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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무지한 스승>(랑시에르)을 읽었다. 재미있었다.

 

읽으면서 내가 피아노를 어떻게 배웠는지 생각이 났다.

 

중학교 2학년 때 교회 반주자 누나가 전도사랑 싸우고 나갔다.

반주를 할 사람이 없었다.

 

체르니 30번 까지 마치고 무려 4년동안 피아노를 증오하면서 살았던 나보고

피아노를 치랜다.(그 시절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운 사람은 알 거다.

체르니를 40번까지 쳐도 코드 악보를 보며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전도사님은 나한테 무려 '기타 코드책'을 던져주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일요일마다

오른 손으로 멜로디를 치고 왼손으로 코드를 짚었다. 한 마디에 한 번씩.ㅡㅡ;

 

근데 이게 너무 재미있었다. 뭔가 내가 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도 어울리는 소리!

 

학원에서 아무리 피아노를 쳐도 알 수 없었던

'화성'이란 게 몸으로 익혀졌던 것이다.

 

6개월만에 난 교회에서 가스펠을 가장 잘 연주하는 반주자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난 악보를 잘 읽지 못함에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그럭저럭

내가 반주를 만들어서 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사람들은 그 때 나보고 천재냐고 했었다. 그 땐 잘 대답하지 못했다. 4년 쯤 후에는 천재가 아니라고 대답했다.(진짜 천재들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니라는 걸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뭐였던가?

 

나는 그저 다른 사람만큼의 지적 능력을 발휘했을 뿐이다. 누구나 "모국어 습득"을 통해서 증명한 그 평등한 '지적 능력' 말이다.

 

이게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의 내용이다. "자기가 하나도 알 지 못하는 것이라도 우리는 가르칠 수 있다!" 나에게 기타 코드책을 던져준 그 전도사님처럼 말이다. 그분은 단지 기타코드 책을 던져주고, 매 주, 반주를 시켰으며, 틀리면 혼을 내기도 했다!(지가 뭔데!ㅡㅡ;)

 

 

생각해보면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이 다 이런 식으로 생긴 거다.

 

인터넷에서 논쟁하다 무참하게 깨지자, 글 쓰기를 아둥바둥 익혀야만 했고,

또...(음. 별로 갖고 있는 능력이 없구나.ㅜㅜ)

 

암튼 학교에서 배운 게 없다.

 

랑시에르는 '교육'은 절대로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 수 없다고, 지식인과 대중,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해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교육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가르침과 배움, 그리고 그것을 통한 해방. 그것은 스승이 '무지할 때' 가능하다.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가 스스로 자신의 지능을 발현하여 해방될 수 있도록 상황을 강제하는 이일 뿐이다.

 

아래는 한 세미나에서 썼던 발제문.

 


지능의 평등과 해방


김강기명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 계통의 한 토론방에서는 종종 아래와 같은 불만을 토로하며 필진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편지풍파를 일으키곤 한다.


“여기 계신 분들은 그저 지적 유희를 즐길 뿐 순수하게 신앙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군요. 예수님이라면 그런 식으로 어렵게 말하고 사셨을까요? 진짜 훌륭한 글쟁이라면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게 글을 써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잘 이해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짜증이 나는군요.”


이러면 왠지 - 특히 기독교 계통의 토론방이니까 더더욱 - ‘약자’인 그 사람을 이해해주고, 그 사람 말대로 해야만 할 것 같은 아주 짜증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갑자기 사람들이 서로 “나 그렇게 어려운 사람 아니에요.”라고 커밍아웃하며 화기애애한 글을 남기는 그런. “지적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을 향해 저런 식의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는 단지 단 한치도 바뀌지 않기를 원할 뿐이다. 무식한 것은 나쁜 게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신앙의 표지이고, 책상머리의 지적 유희와는 다른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인의 덕목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지식인들을 싫어하고 무식을 예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진리를 이야기해주는 지식인”들에게 열광한다. 예속, 예속, 예속.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이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는 지식인들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진리는 쉬워야 한다!”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진리가 쉽다는 것을 망각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진리란 게 있다면 그것은 인간 모두가 지적인 능력에서 평등하다는 것, 모두가 자기의 해방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 외에 진리는 없다. 따라서 공부란 스승이 가진 어떤 지혜를 제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승은 제자를 공부해야만 하는 상황 속으로 강제할 뿐, 제자는 스스로 자신의 지능을 책의 지능과 연결지으며, 그것을 전체와 연결지으며 해방으로 나아간다.


“강제는 나쁘다! 우리는 아이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눈높이 교육을 해야 한다.” 이것은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300년 동안 그 시대의 진보주의자들을 통해 반복되어 왔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주장이 오히려 영원히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든다고, 영원히 인간을 스승과 제자, 지도부와 대중으로 규정짓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스승의 지능과 제자의 지능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연결되어야 할 것은 스승의 의지와 제자의 의지이다. 무지한 스승 - 이를테면 아주 약간의 지식만 있는 노동계급의 가장 - 도 자녀를 철학자로 만들 수 있다. 공부를 성실하게 계속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상황을 만들어준다면 말이다. 지능의 평등을 가정함으로써 인간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나눔(자리/몫의 분배)을 거부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나도 그 시인의 말에 감동할 수 있고, 그 학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음악가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나는 인간이니까.” 이런 존재가 랑시에르가 바라본 프롤레타리아였다. 



따라서 앞서 예로 들었던 무식을 찬양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사실은 위계를 사랑하고, 불평등을 예찬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게으른 사람이다. 자신이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고, 껴들어서 토론할 수 있는 곳에서 깽판을 치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사제들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위로와 지도와 가르침을 청한다. 게으르지 않다면 우리는 해방될 수 있다. 지적인 유희를 마음껏 즐겨야 한다.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식의 고상한 삶”은 어디에도 없다.


9월부터 구로의 공부방 청소년 인문학 프로그램 “문방사우”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다. 처음에 오야붕의 이 기획을 보았을 때 기겁을 했다. 아니 나도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이 책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라는 말인가? 가르칠 수 있단다. <무지한 스승>의 논의에 따르면 내가 가르쳐야 할 것은 <짜라투스트라는…>의 내용이 아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하게 하는 것, 니체의 저 난해한 책을 읽도록 하는 것, 어떤 부분은 외우게도 하는 것, 그걸 가지고 무엇이건 글을 써보도록 하는 것, 서로 성실하게 평가해주도록 하는 것, 그것뿐이다. 아이들이 이 책을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던 그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문방사우가 시작되면서 많은 매체들이 보도를 했다. 지극히 ‘진보주의적’인 시각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고전을 가르쳐서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 좋은 선생님들” 그들이 말하는 ‘스스로 일어난다’는 것은 그저 정상적 삶의 기준에 미달하지 못하던 것에서 정상적 삶의 기준에 합당한 인간이 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빈부격차를 넘어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좋은 지식인들’. 언론은 문방사우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문방사우의 목적은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사회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마땅히 차지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는 이 사회의 어떤 몫,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의 한 위치에 도달하도록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문방사우는 그런 몫이나 위치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행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미 평등하다. 따라서 언제나 우리는 더 알 수 있고, 더 할 수 있다. 누구나. 그리고 이 지적 해방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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