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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만난 사람들

 

좀 심하게 엄살을 부렸다 싶긴 하지만 떠나기 전엔 정말 걱정이었다. 좌석 불편한거야 어떻게 견뎌본다 하더라도 도난 사건도 많다지, 담배는 막 피워댄다지, 사람들 심하게 시끄러운데다가 지저분하기까지 하다지 뭐 안 좋은 풍문들만 머릿 속을 오락가락 하는데 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그래도 한 번 타봤다고 그 와중에 슈퍼에 들러 물이랑 빵이랑 과일 등을 사서 바리바리 고장난 아디다스 가방에 짊어지고 대합실에 들어선다. 아니나 다를까 대합실에 사람들은 또 왜 그리 많은 것이며, 사람들이 들고 있는 짐들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이러다 배낭을 무릎에 안고 있어야 하는 거나 아닌지 걱정이 밀려온다.


이래저래 사람들을 따라 개찰구를 지나 역구내로 들어선다. 허걱, 이번에는 차량 호수 표시가 없다. 이 역이 시발역이 아니니 잘못하다간 배낭 메고 뛰거나 아님 아무데나 올라타서 좌석 사이를 끝도 없이 걸어야 할 판이다. 표를 꺼내 여기저기 물으니 기다려야 할 곳을 알려준다. 내 아무리 봐도 별 표시가 없더구만, 그 양반들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건지 지금 생각해도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든  무사히 차에 올라타곤 살짝 놀란다. 생각했던 것 보다 좌석의 상태가 너무 좋은 탓이다. 물론 두줄, 세줄 씩 총 다섯줄로 이루어져 있고 서로 마주보고 가야 한다는 게 살짝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 사이엔 작은 탁자까지 있으니 이만하면 매우 훌륭하지 않은가 말이다.


 

 딱딱한 의자칸. 짐칸 밑에 걸려있는 수건들을 승무원 아저씨들이 수시로 다니면서 예쁘게 다시 걸어준다. 왜 그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 기차표의 이름이 딱딱한 의자 즉 硬座 아니던가 근데 생각만큼 딱딱하지 않더라는 말이다. 물론 등받이는 90도가 확실하더만.. 처음 30분쯤은 좋아 좋아를 연발하면서 그냥 이거 타고 끝까지 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한시간쯤 지나니 생각이 달라진다. 앉아서 가는 거야 그렇다 치고 긴긴밤을 어찌 앉아서 세운단 말인가. 게다가 내 자리는 3인 좌석의 중간에다가 기차 진행 방향과는 반대인 거의 최악의 자리인 것이다. 그 중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뭐 복장 색깔이 좀 다르고 모자 쓰고 있는-아저씨에게 자리가 있으면 바꿔달라고 말해본다. 첨부터 적어 보여주는 건데 괜히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는 외쳤나 보다-내 인생에 이런 날 올지 정말 몰랐다- 그랬더니 이 아저씨 그때부터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발은으로 뭐라뭐라 하는데 정말 후회가 몰려온다. 그제서야 적어놓은 쪽지를 보여준다. 硬座 - 硬臥 이 아자씨 얼굴이 환하게 펴지더니 오케이를 연발한다. 그러고는 알아보고 오겠다는데.. 다녀오더니 이번에는 영어로 쓰신다. 하드한 베드는 없어요. 그러나 소프트한 베드는 있어요. ㅋㅋㅋ 됐다 그거 탈거였으면 그전에 표 끊어 탔다.  


이제 적응의 시간이다. 좌측에 아줌마, 우측에 아저씨, 전방 135도 각도에 인물 안 되는 청년, 전방 90도에 매우 시끄러운 또 다른 아저씨 그리고 정면에 앗.. 드뎌 꽃청년 발견이닷!! 꽃이 중국에 와서 고생한다 해도 그리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만하기가 쉽냐 말이다. 게다가 이 청년 과묵하기까지 하다-중국에서 과묵하다는 건 정말 타고 나지 않으면 가지기 힘든 미덕이다^^- 꽃청년을 제외한 매우 수다스러운 3인방이 끊임없이 중국어로 질문을 해대는데 팅부동, 워스 한궈런도 한 두 번이지 대략 난감이다. 영어는 원, 투, 쓰리도 안 통하지, 그나마 사간 여행 중국어 책에는 깍아주세요, 영수증주세요 따위의 말 밖에 없지, 그래도 그럭저럭 혼자 여행한다, 결혼은 안했다. 북경-상해 거쳐 계림 가는 길이다, 등등의 취조를 당한다. 내 꽃청년의 호기심 어린 눈빛만 아니었어도 일찌감치 자는 척이라도 했으련만 덕분에 도란도란 -사실 매우 시끄러웠지만- 얘기를 나누며 간다. 뭐 대략 대장금 얘기랑 애니콜 즉 삼성과 현대자동차 뭐 그런 얘기였는데 우리가 일본 사람 만나 키무라 다쿠야 좋아요, 소니 알아요 하는 거랑 비슷한 정도의 대화였던 것이다. 


 

좌우의 아주머니와 아저씨. 저 중간이 내 자리였던 것이다. 꽃청년은 사진 찍는 것을 한사코 거부해 결국 카메라에 담는 것은 실패했다.     


기차타기 전에 샀던 귤을 나눠주니 사람들도 주섬주섬 먹을 걸 나눠준다. 바나나, 해바라기씨, 껌까지 기차에서 주는 거 받아 먹지 말라는 말도 잊고 넙죽넙죽 죄다 받아먹는다. 시간은 흐르고 잘 시간을 다가오는데 어찌 자야하나 그저 버텨보지는 심정으로 앉아 있는데 마주보는 사이에 있는 작은 탁자에 엎드리기도 하고 의자 사이 공간에 발을 쭉 뻗기도 하며 나름대로 잘 준비들을 한다. 꽃청년이 자기 옆자리를 조금 내주며 발을 뻗으라고 권한다. 차마 그럴 수는 없어 한두시간은 버티다가 결국 나도 모르게 다리도 뻗었다가 탁자 위로 머리를 들이민다. 그랬더니 또 불편한대로 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러다 어영부영 날이 밝는다. 저녁은 사발면으로 때웠으니 아침은 이사람들 차 마시라고 둔 더운물 받아다가 커피랑 사가지고 탄 빵이나 먹어야겠다 하고 있는데 꽃청년이 국수를 사서 먹으라고 준다. 고맙긴 한데 이걸 먹어도 되는 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국수 값을 줄 수도 없고.. 국물까지 확 부어놨는데 무를 수도 없고...  그냥 고맙게 먹기로 하면서도 맘 한구석이 불편하다. 그리 넉넉해 보이는 차림새도 아니었는데.. 어쩌나 하다가 여행중국어책을 뒤져 단어를 조합해 적는다. 쎄쎄 미엔티아오 하오츨(고마워요 국수 맛있어요) 보여주니 씩 웃는다.


계림 전 정거장을 지나자 저마다 다음에 내리라고 일러주느라 다시 차안이 소란스럽다. 어제 영어로 하드한 베드는 없다던 그 아저씨도 담이라고 알려준다. 그래도 이번엔 적지는 않으신다^^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데 문제의 자크 고장난 아디다스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내리기 전에 함 고쳐보겠다고 주머니칼을 꺼내 설치니 이번에도 꽃청년이 받아서 대신 고쳐준다. 잘생기고 과묵하고 친절한데다 손재주까지.. 마지막까지 감동의 연속이다. 이제 내릴 시간이다. 20시간 22분.. 나도 나름 긴 여행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좌석 중에 내가 가장 빨리 내리는 사람이라니 .. 이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것일까? 언젠가 중국여행기에서 본 글귀.. 가난한 사람들의 인내는 부자들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결국 열차는 계림역에 도착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짐을 들고 내린다.


그새 정이 든 건가.. 내린 뒤 다시 열차를 거슬러 창문 근처로 간다. 내가 어딘지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데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에서 올라오는 거 같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러다 진짜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다. 목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꿀꺽꿀꺽 삼키며 지금은 울지 않겠다고 이를 악문다. 또다시 낯선 도시다. 아직 집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이 감정은 또 뭐란 말인가. 그냥 조금 외로운 모양이라고.. 곧 괜찮아 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기어이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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