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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변절'일까?

요즘 황석영의 행보를 두고 변절이니 뭐니..시끌시끌하다.

그야 당연히 그가 한국문학사에서, 더군다나 진보진영에서 가져왔던 상징적 의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그러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변절이라는 평가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이건 황석영의 변절이 아니라, 황석영 사상의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그 사상의 이름이 대민족주의건 뭐라고 이름 붙이건 말이다.

 

 

일전에 포스팅 해놨던 글중에서 보면..

 

...'심청'은 이미 동아시아 여성의 새로운 문화적 아이콘으로 전략화되고 있다. 헐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진 공리, 장쯔이 주연의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영화로 구별지으면서 영화 <심청>은 "조선의 한 여성이 아시아 각국의 매춘부로 떠도는 여성 수난사를 통해 서구화로 왜곡된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은 한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아시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서구의 시각에서 판타지화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편견 없는 우리 시각으로 바라본 이야기"로 선전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위험하게도 서구 중심 문명론에 대항하는 동질한 역사를 가진 지역과 집단으로 뭉뚱그려진다. 동아시아 국가, 민족, 인종, 성, 계급 빚어내는 비균질적인 차이들과 다성적인 목소리와 서사들은 배제되고 '범 아시아를 묶어내는' 상상의 공동체를 꿈꾼다. 여기서 '우리'는 아시아를 시장으로 한 문화 자본들의 결합이다. "범 태평양 영화(pan pacific movie)"를 꿈꾸는 <심청>은 과연 아시아/여성의 타자화, 성적 대상화의 역사와 서사화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 것인가. - 노지은 "심청: '동아시아 근대' 서사의 창출과 여성의 재현-황석영 소설 <심청>"( [황석영의 '심청'에 대한] 에 관련된 글 중에서)

 

 

그렇다. 한겨레에 나온 기사를 보니 황석영의 구상이라고 하는게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해, '우리가 먼저 나서' 동아시아를 단일하게 균질하게 묶어내고자 하는

또다른 '제국' 욕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모든 기사 인용은 한겨레 기사-“막힌 남북관계 풀려는 뜻…나는 변하지 않았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5178.html

 

“북한 노동자·남한 청년백수 손잡고 몽골 개척, 몽골+2코리아 구상”

몽골이 동몽골을 같이 개발하자고 한 지 벌써 10년 됐다. 우리 한반도 넓이의 배 정도인데 남한이 산지를 빼고 경작지가 120만 헥타르니까 사람마다 수치는 다르지만 한 400만 헥타르 된다고 한다. 같이 참석한 농업관계 전문가에 의하면 고추도 재배되고 옥수수, 콩, 밀이 된단다. 그 안에는 수많은 지하자원이 있다. 이 사람들이 재미있는 게,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주장이다. 몽골+2코리아 하자는 거다. 나는 내년 상반기까지 남북관계 풀리면 북한 노동자와 남한 청년백수들이 같이 가서 그땅을 개척해내고 여러가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꿈이었던 ‘느슨한 연방제’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남북관계만 풀린다면. 동북 중앙아시아 연합이 가능하단 말이다. -황석영 인터뷰 중에서

 

 

아직 근대화되지 않은 몽골땅을 '남북한 청년'이 손잡고 땅파서 개발하자는데

이게 MB식의 삽질하는 개발론랑 다른게 뭔가?

못사는 나라에 한국 기업 진출시키고

거기에 값싼 북한 노동력+남한 백수까지 합치면 금상첨화지! 안그런가?

 

MB가 "그 안을 같이 얘기했더니, 현 정부가, 이 대통령이 “그건 내 생각이다”라고 하더라. 아, 이건 생각이 같구나." 라고 대응하는 건 정말 너무 당연한 결과다.

 

황석영의 생각은 우리민족이 우선 손잡고 몽골 개발해주고 손잡고

골치아픈 중국은 제일 마지막에 마지못해서라도 손잡게 하면 '동북 중앙아시아 연합'이 된다는거다.

 

이게 문화적인 구상이라고 한다면, 평화전략이라고 한다면, 이건...황석영 선생님 너무 순진하신거 아닌가요.

맙소사, 요새 애들은 한국말도 잘 못하는데, 알타이 어족이라고 묶이면 이건 정말 너무 하잖아요.

 

도대체 주구장창 변하지도 않는 '범(pan)', '연합', '개발' 논리

자신을 구원자적 위치로 놓으려고 하는 거 (-박쥐, 보고 박찬욱한테 느낀 감정과 유사함)

끝내 '우리 손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함에 대한 지난한 미련

근대 민족주의적 남성 지식인의 상상력의 한계인건가?

 

기사 보다 빵 터진 게 하나 있었다. 역시 새겨들을 말은 가까이 있다.

 

"나는 침체되면 내 탓인 줄 알고 총대를 메잖아.

마누라가 어제 밤새 “그놈의 메시아 콤플렉스 좀 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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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녀와 네이년은 한끗차이

 

왜 트랙백이 안되지..

Septimus님의글 http://blog.jinbo.net/fauntine/?pid=186

 

오랜만에 집에 내려왔다가..근처 모 대학에 들어갔더니..

다함께 대자보에 '고대녀 김oo'이가 강연하러오는 연사라고 대문짝만하게 붙여놔서..

아직도 저러고 있구나 하고 한숨 푹푹 쉬고 있었는데..

마침 블로그에 글이 올라왔더라...

 

여성차별과 해방과 거창한 구호는 다 갖다붙이는 훌륭하신 단체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고대녀, 를 오래도록 우려먹을거라고 그 누가 생각했을까만은.

내부에서는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뭐지??

별로 친절하게 글을 쓰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렇게 문제제기 한다면 린지저먼, 인용이나 하면서

페미니즘과 가부장제 이론에 메스를 긋네..어쩌네..할테다만.

 

솔직히 정말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건 정말 직감적으로 느낌으로 '기분나쁜' 문제 아닌가?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평소에도 넘쳐나는.. 지하철녀, 개똥녀, 된장녀 여자들을 비하하는 -녀 시리즈는

민주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이른바 촛불정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 아무리 좋은 의미를 갖다붙인다고 해도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여성들은 촛불소녀, 거나 하이힐녀, 거나 유모차 맘, 이었다.

소녀-아가씨-어머니라는 특수한 분류는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회사원을 지칭하는 넥타이부대, 청년을 대표하게 된 대학생, 노동자

...이와 같은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는 곧 남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여성들은 '개념녀'는 될수 있을지언정

민주시민을 대표하기는 어려웠다.

'진보'적 담론이 급증했던 촛불정국에

-녀 시리즈에 대해 분석을 했던건 흥미롭게도 '꼴보수' 조선일보였다.

 

 

[조선] 고대녀·서강녀·경찰방송녀… '○○녀'시리즈 누가 만드나
"인터넷서 적극적으로 의견 내는 20대 남성층이 주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30/2008063001795.html?colTrack=news&urlTrack=news2

 

 

어찌되었든.

민주시민들은 네이버를 네이년이라고 부른다.

나경원은 관기녀이고 박근혜는 복당녀이다.   이명박 내각이 부자내각, 인맥내각이라고 비난받았을때,  민주당에서 고소영, 강부자라고 여자 배우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어졌던건 단지 우연의 일치였을까?

 

제 아무리 고대녀가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고 박박 우긴다고 해도

내가 보기에 고대녀와 네이년은 한끗 차이다.

다함께 회원 '고대녀'가 숭상받는 것처럼 보일때,

 '서강녀'는 박근혜와 같은 학교 다닌다고 욕먹고..학교 이름에 먹칠한 '년'이 되어 있었다.

 

웃기지 않는가.

강기갑의원은 강달프이고..이명박이나 홍준표는 쥐나 개가 될지언정,

개념남, 처럼 -남, -놈이 되지 않는 이유 말이다.

그들이 정말 모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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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적 글쓰기..

내 글쓰기 방식에 대해 생각하고..

댓글들을 보면서 생각하고..

여성(주의)적 글쓰기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해답과 결론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무언가 상당히 다른 인식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성적인 글쓰기를 누군가는 '여성스러운'  글쓰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혹은 여성적인 글쓰기가 '인품이 훌륭한' 글쓰기라고 인식되는 경향도 있는 듯..

 

 

그냥 내 경험에서 말하자면

내가 여성적인 글쓰기를 잘 못하는 것 같다고 했을 때의 의미는..

교육받아 오면서, 또 대학 이후에 운동을 하면서 만들어진 내 글쓰기 방식이..

한마디로 대자보, 성명서, 기사용 같다는 거였다..

어떤 팩트에 대해 의견을 내는거..(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논리, 이성, 합리적임을 추구하고, 결론과 대안을 제시해야만 인정받는 글쓰기..

감정이라고는 유일하게 공적인 감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공분' 만이 용납되었고

연민, 안타까움, 슬픔, 기쁨, 외로움 같은 감정들은 

냉철한 판단에 걸림돌이 되는, 가지쳐야 되는, 것들로 생각했던 글쓰기 말이다..

그러다..언젠가..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받았던 충격은..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비슷하게도 다시 학교에 들어와서 다른 백그라운드를 가진 친구들의 글을 보았을때,

블로그에서 다른 이들의 글을 보았을 때..받은 느낌도 유사했다.

그에 비하면 내 글은 차갑고 무미건조한 느낌이었달까..그런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글쓰기가 단순히 개개인의 인품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적'인 언어체계,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시작했다.

여성적인 글쓰기..여성주의적인 글쓰기..라는게 단일하고도 합의된 개념인 것은 아니지만..

페미니스트들이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하는 비판으로부터

나온다는 거..어렴풋이 경험적으로 알 것 같았다.

보편적임, 시민됨, 인간이라는 범주에 들지 못했던 여자들이 쓰는 글쓰기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로 간주되지 못했던 여자들의 글쓰기란..

남성 중심적인 상징질서와 언어체계에 익숙하지 못했던 여자들의 글쓰기란..

이 사회에서 봤을 때는 (치유하는 글쓰기, 라는 책에서 보았던) '미친년 글쓰기'에 가까운 것이다.

중얼거림, 알 수 없음, 논리적이지도 않고, 어쩌면  쏟아버리는 광기어린, 분노, 감정들이 뒤섞인

머리보다는 몸적인 언어들, '두 입술'로 말하는, 그 자체로 단일하지 않고 복수적인 글쓰기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나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듯이

미친년 글쓰기가 용납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왜 자꾸 말이 바뀌냐, 앞뒤가 맞지 않다, '사실'이 무엇이냐고

따져묻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하지만 그것이 폭력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기억, 사실, 감정은 바뀌는 건데..

어찌 되었든..그에 비하면 아직도 내 글쓰기는...'남성적/공적인 글쓰기'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꽤나 논리적으로 쓰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늘 글을 쓰고도 개운하지 못한 이유...

진정으로 내 자신을 위한 것인지, 글을 위한 글을 쓰는 것인지 헷갈리는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익숙하지 못해서인지..이미 습이 생겨버려서인지..

아니면 쏟아놓을 감정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가끔은..

글을 보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보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 친절함을 요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글쓴이의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감정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보기를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단지 거칠다고..정제되지 않은 말들이라고 비난하는건...지나치게 가혹한 것 같다..

마초적인 공격성 댓글이 달리면, 여성적인 글쓰기로 확인된다는

어느 블로거의 말은 씁쓸하지만...가장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점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고...내 글이 공격적이라는 건...비난이나 분노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가슴보다 머리로 이해하는 건 아닌지, 무작정 비판의 날을 들이대려 한건 아니었나..생각이 들어서..

 

글쓰기는 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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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을 쓰는지..

가끔은 왜 글을 쓰는지

정말 모르겠다.

 

예전에 언젠가 블로거들이

나는 왜 블로그를 하는가, 하는 걸로 한참 얘기한적도 있었고

글쓰기 부담감에 대해 또 한참 얘기한적도 있었다.

 

그런데 늘 원점인 걸 보면..

나만 그런가?

 

 

배려하는 글쓰기(http://blog.jinbo.net/kommunistka/?cid=1&pid=142)가 싫어서

한동안 블로그를 방치해두었다가

다른 블로그로 옮길까 또 생각도 해보았다가

그래도 그냥 두는 걸 보면

뭔가 미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워낭소리를 써놓고도 그랬다.

오프-온라인 모두에서 나를 아는 이에게 물어봤다.

-내 글이 너무 딱딱하니? 인정사정 없이 공격하는 것 같니?

 

솔직히 여성주의를 공부하지만

내 글이 소위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에 전혀 가깝지 않다는 건

내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감정은 되도록 배제하려고 하고, 충분히 공격적이고 등등.

글쓰기도 일련의 '습'인데 나한텐 그런 습이 만들어졌나보다.

 

아무튼 여전히 내키지 않는것도 사실이다.
어느 한군데는 검열없이 쓰고 싶기도 하고

오빠는 필요없다, 에 나왔던 '설득노동'을 블로그에까지 가져오고 싶지 않으니까.

또 한동안 블로그를 방치할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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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_한줄로요약안됨

영화보고 다이어리에 끄적끄적..옮김.

 

 

누가 그랬다.

울고 나왔는데 묘하게 껄끄러운 감정이 든다고.

나 역시, 딱 그런 기분이다.

한줄평을 적으라는데 도저히 한줄로는 정리가 안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평이 나올 수 있을 듯하여.

 

모든 껄끄러운 감정들이 논란이 될 수 있을테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 깔린 전제-일종의 당연함이

무엇인가 질문하게 하게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라면은

괜찮은 영화였던 것 같다.

 

난 영화를 잘 모르지만

이 영화는 철저한 극영화이다.

(물론 이 영화가 다큐냐 아니냐 하는 논란 뒤에는

연출과 개입없는 '사실만을' 보여주는 다큐가 있을거라는 믿음이 있을테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그 순간, 촬영되는 그 순간 이미 사실,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그 점이다.

다큐와 사실이라는 관객의 기대를 철저하게 활용하면서

다른 것들을 보이지않게 만들면서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함정.

 

오로지 소를 중심으로 한 얘기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일상과 관계들-특히 할머니와의 관계들은  지나치게 삭제되거나 조절된다.

할아버지의 삶에는 99.9% 소만 들어차있는 것 같이 보이고

할아버지는 반려동물로 소를 대접하는 사람처럼 보여진다.

할아버지가 소를 아끼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오로지 소에 의한 소를 위한 사람처럼 보여질때

'농촌'이란 현실적인 공간은, 과도하게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농촌에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철저한 낭만화라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군데군데 의도삽입된 '자연'의 모습과 소리는

더욱 관객들에게 자연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그대로 '자연화'시킨다.

 

IMF시절 무너지는 아버지의 어깨를 보면서 이 영화를 구상했다는 감독의 의도는

사실상 이 영화가 소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영화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근대화과정에서 이촌향도했던 사람들에게 농촌에 대한 원시적인 묘사와 고향 이야기를 통해

결국은 소로 동일시되는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영화는 생각 이상으로 성공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시공간적인 차이는 있으되, IMF시절 유행했던 소설 아버지 류와 동일한 맥락에 있다고 본다.

소와 할아버지 뒷바라지 하시느라 고생하시고

영화 내내 스토리텔러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신 할머니가 부차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이 영화의 의도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보통 성공한 '아들들'의 스토리 뒤에는 어머니의 희생이 부각되는데

요즘은 경제위기가 심각하다보니 오즈인가 모 대리운전 CF처럼 

'가장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또 그것이 공감을 사는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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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과 도덕성

 

 

혹자는 이번 사태를 두고

민주노총이 갈데까지 갔다, 쪽팔린다고 얘기한다.

좀 더 고상하게 얘기하면 민주노조운동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 도덕적 해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을 접하는 이런 식의 도덕성 담론에

나는 사실 불편함을 느낀다.

 

조직의 도덕적인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는

대표적인 예시로 '돈문제와 여자문제'를 함께 얘기하는 류의 인간들.

성폭력을 여자문제로 치환하는 작자들에 대한 분노는 치우고서라도

강승규와 김상완 사건을 모두 '도덕성'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총연맹은 지도부 총사퇴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듯하다.

물론 사건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그를 도려내는 것보다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직의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슨 목적으로, 무슨 내용 하에 이루어지느냐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혹자가 말하듯 이 사건은 어디까지 '부도덕한 개인'의 문제인데

왜 지도부 전체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 사건이 진정으로 '조직적인' 문제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민주노총이 정말 '창피해야' 될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총사퇴는 해당 사건을 시급히 마무리하려는 면피용이 될 수도 있다.

왜 사퇴하는가?

어느 부도덕한 인간이 간부였기 때문에 아랫사람의 과오에 조직의 대표자가

사퇴하는 것이라면 사퇴는 책임이란

우리 애 잘못은 애비인 내가 책임지겠소, 하는 또다른 가부장적 형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명서에 나온 이번 사건의 전말은 처음부터 조직적인 문제였다.

남성 위원장을 여성 조합원의 집에 은닉했다는 그 사실 자체부터

피해자에게 은닉죄를 모두 전가하려고 했고,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단 무마해보고자 상부에 보고조차 않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조직 외부의 지인에게 도움을 청할수밖에 없었다는

이 사건의 전말 자체가 모두 엄청나게 조직적인 문제이다.

80만 조합원이 있다고 하는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여전히 피해자의 인권보다는 자본과 보수언론에 역공을 당할 '빌미'로 생각한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위한 어떤 제도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었는가,

(그랬다면 사무총장이 개인적으로 피해자를 만났을 일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민주노총의 조직문화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가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왜 이 사건이 민주노조운동의 도덕성, 진보운동의 도덕성 문제가 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김상완 같은 작자가 민주노조 운동의 도덕성을 갑자기 땅에 떨어지게 했다거나,

요즘 활동가들의 도덕적인 기강이 해이해져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는 식의 얘기들.

솔직히 말해서 현장에서 술먹고 단란주점 가고, "여자끼고 노는 건" 문제 삼지 않으면서

이런 사건이 발발했을 때만 운운하는 도덕성은 위선에 불과하다.

그리고 '운동의 도덕적인 기강'과 '활동가의 도덕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일견 나아보이지만, 사실은 마찬가지로 위험한 사고방식일 수 있다. 

도덕성이라는 건 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합의된 일련의 윤리적 가치를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도덕성이라는 건 기존의 것, 매우 보수적인 선/악 가치판단에 가깝다.

보수적인 기독교와 레닌같은 (금욕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교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 '도덕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상적으로 양극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여성주의를 보수적이며 남성중심적인 도덕적 가치에서 성적 급진주의라고 비난하고,

성과 관련된 일련의 사안들에서 공통적으로 도덕적인 금지주의 입장을 가진다.)

 

도덕성은 지켜져야할 가치가 아니라, 논쟁되고 논쟁되어져야 하는 가치여야한다.

그리고 성폭력은 도덕성이 아닌 피해자의 인권과 권력관계,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노동운동과 조직문화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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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

 

 

 

12월 30일, 개봉날을 기다리다.

뜻밖의 무대인사 덕분에 좋아하는 인성씨도 보게 되고. 훗...

 

쌍화점의 감상을 얘기하자면, 한마디로 좀 '뒤쳐지는' 영화였다..

뭐랄까..

감각의 제국, 색계, 황후화까지..여러 영화들을 군데군데 뒤섞어놓은 듯한 비쥬얼..

특히 정사신과 색감..

 

그런데 그 스토리 전개 라고 하는 건, 전혀 몰입이 되지 않았다.

 

어느 감독 인터뷰를 보니 절박한..사랑의 장애물로 성정체성(동성애)을 집어넣고 싶었다는데..

성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적인 고안물임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조인성이 왕후를 만나고서 그동안 몰랐던 이성경험?, 이로 인해 왕과의 연모는 모두 착취(?)라, 하는 이 상황은 뭐인지..

더군다나 상대가 조인성의 연적이었던 왕후라니...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왕후와 공모해 왕을 죽일 계획이었다던지..차라리 아들을 하나 낳아서 왕위에 올릴 생각이었다던지..

갑자기 떠오르는 순수한 사랑, 지고지순한 연모의 감정이라니..

몸적 경험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색계와 조금은 비슷했지만,

실상 몸적 경험이 각종 경계를 뒤흔들 수 있는 파워를 이 영화는 스스로 거세해버렸단 점에서

색계와는 전혀 다른 길로 가는 영화였다고 본다..

 

게다가...근대 이전에는 지금과 같이 개인의 성적 지향을 중심으로 자아를 구성하는 성정체성이란게 없었다..

오히려 오늘날의 기준에서 호모섹슈얼한 성적 행위들은 매우 공공연한 것이었다..

왕의 섹스란..비밀이 아니라 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음에도..

조인성이 거세당한건, 왕의 사랑을 배신해서이지, '동성간의 섹스' 때문이 아니었듯이..

그러므로 결론으로 조인성을 이성애자로 커밍아웃 시키는 건,  좀 많이 웃기는 상황이 아니었나 했다..

 

뭐 아무튼...여러모로 실망이 있었지만..

영화 초반 조인성이 보여준 귀여운 애교와...

의외의 몰입력을 끌어냈던 주진모..

본격적으로(?) 연기를 해보지...하는 정도로.. 아쉬움을 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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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어서 블로그를 찾았다.

블로그는 아아, 여전히 그대로구나.

 

 

 

 

전희경님의 <오빠는 필요없다>,

2000년에 나왔던 석사 논문이

2007년에 새롭게 인터뷰와 작업을 더하여 책으로 나왔다.

 

하루종일 읽고서 마음이 뭉클뭉클.

아리고 쓰리고 말하고 싶은 것들이 뭉클뭉클하여

글이라도 남기고 자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을 맞을 수 있을까 해서.

 

2000년대 이후의 학번으로 학생운동을 했고 

현재는 20대 중반으로 여성학을 공부하는 나는

나의 위치에서 이 책을 마주하면서

고이고이 접어두었던 경험들과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어본다.

 

언젠가 [좌파, 페미니스트] 라는 포스팅을 한적도 있지만

내 인생에선 짧지만, 강렬한 각인이자 전환이었다.

학생운동도, 그리고 여성주의도 말이다.

한동안 자아분열이라는 성장통을 겪어야 했고,

적어도 조금은 내려다놓고 보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1.

"내가 비판하고자 한 바로 그 언어 속에 있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나는 혹시 남자들과 '남자식으로' 싸우고 있던 것은 아닐까?(5-6)" 하는

저자의 성찰이 내게도 아리고 쓰리게 다가온다.

 

그랬다. 평생 변절않고 운동할 것 같다는 '기대'조차도 받지못했던

나는 언제나 '똑똑하고' '말발센' 남자 동료/선배들과 싸워 이기길 바랬지만

그러나 "'똑똑해지기를 열망한 만큼, 그것은 또다른 권위에 짓눌리는 과정이기도 했(39)"던 것이다.

그래, 결국 내가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다시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내가 침묵하고 있었거나 내면에서 가장 혹독하게 보았던 이들이

바로 내 옆의 '여성'활동가들은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아프다.

 

2.

졸업 즈음 운동을 그만두고, 잊을만하면 뜸하게 걸려오는 후배의 전화는 무서워 받지 못했다.

또 혹시 성폭력 사건이면 어떡하지?

달리 찾을 사람이 없었던 그 후배의 입장이야 오죽했으련만

정말로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몇년이 지나서도, 가까운 언니에게 또다시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때,

나는 다시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펑펑 울고 말았으니 말이다.

"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거야..왜..."

 

내가 한 노력, 내가 겪었던 경험, 그 모든 것은 재가 되어 날아가버리고

불연속적이면서도 내게는 연속적으로 의미화되어있는 사건들과

동시에 내 자신이 피폐해지면서도 끝까지 놓지않았던 사건들이

한꺼번에 다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는 느낌, 이었다.

이조차도 지금,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치스러운 감정은 아닐까

고민했던, 아니 고민해야만 했던 내 자신이 떠올랐다.

 

 

3.

나는 이 책에 나오는 90년대의 '영 페미니스트'  이후의 세대로

그녀들의 치열함과 헌신적인 활동 덕분에

'페미니즘 좀 아는 좌파'들과 함께 활동한 세대이다.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남자들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229)"은

실은 동일한 성별구도의 양면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가장 와닿는 부분 중 하나였다.

 

" 이 '오빠'들은 둘 다, 여성주의를 통해 자기를 성찰하고 조직과 이념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여성 활동가가 여성문제를 '담당'하고 '전문가'가 돼 '해결사' 구실을 해주기를 요구했다.

여성주의를 '인정'한다면서 '구색 맞추기'로 동원하고,

끊임없이 여성주의를 '가르쳐달라'고 조르면서 정답을 요구하는 남성의 행태는

여성활동가들을 소진시키고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활동했던 시절 여성주의는 여기저기 '문패'마냥 걸려있었지만,

(그 문패가 있어야 적어도 '진보'라고 인정받는 분위기였으니)

그러나 그 문패는 늘 그들의 집에는 같이 살지 않는 타자, '여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성주의는 타자화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공부해야한다면서 페미니스트가 커리를 짜서 세미나 시켜주길

시시껄렁한 에세이 같은 건 치우고 페미니즘의 (비판할 수 있기 위한) 핵심, 요약본을 바랬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한번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았다.

 

 

4.

저자의 성찰과 비판은 여성주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단일하게만 보여졌던 '우리' '여성주의자' 사이의 차이와 갈등들,

나의 위치를 2000년대 이후로 더 드물어진

학생운동을 했던 여성주의자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그래서 4부 흔들리는 지도를 들고 걸어가기, 가 특히 많이 와닿았다.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노동에 관심이 있다는 그 자체로 나의 역사성이 탄로나고

학생운동을 했다는 것이 '후지다'는 뜻인 것마냥

나야말로 철지난 유행의 막차를 탄 존재로 보일까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기도 했다.

'진정한 여성주의자'인지 내 정체성을 의심받을까봐.

 

저자는 말한다.

"'일상의 정치'를 화두로 삼고 모든 일상을 정치적 문제로 토론하고 고민하려 한 여성주의자들이

이런 견해차이를 단순히 (나와 분리된) 어떤 '문제'로 거리를 두고 다룰 수 없던 것은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여성주의는 자신이 '갖고 있는'(그래서 버리거나 바꿀 수 있는) 어떤 생각이나 견해라기보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나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처를 동반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의 살아가는 힘은,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상처와 강박으로 인해 (언젠가 페미니스트 자격에 대해 쓴적이 있지만)

자신을 비하하거나 페미니스트이기를 포기하기도 했다는 슬픈 사실.

생각해보면, "복수의 여성주의들"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없었던 것은,

그 시절만큼, 아니 그보다 더 이후의 여성주의자들에게 힘들었던 과정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진정한' 여성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로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하는 것이다.(18)"

 

 

 

마지막으로, 에필로그 중에서

 

 

나는 사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올바름이나 신념도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그 올바름과 신념에 마음이 연결될 때, 자신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걸게 될 때,

비로소 뭔가가 시작된다고 믿는다.

 

갈등을 드러내고 토론하는 것이 여성주의 정치학을 성장시킬 거라는 걸 누구나 알지만,

또 여성은 동질적 집단이 아니며 여성들 사이의 차이의 정치학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누구나 느끼지만,

이 모든 것은 드러내고, 말하고,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알고 타인의 마음을 살피면서 여성주의를 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일상의 공간이 너무 분절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기억이 쓰여지고 해석되는 과정이 너무 불연속적이다.

그래서 경험과 기억의 바로 그 연속과 불연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꾸벅.
 때로는 같은 공간에 있기에 깜빡하는 언니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도.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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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하는 글쓰기?

오랜만에 글 하나 쓰려고 내 블로그를 봤더니 밑에 포스트와 댓글 130개가 맘에 걸린다.

 

빨리 다른 글들을 써서 밑으로 밀어버리고 싶다. 쿠쿠.

 

특유의 소심한 성격 탓에

"내가 글을 어떻게 써야 됐나" 한참을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내가 글을 왜 썼나"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블로그는 내게 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사적이지 않은 공간이다.

일기처럼 끄적이는 거라면 왜 공개된 블로그에 글을 쓸까.

하지만 여전히 익명이고 사람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다른 블로그들도 있지만 하필 진보블로그를 쓰는 이유도 있다.

 

그 경계 어디쯤에 있다.

 

포스트를 불특정 다수가 본다고 가정 해볼 때,

보는 사람을 배려하는 친절한 글쓰기가 있을 수 있다. 좋다.

하지만 매번 친절해야 된다는 건 꽤나 불편한 일이다.

자기 검열을 해가면서 글을 써야된다는 거, 말이다.

 

지난 번 사건을 통해 생각한 건

생략된 예의 같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썼어야 조금은 '덜'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지

"그래도 개념있는" 페미니스트처럼 보이는지 잘 알고 있지만

매번 그렇게 글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숨이 막혀서라도.

 

누군가, 

나혼자 지껄이는 얘기, 메모수준의 단상들,

일일이 친절하게 양해와 이해를 구하고 예의 차리지 않아도

행간을 읽어주고 공감해줄 수 있는 이들이 있을 거란 기대는 불친절하기만 한건가.

 

소통이야, 되면 좋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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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 메모

촛불시위.

 

 

오늘보니 댓글이 130개고만.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가끔씩은 불특정 다수의 '그들'이 꿈에라도 나타날까, 두렵기도 하다.

 

 

소통의 목적으로 하지도 않은 메모 수준의 글로 일어난 어마어마한 사태를 보며

변명인지 자기정당화인지 모를 이런저런 생각들을 쓰다 지워버렸다.

 

몇개월에 한번쯤 가끔 들어와 내키면 글을 써대는 이 공간,

내 개인블로그에까지

과잉 친절한 글을 내어놓으려 노력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불친절한, 메모를 남긴다.

5월 한달간의 경험과 고민들을 놓쳐버리고 싶지는 않아서.

 

 

1. 주체의 문제

-10대 소녀에서 촉발.

10대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언론이나 학자들이 주목. 하지만 성별성에 대해서는 분석되지 않았다. 

"여성은 먹거리 문제에 민감하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가?

청소년들과 비교하여 가지는 청소녀들의 특성, 집단적 관계맺기의 문제,

기존에 부정시 되었던 팬클럽 문화등과 연관지어 이들의 행동력, 움직임에 대해 생각해볼수 있을듯.

-> 이후 이들이 촛불시위의 '아이콘화'. 촛불소녀가 되다.

 

- 이후 시위의 달라지는 양상.

 대학생 및 직장인,386의 등장.

 예비군 부대. 넥타이 부대. // 반면 여성들은? "유모차 부대?"

 

- 예비군

 '군복'의 이중성: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저항하는 급진성과 전복성. 

동시에 보호라는 권력관계의 발동과 배제, 젠더정치가 맞물림.

촛불소녀에 대비되는 예비군 오빠가 됨.

 

2. 새로운 시위문화의 등장

- 전근대적 대통령과 탈근대적 시민?

  기존의 시위 문화를 바꾸고 있는 시민들.

 

- 온라인

 

- 노동운동에 시사해줄 수 있는 점

  사회운동의 레퍼토리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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