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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독교적 예수에 관한 짧은 메모

"모든 실험들, 모든 혁명들, 모든 선언들에서 엄숙주의를 몰아내자. 우리는 더는 실험할 필요가 없는 단 한 번의 '진정한 실험'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 이상의 실험을 원하지 않는 실험, 우리는 그런 '진정한 실험'에 관심이 없다.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실험과 시도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실험을 반복함으로써 한 발씩 한 발씩 걸어 나간다. 코뮨주의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코뮨주의는 대안적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시도 속에서 언제든 실현된다."


"타자의 절대 권리를 희생자의 절대 권리에서 찾고, 그 절대 권리를 영원한 정의로 바꾸어내는 사유의 전개 과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삶보다 죽음을, 그가 삶 속에서 느꼈을 행복보다 십자가에서 느꼈을 지옥 같은 고통을 환기시킨 사제들, 그들이 어떻게 통치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라."

-고병권 · 이진경, <코뮨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 中

 

 

1.
오늘날 복음주의권의 그것이든, 에큐메니칼-민중신학의 그것이든, '기독교 사회운동'을 강하게 짓누르는 정서가 있다면 그것은 '엄숙주의'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의 엄숙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희생자와 약자에 대한 애도의 정서인 "타자의 엄숙주의"라 할 수 있고,또 하나는 민주화 프로젝트가 신자유주의와 전지구화 앞에서 무너져 버린 데서 생겨난 정서인 "종말론적 엄숙주의"이다.


2.
예수는.. 그는 엄숙했을까? 에코의 <장미의 이름> 속에 묘사된 중세 학자들의 논쟁 - "예수는 웃었을까?" - 을 보면 예수에 덧씌워진 엄숙주의라는 이미지는 아주 오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세의 성화에서 그는 늘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웃는 장면에서도 엷은 미소만을 띄고 있을 뿐이다.


3.
니체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바울을 탄핵한다. 그가 삶-예수를 죽음-예수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삶의 불멸성을 단 한 번의 십자가상의 '제사'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의 중심 문제는 예수와 같이 지금-여여기에서 살림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예수에 대한 애도 속에서 그와 함께 죽은 자-타자들에 대한 사랑의 문제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죽은 자에 대한 사랑이다.(그러나 과연 바울이 엄숙주의자였는지에 대해 나 자신의 판단은 유보하려 한다. 난 아직 그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


4.
복음서는 더욱 다루기 어렵다. 각 복음서들에 등장하는 종말론적 엄숙주의는 예수의 것인가? 아니면 유다전쟁을 겪은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의 것인가? 왜 복음서는 지금-여기에서 살림을 살 것을 주장한 예수를, 풍자와 해학으로 민중과 더불어 살았던 예수를, 종말론을 설파하는 세례 요한적 예수와 더불어 기록하고 있는가? 나는 감히 예수에게서 종말론을 제거하려 한다. 예수는 삶만을 설파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죽었다. 바벨론 유수 이후로 종말론은 이스라엘의 우파와 좌파, 권력자와 민중을 막론하고 그들의 '공통감각'이었다. 때문에 단-한번의 종말과 왕-메시야의 도래를 거부한 예수, 미래에 올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 지금-여기에서의 실험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를 설파한 예수는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좌파와 우파, 권력자와 민중 모두의 공모 속에서.


5.
네그리는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라고 말했다. 나에겐 예수야말로 "야만적 별종"이다. 그는 바울적 엄숙주의(타자의 엄숙주의. 그러나 과연 바울 공동체가 엄숙주의적이었을까!?)와 유대적-복음서 공동체적 엄숙주의(종말론적 엄숙주의) 모두에 대한 별종이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나 유대주의를 넘어선 유대인이었다.


6.
자. 이제 나름의 결론을 내려야 할 때이다. 그러나 비참하게도 난 이 지점에서 침묵하게 된다. 타자의 윤리가 아닌 코뮨의 윤리를, 종말론적 윤리가 아니라 영원회귀의 윤리를, 예수의 윤리로 제시하면서 민중신학과 기독교 사회운동의 '회춘'을 부르짖어야 할 이 절에서 나는 안타깝게도 말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대선 트라우마(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를 극복할 때까진 조금 더 침묵하지 않을까 싶다. 민중(multitude든 the minor건)이 어디에서건 국가를 중단시킬 때 나의 언어도 다시 터져나오지 않을까.(아니면, 그냥 공익근무로 인한 우울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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