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골든 햄스터

  • 등록일
    2009/02/02 10:27
  • 수정일
    2009/02/02 10:27

I

어제 어느 할인매장 지하에서 골든 햄스터를 봤어.

노오란 털이 송송 까만 눈이 수박씨같은, 고급 3D ,애니메이션(라따뚜이 같은?)에서 갖 튀어나온 듯한 이질적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런 귀여운 아이였어.

만져주고 싶은 도닥여주고 싶은 뽀뽀해주고 싶은 그리고 가지고 싶은,

내 뜰에 풀어 키우고 싶은, 물주고 싶은, 먹을 걸 주고 똥을 치워주고 싶은,

이야기해주고 옹알이를 듣고 싶은...

귀엽고 이쁜 것에 대한 단순한 욕심인지, 아니면 생명을 키우고 싶은 모성인지.

 

II

요즘, 남아공출신의 Coetzee('쿠시에'라고 읽나봐)의 Age of Iron에서 등장하는

암에 걸린 늙은 주인공 백인 여자가 남아공의 흑백분역정책 속에서 살해당하는

흑인 아이들의 죽음을 보고 "I"를 반성하는 대목이 나오지. 

부유하고 포근한 안락함 속에 살아가지면 사실은 분열되고 고립되고 죽었으나 살아있는,

살아있지만 죽지 못하는, 인형의 머리처럼 텅빈 "I",

분열된 존재의 이면에는 노예노동과 흑백차별이 존재하고 있어.

안락한 I 는 원래 그런 존재라는 거지. 날때부터 그림자들을 끌고 다니는 밝음.

어릴때 엄마 손에서 걸음마하며 찍은 사진 한장을 놓고

"사진에 찍히는 순간 삶은 내 속에서 빠져나가버렸다"고 얘기하는 대목이 있어.

그리고 삶은 영원히 사진의 프레임 밖에 존재한다고.

아직 책을 다 읽진 못했지만, 그 프레임 밖이 의미하는 건 짐작은 가. 하지만 아직 규정하진 않을래.

규정하는 순간 그림자는 프레임 밖은 또 안이 되고 밖은 계속해서 생겨나니까 양파껍질처럼...

 

III

왜 햄스터의 얘기가 남아공의 늙은 여자의 한탄으로 이어지는 걸까?

서서히 느껴지는 '나'라는 껍질의 가벼움/혹은 무거움 때문일까?

삶의 무거움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비겁하고 자신감이 없어서,

삶의 가벼움을 풍선처럼 머리에 인 채 살아가기엔 발이 땅에 안 닿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