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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사람들에게 성서에 대해서, 또 신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때 이야기는 종종 어떤 '당혹감'으로 끝날 때가 많다.
그것은 주로 비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성서를 '기독교'라는 집단의 교리를 담고 있는 책으로 생각하는 뿌리깊은 습속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성서학자'를 제외한 상당수의 신학자들까지도 '성서'(혹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정도는 분리하여)를 마치 어떤 일관된 사상을 담고 있는 책으로 탈'역사'적으로 이해하곤 한다. (가끔씩 '성서학자'들도 교회에서 설교할 때 보면 '설교 용 성서'를 마치 따로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이런 읽기의 '방법' 위에서 이루어지는 '신학', '성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 때문에 내가 꺼내는 어떤 이야기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 말하자면 '결론'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 같다.
그들은 내게 끊임없이 '네가 믿는 바가 뭐냐?'고 묻는다. 혹은 '기독교는(성서는, 신학은) ~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냐?'고 묻는다. '신학' 혹은 기독교란 '성서'에서 말하는 어떤 사상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면 그런 '성서'에 입각해서 '믿는 바'는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대신 성서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비일관성과, 사건들과, 담론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성서는 바로, 성서를 위에서 말한 방식으로 사용하여 성립된 '기독교'나 '신학'을 끊임없이 해체하는 '책'이라고, 그리고 그 해체야말로 성서를 읽는 가장 큰 이유라고 대답할 뿐이다.
수천년 동안의 인간의 삶 속에서 여러 동기와 목적, 상황 속에서 기록된 글들에서 일관된 교리를 추출해내려는 작업이야말로 성서 앞에서 교만한, 성서를 그저 도구로만 생각하는 태도가 아닌가.
성서는 철저히 '역사적'인 책이다.
어떤 이는 이런 말에 "그렇다면 성서는 그저 '사료'일 뿐인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라는 것은 '한국사', '교회사'같은 목적론적 의미의 '역사'가 아니라 무수한 사건, 상황들 속에서 쓰여졌다는 의미의 '역사'를 말한다. 따라서 성서는 어떤 '역사'를 위한 '사료'가 아니라 '역사적 책'으로서 '역사적 우리'(우리 역시 곧 무수한 사건, 상황들 속에서 살지 않는가)에게 말 거는 책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성서가 '역사적 책'이라고 할 때 그 역사가 반드시 '사실 그대로의 역사'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사실 그대로의 역사'란 게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역사적(즉 상황적, 사건적, 시간적) 상상력'으로 성서를 읽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적 상상력 안에서 성서를 읽는 것보다는 적어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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