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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여러 가지 기대 속에 영화 <색, 계>를 보게 되었다. 제일 처음 줄거리를 보고서는 한국영화 <쉬리>를 막 떠올렸는데, 암울한 시대 배경에 미인계 작전이 눈물 짜는 사랑이 되는 ‘뻔한’ 스토리가 아닐까, 거기다가 ‘무삭제’ 개봉에 양조위 불알 얘기에..어찌나 광고를 하던지(^^), 보기 전에 참 많은 ‘선입견’들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의 느낌은, 첫 번째로 뻔한 예상들을 ‘깨는’ 영화라는 것, 두 번째로는 그래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고민지점들을 많이 남겨준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엘리베이터에서 “그러니까 결국 남자가 이긴 거잖아”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이 얘기를 듣고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영화 제목 <색, 계>의 ‘색’이 만약 어떤 식의 (경)‘계’를 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라면, 결국 이 색계는 양조위가 아니라 탕웨이를 흔드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는 이 영화가 탕웨이의 색, 계로 읽혔던 것이다.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영화 초반 홍콩에서의 탕웨이(왕치아즈)는 내내 어색하고 서툴기 짝이 없었다. 노라의 인형의 집을 공연하겠다던 여자애들에게 “(그런 부르주아적 연극이 아니라) 애국적 저항연극을 해야 된다. 연기는 투쟁의 일환이다”라고 말하던 그 남자애는 물론이고, 그렇게 어설프게 설득되는 과정. 그리고 “남자라면 죽은 오빠를 대신해 싸웠을텐데, 중국을 구하자!!”라고 외치던 왕치아즈의 대사며 연기는 완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어설픈 아마츄어 킬러들의 ‘살인’ 장면만큼이나, 그 장면에 아연실색하며 도망간 왕치아즈는 마치 자신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에 반해, 이 영화에서 막부인은 왕치아즈가 수행하고 연기하는 느낌이 아니라,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처럼 잘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점이 참 흥미로웠다. 원래의 탕웨이인 왕치아즈의 모습을 관객인 우리들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원래’가 무엇인지, 무엇이 연기인지 실제인지, 의도인지 자연스러움인지 경계는 모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그 과정은 ‘낭만적 사랑’이라기보다는 ‘몸적 경험’, 사도마조히즘적 섹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다이아 장면이 나왔을 때 관객들이 웃은 것1)은 왜일까? 순수하고 로맨틱한 낭만적 사랑과는 배치된다고 생각되는 격렬하고 거친 섹스 이후에, “내가 지켜줄게”와 함께 제공되는 사랑의 상징, ‘다이아몬드 반지’라니, 뭔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비록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일이라 해도 고도의 문명의 양식을 창조한다고 듣고, 역사를 변화시킨다고” 숭고한 그 무엇으로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비넬리가 지적하듯이 이런 사랑과 “다른 종류의 감정적 애착-욕망, 욕정, 사회적 책무들과의 사이의 선은 매우 희미하다”.2) 이 영화 안에서는 양조위는 탕웨이를 사랑한 것인가? 욕망한 것인가? 탕웨이는 양조위의 어떤 면에 길들여진 것인가? 그 길들여짐은 사랑과는 다른가?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져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불분명한 사랑, 욕망, 욕정, 길들여짐, 친밀성 사이에서 ‘몸적 경험’들이 매개가 되고, 그것이 탕웨이라는 한 여자를 변형시키는 기제가 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사실 평일 낮에 백화점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본 덕인지, 내 주변에는 30대부터 60대까지 중 ․ 장년층 여성들이 굉장히 많았다. 실제로 아파트 촌 근처의 멀티플렉스 극장에는 평일 첫 회 관객이 150~200명에 이를 정도로 여성관객 비율이 높다고 하는데,3) 여러 기사에서 말하듯이 단지 ‘야하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그 ‘야함’이 중년 여성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주부들이 즐겨보는 아침 프로그램 ‘위기의 부부4)’ 편에도 매일 나오는 얘기지만, “우리 부부는 사랑이 없어”라는 언설 속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가장 큰 내용들은 ‘섹스’인 경우가 많다. 옥소리 ․ 박철 부부의 이혼공방에서 “지난 11년 동안 부부관계 10번도 안 해”5)라는 것이 큰 논란이 되었던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섹스리스 부부는 곧 사랑 없는 부부로 이해가 된다.  우리 사회가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끊임없이 유통시키고 재생산하는 구조이지만,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그 사랑이라고 믿는 것들에서 육체, 몸적 친밀성에 의해 구성되는 부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이미 ‘나의 순결성을 지켜 주는 꽃미남 왕자님’이 허구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년 여성들에게, 이 영화가 주는 매력은 분명 다른 어떤 것일테다.


  물론 이들의 s-m 섹스 관계를 보면서 참 많은 고민이 들었다. 특히 가장 처음에 섹스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대부분 그러했겠지만 ‘강간’ 혹은 ‘성폭력’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학(남성)과 피학(여성)의 구도,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들에 대한 불쾌감과 거부감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내 안에서 작동하는 도덕주의적 잣대 때문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양조위가 이 연기를 콘티없이 즉흥적으로 한 것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6), 양조위가 ‘이 대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너무나 몰입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항일인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언제 자신을 노릴지 모르는 인간들에게 늘 신경을 쓰고 있는 이 대장에게 섹스는 폭력과 고문, 불안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노골적인’ 폭력 앞에서 이것 때문에 너무 불쾌하거나 영화가 싫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최민식이 밥 먹다 말고, 자기 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뒤에서 섹스를 하는 장면과 유사하면서도 그 느낌이 달랐다. 최근에 본 성적 급진주의 논의의 영향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 유명한 클립체위 아니면 탕웨이가 양조위의 눈을 가리고 섹스를 하는 장면 때문인지, 이 장면도 하나의 s-m 퍼포먼스, 게임으로 이미지화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영화에서 ‘창녀’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장면은 두 군데가 있는데, 첫 번째는 ‘처녀’였던 탕웨이에게 함께 저항극단을 했던 친구들이 우리 중 여자랑 자본 남자는 하나뿐이라며 권하던 장면이다. 여기에 탕웨이는 “창녀랑?”이라고 불쾌해하며 되묻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조계지의 술집에 찾아가는 장면인데, 방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술취한 일본군들이 붙잡게 되고, 이 술집의 여주인은 탕웨이에게 사과하며 “우리 아이(게이샤)로 착각하셨나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양조위를 만나는데, 이 양조위에게 탕웨이는 당신이 왜 여기로 부른지 알고 있다며 “당신의 창녀가 돼 달란거죠.”라고 말한다. 그랬더니 양조위는 “창녀가 되는 법을 알기는 해?”라고 대답한다.  감독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난 참 이 장면들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의 ‘섹스 연습’ 앞에서 “창녀랑?”, 그 대사를 듣는 느낌은 참 역설적이었다. 사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원화한다는 점에서 창녀와 그녀 사이의 경계는 매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는 목적을 위해 ‘연습하는 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일본군들이 지나가던 탕웨이를 게이샤로 착각하고 붙잡았던 장면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닐까?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창녀를 언급하던 첫 번째 장면과 두 번째 장면의 사이에, 몸적 경험을 매개로 변화를 겪는 탕웨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포비넬리가 말하듯이 “친밀성의 진실은 우리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신호는 우리가 변형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일어남(happening)은 우리를 만든다.7)"는 사실, 버틀러가 섹슈얼리티란 나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나의 ‘몸’이 관계를 통해 부대끼고 그 자체가 나, 우리의 변형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 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그러나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은 이 모든 관계들이 매우 ‘불명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치아즈에서 막부인으로의 변화가 분명하게 그어진 선을 넘은 듯이 있는 것도 아니며, 스파이 임무에서 사랑으로 완벽한 전이가 일어난 것도 아니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 탕웨이는 양조위를 살려준 대가로 자신이 죽게 되지만, 내가 보기에 그를 살려준 이유도 옷깃에 붙어있던 약으로 자살하지 않았던 이유도 모두 분명치 않다. 순정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붙잡혀간 동료들과의 의리를 위해서인가. 내 생각에는 한 마디로 답할 수 없는 그 모호한 지점이 6캐럿 다이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구태의연한 멜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같다. s-m 섹스, 사랑, 친밀성, 애국, 스파이, 동지, 의리, 그 모든 것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기 때문에, 이 영화를 단순히 진부한 ‘사랑’ 얘기나, 격렬한 ‘섹스’ 영화, 어느 하나의 카테고리로는 완전히 해석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이 깨는 영화, 색, 계의 매력이 아닐까...



1) “6캐럿 다이아몬드 시퀀스에서 영화는 거의 코미디 수준으로 떨어진다.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두번 보았는데 일반 관객 시사회에서 이 부분은 커다란 폭소를 유발시켰다.”, 김소영, “‘색’은 ‘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씨네 21』 2007.11.15일자.


2) Povinelli(2006), The empire of love, p,178


3) “영화예매 사이트 맥스무비에 따르면 21일부터 집계한 ‘색, 계’의 관객 중 30, 40대의 비율은 57%로 지난주 박스오피스 1위인 ‘세븐 데이즈’의 39%에 비해 월등히 높다. 또 여성 관객의 비율도 62%로 ‘세븐 데이즈’의 54%, ‘식객’의 53%보다 높다.” 채지영, “ ‘옴 파탈’ 량차오웨이 덕에? ‘색, 계’ 100만명 돌파”,『동아일보』, 2007.11.27일자.


4) <생방송 오늘의 아침>이라는 프로의 ‘위기의 부부’ 고정 코너.


5) '디워 광풍'부터 '옥소리의 색,계'까지…2007 연예계 10대뉴스. 『마이데일리』.2007.12.03일자.


6) 김명신, “‘색, 계’ 왕조위-탕웨이, ‘충격의 정사신은 왕조위의 즉흥연기?’”,『한국경제』, 2007.12.07일자


7) Povinelli(2006), The empire of love,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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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삶

 

정해진 조합원이 치료를 받고 있는 한강성심병원은 화상전문병원으로 전기분과 조합원들이 가장 오기 싫어하는 곳이라고 한다. 2만 2900볼트 이상의 전기를 만지는 그들에게 화상은 매우 두려운 존재이며, 그 동안 많은 동료들이 화상으로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죽어가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해진 조합원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스스로 이 병원에 들어온 것이다.

-참세상 기사 중에서.

 

 

또 한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사람대접, 인간답게, 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

인간다운 삶을 위해, 삶이 아니라 죽음을 택하는 이들.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역설.

어떤 삶은 살만한 삶이고, 어떤 삶은 그렇지 못한가.

 

 

토요일 밤, 한강성심병원 앞에서 눈을 애써 땡그랗게 떠보려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핑-돌았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애도하고 슬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의 죽음은 나에게 어떻게 각인되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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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그리고 인정하기

 

   책장에 있는『우리 안의 파시즘』을 꺼내들었다. 책의 첫 장에는 2002년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처음, 대학이라는 공간에 들어와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한 스무 살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때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늘, 나 혹은 우리를 억압한다고 생각하는 '외부의 어떤 것'에 분노했다. 학교, 공권력, 자본주의...그러나 그 분노라는 것이 얼만큼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여성주의를 접하게 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폭력의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면서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하던 웃기는 인간들에 대해 화를 내고, 내 자신이 ‘그’ 인간들과 닮은 구석은 추호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과 다르니까, 그들은 나와 다르니까.

  

  그러나 그런 그들과 나 사이의 경계, 그 경계조차도 내 스스로가 그어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그들’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찬찬히 생각을 더듬어 보니,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떠올라 마음을 괴롭힌다... 

  

  여성주의를 알게 되고, 내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로 정체화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그 말을 나를 돌아보는 방법이기보다는, 남들을 재단하는 잣대로 사용해왔던 것 같다. 특히 ‘성폭력’이라는 의미도 그러했다. 나는 피해자가 될 수는 있어도 가해자가 될 수는 없다, 라는 생각이 있었고, 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내가 만약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는 ‘성폭력 가해자’가 된다면, 나는 내가 내세우는 ‘정치적 올바름’에 도덕적인 타격을 입고, 그로 인해 다시는 ‘여성주의자’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그런 무게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이 내 잘못을 지적했을 때조차, 그 상황을 벗어나기 바빴던 것이다. 잘못, 이라는 것이 내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나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할 만큼,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누구도 촘촘한 그물처럼 짜여 있는 권력의 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을 느낀다. 내가 ‘여성주의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한다고 해서 가부장제라는 억압의 바깥에 위치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렇게 쓰는 순간에도 이것이 나라는 사람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나, 성찰하지 않음을 변명하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라는 위치가 어떤 면에서 분명히 권력을 갖고 있고, 그 권력과 타협하고, 때로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는 인간이라는 점부터 인정하고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한 저항자, 혹은 완전한 피해자와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부터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특히 이것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장 벗어나지 못하는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 곳이 가장 느리게 변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떤 것에는 저항하는 인간이지만 어떤 것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어떤 것’ 조차도 내가 서있는 위치가 변하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FM이니 사발식이니 하는 대학의 문화에 저항하는 ‘당돌한 후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 역시도 학번문화와 ‘선배’라는 이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었다. 대학시절 4년 내내, 과에서 학회에서 세미나를 해왔지만, “하급생의 반발이나 문제제기는 그 하급생의 이론적 총명함을 판단하는 기준이거나 정해진 결론에 이르게 하는 도구였지, 진정으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권인숙,p.136)라는 말은 나에게도 아프게 다가온다. 

  

  나를 성찰한다는 건, 일차적으로 사회구조와 관계의 망 속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배우는 학생이지만, 가르치는 강사이기도 하며, 또 나는 누군가의 후배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배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에서 느끼는 ‘민감함’을 갖고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별다른 생각 없이 해왔던 많은 말들과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논리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과 실제로 이것을 돌아보고 ‘내 것’으로 인정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큰 것 같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쉬워도, 내가 속한 우리를 비판하는 것은 어렵고,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나를 떨어뜨려 보기는 더욱 어렵다. 보려고 하는 순간 잘못이 보일까 두렵고, 잘못을 보는 순간 비난 받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 비난이 자기 부정이 되어 고통으로 밀려들어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오류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기억이라는 것에는 함정이 있어서,

  그것은 처음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가도  어느 사이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놀게 된다.”

  (문부식,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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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돌(아)봄

7시반 기상, 8시반 집을 나섬, 9시 출근.

어제 남은 쿠키 몇개랑 커피를 들고, 컴퓨터를 켜고.

 

이렇게 해서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오늘은 포럼준비를 해야하고 기업현황을 조사해야하고

조금이라도 정신말짱할때 영문텍스트를 읽어놔야한다.

그리고 5시부터 10시까지는 학원에 몸을 묶어놔야 한다.

 

..

아무래도 이번주는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긴장을 많이 했던 탓인가, 너무 피곤한 것 같다.

 

어제는 참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후배가 술먹자고 연락이 왔는데도

정말이지 몸이 따라주지 않아 집으로 향했다.

 

왜 이러고 사냐.

 

 

..

어제 수업 중에 들었던 말 중에

성찰=돌(아)봄, 이라는 말이 있었다.

 

성찰은 자신을 돌보는 것, 그리고 돌아보는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불행히도 나는 둘 다, 그리 잘 하지 못하는 인간인 거 같다.

 

바쁘다,는 핑계가 이럴 때 참 유용하게 느껴진다.

바빠서 못해요, 바빠서, 피곤해서, 시간이 없어서 못해요.

 

그래도 무작정 모토로 삼아보기로 했다. 돌보자, 돌아보자.

이렇게 자기 최면이라도 걸어야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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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나에게 솔직한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난 참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오늘은 예전, 학교를 다녀왔다.

한 3-4개월 만인것 같다.

 

늘 먹던 밥집, 늘 가던 시장골목의 술집,

익숙한 간판과 길들-

 

구석,구석 많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슬퍼졌다.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겠는데,

그냥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사람, 때문일까.

무엇, 때문일까.

 

한때는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다.

 

 

하지만 되돌릴 생각을 하기엔

지나버린 시간만큼 다치고 아파했던 마음들이

나에게도 다시 절절하게 오는 것이다.

 

이미 익숙함 대신에

그 자리에 낯설음, 어색함, 공백들이 있기에.

 

 

아무것도 자신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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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길

잘못된 길(Fausse Route)

                                       by 엘리자베스 바댕테르(Elisabeth Badinter)

 

 

잘못된 길.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바댕테르는 남성성의 구성성과 그 과정을 기술한 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하다.

잠깐 딴 소리지만, identity를 '본질'로 번역한 건, 바댕테르의 책을 통째로 오독한거나 다름없다고 본다.

 

<잘못된 길>에서도 계속해서 주장하는 바이지만

바댕테르는 생물학적이고 본질주의적인 남성성/여성성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바댕테르는 미국의 급진주의 여성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기한다.

 

바댕테르에 따르면 이들이 남성지배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원인을 찾아들어갈때에는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자연스럽고 선천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남성성' 그 자체의 문제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이는, 반대편에서는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을 단일화해버리는 효과,

남성 가해자/여성 피해자라는 구도로 여성들을 피해자로 희생물로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본질론적인 남성성/여성성에 기반한 페미니즘의 분리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바댕테르는 본성에 호소하는 자연주의로의 복귀라고 비판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가능한가, 라고 다시 묻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차이에 기반한 평등'이라는 슬로건 역시

고정되고 대립되는 이원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리가라이와 같은 이론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특히 바댕테르는 폭력, 강간에 관한 이론과 실천으로 유명한 드워킨, 맥키넌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이들이 모든 종류의 성적 폭력을 강간과 동일시 한다던가, 이성애와 강간을 인과관계처럼 놓는다던가, 성관계에 있어서 '투명한 동의'가 가능한 것처럼 선전한다던가, 반 포르노 운동이 보수적 도덕주의와 결합하는 현상들에 대한 비판들이다.

 

바댕테르의 문제의식은 많은 고민들을 던져준다.

 

지금까지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젠더불평등의 문제로 곧바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김은실 선생님의 말대로 모든 여성들이 어느 정도는 젠더 연속선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각기 다른 맥락들을 젠더로만 환원할 수는 없다.

각각의 계급, 국가, 인종 등의 다양한 맥락을 삭제시킨

단수로서의 여성, 여성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매매/성노동 논쟁은 강제/자발, 폭력/노동의 대립각 속에서 이루어져 왔지만

무엇이 진실이냐, 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가 정의(definition)가 되었을 때, 경합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혀져버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성에 기반한 여성성,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것의 위험성, 딜레마.

 

그러나 바댕테르는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그토록 경계하고, gender의 구성성을 강조하면서도,

자연으로서의 sex,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듯하다.

gender와 마찬가지로 sex 역시,

남자, 여자, 성기를 기준으로 단 두 가지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

하늘이 내려주신 엄연한 '사실'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갖가지 정치적 담론 속에서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댕테르는 생물학,이라는 상수를 어디까지 인정하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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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 성폭력

은수님의 [성폭력의 개념화] 에 관련된 글.
은수님의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하여] 에 관련된 글. 

...성적 자기결정권이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자는 주장이라면, 피해자 중심주의는 여성의 누적된 차별을 고려하여 남성과 다른 대우, 즉 ‘우선적’ 고려를 주장한다. 하지만 남성과 같음을 주장하든, 다름을 주장하든 이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은 동일한 인식론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고려하는 데에서, 남성과 남성의 차이, 여성과 여성의 차이, 혹은 개인들 사이의 차이보다는 사회적 범주로서의 남녀간의 차이, 즉 젠더를 가장 우선적으로 사고한다. 둘째, 두 개념이 전제하는 인식자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적 제 관계로부터 초월적이며, 자신의 신체를 인식 과정에 개입시키지 않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 대체하더라도 동일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는 보편자다. 이러한 보편 주체가 인식하는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성별 권력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실’로 존재하게 된다. 셋째, 두 개념이 전제하는 인간은 자유주의(인본주의) 세계관에서 논하는, 사회 제 관계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투명하고 순수한 행위자다. 다시 말해, 모든 사회적 행위를 스스로 책임(‘선택’ ‘동의’ ‘결정’)질 수 있는 독자적인 주체라고 가정한다.


...자유주의 철학은 양성 간의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인 동시에 걸림돌인 것이다. 모든 여성은 여성이지만 동시에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성폭력 반대운동의 딜레마 중 하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성폭력 당한다”라고 하는 젠더 범주가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지만, 실은 여성주의가 극복해야 할 인식이기도 하는데 있다. 성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젠더 개념은, 한편으로는 여성을 성별 정체성으로 환원하여 모든 여성을 동질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가부장제에 기능적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객관성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객관성이 사회적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마치 여성주의가 가부장제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성주의는 기존 남성의 입장에서 구성된 객관성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객관성을 역사화 ․ 정치화함으로써 부분화 ․ 상대화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은 권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관계에 따라 변화 ․ 유동 ․ 이동하는 정치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모든 피해 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하며, 피해자의 경험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 같은 오해를 유발한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오히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 증명 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떠넘긴다는 사실이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피해 여성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개인의 경험과 말하기 실천은 기억들 사이의 경합과 선택의 결과이며, 따라서 경험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해석이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사실’ ‘진실’)은 여성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특정 사회의 언어체계에 그 책임이 있으며, 이는 성별 권력관계에 의해 구조화된다.


...개인의 몸은 개인이 소유한 자원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운동하는 행위자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가 상정하는 여성의 몸은 피해 당시의 경험이 ‘고스란히’ 기억된 객관적인 그릇, 공간으로서의 몸이며, 여성 경험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간주된다.

 

-정희진(2006),“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서”에서 발췌

 


 

 

그릇으로서의 여성의 몸, 몸/정신의 이분법을 넘어서,

여성들간의 차이, 젠더로 환원되지 않는 성폭력,

경험과 해석의 간극, 권력과 객관성..

성적 자기결정권이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임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동시에

또다른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과 맥락을 삭제시킨다.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주의가 넘어야할 인식...

성폭력에 대한 개념화..아 정말로 어렵다..

정의가 불가능한 것에서 나는 명확하게 정리된 답을 찾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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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7

오늘도 비가 온다...

 

 

언제까지 이렇게 비가 올까.

 

 

 

내가..

잘 하고 있는걸까?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보면

하나, 둘,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

앞으로 또 향해야 할 곳은 어디.

 

이런 생각들 하다보면

결국 그리워지는 건 사람인데.

함께 했던 사람

함께 고민하고 함께 울었던 사람

끝내 상처주었던 사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붙잡고

이렇게 곱씹고 있는 나.

참 못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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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말해야할까

돕헤드님의 [민중은 여성이다] 에 관련된 글.

당신의 고양이님의 [여기까지 읽고 나서] 에 관련된 글.

 

 

 

실은 마음이 쭉-불편했다.

navi가 '잘못'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부터.

나비 당고 돕헤드의 글을 읽고 덧글을 읽고

마음은 점점 더 답답하게 조여온다.

 

 

아-, 이건 아닌데, 내 글은 어떤 의미였나.

어디에서부터 말해야할까.

아주 많이 썼던 말들 중의 하나였던 '여성주의적이다' '반여성적이다'와 같은 말들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은 여성주의적이고, 저러한 것은 반여성적이며 성폭력이다, 라는 규정이

점점 더 체크리스트가 들어있는 매뉴얼처럼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이라는 걸 설명할 때마다

"이건 성폭력이야? 이렇게 하면? 남자가 하면 그렇고 여자가 하면 아니고? 넌 기분나빠? 난 아닌데"

말도 안되는 예시를 끝없이 들어가며 닥달해대는 이들의 속내를 알기에 짜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특정' 경험의 한 '단면'이 모든 성폭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연우의 글에 나온 것처럼  "내 경험을 우선시하고 강요하는 것이" 될까봐 말이다.

내 경험과 네 경험은 다를 수있고, 그게 자연스럽다.

모 힙합가수의 콘서트 장에서 그남들이 우스갯소리로 "땀 많이흘렸어요? 아래까지 다 젖었나?"

했을때 난 그 자리에서 희롱당한 것 같아 기분 더러워졌지만

함께 있던 내 친구는 완전 좋다고 소리지르면서 방방 뛰어댔다.

그 애가 '여성주의적'이지 않아서, 혹은 '여성주의 의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꼴통페미'여서, 너무 많이 '예민하고' '민감해서'가 아니라

우린 어릴때부터 다른 경험과 환경 속에서, 다르게 자라왔기 때문에

다르게 느끼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여자들'에게 억압적이라는 그 '보편성'에 기대어서만이, 그래서 '反여성적'이라는 말을 써야만이

그나마 나의 불편함을 얘기할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다.

그 맥락을 모르는 바 아니다. 아니 너무도 절실하게 이해한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그 불편함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

마치 성폭력,을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것마냥 생각하는 그 과정에서

또 누군가의 '다른' 경험들은, 목소리들은 삭제되었으니까.

 

제일 처음 돕헤드의 '사과문'과 반성,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나는 왜 자신의 글에 대한 설명이 없을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가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 이름 붙인 이유와 맥락이 정말로 궁금했다.

그는 창피하다고 했다. 하지만, 왜? 왜?

그는 반성한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을? 대체 무엇을?

그런 이야기들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피해'에 대해 '사과한다'고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궁금했고, 동시에 불편했다.

거한이 말했다시피

아무도 그에게 '가해자'라고 하거나, '우리 모두에게 사과하라'고 하거나

'활동중지를 하라' '블로그를 떠나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더 심각한 가해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

정확하게 말해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성에 타격을 입을까 두려워'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말이 나오자 동시에 그렇게 끝내버리는건,

제일 처음 문제제기 한 사람에게도, 그 글을 보았던 사람들에게도,

같은 글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했던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돕헤드 자신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른 많은 이들도 그랬지만, 나 역시도 그런 식의 종결을 바라지 않았기에 글을 썼다.

정말로 무언가 얘기를 한 연후에, '반성'이라는 단어를 써도 늦지는 않을거라고 

그래서 그런 글을 썼다.

그런데 내 글이 이 일을 수수방관하며 지켜보다가 훈수나 두는 것처럼 비춰졌을까

아니면 처음에 문제제기한 이들을 탓한 것처럼 읽혀진건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던 와중에 돕헤드가 새로 쓴 글, '민중은 여성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솔직히, 아주 솔직히, 실망스러웠고,화도 난다.

나, 혹은 다른 이들이 궁금했던 건,

"돕헤드는 어떤 정치적 지향을 가진 사람인가?"가 아니다.

내가 돕헤드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가 궁금하다고 썼던건

그가 어떠한 생각 속에서, 어떠한 맥락 속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였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남자, 라는 것만으로 글을 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들에 대해, 불편함을 제기한 이들에 대해, 자신의 글에 대해 침묵한채

자신의 세계관이 어떠하고, 자신의 정치적 지향성이 어떠한가만을 길게 쓰고 있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사람의 언행을 곧 페미니즘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때때로 그/녀는 누군가에게 불쾌감이 되고 성폭력이 될 수 있다.

중요한건 -주의자,-이스트는 그래서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그럴리 없다는,

그 완전무결한 관념부터 벗어던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화가나 버렸다. 자전거에 비유하는 그 대목에서.

돕헤드가 만약 정말로 남성집단이라는 괴물, 남성성이라는 동일체로 보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생각을 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말했어야 되지 않나.

자신의 욕망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소유하려는 다른 남성들의 욕망과 어떻게 다른지,

여성인 내가 만약 내 자전거에 그런 이름을 붙이고 자위 혹은 여자애인과의 섹스를 상상하는 욕망과는 어떻게 같을 수(아니면 다를 수) 있는지 말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러나 돕헤드는

"나는 민중이고, 여성이며 이 차별과 억압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주체입니다"라고

선언하듯 말하고 있었다.

왜 돕헤드는 민중을 게이가 아닌, 장애인이 아닌, 흑인이 아닌, 비정규직이 아닌 여성이라 생각했을까.

그가 생각하는 민중이, 그가 생각하는 여성(성)이 무엇이길래. 여성이라는 젠더는 어찌하여 획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차를 모는 운전자들을 개별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왜, 어찌하여 민중은, 여성이라고 명명했던 것일까?

나는 자전거 운전자라는 약자, 소수자, 억압받는 자들의 영상들이 '여성'이라는 단일한 집단으로 투영되는 것이 싫다.

그래서 나는 민중은 여성이어서는 안된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여성,이 그렇게 투명한 주체로 존재하는 건,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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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궁금증

당신의 고양이님의 [어떻게 그는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나?] 에 관련된 글.

돕헤드님의 [성폭력 가해를 반성합니다] 에 관련된 글.

 

오랜만에 컴터를 켜고, 블로그에 들러서, 뒤늦게 글을 확인했다.

뭔가...'개운하지 않은' 감정이 남아, 포스팅을 해본다.

 

"성폭력 가해를 반성합니다."

 

글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돕헤드는 무엇을 '성폭력 가해'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걸까?

나는 궁금했다.

여기에는 어떤 비꼼도 개인적인 원한도 없다.

그냥 정말 궁금하다.

 

나는 원문을 읽지 못했다.

당고의 글에서 그 내용의 일부로 보이는 글을 발견했을 뿐이다.

 

내가 본 그 글에선,

어떤 이유에서 돕헤드가 자신의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어떤 이유에서 돕헤드가 클리토리스 자전거를 타며 짜릿함을 느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궁금하다.

"저는 지금 너무나 창피하고,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그런 무감각한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자신에 대해 매우 화가 납니다."라고 말하는 돕헤드가

한편으로는 "여성의 성기를 소유하려거나 또는 그것을 도구화하거나 또는 대상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저는 자신합니다."라고 말할때

진짜 속내가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내가 느끼기엔, 돕헤드가 사과한 이유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많은 분들께서 성적 수치심을 느꼈고, 몹시 불편했으며, 강하게 분노했고, 어이없고, 많은 짜증을 느꼈고, 성폭력을 받은 느낌이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돕헤드가 

자전거에 이름을 붙일때, 짜릿함을 느낄 때, 그것을 글로 쓸때

어떤 맥락이었는지, 어떤 이유였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정말로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좀 더 세세하게 알고 싶었다.

모호하고도 어려운 '-되기'라는 단어 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건 내가 만약 내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란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탈때 짜릿함을 느낀다면

그 감정과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결국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돕헤드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과정이 또다른 '가해'가 될까봐,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자신이 더 심각한 '가해자'가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는 것이 '2차 가해'가 될까?

 

그 '불편함'을 기준으로 볼때, 나는 여자이지만, 그 글이 그리 불쾌하고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른 불편함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오고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모든 여자'가 잠재적 피해자처럼, 억압받는 자인것 마냥 여겨지는게 싫었을뿐이다.

나는 사실 에로틱이라는 단어에도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클리토리스는 에로틱한 부위가 아닌가? 물론 내 감정은 하나의 의견일뿐이다. 

생물학적 남성은 그 부위를 에로틱하게 느끼면 안되는가?

그 감정을 비판받아야되는건가, 아니면 그것을 소유물 자전거에 빗대서 비판받아야 되는 건가,

아니면 공개적인 블로그에서 말해서 비판받아야 되는건가.

 

 

그래서 나 역시도 '성폭력이다/아니다'라는 규정보다는, 아니 규정이 있다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100% 순결할 수 없으며,

때때로 공모하고 협상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성찰과 소통을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차적으로는  '불편함'이라는 단어 이외에 언어화할 수 없는 답답함을 지닌 이들의

풀어놓기,가 중요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또,

돕헤드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반대편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심리도 궁금하다.

특히 그가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남성'이라고 말해지는 이라면 말이다.

그런 이유로 그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성폭력이라는 규정 자체가 매우 다층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거라면

그 맥락 중의 하나는 그가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상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중의 하나는

역시 문제제기한 이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야기 구조 속에서 '성폭력'이라는 규정이 생기면서

따라붙는 효과들이다.

(개인적으로, 당고 글은 "이 행위에 여성주의적인 명명이었다고 생각할 만한 맥락이 있는가?"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살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규정함으로써 가져오는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

그것은 대부분 남성/여성이라는 생물학적 대립항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해자의 사과문 혹은 징계-퇴출.

이것은 '그나마' 잘 해결되는 케이스로 여겨진다.

 

나 역시도 나의 경험들을 되돌아보면서, 후회가 남았다.

당시에는 분노, 좌절, 이런 감정들에 휩싸여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내가 못했던 걸 다른 이들에게 요구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는 없었을까.

불편함, 이 누군가를 낙인찍는 기준이 아니라

말하게 하고, 듣게 하고, 돌아보게 하고, 대화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그리고 나서 '반성'이라는 단어가 나와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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