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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기사들 대기실이 따로 있고 파견 대기실이 따로 있는데, 정규직 대기실은 개인 탁지라든가 의자, 옷장, TV도 칼라로 세대씩 있었지. 냉장고 공기청정기 에어콘 빵빵하고." \"시골에 보면 그거 벼 날리는 선풍기 있잖어. 이따만한 거. 왱왱 방아찍는 소리나는 그 거\" ⓒ민중의소리 김철수 ⓒ민중의소리 김철수 "우리방은 50평에 54명이 바글바글했는데, 17인치 흑백 로타리 TV에, 시골에 보면 그거 벼 날리는 선풍기 있잖어. 이따만한 거 왱왱 방아찍는 소리나는 그 거 틀어놓고 있고. 의자는 옛날 극장식 의자에 앉아있다가 마이크로 부르면 나가곤 했는데. 우리는 채널도 MBC KBS SBS만 고정돼 있었는데. 한번은 박찬호가 경기를 하는데 못보는 거야. 정규직들 방에 몰래 보다가 걸리면 '야 용역' '야 렌트카' '나가 시키야' 물 먹다 걸려도 '니네 방에서 사먹어 시키야' " 그래서 파견직들은 한달에 2천원씩 돈을 걷어서 물을 사먹었다고 한다. "아까워서, 돈이 없으니까, 파견 노동자들끼리도 물을 먹는 것만 허용하기로 하고, 떠 가지는 못하게 했지" 출장 중에 정규직 노동자를 추월이라도 하면 도착지에서 불려다녀야 했다. 정규직한테 아침에 인사를 안 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고분고분 하지 않아도 불러다녔다. 이튿날 동료가 보이지 않으면 으례히 교체된 걸로 여겼다. 파견 노동자들이 당시에 제일 무서웠던 건 사용자도 파견업체도 아니라 가까이 있는 정규직이었다. IMF 이후 정규직에 대한 강제 명예퇴직이 실시됐고, 그 자리를 파견 노동자들이 채웠다. 99년 KBS는 정규직 노동자 3백명을 정리해고 했는데, 파견 노동자들의 속이 후련했을 법도 하다. '니들도 비정규직으로 살아봐라' "파견으로 다시 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 당시에 울화통 터지게 얘기했지. 당신들 정규직으로 있을 때 얼마나 설움을 줬냐. 생각나냐." 짝수해, 파견노동자의 시련 지금도 그렇지만, 파견노동자에게 짝수 해는 시련이었다. 파견법이 시행되고 만 2년을 앞둔 2000년 6월, 운전직·카메라 보조·오디오맨·웹디자인 등 방송사 파견노동자들에게도 계약해지가 들이닥쳤다. SBS 437명을 시작으로 MBC 160명, KBS에서도 227명이 해고됐다. 전체적으로는 5천명 가량의 파견노동자가 그 해 계약해지된 걸로 추정된다. 6년 넘게 근무한 주씨를 비롯해, 파견노동자들은 5년에서 길게는 15년까지 KBS에서 일해 왔었다.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자르진 않겠지'라는 믿음은 여지없이 깨졌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민중의소리 김철수 " KBS는 '우리는 꼭 쓰고 싶다. 그런데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니 2년 후에 다시 오면 써주겠다. 파견법을 원망해라' 그랬어. 우리는 법을 몰랐는데, 아 파견법이 2년에 한번 쓰고 버리는 건가 보다 그때 알았지." KBS 운전직은 씨랜드 참사 당시, 현장을 촬영한 필름을 입수하고 삼풍백화점 붕괴 때도 인도를 타고 가서 특종을 만드는 등 뉴스보도에 큰 공을 세워왔다 실상 성수대교, 인천호프집 화재, 연천댐 붕괴 등 모든 특종은 운전직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한다. 처음 모인 파견노동자들은 운전직이었다. "그렇게 일했는데도 우리는 칭찬 한번 못받고. 전부 해고된 거지. 처음엔 딱 열명을 만들었어. 그런데 모인 친구들이 안할라 그래.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노조를 만들어야 못 받은 연월차라도 받는다고 설득을 했어. 나도 이렇게 까지 올 줄 몰랐지. 골탕이나 먹이고 가자. 10년을 있었는데 KBS가 책임지는 게 뭐냐." 방송사비정규노조, 화장실을 접수하다 '비정규'라는 이름을 넣고 노조를 만든 건 이들이 처음이었다. 난데없이 한글학회에서 전화가 오기도 했단다. '한글을 똑바로 알자. 국어 사전에 비정규 노동자라는 건 없다. 불안정 노동자로 고쳐야 한다' 주봉희 위원장은 '군대도 정규군이 있고, 빨치산 같은 비정규군이 있지 않냐"며 이 이름을 고집했다고 한다. 주봉희 위원장도 처음부터 조합원 없이 싸운 건 아니다. 초기 400가까운 조합원은, 경찰특공대가 롯데호텔노조를 '작살'냈던 6월 29일에 방송사비정규직노조도 야간에 '습격'을 받고 27명으로 줄었다. 남은 이들은 투쟁을 할래도, 사무실도 투쟁기금도 없었다. 해고자들에겐 당장 깃발 하나를 살래도 '돈'이었다. 현장에 있을 때도 기본급 72만 5천원에, 식대 5만원. 시간외 근무만 100시간을 해야 겨우 100만원을 채웠던 인생들이었다. "여의도에서 15일을 보냈지. 회의하러가자 하면 여의도야. 그 땐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어서. '형님 마포대교 갑시다'하면 거기 가서 회의하고 일정 짜는 거야. 2시에 대학로에 롯데호텔 집회 갔다가, 이랜드 집회 갔다가 저녁엔 다시 서강대교 밑으로 와서 막걸리 한잔 하고." 한번은 비가 '억쑤로' 쏟아진 날, KBS로 들어가려다가 여의치가 않자 여의도 공원 남자 화장실을 접수하게 됐다. "거기서 전략회의 했어. 우리는 아주 판이 이상해.. 조합원 꿔서 집회하고, 화장실에서 생쥐같이 비맞고 냄새나는데 회의하고 그랬어" 조합원도 없는 노조위원장 ⓒ민중의소리 김철수 ⓒ민중의소리 김철수 구차하고 승산없게 보이는, 비정규직의 싸움. 조합원들은 하나둘 떠나게 되고 결국 두달 후엔 주씨와 송진수(가명) 총무국장 이렇게 둘만 남게 된다. "나중엔 미안하더라고. 9월 15일인가 비가 무지 많이 왔는데. 롯데호텔 투쟁에서 '너 들어가라. 벌어야 하지 않냐' 그 놈이 딸만 둘인데 내가 깃대를 뺐었지. '보고 싶으면 핸드폰으로 전화해라' 비 쫄딱 맞고 막걸리 한잔 하고 울고 갔지. 삼각지까지 걸어가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고 거기서 헤어졌어. '형도 좀 있으면 들어갈 거다' " 당시를 떠올리는 듯 주씨의 눈 언저리가 발갛다. "그 동지 가고 나 혼자 딱 남았잔아. 허망하더라구. 아무도 없는거야." 조합원도, 사무실도, 당장의 차비도 없었던 주씨는 굶기를 밥먹듯 했고 잠자리조차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김종철이 당시 부대변인이었어. 그 친구가 파견철폐공대위 집행위장이던 윤애림 동지 선배야. 애림이가 연락을 해서 당 회의실 하나 줄 수 없겠냐고 해서 책상을 들어내고 그렇게 시작했지" 잠자리가 해결되도 배가 고픈 건 여전했다. 한창 더운 여름에 해고된 터라, 먹는 것도 시원찮은데 '꼭 나같은 비정규직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가 그는 그렇게 미웠다고 한다. "오늘은 어떻게 밥을 먹나. 집회가서 동지들 따라가는데. 그 동지 못쫓아가면 밥 못먹는 거고. 지하철도 많이 몰래타고. 어떻해. 집회는 가야하고. 조끼 입고 쪽팔리기는 하는데" 2000년 12월까지 민주노동당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이랜드, 한통계약직노조와 식구처럼 지내던 주 위원장은 겨울에 용두동에 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를 '접수'했다. 2001년에는 굶지 않으려고 50을 바라보는 그가 명동성당 농성장 사수대를 자원했다. 당시 명동성당에는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차봉천 초대 공무원노조 위원장 등이 수배상태로 농성중이었다. '싸워야지, 여기오면 어떻하냐'는 단 위원장의 질문에 주씨는 '여기와서 싸우면 되요'라고 했지만 실은 '밥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명동성당에서 자고 새벽같이 마이크 차를 끌고 나와서 혼자 집회를 했다. 레미콘 노조원들을 꿔서 집회를 하다 혼자 남은 주씨에게는 사실상 '연대'가 없는 희망이란 없었을게다. 복직하던 날, 그가 떠올린 얼굴들은 그래서 참으로 많을 수 밖에 없었다. 2001년 여의도를 접수했던 레미콘 노동자들은 기꺼이 주봉희 위원장의 조합원이 되어주었다. 주봉희 위원장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사람 참 좋은 장문기 위원장에게 조합원을 꿔서" 집회를 했다. 경찰의 '도끼진압'으로도 유명한 레미콘 노동자들은, 그래서 경찰서에 끌려갈 때면 "왜 KBS 앞에 가서 그러느냐"는 질문을 받게 됐다. "하루도 안빼고 여의도에 갔는데. 내가 특이하잖아. 대가리에 파견철폐를 쓰고 다니니. 금방 알아보는 거야. 나는 돈이 없으니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얻어먹는 거지. 조합원 꿔다가 아침 집회 한 놈은 나밖에 없을 거야. 아침에 방송차 끌고가면 조별로 쭈욱 밥먹고 있어 그럼 '조합원 좀 꿔조' 그러면 KBS까지 쌀자루 뒤집어 쓰고 밥그릇 뚜들기면서 와.. 50명이고 200명이고 거의 한달을 꿔다 썼네." 한국은 월드컵 열풍이 불면서 바디페이팅도 붐이 일었지만, 주 위원장은 이미 바디페인팅엔 전문가였다. 머리에 '파견철폐'라는 붉은 글씨를 쓴 주봉희 위원장이 집회장에 없으면, 사람들이 궁금해 할 정도였다. 주씨는 머리카락은 0.7cm 정도가 가장 글씨가 뚜렷하게 나온다고 설명한다. 더 길어지면 글씨가 드러눕게 되어 '파견'이 '파전'이 된다고. "한달 되면 깎아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그래도 돈 생기면 밥은 굶어도 이거부터 했어. 사실 파견법 철폐라는 프랑카드, 구호하나 먼저 걸어주는 데가 없었지. 노동계에서도. 2003년에 경제특구법에 파견이 들어갔을 때 넣기 시작했지.. " 박상윤, 김주익, 배달호, 이용석, 정종태.. 주봉희 위원장은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다. 특히 주씨에겐 고 박상윤 서울본부 사무처장이 가장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아픔일 것이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민중의소리 김철수 "상윤이가 굉장히 애썼지. 상윤이가 살아 있을 때, 서울본부에서 주사모(주봉희를 사랑하는 모임)라는 걸 만들었어. 서울본부 대의원들하고 당시 한 삼심명 모집해서 CMS로 한달에 25만원에서 30만원씩. 집회 나갈 때 차비하고 밥먹으라고." "숙소가 서울본부 였는데, 3층이 내 방이야. 돈이 없어서 아침에 라면 반쪽에 고추장 풀어서 끓여먹고 책상위에 놓으면, 저녁에 와보면 박상윤, 여성호가 다 끓여먹고 없는거야. 어쩔 때 보면 스프 흔들어서 아작아작 먹고 있어. 내가 뭐라 했지." 고 박상윤 사무처장은 노동절은 있어도 생일은 몰랐던 주봉희 위원장에게, 새벽같이 몰래 끓여놓은 미역국과 초코파이를 챙겨 주기도 했다. '아침부터 소주 한잔 했던 생각 나네.' 그는 정말 무지하게 울었다. 주봉희 위원장은 '그래도 민주노조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그런 활동가들, 내 숨을 던진 활동가들'이라고 믿는다. "김주익 동지는 손이 이 만해. 키도 크고. 2002년 8월에 부산에 갔더니 '위원장님 파견철폐 왜 지웠어요' '아. 머리가 빠져서' 다음달에 다시 쓸 거라고. 그게 마지막이었지. 2001년 배달호 열사부터 시작해서 당시엔 참 울다가 지쳤어. 이용석 동지는 하필 내 옆에서 분신했어.. 불이 확 올라오더라구. 몇 십초 순간이야. 내가 멎었어. 심장도 멈추고, 머리도 뭘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 피켓을 막 뽑아서 불을 끄고 난 다음에는 화기를 다 먹었어. 그 동지 그렇게 보내고 이듬해 복직되고 나니 이용석 열사가 돌아가셨잖아. 기가 막히더라구. 그렇게 아들 아들 하더니 서른 살 나이에.." 주봉희 위원장은 '이용석 동지는 전태일의 혼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한다. 주씨가 걸어 온 길에는 그렇게 '힘에 겨워 굴리다 못 다 굴린' 덩이를 맡은 이들이 많았다. "정종태 동지도 잊을 수가 없지. 그 동지한테는 참 미안해. 내가 참 구박 많이 했어. 이문동 옥탑방에 살았는데 여름엔 30도 겨울엔 영하 20도. 요만한 이불 하나에 치약 치솔 밖에 없었다니까. 지가 입던 옷하고. 걔도 나만큼이나 굶었어. 저녁에는 결국 장충단 공원에 올라가서 소주. '너 조직 관리 그렇게 못하냐' 내가 많이 혼내고. 내 생각엔 4천 대오 있을 때를 일깨워 주려고 했는데.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건강관리 했다면 더 살았을텐데." 계란으로 바윗돌을 쳐서 이겼지. 다 할 수 있다고 주봉희 위원장은,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한때 '도망'쳤었다. "2002년이 제일 힘들었던 때인데. 한통계약직 깃발 내리고 나서. KBS, MBC 다 무너지고. 나도 이제 여기서 끝내자. 그만 하고 내려가야겠다. 연세대에서 같이 보따리를 쌌어. 한통 동지들이랑 같이 울고 그 길로 온양으로 내려간거야. 농사를 짓든 다른 진로를.." 주씨는 그러나 깃발을 내리지 못했다. 그를 붙잡은 것은 고 박상윤 사무처장과 같은 그런 '동지'들이었다. "누나네서 한달 반 정도 있다가 핸드폰을 꺼놨었는데, 받지 말았어야 하는데, 파견법 시행 5년이라고 철폐연대 서울본부 민변에서 뭘 하는데 발언해 달라고. 그게 계기가 되서 김혜진 동지나 이런 동지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죽기야 하겠냐' 여성호 박상윤도 '아 형님 도망갔다'고 난리를 피워서 2002년 말까지만 간다고 했는데 거기서 붙잡힌 거지." 47살에 해고된 주봉희 위원장은 결국 52살에 복직했다. 다른 게 있다면 그가 운전직이 아닌 사무직으로 배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씨는 이제 실제 조합원들이 있는 방송사비정규직노조의 위원장이라는 점이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윗돌치기라고 그랬지. 내가 계란으로 바윗돌을 쳐서 이겼지. 다 이길 수 있다고. 당신들 어차피 우리같은 사람 필요한 거 아니냐는 거지." ⓒ민중의소리 김철수 ⓒ민중의소리 김철수"에 해당되는 글 112건

  1. 2005/08/12 시인이 된 비정규직 노동자, 주봉희
  2. 2005/08/12 파견노동자 설움 엮어 시집 펴낸 한국방송 주봉희씨

시인이 된 비정규직 노동자, 주봉희

2005/08/12 20:08
시인이 된 비정규직 노동자, 주봉희

 

[인터뷰] '어느 파견노동자의 편지' 시집 낸 주봉희 방송사비정규지부 위원장
이꽃맘 기자 iliberty@jinbo.net
무언가 채우고 싶은 욕망은
속 깊은 곳에서 꿈틀대지만
후들거리며 저려오는 종아리 싸매 쥐고
여의도 한 모퉁이 싸잡아 안고 나뒹굴다가
하늘을 보면 숨바꼭질
참새란 놈이
여기가 뉘땅인데 누워 있냐고
찍 갈긴 참새똥에 일어나보니
아이고야 내 나이 오십이구나
<인생은 숨바꼭질 中>

'파견직 노동자의 상징' 주봉희 방송사비정규지부 위원장이 시집을 냈다. 그의 시집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어느 파견노동자의 편지'이다. 98년부터 시행된 '파견직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에 의해 KBS 입사 후 정확하게 2년 만인 2000년 7월 1일 해고 된 그는 2004년 7월 1일 복직될 때 까지 5년 동안의 투쟁과 삶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의 시집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기쁨이 그대로 담겨 있으며, 5년 동안의 투쟁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투쟁하다 힘들어서 보내야 했던, 끝까지 버틸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 보내야 했던, 투쟁하다 죽어서 보내야 했던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한 편의 시가 되었고, 소주 한잔 하며 함께 불렀던 노동가요가 한 편의 시가 되었고, 지칠 때 옆에서 힘이 되어 주었던 동지들의 이야기가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주봉희 위원장의 투쟁, 삶, 시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가 일하고 있는 KBS 배차실을 찾아갔다. 그는 사무실 한 켠에 앉아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한가닥 미련마저 울컥 삼키며
쓸모없는 이 몸뚱아리 허공 위로 뒹구는
너 가엾은 낙엽과 같은 비정규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 낙엽과 같은거야 中>

그가 해고되기 까지 KBS에서의 삶은 이 땅을 살고 있는 파견직 노동자가 느꼈을 모든 차별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한 시간들이었다. 주봉희 위원장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이중으로 파견된 노동자로 KBS에 고용되었었는데, 렌터카 회사에서 차랑 운전사를 묶어서 입찰을 했죠. 용역에서 렌터카로 파견되고, 또 KBS로 파견되고.." 그는 이렇게 KBS에 입사한다.

"지금은 방송차량 쪽에 정규직이 거의 없지만 그때는 정규직이 많았어요. 정규직은 마치 하나님처럼 움직이고, 우리가 모두 이름이 있음에도 우리를 부를 때 야! 용역!, 야! 렌터카! 이렇게 불렀어요. 95년도에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처음 가서 잘했을 때 있잖아. 비정규직들이 모여 있는 방에는 17인치 로타리식 흑백TV가 있었고, 정규직 방에는 29인치 칼라TV가 있었거든. 우리 방에는 채널이 없어서 박찬호 경기를 보려고 정규직 방에 갔다가 혼났지. 니네들 방에 가서 보라고 하데요(웃음)" 어떻게 보면 뭐 저런 식으로 유치하게 구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주 사소한 것에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해 파견직 노동자들은 더욱 힘들었다.


그는 2000년에 해고되면서 자신이 왜 해고되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2000년 7월 1일 해고가 되었는데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지 이해할 수가 없더라구요. 파견법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파견법이 뭔지 전혀 몰랐거든. 그래서 교보문고에 가서 파견법에 대한 책을 한 권 샀지.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인데 왜 우리가 보호받지 못하는가 알고 싶었어요. 책을 보니까 근무일수가 하루라도 넘어가면 직접고용한 것으로 본다라는 조항이 었더라구요. 아 이것 때문에 해고를 시키는구나. 그때부터 파견법은 파견직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률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법을 달달 외우고 다녔어요" 그는 파견법을 알리기 위해 제일 앞에서 투쟁하는 것은 물론이며, 머리에 '파견철폐'라는 글씨를 새기기도 하고, 얼굴에 색칠을 하고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였다.

그의 노동조합 활동은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위한 절박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파견직이라는 신분으로 노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 처럼 보였다. "2000년에 노조를 만들었는데 계약기간이 되니까 조합원들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근데 언제부터 인가 파견법을 이용해서 방송국에서 교차사용을 하더라구요. KBS에서 2년이 된 사람은 SBS에 가 있고, SBS에 있던 사람은 MBC에 가있고. 그래서 다시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다시 조직하면 뭐하냐 조합비만 아깝다. 또 다 해고 될텐데 뭐하러 하냐라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을 만나고 조직하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이런 과정을 거처서 방송사비정규운전직노조가 2002년 처음 건설된다. 이때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노동운동에서 처음 제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봉희 위원장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온 몸에 안고 싸움을 시작했다.

"조합원들을 만나러 현장에 가면 청경들이 잡고 때리고 해서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한번은 온몸에 고추장을 바른 적이 있었어요. 그럼 못 만지니까요. 나중에 씻으러 갔는데 손톱 밑에 고추장이 가득 들어가 있더라구요(웃음)"

향기 없는 사람들
축 늘어진 어깻죽지 너울거려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춤을 추지
흐느적거리며
걸려 넘어질 듯 앙상한
종아리뼈에 사무쳐
이렇게 살다간
비정규노동자
희망조차 꿈 속에서나 찾아 헤메누나
<개 같은 세상에서라도 살고 싶다 中>

그는 2000년에 해고된 이후 그리고 파견법의 실체를 알게된 후, 5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 땅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 "노조원이 많을 때는 700명까지 있었어요. 근데 사실 다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생활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다들 떨어져 나가더라구요. 아침에 가보면 30명 줄어있고, 그 이튿날 가보니까 또 줄어있고, 결국에는 총무국장이랑 둘이 남았더라구요. 서울역에서 비가 엄청 쏟아지는데 총무국장이 깃발을 들고 둘이서 비를 쫄딱 맞으면서 투쟁한 날이 있었어요. 그날 총무국장이 들고 있던 깃발을 뺏고 그만 들어가라고 했어요. 나도 12월 까지만 하겠다고... 근데 그때 대상식품 비정규직 노동자 4명이 힘차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내가 저 사람들을 두고 그만두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일 년만 더 일 년만 더 하다가 5년이 지나간거죠"

그는 이런 투쟁의 과정을 시로 옮기기 시작했다. "2000년에 해고되고 나서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혼자 살다 보니까 저녁 집회 끝나고 나면 동지들은 다 흩어지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여의도에 남았어요. 뭔가로 메우고자 하는 충동이 들어서 가방에 항상 가지고 다녔던 노트를 꺼내서 벤치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의 시는 세상을 지켜보고 감상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의 시는 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나는 대공장 노동자들 처럼 큰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여서 응어리 진 것들을 풀 곳이 많지 않았어요. 꾸역꾸역 밥을 먹어도 배만 부르고 가슴 속은 여전히 허한 것이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죠. 내가 본 현실은 비정규직이 불에 타야 정규직이 되는 세상이었고, 비정규직이 목을 메달아야 복직이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시는 감상에 젖어서 쓴 것이 아니라 현장을 목격했던 5년 동안의 나의 삶을 쓴 것이라 생각해요"

초원의 푸르름이 넘실대는데
너는 아직도 어딜 헤매고 있는가
쥐어 뜯으며 살아가면 인생역전 될까
하고 많은 직업 중에 데모질이냐고
오늘도 터벅터벅 향하는 길목에
어느새 사쿠라꽃 휘휘 감은
여의도라네
<출근연습 中>

주봉희 위원장은 KBS방송차량서비스에 2004년 7월 복직했다
그는 5년 만이 2004년 7월 1일부로 KBS 자회사인 KBS방송차량서비스에 복직하였다. 그는 현재 '방송국 차량 배차 반장'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파견직 노동자이다. "출근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적응도 안되고... 출근 첫 날 여의도 공원에 앉아서 술을 먹고 엉엉 울었어요. 그리고 집으로 가버렸죠. 5년 동안 나도 참 많이 변했었나봐요. 복직할 때 해고됐던 동지들을 복직시켜 줄 것을 요구했어요. 결국 12명의 동지가 복직되었죠. 하지만 안타까운 건 12명을 복직시키기 위해 또 다른 12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일자리를 늘려달라는 요구를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파견직을 없애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다. 하기에 복직한 주봉희 위원장의 앞에는 더 많은 일이 놓여 있었다. "5년 동안 동지들로부터 받은 거 그대로 다 돌려줘야죠. 나는 얼마 있으면 정년이지만 아직 젊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잖아요. 그 친구들과 함께, 그 친구들을 위해 싸워야죠. KBS가 방송차 운전직을 직접 고용하라는 요구를 하고 싶어요. 예전에 그러했듯이 안정된 직장에서 안정된 삶을 살수 있도록 싸워야 하는 거죠. 그리고 노동자들 투쟁이라면 내일처럼 달려갈 거예요. 그곳이 어느 곳이 되는 간에 말이죠" 그는 그의 시가 그러하듯이 항상 투쟁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쩌다 찾아오는 할멈 손이 그리워
태양이 내리쬐는 한 귀퉁이에
꽃을 피우면 왜 이리 못 생겼냐
지나는 길손 차 버리고
미안타 사과하면 아가리 찢어지나
나는야 파견 나온 비정규 나물인가베
그래도 나는 질기고 질긴
질경이인 것을
<밟히어도 나는 질긴 질경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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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노동자 설움 엮어 시집 펴낸 한국방송 주봉희씨
[한겨레 2005-07-13 23:21]

[한겨레] ‘재직 2년’ 하루 남겨두고 2000년 한국방송서 해고
5년 투쟁 끝에 지난해 복직 2년마다 잘리는 파견노동자
두해 살이 풀과 뭐가 다른가
‘죽어서야 정규직이 되는 세상, 목을 매달아야 손배가압류 풀어주는 세상’이라고 울분을 토해낸다. ‘차별을 낳고, 빈곤을 낳고, 갈등을 낳는 파견법’에 ‘퉤’하고 침을 뱉는다.

한국방송 파견노동자인 주봉희(53)씨가 파견노동자의 설움을 읊조린 시 69편을 <어느 파견 노동자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엮어냈다. 주씨는 그의 시에서 파견노동자를 ‘두해살이 풀’이라고 했다.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때문에 2년마다 해고가 되는 파견노동자의 삶이 두해살이 풀과 꼭 닮았다는 얘기다.

주씨의 처지가 딱 그랬다. 그는 98년 한국방송에 운전기사로 입사한 뒤 입사 2년을 채우기 하루 전날 해고됐다.

파견법에 따라 파견노동자를 2년 이상 고용하려면 파견업체를 통하지 않고 방송사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 이를 피하려고 방송사는 그를 비롯해 파견노동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6월30일생(파견법 발효 날) 파견노동자’들은 이름도 낯선 파견법에 떠밀려 거리로 내몰렸다.

“파견노동자를 보호한다던 파견법이 내 일자리를 빼앗아 갔어요. 일자리를 되찾으려면 스스로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직투쟁은 자연스럽게 해고의 원인이 된 파견법 폐지투쟁으로 옮아갔다. 그는 운전직, 작가, 사무보조 등 방송국의 비정규직을 모아 비정규노조를 만들면서 첫 싸움을 시작했다. 짝수 해마다 어김없이 무더기 해고가 거듭되니 노조를 끌어가기가 쉽지 않았고, 월급을 받지 못하니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겨웠다. 주씨는 “한 끼라도 밥을 먹는 날에는 ‘아, 오늘은 그래도 밥을 먹었구나’하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 만큼 혹독한 날들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회사의 비정규직 동료들이 돈을 걷어 한 달에 20~30만원을 주는 게 수입의 전부였다. 끼니를 걱정하면서도 비정규직 차별철폐집회나 노동자집회 때마다 독특한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열성으로 투쟁에 나섰다. 주씨는 언론노조 방송사 비정규지부장을 맡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지난해 7월 그는 한국방송 자회사에 운전기사로 복직했다. 혹독한 투쟁 끝에 현장으로 돌아와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주씨는 일자리를 되찾기 위한 5년을, ‘세상사 하고 많은 일 중에 데모 질이냐고, 한번 데모 질에 일당이 얼마냐고, 비아냥 소리도 그저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쯤으로 지나쳐왔던 세월 5년’이라고 읊조렸다.

“파견법이 개악돼 파견 업종이 늘어나면, 더 많은 파견노동자가 생기고 갈수록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된다”며 한숨을 내쉬던 그는 “파견노동자라는 서러운 이름이 없어지는 날까지 우리의 처지를 시로 달래며 싸우겠다”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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