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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것이 아니면 안 됩니까? [복상2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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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한겨레신문사, 2007

장 선배님께…

 

 

선배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저 김강입니다.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어떠신지 모르겠어요. 대학에 처음 올라갔을 때 저에게 공부와 대학생활을 가르쳐주었던 선배 생각, 많이 하곤 해요. 고등학교 때부터 나름 성경도 많이 읽고, 고등학생답지 않게 이것저것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만하고 있었던 저를 선배님은 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으셨죠. 그 때 그렇게 깨져보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지금도 얄팍한 교리적 지식과 ‘경배와 찬양’이 세상의 전부인줄만 아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배우다
어디서 몇 자 주워들은 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찬양인도자”니, “불붙는 지성의 설교자”니 하는 것을 꿈꾸고 살던 저에게 선배님은 하느님이 교회의 하느님만이 아니요, 세상의 하느님임을 가르쳐 주셨고, 기독교 사상의 세계가 웨스터민스터 교리문답이나, 제가 읽었던 목사님들의 설교집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깊은 세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때 선배님께서 저에게 권해주셨던 프란시스 쉐퍼나 아더 홈즈, 존 스토트 같은 이들의 책들을 통해 저는 “기독교 세계관”을 알게 되었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리라는 비전을 가슴에 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보다 서너 살 밖에 차이 안 나는 선배는 어쩜 그렇게 똑똑했는지, 무얼 물어봐도 막힘없이 대답하던 선배의 속사포같은 입술이 아직도 생각이 나네요.

 

선배가 유학갈 땐 많이 아쉬웠어요. 선배에게 더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한국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2% 부족하다. 가서 제대로 배워올게”라며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려서 내심 많이 섭섭했답니다. 그래도 간간이 선배님의 홈페이지에 들러서 쓰신 글이나 사진들을 보면서 ‘여전히 장 선배는 멋지게 잘 지내고 있구나.’ 하고 확인하곤 합니다.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교단의 신학생이라는 신분이 무색할 만큼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나 문화변혁, 평화와 정의를 위한 행동의 중요성을 논하는 선배의 글들을 보면 선배를 통해서 한국의 복음주의 담론이나 기독교세계관 논의가 한층 더 풍부해 질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왜 구체적인 삶에 와 닿지 않을까
그런데 말이에요 선배…, 오늘은 죄송하게도 감사와 기대의 마음을 전하기보다는 선배의 글을 보면서 느꼈던 아쉬움을 전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물론 단순히 선배에게만 느끼는 아쉬움은 아니에요. 어쩌면 한국의 “복음주의”나 “기독교 세계관” 담론 전반에 대한 아쉬움이라 할까요.

 

저는 선배의 글이나 최근에 소개되는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이 저의 삶과 참 많이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제가 이제는 복음주의자가 아니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2007년 현재 한반도에서 자리 잡고 사는 저의 개인적, 사회적 삶과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이 그다지 가깝지 않다는 이야기에요.

 

예를 들자면, 최근에 통과된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해서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는 기업이 “기독교적 경영”으로 유명한 “이랜드”죠.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기독교 세계관 진영에서 나온 논의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여전히 총론적 수준에서 ‘기독교적 경영’ 등에 대한 논의만 있을 뿐, 구체적인 한국 상황에서 노동의 문제, 경영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전에 선배가 쓰신 ‘평화 공동체’에 관한 글도, 일반론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넘어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이 필요할지, 어떤 선례가 있는지에 대해선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왜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은 20여 년이 지나도록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 이미 복음주의나 기세 담론을 생산하는 이들 자신이 이미 이 문제를 10여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듯합니다. 각론이 없다는 이야기나, 개혁주의 세계관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든지 하는 나름의 해결책들도 나오고 있구요. 선배가 요즘 주목하고 있는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라든지, 비폭력 평화 운동 같은 논의들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성’과 ‘식민성’을 다시 생각하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박노자 선생님의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를 읽으면서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바로 ‘지역성’과 ‘식민성’이라는 관점에서 말이죠.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복음주의나 기세 담론이 바로 이 ‘지역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 아니라 서구의 학자들의 논의를 마치 우리의 논의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학문했던 지적(知的) ‘식민성’과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매우 흥미진진한 역사책이자, 90년대 말부터 학계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기도 합니다. 일단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왜 이 책을 읽으면서 기세와 복음주의 담론이 생각났는지를 좀 더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저자는 “한자․유교 문화권”이라는 전통문화에 기반한 동질성이나 “경제적 공존․평화체제”같은 현실적인 필요성의 코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동아시아 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합니다. ‘유럽’이 ‘기독교적 가치’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지 않고, 그 안에 도도한 반란의 전통을 또한 가지고 있듯이, ‘동아시아’ 역시 ‘유교문화권’이나 ‘권위주의적 위계질서’ 같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반란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동아시아’는 20세기 동아시아의 급진적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역사입니다. 저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한, 중, 일 3국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민족을 넘어서, 또 복고주의를 넘어서 아래로부터의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연대를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의 역사야말로, 오늘날 극우적 민족주의와 군비경쟁, 천민적 자본주의의 지배하에 놓인 동아시아의 민중들이 기억하고 공부해야 할 역사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반란의 동아시아”가 바로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라는 것이죠.


반란과 억압의 동아시아
그동안 <한겨레21>에 꾸준히 연재된 글을 모은 이 책은 정말로 학교에서의 역사공부를 통해선 들을 수 없었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의 반란적 흐름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세기 서구와 같은 제국주의적 주권체제를 갖추었지만 서구와는 달리 이슬람을 포용하고 받아들였던 중국의 명․청 왕조의 이야기, 니체보다 앞선 시기에 급진적 개인주의를 주장한 아나키즘적 사상가 이탁오, 국왕에게 절하기를 거부한 승려 혜원, 군대와 국가의 폐기를 주장한 톨스토이주의자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또한 저자는 동아시아의 반란적 흐름을 중단시키고, 민중을 국가와 민족의 지배하에 두려 했던 동아시아 지배층의 시도 역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 서구와는 다른 형태의 인종주의(황인종 연대)를 설파한 일본의 지배 계급이나, 친일파 못지않게 민중을 억압하고 때론 학살하기도 했던 조병옥과 같은 숭미파 지식인들, 윗사람에 대해 맹종하는문화가 낳은 동아시아의 특이한 사이비 종교들, 톨스토이의 급진적 이데올로기를 ‘자기 수양’의 담론으로 바꾸어 버린 이광수와 최남선과 같은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 억압적 질서의 뿌리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미국 것 말고는 안 되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한국의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이 지나칠 만큼 서구, 특히 미국의 이론에 경도되어 한국 혹은 동아시아라는 우리의 지역적 상황에 들어맞지 않는 이론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00년 전에 유길준이나 서재필, 윤치호 같은 지식인들이 ‘고루한 전통’을 타파하고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구 문물이나 선교사들의 기독교를 수용하여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처럼, 오늘날의 기세나 복음주의 지식인들도 고루한 이원론적 기독교 전통을(사실은 이것도 수입품입니다!) 비판하기 위해 서구의 진보적인 복음주의 이론들을 가져다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 이야기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해 왈시나 미들톤을 읽어야 할까요. 이미 70년대에 이야기의 신학을 정립한 서남동이나 안병무를 읽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존 요더를 읽어야 할까요. 함석헌을 읽으면 안 될까요? 왜 우리는 사회참여적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세이비어 교회나 쉐인 클레이본의 책들을 읽어야 할까요. ‘나눔의 집’이나 80년대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배울 것은 없을까요? 왜 우리는 영성을 공부하기 위해 헨리 나웬이나 달라스 월라드를 읽어야 할까요. 유영모나 이세종 같은 이들에게선 배울 게 없는 것일까요?

 

물론 제가 “서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을 택해야 한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위에서 예를 든 사람들도 ‘순수한 한민족적 사유’를 펼친 것도 아니었구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현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에 맞는 기독교적 사유와 실천을 위해선 지역성과 식민성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현실에서 배태된 사유, 한국 사회의 모순과 억압적 질서를 타계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이들의 사유를 보지 않고 서구의 이론을 따라가기 바쁘다면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은 영원히 총론의 수준에서 머물고 말 거란 생각이 듭니다.

 

선배님의 관심이 지금까지의 기세운동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에 있다면, 그리고 한국의 구체적 정황 속에서 기독교인으로써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에 있다면, 잠시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덮어놓고 한반도와 동아시아 역사 속의 ‘반란의 기독교’를 한 번 찾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것이 복음주의냐 아니냐를 떠나서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고민했던 이들의 사유는 선배님이 더 깊고 구체적인 사유와 실천으로 들어가는 데 틀림없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나라는 한반도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보편성을 ‘서구적인 것’ 혹은 ‘미국적인 것’과 혼동할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지리적 모순과 맞서 싸우면서도 항상 다른 세계를 위해서 민족을 뛰어넘는 세계 민중의 연대를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전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인들과 연대해야 할 것입니다.

 

쓰다 보니 좀 건방진 글이 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선배님의 공부에 더 큰 진보가 있기를 기도할게요. 돌아오시면 하느님께서 꼭 선배님을 크게 쓰시리라 믿으며,

 

장 선배님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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