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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질문과 응답.

 아래 글 "유물론, 예수, 폭력"에 달린 베땅이 님의 질문:

 
"글 잘읽었습니다. 한가지 여쭙고 싶은 것은 여기서 말하는 폭력과 비폭력적 저항주의에서 말하는 저항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또 폭력의 개념을 사용할 때 일반적인 사용례는 부정적 의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사용하시는 폭력의 개념이 후대에 재해석된 폭력의 개념을 예수에게 덧씌우고 있다는 느낌입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시면 감솨^^"
 
 
 
제가 이 질문에 대해 적절하게 잘 대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댓글로는 너무 길어질 듯 하여(저는 화면이 7.6인치밖에 안 되는 넷북으로 주로 글을 씁니다.ㅜㅜ) 새로 글을 열어보았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폭력'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제가 '유물론'과 '관념론'이라고 지칭한 것들을 조금 더 설명해야 할 듯 합니다. 이 글에서 제가 상대하려 했던 입장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은 이러저러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그 가르침과 삶을 따라야 합니다."라는, 통상 '제자도'라고 불리는 입장입니다. 좀 더 특정하자면, 그 제자도의 핵심에 예수가 선포했다는 '비폭력주의'를 두는 요더 類의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이차적으로는 현재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입니다.)
 
 
제가 이러한 입장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로 하여금 그러한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들었던 예수의 오클로스(무리)를 삭제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며, 예수의 급진성을 단지 그의 '말' 혹은 '주의' 속에서 발견하는 파리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파리한 이론은 '파리한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관념론'이란 것을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아주 범속한 의미에서, 즉 '말' 혹은 '개념'으로 어떤 실재가 온전히 재현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을 관념론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이를테면 70-80년대 한국의 역사를 '민주화'라고 개념화할 때 그 개념은 마치 70-80년대가 실제로 어떤 '진보하는 모종의 힘'에 의해 변해온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실 그런 '진보'나 '민주화'는 개념일 뿐, 실상은 무수한 투쟁과 싸움이 있었을 테지요. 그러나 그것을 '민주화'라는 진보의 도정으로 정리함으로써, 그 민주화를 대표하는 누군가가 그 역사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되고, 그들은 오늘도 벌어지고 있는 무수한 싸움과 투쟁에 대해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왜? 민주화가 되었으니까.)"라는 식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폭력적으로 삭제할 수 있게 되지요.(아, 이 이야기는 노무현 대통령이 FTA에 반대하며 분신한 허세욱 열사에게 퍼부었던 독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물론이란 그러한 말, 혹은 개념의 외부와 마주하는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물론자들은 관념론이 삭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길에 서서 삶의 전투를 이어갑니다. 그들은 진보해가는 역사라는 개념을 중단시킵니다. 그들의 투쟁 속에서 말과 개념으로 닫힐 수 없는 어떤 실재가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유물론자들도 '말'을 합니다. 저도 여기서 '말'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 없이는 인간은 대부분의 행동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유물론적 '말'은 언제나 관념론에 대항하는 하나의 전투로서, '불화'의 언어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말 자체의 '내용'이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화'가 어떤 실재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지요.  
 
 
저는 예수의 삶과 말을 이렇게 바라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통상 교회에서 익숙한 예수에 대한 재현방식은 예수의 말에서 오늘을 위한 어떤 가르침을 해석해내고, 그것을 통해 어떤 실천을 하자는 식입니다.(관찰-해석-적용) 그러나 예수를 이렇게 바라볼 때 예수는 당시의 모든 물적 관계로부터 벗어난 어떤 존재가 되고 맙니다. 심지어 '역사의 예수'를 말할 때조차도, 그 역사의 예수를 예수의 '주장의 차원'에서만 바라보거나, 당시의 역사를 단지 '배경'으로 취급한다면 '신앙의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실천을 낳게 될 것입니다.(그게 앞선 글의 서두에 썼던 진보꼰대/보수꼰대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예수의 주장조차 왜곡하고 맙니다. 예수가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 특히 비유로! - 전한 이야기를 어떤 이론과 관념으로 정리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합니다. "예수는 비폭력'주의'를 주장한 위대한 성인이었다."는 식으로요. 하느님 예수 대신에 그와 지극히도 닮은 '지도부 예수'의 등장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는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실상'은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든 예수의 무리들, 당대의 사회적 관계들의 차원과 함께 바라볼 때 보여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여러 이야기가 수행한 그 '불화'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나타나는 게 아니겠습니까.(물론 그 '실상'이란 객관적인 사실관계가 아닙니다. 누가 '사실자체'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것을 알기 위한 방법은 끊임없이 과거의 삭제된 목소리를 오늘의 우리의 과제와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실상'은 다채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저는 마태복음 11장은 예수 자신이 당대의 세례 요한과 자신, 그리고 무수한 해방투쟁들을 보는 이러한 유물론적 시각을 잘 드러내주는 하나의 전거(reference)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저는 '폭력' 이야기를 꺼냈던 것입니다. '비폭력주의'나 '폭력주의'는 이미 매우 높은 수준에서 개념화된 언어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런 순수한 개념으로서의 폭력이나 비폭력은 기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는 폭력이고 어디까지는 비폭력이다라는 것은 법학 용어로서 규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자본가는 노동자가 구호만 외쳐도 "폭력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청계광장에서 단지 촛불을 들고 걷기만 해도 저들은 "불법폭력시위"라고 하지 않습니까. 혹은 지진이 나고 폭풍이 불어 우리의 삶이 파괴될 때 그 누구도 폭력을 행사한 바 없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자연으로부터, 혹은 '신으로부터' 폭행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후대의 폭력의 개념을 예수에게 적용한 게 아니라 후대의 '비폭력'의 개념으로 채색된 예수를 벗겨내려 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는 '방법론'에 있어 분명히 비폭력적이었던듯 합니다. 그에게는 어떤 폭력의 수단도 없었습니다. 예수의 무리 중에는 무장투쟁가들과 급진분자들도 섞여 있을 수 있지만 상당수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다는 것을 성서는 이야기해줍니다. 게다가 예수가 활동할 당시는 예수가 태어났을 무렵이나, 예수 이후 60-70년 경의 상황에 비하면 매우 평온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비폭력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는 개념화된 '비폭력주의'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예수에게 분명한 것은 자신들의 행동이 '저들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폭행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꿈꾸는 '하느님의 율법 아래 정결한 모든 사람들이 질서와 평화를 누리는' 그런 하느님 나라에서 배제된 이들의 운동은 저들에게는 언제나 폭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들로 하여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밖에 했던 것이겠지요. 
 
 
'비폭력주의'에 대해 제가 경계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개념으로 제출되거나, 혹은 하나의 '규범'이나 '지도이념'으로 제출되어 민중의 자기해방을 가로막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굳이 저도 '개념화'를 시도하자면, 하나의 주권적 체제를 만들거나 유지하려는 '폭력'과 그 주권적 체제를 무너뜨리고, 다른 주권적 체제가 성립되는 것을 막는 '폭력'은 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 심지어 그것이 아주 비슷한 모습을 하고 나타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 생각합니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나치 시기 유대인 비평가는 전자를 '법정립적 폭력'과 '법 유지적 폭력'으로, 후자의 폭력을 '하느님의 폭력'(통상 '신적 폭력'이라고 불리는 이것을 다르게 번역해 보았습니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지요.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저의 또 다른 글('신적폭력[벤야민]'에 대하여)에서 자세히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저는 사회선교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선교단체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있을 당시 이 단체는 사회선교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격렬한 사회적 갈등이 벌어졌을 때 약자들의 편에 서서 시위나 직접행동에 참가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결같았습니다. "폭력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웃긴 이유입니까? 우리들은 사실 '하느님'을 '비폭력주의'라는 규범 속에 가두어 놓고 그분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민중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단지 방법 때문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권력자들을 인정해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물어야 할 것은 '폭력이냐 아니냐'라는 왜소한 질문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저들만의 '하느님 나라', 혹은 저들만의 '대한민국'을 침노하고 균열내고 있는가가 아닐까요. 아주 힘 없는 폭력도 있고, 아주 강력한 비폭력도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언제나 우리의 폭력이 주권적 폭력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그러나 비폭력을 하나의 '주의'로 만들어 놓고, 그래서 그것이 모든 것을 지나치게 결정하게 되는 것을 저는 반대합니다. "자연은 언제나 관념을 초과하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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