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6장 '신적 폭력'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9번에는 '역사의 천사'가 등장한다. 그는 파국적인 진보의 폭풍 속에서 미래를 향해 날아가려 하지만 또 한편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싶어 하며,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지젝은 이것을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신적 폭력'과 연관시킨다. 신적 폭력은 진보 속에서 축적된 불의에 보복하며 파괴하는 신의 분노이며, 정의의 회복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신화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어쩌면 신적 폭력은 모든 신화가 거기서 제거된 가장 '세속적'인 폭력이다.)
지젝은 욥의 예를 들면서 신적 폭력의 반대편에 있는 신화적 폭력을 든다. 신은 사실 욥에게 무의미하게 폭력을 저지른다.(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그저 '존재의 발현'이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계속하여 그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한다. "홀로코스트나 콩고에서의 수백 만 학살 같은 사건에 직면해서도 그 얼룩들이 심층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로써 전체적인 조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외설적이지 않은가?" 지젝이 보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이 의미를 가진 신의 완전한 죽음이 된다. 욥-그리스도.
벤야민은 이 인간이 된 신(그리스도)를 신적 폭력과 테러리즘을 구분하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 신적 폭력은 인간의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 시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테러 현장을 위(신의 시점)에서 내려다보는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카메라가 부적절한 이유다.
다른 한편으로 지젝은 역사에서 분노의 악순환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슬로터다이크를 탄핵한다. 그는 니체의 원한에 대한 사유를 연상케 하는 분석을 통해 좌파의 것이든, 페미니즘이든, 탈식민주의든 그것이 유대-기독교적 분노의 폭발에 기초할 때 끊임없는 분노의 악순환을 낳아 전체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지젝의 말에 따르면.) 대신 그는 원한을 넘어선 정치로서 자유주의를 주장한다. 지젝은 이에 맞서서 신적 폭력의 개념과 연결되는 '원한'의 개념을 재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적 폭력의 원한은 니체의 노예도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 (범죄적인) 그 일을 아무 일도 아닌 것/해명할 수 있는 것/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그리고 일관성 있고 의미 있는 삶의 서사로 통합하는 것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불의 앞에서 설명을 요구하거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탄핵하는 것', 그것이 신적 폭력의 '원한'이다. 그것은 '처벌이냐, 용서냐'라는 두 항을 모두 기각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젝은 신적폭력을 '역사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792-94년의 혁명적 테러(자코뱅 시대)를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신적 폭력입니다." 물론 그것은 살인이다. 개별의 '목숨'들이 종료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역에서는 살인이 개인적 병리, 즉 기이하고 파괴적인 충동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혹은 범죄에 대한 처벌)도 아니고, 성스런 희생도 아니다. 그것은 심미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않다.)" 지젝은 신적폭력에 의해 죽은 이들은 희생자(제물)이 아니라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그것은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자비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윤리적 행위란 무엇인가? 지젝은 슬로터타이크가 보편적 해방을 이룬자를 질투하는 것이며, 그 기초를 더럽히기 위해 무언가 '순수한 보편적 해방'을 상정하고 그 순수함을 훼손하는 오점을 찾아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한다. 지젝은 라캉을 통해 통상적인 칸트 해석을 뒤집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행위를 할 때 자기가 그 행위를 왜 하는지 진짜 모르는 주체의 입장에서 진짜 외상으로 남는 것은 순수한 윤리적 행위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 진정으로 외상적인 것은 자유 그 자체, 자유가 정말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어떤 '병리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나는 지난번의 한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여기서 벤야민이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의 구원에, 혹은 혁명적 봉기에 있어 누군가의 목숨은 죽어야 하는 그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살인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되는 '생명'을 '목숨'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우리에게 한 가지 힌트를 주고 있는 듯하다. 구약성서의 면죄하는 폭력에는 언제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함께 주어진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 계명이 판단의 척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계명은 무엇보다 “이미 실행된 행위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이며, “행동하는 인격체 또는 공동체에 대해 행동의 지침으로 있다. 행동하는 인격체나 공동체는 홀로 있으면서 그 계명과 대결해야 하며 예외적인 경우들에서 이 계율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 더 나아가 벤야민은 이 계명이 환기하는 것은 단순한 목 숨이 아니라 ‘삶의 신성함’ 에 대한 것이라 주장한다. 생명은 ‘단순한 목숨’으로 표상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목숨 너머의 것이다.")
지젝은 신적폭력이 전혀 성스러운 희생이 아니며, 심미적이지도, 종교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신적 폭력은 법이 다루는 '목숨'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의 차원에 놓여 있다. "신적 폭력은 죽지 않는 것, 즉 과도한 생명이 가진 순수한 충동을 표현한 것으로 이 충동은 법의 규제를 받는 '벌거벗은 생명'에 채찍질을 한다. […] '신학적 차원'이란 바로 충동의 과잉이라는 차원을 말한다." 이것이 지시하는 것은 물론 혁명적 폭발이다. 지젝은 신적폭력을 이상화하지 말고 철저히 역사적 사건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물론 벤야민에게 있어서 개별의 사건들은 단지 개별사건들만이 아니며 또한 동시에 이념들의 서술이다. 이것은 그의 '성좌적 인식'과 관련이 있다. <인식비판적 서론> 참조.) 신적 폭력에서 신 혹은 대타자는 철저히 무능해진다. 그것은 초도덕적이지만 부도덕하지는 않다. "구조화된 사회적 공간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바로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따라서 이 신적폭력에는 이것의 정당성을 판별할 수 있는 정당성의 기준이 없다. 대타자는 없고, 주체가 오롯이 그것을 떠맡아야 한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