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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목적"

앞으로 세 달 안에 석사 논문을 탈고해야 한다. 일단 가장 첫머리에 들어가는 "연구의 목적"만 작성된 상태..ㅡㅡ;

논문 제목은 일단 잠정적으로 <스피노자의 '다중' 개념의 민중신학적 함의>로 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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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일. 촛불이 켜졌다. 처음에는 몇 명의 청소년들, 특히 ‘소녀들’ 뿐이었다. 그러나 촛불은 이내 서울 한복판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그네들이 “희미한 메시야적 힘”(발터 벤야민)으로 도래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 논문은 이 작지만 커다란 힘의 분출 앞에서 기획되었다. 어떠한 대의도 거부하며 자발적으로 분출한 집단적 역능 앞에서 무언가 신학이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지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의와 주권의 거부, 집단적이면서도 자율적인 자기 통치, 아래로부터의 협력과 소통이라는 촛불의 모습은 단지 정치의 영역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위로부터의 구원을 그 중핵으로 하는 정통적/대중적 기독교 신학의 변화의 필요성 역시 제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민중신학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신학의 변혁을 사유하려는 실험이었다. 70년대 이후, 체제에 의하여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자기-초월, 자기-구원으로 나아가는 민중의 해방적 투쟁을 민중신학은 증언해왔다. 민중신학자에게 구원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전태일, 광주의 시민군들, 87년의 봉기 속에서 그들은 “구원사건”을 읽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촛불봉기가 한참 상승해 가던 때에도, 또 7월 중순 이후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도 이 사태를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개입하는 글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하나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즉 오늘날 새롭게 변해가는 민중을 해석하고 증언할 능력과 해석틀을 잃어버렸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


이러한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잃어버린 현장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민중 억압의 현장, 민중 해방의 현장과 민중신학자들 간의 연대를 회복하고, 현장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민중신학을 위한 동력을 확보하는 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새로운 대중의 모습을 적실하게 설명해주는 사회과학 담론을 채용하여 민중신학적 사유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길이다. 이 두 방법은 민중신학의 시작에서부터 사용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은 민주화 운동과 민중운동, 통일운동이라는 현장에 연대함으로써 그 동력을 확보하였고, 또한 당대의 민중론을 비롯한 사회과학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 적실성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이 두 방법과는 구분되는 다른 방법을 통하여 주어진 위기를 극복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2008년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대중적 힘의 분출은 그 공간에 참여하는 이들조차 그 정체와 향방을 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경험이었으며, 사회과학 이론가들 역시 쉽사리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세 번째 방법, 즉 민중적 힘의 분출을 그 존재론적 차원에서부터 철학적/신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오늘날 새롭게 대두한 민중 주체성을 분석할 하나의 틀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것은 어쩌면 현장과는 더욱 멀어지는 길일지 모르며, 사회과학의 입장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격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위기상황 앞에서의 해답은 때로 직면한 문제와 직접적으로 씨름하기보다는 잠시 숨고르기를 하며 우회로를 찾거나, 문제의 근본을 탐색하는 데서 떠오르기도 하는 법이다. 실제로 서구사회에서도 68혁명이라는 커다란 대중의 분출을 겪으며 기존의 사회과학이론과 정치철학이 그것을 적실하게 해석하거나 개입하지 못하자, 존재론적 차원에서 그 힘을 규명하려는 시도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바 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프랑스 철학”이라고 뭉뚱그려 부르곤 하는 프랑스의 탈구조주의 철학이나,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철학 등은 68혁명과 그 이후의 정치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어 온 사유라 할 수 있다. 최근의 사회이론이 이러한 철학적 담론으로부터 많은 자원을 얻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세 번째 길을 우리는 “민중신학의 존재론적 재구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논문은 이러한 기획을 위한 ‘민중신학의 친구’로서 17세기 네덜란드의 이단적 사상가 스피노자(1632-1677)를 호출하려 한다. 스피노자는 종교 개혁 이후 급속도로 카톨릭화되어 이미 17세기에는 하나의 “주권적 신학체제”로 기능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교회와, 또 칼빈주의와의 공모 속에서 “신학적 주권체제”의 형성을 모색하며 군주제로 향하고 있었던 오란녜 가문에 맞서, 인간주의(인문주의)적이며 민주적인 철학과 신학의 길을 모색한 사상가였다. 스피노자는 오랜 기간 동안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근대 초기의 합리론 철학자로, 범신론자로, 혹은 홉스 류의 사회계약론의 아류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일단의 프랑스 철학자들 - 들뢰즈, 게루, 마트롱, 마슈레, 발리바르, 네그리 등 - 에 의해 혁명적인 정치철학자로 재발견되었다. 이들은 특히 스피노자 사상에서 “역능”(역량 potentia)와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 개념에 주목하여 “신”과 “양태”(정치철학의 용어로는 “다중” multitudo)의 관계를 재해석하였으며, 이것은 민주주의를 주권과 대의의 논리로부터 분리하여 아래로부터의 공통개념의 구성(혹은 공통-되기)을 통하여 신의 영원성으로 나아가는 다중(multitudo)의 운동으로 재정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논문의 본론에서는 스피노자의 완숙기의 세 저작인 『윤리학』, 『신학정치론』, 『정치론』에서 나타난 “다중 multitudo”의 모습을 분석하고, 신과 다중의 관계와 다중의 역량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민중신학의 민중론과 대화를 시도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안병무와 서남동의 민중론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민중신학 2세대와 3세대의 민중론을 비판적으로 재고찰함으로써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민중상황 - 특히 민중의 자율적 구성과 힘의 분출에 주목하여 - 앞에서 민중신학의 존재론적 재구성을 도모하려 한다.


물론 이런 기획에 대하여 “왜 하필 서구철학자인 스피노자인가? 민중신학은 그간 서구사상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사상에 대한 민중신학자들의 반대는 주로 “주객 도식”으로 대표되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60년대 이후 스피노자에 대한 재해석은 탈근대적 맥락에서 이러한 근대성을 극복하려는 사유 실험의 하나로 이루어져왔다. 그렇다면 오히려 민중신학과 스피노자 철학(의 재해석)은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공명(共鳴)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서구사상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는 민중신학적 사유와 실천을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상황(그것이 아시아적 상황이든, 한국 민중의 상황이든)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민중신학은 특수한 상황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사건’을 사유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상을 모색하는 신학이다. 안병무와 서남동을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의 많은 작업 속에서 우리는 한국적, 아시아적 상황을 넘어서는 보편적(혹은 이것을 서구근대적인 ‘보편’과 구분하여 ‘공통적’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인 사유와 실천의 기획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과의 대화는 민중신학을 서구근대적인 보편주의와도, 탈식민주의나 민족주의의 특수주의와도 결별한 ‘공통적인 것’의 신학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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