에 머무르니 그래도 사람들이 쉬임없이 왔다.

동상 앞에서 묵념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지금 세상을 보면서 옛날 가두투쟁 할 때가 생각났다.

집회를 하다 전경들에게 밀리면 뒤돌아 보지 말고 뛰어야 했다.

설령 우리의 숫자가 많아도 모두가 함께 멈춰 서서 반격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니,

나 혼자는 설 수 없었다.

그러니 다음 집결지까지 뛰어야 했다.

 

지금 우리들은 아파트니 교육이니 취업이니 등등으로 앞만 보고 뛰어야 한다.

혼자서 '아니오'라고 말했다간 혼자만 낙오될 것 같다.

비록 이런 삶에, 이런 사회에 회의를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집회에서는 다음 집결지가 있었지만,

지금 우리들에게는 다음 집결지가 어디인가??

 

...

 

 

5.

 

만주벌판을 넘어 시베리아를 달리던 원대한 꿈을 꾸던 마지막 세대였던 우리,

어쩜 우리는 꿈을 잃은 첫 세대가 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볼품 없이 훝날리는 꿈들이 되었나...

그래도 언젠가 단단히 뭉쳐 굳건한 대지가 될 날이 있겠지...

 

...

 

나는 집회에 참석할 자신이 없어 노동자대회로 향하는 일행을 뒤로 하고 홀로 집으로 왔다.

 

여의도에 모였던 이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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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이명박이 정운찬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한 것에 대하여 언론은 온갖 분석을 내놓는 것 같다.

오늘 오마이뉴스의는 김당기자의 [이명박-정운찬 누가 '소신' 굽힐까]라는 제목의 분석기사를 내놨고,

오마이뉴스는 이 기사를 탑으로 올려놨다.

 

참 웃기는 일이다.

누가 '소신'을 굽혔는지는 다 아는 사실인데, 무슨 분석이 필요할까?

이 정권이 이명박 정권인가, 아님 정운찬 정권인가.

정운찬 스스로 자신은 MB와 경제관의 차이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정운찬이 과거 어떤 삶을 살았든지 상관없이

이명박 정부의 총리로 들어간 이상 정운찬은 또 다른 이명박이 되었을 뿐이다.

 

굴원(屈原)은 어부사(漁父辭)에서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고 어부의 말을 빌려 노래불렀다.

 풀이하면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라는 뜻이다.

 

갓끈을 씻는 대우를 받는 맑은 물이 되든, 발을 씻는 대우를 받는 흐린 물이 되든 그건 창랑의 몫이다.

이미 흐려진 이상 창랑의 물이 왜 흐리냐고 따질 일은 아닌 것 같다.

정운찬이가 모범적인 살아왔을 땐 우리가 칭찬하고, 따르면 될 일이고,

이제 또 다른 이명박이 된 이상 분석할 것 없이 욕을 하면 그만 아닐까?

 

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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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2주년

1.

 

6월항쟁 22주년이 되는 오늘

서울시청 광장이 봉쇄될 것인지 아닌지가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22년 전 그날

내가 다니던 학교는 당시 전교생이 7천명이 채 안되었었는데, 4천명 이상이 집회에 움집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였는지, 캠퍼스가 집회에 모인 학생으로 가득 덮혔었다.

 

도로변 학교 담장은 모두 무너지고, 경찰은 물러나고, 학생들은 줄을 지어 전철역으로 갔고, 전철을 전세내다시피해서 시내로 갔다. (그날 뉴스에는 학생들이 전철을 탈취했다고 나왔다.)

 

나는 아쉽게도 다수의 학생들이 줄을 지어 타고간 전철을 함께 타지 못했다.

당시 이른바 '오르그'를 통한 집결장소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결장소에 나가니 사복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이전과 달랐다.

 

'여긴 정보가 샜으니 다른 데로 가.'

 

그들은 고압적이지도 않았고,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더 초조해보였고, 단지 우리가 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해 책임을 모면해보려는 듯이 보였다.

우리도 굳이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수시로 전해지는 소식에 의하면 서울시내가 온통 시위대로 꽉찼기 때문이다.

 

그렇게 6월항쟁은 시작됐다.

 

박종철 열사 흉상

 

 

2.

 

1987년 초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젊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지식인들에게 매우 많은 부채의식을 남겨주었던 것 같다. 그의 죽음 이후 저항이 많은 이들에게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과 전두환은 정권 막바지에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했고, 데모는 급증했다.

 

다수의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지만, 민정당은 4월 13일 호헌조치를 선언했고, 6월 10일 전당대회를 열어 차기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기로 했었다.

 

6월 10일 대규모 집회는 민정당 전당대회를 겨냥한 것이니, 날짜는 어떻게 보면 민정당이 잡아준 것이기도 했다.

 

당시 지도부(?)였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국민 대회를 개최를 선언하였고, 행동요강을 발표했다. 그 행동요강에는

 

.. 2.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하여 전 국민은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린다. 전국 사찰,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한다. 국민들은 형편에 따라 만세 삼창(민주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을 하거나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하며 민주주의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등이 있었다.

 

그러나 오후 6시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시내 곳곳에서는 애국가가 아침이슬과 함께 울려퍼졌고, 차량은 일제히 경적을 울려댔고, 거리를 가득 메운 이른바 넥타이부대는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3.

 

6월 항쟁 기간 내내 서울시내는 해방구나 다름 없었다.

시장 상인들은 숨겨주는 것은 물론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었고, 젊은 아가씨들도 우리에게 음료수를 사먹으라고 돈을 주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6월은 갔고,

 

7,8,9 대투쟁이 갔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냐, 독자후보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그해 겨울에 있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승리했다.

 

선거개표 때 부정선거 혐의에 분노한 시민들이 구로구청을 점거했지만,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항쟁이 실패한 것을 알았고, 침묵으로 분노를 삼켰다.

 

대통령 선거 다음날 명동 롯데백화점 앞 도로를 점거해서 시위를 벌였지만,

시민들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렇게 6월항쟁은 끝났다.

 

 

4.

 

6월항쟁은 실패한 항쟁인가?

난 물론 실패한 항쟁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은 시민들로부터 멀어졌고,

지금도 광장은 시민들에게 봉쇄되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항쟁이 실패했다는 증표는 충분하다.

 

그렇다고 6월항쟁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올리비에 롤랭의 말대로 '우리는 그 당시에 원대하면서도 막연한 희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그 이상에는 모험으로 가득 한 삶에 대한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세상에 대해 아무런 사심없는 애정을 쏟았고, 함께 공유했다는 집단기억은

반동에 저항하는 근원적 힘이 되었으며,

우리 사회를 사람 중심 사회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이들의 신념을

지금도 마르지 않게 적셔주는 샘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고, 세상도 그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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