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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절. 17세기 네덜란드의 정치 ․ 사회적 상황

1. 17세기 네덜란드의 정치 ․ 사회적 상황


(1) 경제성장과 정치적 위기

스피노자는 1632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은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서 유럽 뿐만 아니라 남북 아메리카와 인도, 일본,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각지에 식민지와 교역지를 둔 바다의 지배자였다. 16세기부터 가속화 된 네덜란드의 경제적 급성장은 공화국 이전 도시국가들의 자유로운 상업적 교류 전통과 그에 기반한 사상과 학문 ․ 종교의 자유, 그리고 전제적 지배자인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는 정치적 자신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는 동시에 위기상황이기도 했다. 30년 전쟁 시기와 그 이후, 각국이 서서히 절대왕정과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가며 소위 “유럽의 균형” 체제를 모색하던 이 시기에 네덜란드는 끊임없는 외침을 당해야 했다. 1565년의 스페인에 대하여 독립투쟁을 시작한 “공화파의 반란” 이후로 네덜란드는 전쟁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시장과 식민 사업의 독점에 기초한 중상주의적 확장의 형태는 영속적인 전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1)


(2) 정무관파와 오란녜파

이러한 모순 - 안정적인 경제적 성장과 유럽의 위기 - 이 스피노자 시대의 격렬한 정치적 갈등상황을 결정지었다. 네덜란드의 17세기의 정치상황은 그야말)로 극단적인 정권교체의 연속이었다. 1618년, 1650년, 1672년, 그리고 18세기에도 연이어 발생한 커다란 정치적 갈등의 두 극은 정무관파(의회파)와 오란녜파(총독파) 였다. 이 두 파는 공히 ‘레헨트’라 불리는 네덜란드 특유의 상층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1565년부터 이들은 함께 스페인에 대항하여 싸운 동지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이 사실상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자 이들은 본격적으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이들은 같은 레헨트 계급이긴 했지만 종교적 성항, 정치적/정책적 지향, 지지기반에 있어서 큰 차이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정무관파는 주로 무역상, 법률가 등의 도시부르주아 계층에 기반을 두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지방분권, 민주주의, 공화제, 외국과의 화평 노선을 취하였고, 종교적으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파나 자유종파들2)에 속했다. 반면 오란녜파는 독립이전부터 홀란트의 총독을 배출하였고 독립전쟁을 주도한 군인 가문인 오란녜가를 중심으로 모였으며, 중앙집권, 총독제, 스페인 등 카톨릭 세력과의 항쟁 노선을 취하였고, 주로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이단에 대한 불관용을 주장하는 깔뱅파(고마루스파)에 속했다. 17세기의 네덜란드 공화국 시기에 오란녜파는 군대 지휘권과 “총독 stadouderd”의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고, 정무관파는 도시행정권 및 지방 재정관들 혹은 연합주 공화국 의회와 “재상 Grand Pensionnaire”3)에게 위임되는 공적 금융의 관리권을 보유하고 있었다.4)

 

총독과 의회라는 이중권력구조 속에서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은 평화 시에는 정무관파가, 외교적 갈등기에는 오란녜파가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았고 그 때마다 네덜란드는 커다란 홍역을 치루어야 했다. 1619년 당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던 홀란트의 재상 올덴바르네벨트는 아르미니우스파 목사들과 공모하여 쿠데타를 꾀했다는 혐의로 총독 마우리츠(오란녜 공)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그 후 오란녜파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고, 국가를 군주제의 방향으로 밀고가려 했다. 그러나 1650년경에는 상황이 바뀌어 그동안 무역과 은행업의 성장을 통해 기반을 닦은 정무관파가 오란녜파의 군주제 시도를 막고 정치와 군사, 총독직으로부터 오란녜파를 배제하는 법안을 성립시켰다. 이 때 활약한 재상이 스피노자의 강력한 후원자이기도 했던 요한 드 비트였다. 그러나 1660년대부터 오란녜파는 젊은 야심가였던 빌렘 3세(이후 영국왕을 겸하게 되는 윌리엄 3세)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선동을 일으켰고, 프랑스가 1972년 네덜란드를 침략하자 이들의 선동에 의해 커다란 대중 폭동이 일어나 요한 드 비트와 그의 동생[코르넬리우스 드 비트]이 군중에 의해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그리고 지난 시기보다 더 강력한 총독제가 복원되었다. 


(3) 정치갈등과 종교의 문제

이들의 갈등이 정상적이고 민주적인 정치과정에 의해 봉합되지 못하고 때로는 쿠데타와 폭동 등 극단의 폭력을 불러왔던 것은 이들의 논쟁이 단지 국사(國事)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16~17세기의 유럽 전체는 종교갈등의 문제로 커다른 전쟁을 수차례 겪고 있었고, 따라서 정치인들의 정책결정은 대중의 종교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네덜란드가 여타의 국가들에 비해서 매우 큰 폭으로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인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종교갈등은 수면 위로 떠올라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때문에 성직자들은 -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깔뱅 파 - 자신들의 교리와 교회의 확장을 위해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고,5)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정책을 교리와 신학을 통해 정당화했던 것이다.6) 아래 절들에서 우리는 이러한 네덜란드의 신학적 주권체제와 주권적 신학체제의 모습을 살피고, 이에 대항하여 살았던 스피노자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1)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 36쪽


2) 이에 대해서는 1절 참조


3) Grand Pensionnaire는 “법률고문”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직책은 처음에는 의원을 보좌하고 법령을 기초하고 의회의 운영을 원만하게 만드는 주의 관리에 불과했지만, 점차 정부의 지도자와 주의회의 의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홀란트 주의 재상들은 총독과 마찬가지로 연방의회의 투표권을 갖지 않았으나 회의의 운영에 정통하고 정무를 장악하여 네덜란드 7주의 이해관계를 조정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일국의 대표자로 외국의 사신을 접견했기 때문에 외국인은 홀란트 주의 재상을 그 나라의 수상으로 간주하였다. 17세기의 저명한 재상들로는 올덴바르네벨트와 요한 드 비트를 들 수 있다. 추영현.「스피노자의 생애와 사상」, 스피노자.『에티카/정치론』, 동서문화사, 역자해제, 421~422쪽


4)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36쪽


5) “이러한 불행의 사태의 원인을 고민하면서, 나는 그것이 교회의 목회를 작위로, 사제를 명사(名士)로 간주하는 대중적인 마음가짐에서 기인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성전은 교회 교사들 대신에 선동가들이 설교하는 극장이 되었는데, 그들 중 누구도 민중을 가르치려는 욕망에 고무되지 않았으며, 감탄을 끌어내고 반대자들을 공중 앞에서 비판하며 군중의 박수를 얻을 수 있는 새롭고 놀라운 교의만을 설교하는 데만 열심이었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큰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서문


6) “폭정과 그것의 버팀목의 최고 비밀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속이고, 그들을 조종하는 공포를 종교의 그럴듯한 이름으로 가려서, 그들이 마치 구원을 위한 것인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고, 한 사람의 허영을 위해 피와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영예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이보다 더 비참한 정책이 고안되거나 시도될 수 없다. 편견을 부여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시민의 자유로운 판단을 강제하는 것은 민중의 자유와 전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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