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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걷고 또 걷다.

아무래도 주말이 걸리지만 별로 할 일도 없는 항주에 하루 더 묵기가 싫어져 그냥 황산으로 떠나기로 한다. 하긴 남들은 하루밤 자고 떠나는 곳에서 사흘이나 머물렀으니 떠날 때도 된 것이다. 서부버스터미널로 가서 툰시행 버스표를 끊는다. 황산 바로 입구 마을은 탕구라는 곳인데 툰시에서 한 시간 반쯤 떨어져 있는 곳이다. 굳이 한시간 반이나 떨어진 곳으로 가는 이유는 기차역이 툰시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기차표 구하기가 쉽지 않아 언제든 도착하자마자 기차표부터 구해 놓으라는 조언을 이래저래 들어온 터다. 국경절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국경절 탓인지 아님 원래 중국의 기차표 사정이 그런 건지 원래 떠나려던 날 표도 그 다음날표도 심지어 그 다음날 표도 메이요우(중국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절망적인 말로 없다는 뜻이다)다. 단지 있는 건 딱딱한 의자밖에 없다는데-중국 기차는 말이지, 같은 기차에 칸이 다른 네 종류의 좌석 또는 와석이 있는데 대략 가격 높은 순서에 따라 푹신한 침대-딱딱한 침대-푹신한 의자-딱딱한 의자로 나뉜단다-이 딱딱한 의자가 딱딱할 뿐만 아니라 등받이는 90도이며 심지어 입석도 있어서 한 서너시간만 가도 고문이라는 얘기가 가이드북에 나와 있다--:; 황산에서 구이린 까지 22시간..차라리 수수료를 내자 싶어 기차역 근처 여행사를 찾아가 봐도 이상하게 기차표는 취급하지 않는단다. 그렇다고 황산에 마냥 잡혀있을 수도 없어 일단 차장에게 딱딱한 침대가 있으면 바꿔 달랠 요량으로 딱딱한 의자표를 끊는다. 


상해에서 쑤저우로 올 때 탔던 푹신한 의자차. KTX보다 쾌적하다. 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쩝..  

 

황산에 도착한 날이 금요일이니 담날 황산을 올라가려면 사람들이 그리 피해야 한다는 주말을 끼고 올라가게 되는 셈이니 하루정도 툰시나 둘러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아침이 되니 그냥 올라가고 싶어진다. 어차피 내려오자마자 씻지도 못한 채로 기차를 탈 일도 꿈만 같고 무엇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루종일 산에 올라갈 걱정을 하는 것 보다야 그냥 오르는 게 속이 편할 것 같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부랴부랴 슈퍼에 들러 물이랑 사발면, 과자 등속을 사고 나오다 36원(한 5,000원쯤 될거다)짜리 가짜가 너무나 분명한 아디다스다(아다디스거나 아도니스가 아니라 아디다스라고 쓰여있다^^) 가방을 집어든다. 짐은 만드는 게 아니랬는데 여튼 비닐 봉투를 들고 올라갈 수야 없는 터.. 정 안되면 쓰고 버리지는 마음으로 가방을 산다.


황산입구에서 드디어 만들어 두었던 비장의 무기! 가짜 학생증을 꺼낸다. 성인입장료 200원, 학생은 반값인 100원이다. 표 구입까지는 무사히 끝났는데 입구에서 다시 학생증을 보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학생증을 꺼내 주었더니 이 아저씨, 나 한 번보고 학생증 사진 한 번 보고 계속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안다 알어 나도 미안하다야.. 그치만 니네 입장료가 좀 비싸야 말이지.. 생글생글 웃으며 이거 나 맞아요.. 했더니 급기야 이 아저씨 너 몇 살이냔다. 가만있어보자 학생증 출생연도가 82년생으로 돼있으니까 내가 몇 살이냐? 갑자기 계산이 안 돼 그냥 트웬티 세븐하면서 나도 무지 찔린다. 뭐 아저씨 할 말은 많은 것 같은데 영어는 짧고 어쩔 수 없이 보내주면서도 영 개운치 않은 얼굴이다.


황산은 입구부터 정상까지 아니 반대편 하산로까지 모두 계단으로 되어 있다. 이중 좀 덜 힘들다는 구간이 서쪽으로 올라 동쪽으로 내려오는 건데 양쪽 모두 케이블카가 다닌다. 이 케이블카의 유혹이 만만치 않았지만 가격도 넘 비싸고 무엇보다 한번은 올라줘야 한 십년은 자랑할 수 있으리라는 얄팍한 계산에 그냥 걸어오르기로 한다. 케이블카로 10분이면 오른다는 운곡사에서 백아령까지 구간을 그냥 계단만 따라 두시간 반을 오른다. 다리는 그간 걸어다닌 덕을 봤는지 견딜 만한데 숨이 차서 오르기가 쉽지 않다.  담배를 끊든가 해야지 원 하다가 산을 끊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을 고쳐먹는다.^^한삼십분은 정말 죽을 것 같더니 한 시간을 지나치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걸어진다. 산 입구부터 자욱하던 안개는 갈수록 심해져 그나마 경치라도 보면서 가면 위안이 되련만 그저 올라가는 계단만 분간될 뿐이다. 주말이라는데 사람이 별로 없네 하면서 오르고 있는데 웬걸 케이블카 내리는 곳을 지나자 한국, 중국 할 것 없이 단체 관광객이 떼로 몰려 다닌다.


 

이런 계단이 계속된다. 

 

숙소 역시 메이요우다. 그저 주말이면 좀 비싸려니 했지 숙소가 없을 거라곤 미처 생각을 못해서 잠시 당황이 된다. 게다가 여기는 산꼭대기이고 내가 아는 숙소는 두군데 뿐인데 둘다 메이요우라면 어쩌란 말이냐.. 갑자기 비박..노숙 따위의 단어가 떠오르며 몸이 굳어지더니 한국단체관광 온 아줌마들한테 사정을 해 볼까 별 생각이 다 난다. 다행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온 중국학생들이 사정을 눈치채고 자신들에 숙소에 사정을 해서 넣어준다. 아마 외국인은 못 묵는 곳인 것 같은데 뭐 모양새도 비슷하니 들통 날 염려도 없고 노는 침대에 돈 받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어서 숙소측에서도 굳이 마다하지는 않는 눈치다. 어쨌든 친절한 중국인들 덕분에 비박 신세는 면하게 되었으니 신세를 톡톡히 진 셈이다.


미리 사들고 온 신라면 사발면으로 저녁을 때우는데 헉 사발면이 이리 맛있어도 된다는 말인가. 라면 먹다 울 뻔했다^^일회용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이미 해가 진 숙소 주변을 배호하다 돌아와도 시간은 일곱시가 조금 넘는다.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만하고 발을 물휴지로 닦고 잠자리에 든다. 도미토리 20인실은 저녁 8시 30분에 불이 꺼진다. 산꼭대기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아침 일찍 일출도 봐야 하니 일찍 자자는 것인데 아무리 고된 길을 올라왔어도 8시 30분에 잠이 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불끄면 잠은 오게 되어 있다.^^


20인실 도미토리의 일부. 일층에서 자는 사람이 몸을 뒤척이면 그 진동이 고스란히 온 몸으로 느껴진다.

 

일출지점이 어딘지 몰라 그냥 중국인들을 따라나선다. 아직 캄캄한 산길을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한 20분이상 올라간다. 일출이고 뭐고 그저 주저앉고만 싶다고 생각할 무렵 일출지점에 도착한다. 내 생애 일출을 본 건 딱 한번이다. 사오년전 정동진 영화제에 갔다가 술 먹고 본 일출이 유일무이하다. 그렇게 많이 갔던 동해에서도, 수학여행에서도, 심지어 제주도에서도 해는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더라는 얘기다. 그.런.데. 황산에서 일출을 본 것이다. 기대가 과했는지 해 뜨기 전까지 에이 사진만 못하네.. 해가며 시건방을 떨다가 막상 해뜨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숨이 멎을 것 같은 상태가 된다. 구름이 많아서 채 다 떠오르기도 전에 일부는 구름속으로 들어가 버리긴 했지만 해는 분명히 봉우리 너머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대체 본 것의 반의 반도 보여줄 수가 없으니 카메라는 왜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내려오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오산이었지만-은 날이 환하게 개여 있다. 푸른 하늘 너머로 구름에 싸인 봉우리들이 선명하게 제 빛을 드러낸다. 비로소 내가 황산에 와 있구나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사실 내려오는 길이라 혼자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길은 정상으로 갔다가 내려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다시 네 시간동안 계단을 올라 정상에 다다른다. 이번에서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산의 자태에 그저 힘든 줄도 모르고 걷는다. 문제는 하산길인데 내려가는 계단이라 만만하게 생각했던 그 길에 다리가 말썽을 부린다.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는지 간혹 짐 나르는 아저씨를 제외하곤 올라오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에 다리가 거의 지 혼자 놀기 시작하는 상태가 된다. 이건 쉬어도 나아지질 않고 계단 하나를 내려가는 온 신경이 집중되는데 거짓말 쫌 보태서 차라리 올라가는 게 났겠더라는 말이다.


 

 


 

 


 

여기도 마찬가지.. 사진 좀 잘 찍었음 좋겠다.

 

여튼 황산이라는 큰 숙제를 마친 지금은 정말 숙제 마친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다. 딱딱한 의자가 걱정되긴 하지만 뭐 숨이 차거나 다리가 풀리지는 않을 거 아니냐는 말도 안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황산으로 오면서부터 슬슬 여행하는 맛이 나기 시작한다. 주변 풍광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도 좀 찍고 싶은데 아직은 카메라를 들이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곧 국경절이다. 대체 표는 언제까지 없을 것이며 관광지에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물가는 또 얼마나 비싸질 것인지 도통 가늠이 되질 않는다. 안되면 이래저래 견디는 수 밖에.. 참 그 아디다스 가방 벌써 쟈크가 고장 났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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