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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1, 2>, 새만화책 2008
민주에게.
얼마 전에야 네 이름의 한자가 民主라는 걸 알았어. 주 선생님 - 그리고 네 아빠^^ - 께서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열기가 그해 12월 노태우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어이없는 결과를 낳는 것을 보면서, 네가 살아갈 세상은 더 “민주”이길 바라는 마음에 이듬해 태어난 너에게 “민주”라는 이름을 붙이셨다는 거. 붙여놓고 보니 “주민주”가 되어 혹시나 애들한테 놀림 받지 않을까 걱정하셨다는 말씀을 덧붙이시더라. 그리고 다행히 네가 네 이름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아 기뻤다는 말씀도.
뭐… 아버지라고 해서 딸의 삶을 속속들이 다 아닌 건 아닐 테니 과연 네가 네 이름을 사랑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가 네 ‘이름답게’ 살아간다는 건 요 몇 년 간 너를 지켜본 나로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뭐랄까, “민주가 아니면 살지 않겠다.”라는 각오를 보았달까. 1년이 넘도록 다니던 고등학교의 비민주적인 학교문화와 인권침해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자퇴하던 그 날의 네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어. 마치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사진 속에서 닭장차에 올라타 환하게 웃음 짓고 있던 운동가의 모습처럼,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내 삶의 주인이다.”는 삶의 충만함을 네게서 느꼈었단다.
하지만 그런 충만함의 전에도, 후에도 삶은 결코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겠지. 너 또한 네가 접한 세상의 온갖 모순들 속에서 때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는 것도. “그땐 정말 괜히 애 이름을 ‘민주’로 지었다고 많이 자책했어.”하시던 주 선생님 목소리 속에선 너에 대한 자랑스러움 한편에 있던 걱정과 회한을 느낄 수 있었단다. 나 역시도, 민주만큼은 훌륭한 삶의 저항을, 그 충만함을 표현하며 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짧은 삶 속에서도 자유와 해방을 구가하며 살려 할 때마다 부딪혔던 삶의 고단함을 기억해. 결코 삶은, 적어도 자유롭고, ‘민주’로 살려는 우리의 삶은 단순하지 않더라.
펑크소녀 마르잔
얼마 전에 <페르세폴리스>라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을 봤어. 이란 출신의 프랑스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마르잔 사트라피가 20대 초반까지의 자신의 삶을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담담하게, 그리고 때론 매우 슬프게 들려주는 그 이야기 속에서 난 민주의 모습을 살짝 떠올렸단다. 그녀 역시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주인이기 위해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거든.
애니메이션이 빠른 속도로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면, 이 영화의 원작 만화인 <페르세폴리스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페르세폴리스2 - 다시 페르세폴리스로>는 좀 더 깊이 있고 차분하게 그녀의 삶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 나와 네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상을 돌아볼 기회를 주었단다.
“이란의 현대사”라고 한다면 사실 우리에겐 매우 생소할 거야. 사실상 우리는 어디서도 이란의 역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 게다가 이란은 우리가 “이슬람”하면 쉽게 떠올리는 “아랍”과도 다른 언어, 다른 정체성을 가진 나라이기도 해.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위해 꼭 이슬람과 이란에 대한 많은 지식이 필요하진 않아. 마르잔 스스로가 들려주는 이란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의 삶을 느끼고 함께 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거라 생각해. 그리고 그녀의 삶이 가진 특수함과, 또 그럼에도 우리의 삶과의 공통성을 함께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안락하고 부유한 삶, 혁명, 전쟁, 근본주의의 억압, ‘제 3세계’ 이민자의 삶이라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10대의 삶을 살았어. 79년 혁명 이전의 억압적인 왕정 밑에서 마르잔은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부모님을 둔 덕에 전통이나 규율에 매몰되지 않고 자라날 수 있었어. 하지만 79년의 혁명은 그 모든 것을 바꾸게 돼. 혁명은 처음에는 억압적인 왕정에 대한 저항이고, 또 해방의 사건이었지만, 그 혁명의 열매를 따먹은 건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성직자들이었거든. 결국 마르잔의 삼촌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 자유사상가들은 혁명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암살과 테러, 정치적 탄압 속에서 죽고 말아. 그리고 오히려 전 사회에 여성에 대한 억압, 종교적 헌신에 대한 강조 등 근본주의적 이슬람화가 진행돼.
그 와중에서 남녀공학의 프랑스계 초등학교에 다니며 자유롭게 자란 마르잔은 이전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어. 정부는 외국계 학교를 없애버렸고, 이제 모든 여학생은 차도르를 쓰고 다녀야만 했어. 오직 종교와, 조국에 대한 비뚤어진 애국주의만이 마르잔이 배워야 할 모든 게 되어 버려. 하지만 그런 억압은 결코 마르잔의 내면적인 삶까지 장악하지 못해. 그녀는 자유와 음악을 사랑하는 ‘펑크소녀’였고, 적어도 사적 공간만큼은 부모님의 보호와 사랑 속에서 자유의 삶을 키워갈 수 있었으니까.
점점 더 억압적으로 변해가는 이란 사회의 모습과, 또 한편에서 지극히 사적인 형태로 존속하는 나름의 ‘자유’의 모습에 대한 마르잔의 묘사는 무척 흥미로워. 난 그런 모습 속에서 비록 약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자유의 요구는 어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어.
하지만 80년대에 들어 시작된 이라크와의 전쟁은 갈수록 이란 사회를 근본주의와 파시즘으로 몰아넣게 돼. 그리고 마르잔이 더 이상 자신의 자유를 사적인 공간에서만 외치지 않고 공적인 자리에서 표현했을 때, 즉 이슬람 혁명 이후 정치범은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교사에게 “내 삼촌은 바로 이슬람 정권 하에서 사형 당했어요. 지금도 30만 명이나 되는 정치범이 있다는 걸 다 알아요.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마르잔의 부모는 그녀가 더 이상 이란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직감하고 마르잔을 빈(오스트리아)으로 유학보내기로 결심해. 그리고 그녀의 할머니(그녀 역시 사회주의 지식인의 아내이기도 했던)는 마르잔에게 “언제나 네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렴”이라는 그녀의 인생에 가장 깊이 간직될 충고를 해. 라벤더 향의 ‘가슴 내음’과 함께.(궁금하면 책을 꼭 읽어보렴.^^)
부모를 떠나, 또 다른 혼돈의 세계로
열네 살 나이에 그야말로 ‘홀로’ 이방의 세계에 던져진 마르잔. 그녀 앞에 펼쳐진 세계는 “자유 서방”이었지만 그녀는 결코 자유롭지만은 않았어. 아마 어쩌면 자유란 외부의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적인 충만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더 이상 차도르를, 종교생활을, 조신한 윤리를 강요하는 사회는 없었지만 이제 마르잔은 아무도 이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런 사회 속을 좌충우돌하면서 걸어가. 그녀는 그 곳에서 쉽게 가난한 나라의 불쌍한 아이로 여겨지거나,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인종차별 속에 놓이기도 해. 게다가 한편으로 그녀는 부모가 없는 곳에서 홀로 정신적, 육체적인 성장기를 맞이해야 했어. 2권의 전반부는 빈 시절에 마르잔이 겪었던 문화충격들, 외로움, 혼란, 하지만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공부하며 혁명을, 사랑을 고민하던 삶을 그리고 있어.
마르잔은 특히나 자신이 빈에서 만난 비주류의 친구들 이야기를 우리에게 많이 들려줘. 그녀가 다른 친구들보다도 아나키스트, 혁명주의자, 동성애자, 성해방주의자 등의 친구들과 어울렸던 건 그녀 역시 빈에서 비주류였기 때문이었을 거야. 물론 그 우정도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야. 마르잔은 그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정체성 - 이란인으로서 라기 보다는 ‘마르잔’으로서의! - 을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했어.
하지만 이제 그녀 곁에는 그 모든 과정을 따뜻하게 지켜봐주는 부모님은 없었어. 혼돈 속에서 때로 그녀는 연애에 푹 빠지기도 하고, 또 그 연애의 실패로 방황하다 결국 이란으로 돌아온 후 우울증을 견디다 못해 고통 속에서 자살을 시도할 만큼 깊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해.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느낀 것은 그런 시간들이 결코 그녀에게 시간낭비가 아니었다는 거야. 그토록 힘들게 비주류의 삶 속으로 내던져진 마르잔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런 삶의 경험은 그녀가 나중에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있으면서 억압적인 주류 이란 사회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해.
이란으로의 귀환, 그리고 다시 떠남
결국 이란으로 돌아오게 된 마르잔은 몇 달 동안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긴 하지만 결국 다시 일어서게 돼. 그녀의 가족들 -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깊은 인상을 내게 남겨주기도 했던 - 은 이제 그녀를 어린아이 마르잔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받아들이고, 그녀 역시도 이란 사회 속에서 작은, 그러나 커다란 삶의 저항을 시작해. 그녀가 돌아온 이란은 전쟁 이후로 더욱 피폐해졌지만 한편에선 경제가 복구되며 근본주의 이면의 사적인 자유공간이 커가던 시기이기도 해. 하지만 그런 사적 공간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공간이었고, 언제든지 이슬람 정권의 ‘혁명 수호대’에 의해 가혹하게 탄압받을 수도 있는 그런 살얼음판 같은 공간이었어.
하지만 마르잔은 그런 사적 공간과 이슬람 사회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예술의 자유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이슬람의 권위주의에 항의하기도 하고, 자신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학생들 앞에서 말함으로써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처음에 그녀는 자신을 매우 소수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여전히 그 사회에서 자유를 구가하길 원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 함께 예술을, 삶의 즐거움을 고민하기도 해. 물론 그녀의 많은 실수들, 좌충우돌들도 이 책에선 솔직히 그려져.
어쩌면 가장 큰 실수였을지도 모르는 “레자”와의 결혼과 그 결혼의 실패, 그리고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대형 예술 프로젝트의 좌절 이후 결국 마르잔은 프랑스로 다시금 유학길에 올라. 물론 이제는 어린아이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한 사람의 자유인이 되어. 하지만 이 만화의 마지막은 “이날 저녁 이후 운좋게도 나는 1995년 3월 이란 새해 때 한 번 더 고향을 방문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1996년 1월 4일에 돌아가셨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랐다.”라는 슬픈 고백으로 끝나긴 하지만.(에니메이션에선 마르잔이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공항으로 향하다가 이란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는 장면으로 끝나.) 삶은, 때로 선명하게 “자유”를 말할 때 조차도 결코 단순하진 않은 것일 테니까.
네 이름이 네게서 이루어진 것처럼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입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촛불집회에 나가는 민주를 보면서 나는 마르잔을 많이 생각했어. 물론, 그녀가 겪었던 삶의 질곡들, 또 경험들은 우리의 그것과 같진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녀의 삶을 그저 바깥에서 지켜보며 놀랍고, 장하고, (때론)불쌍하다고 생각하기만 한다면 아마 우린 이 책을 하나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일 거야. 20여년의 시간을 넘어서, 또 그녀의 삶의 공간과 우리의 삶의 공간을 넘어서 우리가 마르잔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건 우리 역시도 그녀처럼 복잡하고 억압적인 삶 속에 던져져 있고, 또 그럼에도 내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자유롭다”, “민주주의적이다.”라는 말을 강박적으로 해야 할 만큼 사실은 그 이면에 억압을 숨기고 있는 사회일지도 몰다. 이란의 이슬람 정권이 이슬람의 규율로 사람들을 옥죈다면, “자유롭다”고 하는 한국 사회는 오히려 ‘자유’로 포장된 온갖 경쟁의 논리, 적자생존의 논리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걸지도.
민주가 그토록 고등학교를 다니며 억압을 강하게 느꼈던 건, 그런 논리가 어떤 포장도 없이 날 것으로 다가오는 공간이 학교이기 때문인 건 아니었을까. 게다가 요즘은 더한 것 같아. 일부 우수한 학생(혹은 부유한 학생)에게 더 좋은 학교를 선택할 ‘자유’, 더 좋은 학원을 선택할 ‘자유’를 주고, 나머지 모든 학생들을 배제해버리는 최근의 “학교 자율화” 조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하지만 학교 밖에서도 그런 삶은 계속 펼쳐질 거야. 민주가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그 공간은 결코 ‘자유의 공간’은 아닐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 이미 민주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듯이 - 그 어느 순간이건 자유는 외부의 조건에 의해 주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해. 마르잔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썼듯이 자유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내적인 충만함이고, 그래서 매 순간 너에게 다가오는 삶에 진지하게 맞설 때만 가능한 것일 테니까.
우리의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아. 하지만 분명한 건 민주는 이 세상 속에 있고, 민주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앞으로도 그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일 거야. 그 모든 삶 가운데서 때론 세상이 너를 슬프게 한다 해도, 언제나 민주가 ‘민주’로 있기를, 그래서 “네 이름이 네게서 이루어진 것처럼,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할게.
민주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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