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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 전봉준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군 긍동면 양교리(지금의 정읍시)에서 향교의 장의를 지낸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명은 명숙, 호는 해몽이자만 체구가 작아 보통 '녹두'라 불리웠다. 그는 37세에 동학에 입교하자마자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참고: [[포접제]])로 임명되는데 그의 인품과 지도력, 개혁의를 인정받아 주위 교도들의 추천받았다.


 전봉준의 시

 전봉준은 순창 피로리에서 채포되어 초토영이 설치된 나주성에 호송되어 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정봉준은 재판을 받은 뒤 1896년 4월 23일 처형되었다.

 전봉준은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유언으로 남겼다.

 

                                 때가 오매 천하가 모두 한 힘이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전봉준이 죽은 후 민중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로 그를 애도 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파랑새는 청나라 군사를 말하며 청병의 자신만만한 출병을 '하절'로,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것을 엄동설한에 빗대어 노래한 것으로, 녹두는 전봉준을 가리킨다. 파랑새 민요는 청이 거들먹거리며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려다 조선 민중에게 혼이 났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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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갈리츠키에 대한 답변 - 타리크 알리

타리크 알리(Tariq Ali) <제트 매거진> 2000년 5월
원 제목 = (The Third Period In Outer-space: A Brief Comment On Boris Kagalitsk's Suicide)

영국의 세계적인 좌파 이론지 <뉴 레프트 리뷰>가 2000년 1월호를 계기로 전면적인 지면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편집인 페리 앤더슨은 "갱신(Renewal)"이라는 글에서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 승리를 거뒀고 사회 변혁을 바라는 좌파 세력은 사실상 힘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현 체제에 대한 순응도, 그렇다고 막연한 변혁의 희망도 아닌 "타협없는 사실주의"를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반박 글에서 러시아의 좌파 지식인 카갈리츠키는 변혁을 포기하는 리뷰의 자살 선언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에 맞서 리뷰의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는 비현실적인 비판이라고 일축합니다.


나는 뉴 레프트 리뷰의 적절한 재창간에 대해 보리스 카갈리츠키가 분노를 터뜨린 것에 대해 황당해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으며, 그는 절제되지 못한 발언을 종종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따뜻한 인간이다. 나는 80년대말 자신의 부인, 아이와 함께 런던을 방문한 그가 우리집 부엌에서 나와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가 고르바초프에 적대감을 보여 놀랐다. 고르비의 대안인 옐친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보리스는 옐친이라는 정치 공백기가 환영할만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옐친 다음에는 좌파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그에게 이런 태도는 정치적 자살행위같은 것이라고 말했고, 사민주의를 주요 적이라고 비난한 스탈린 3기와 타엘만스(Thaelmanns)가 1933년 파시스트들의 승리를 지적하면서 히틀러 다음은 우리 차례라고 한 정신나간 발언을 상기시켰다. 물론 보리스는 자신이 옳고 내가 틀렸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논쟁은 더 진행되지 못하고 중단됐다. 그의 아들이 바지를 더렵혔던 것이다.

나는 아장아장 걷는 이 아이의 말없는 행동이 자기 아버지의 환락적인 극좌주의에 대한 본능적 적대감을 명확히 보여주는 너무나 적절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마피아가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다. 대중은 불만에 차 있지만 겁먹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시애틀이 아니다. 그러나 보리스는 변한 것이 없다. 이제 그는 뉴 레프트 리뷰의 자살을 이야기한다. 그의 말대로 라면 과거 리뷰는 종종 피상적인 급진주의와 이빨 빠진 온건의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 잡지는 국제주의적이며 전세계 사회주의자들의 만남의 장이었다. 이제 잡지는 자신의 과거를 배신하고 도를 넘어섰다. 최근 내가 뉴욕에서 열린 사회주의학자회의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잡지 이야기는 거의 안했고 자신의 책 '유럽의 좌파' 출판을 거부한 버소출판사(Verso, 뉴 레프트 리뷰를 발행하는 곳)에 대한 개인적 불평을 털어놨다. 나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 그 책을 플루토프레스가 작은 3권의 책으로 출판해 잘 팔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버소에서 거절당한 것에 화가 많이 났고, 특히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이 출판을 거절하며 보낸 편지에 적대감을 느끼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의 원고를 거절하는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버소의 자살'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별 생각없이 리뷰의 자살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년동안 뉴 레프트 리뷰의 변화와 재창간을 논의해왔다. 모든 사람이 필요성에 동의했지만 지난해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이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앤젤레스 분교에서 안식년 휴가를 받아 재창간을 관장할 때까지는 이를 추진할 힘이 없었다. 이제 일이 벌어졌고 새로운 디자인, 편집, 서평과 문화 관련 글의 보강에 대한 반응은 일반적으로 좋다. 앤더슨이 서명하고 쓴 논설은 놀랄 것도 없이 일부의 비판을 야기 했지만 그가 강조한 기본 논점은 슬프게도 잠시 외계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세기말 자본주의의 승리는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모든 체계적 대안의 붕괴를 명백히 볼 수 있다.

시애틀은 아주 기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애틀도, 그렇다고 프랑스의 파업 물결도 근본적인 상황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과장하는 것은 절망만 키울 뿐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현상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연한 일이지만 뉴 레프트 리뷰 재창간 2호에서 제프리 아이작(Jeffrey Isaac)과 알렉스 칼리니코스(Alex Callinicos)가 벌였듯 앞으로도 논쟁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레닌이 '전쟁과 혁명'의 시대라고 했던 때와 전혀 다른 새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리뷰는 미국과 유럽연합내 미국의 동료들에 여전히 적대적이다. 편집위원회를 떠난 이들 가운데 많은 이는 새로운 질서에 잘 적응하고 있다. '갱신'에서 페리 앤더슨은 우리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아주 분명히 보여줬다. 우리는 포크랜드 모험에 반대했으며 잡지 한호를 털어 새처와 그를 지지한 노동당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걸프전도 똑같은 강도로 비판했으며, 보리스는 우리가 나토의 발칸반도 전쟁과 푸틴의 체첸 공격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상기해봐야 할 것이다.

보리스, 절망하지말라. 뉴 레프트 리뷰는 각 대륙 기고자들의 글을 앞으로도 계속 실을 것이다. 다만, 새 세대가 이해하기 쉽게 세심하게 편집하는 데 더 공을 들일 것이다. 우리는 마셜 버만이 '학구적인 까다롭고 우회적인 표현'이라고 한 것을 없애려고 노력할 것이다. 리뷰는 언제나 그랬듯 내용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자신의 옷을 더럽히면서도 보리스가 바보스럽고 주관적인 개입을 하지 않게 관심을 돌려줄 가까운 이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외계에서 홀로 너무 외로우면 우리에게 돌아오라, 옛 친구여.



원문: www.zmag.org/tariqali.htm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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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레프트 리뷰>의 자살 - 까갈리츠키

40년간, 뉴 레프트 리뷰는 전세계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었다. 뉴 레프트 리뷰의 논문들은 좀 더 성공적이거나 그렇지 않기도 했고, 그 관점들의 피상적 급진주의나 무력한 중도주의로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영어를 읽는 모든 좌파들에게 뉴 레프트 리뷰는 당대 마르크스주의의 정보원이 되었다. 새로운 명사들이 그 페이지를 통해 등장했으며 발표되었던 입장들을 중심으로 한 근본적인 중요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영국에서 발행되었고 대다수 저자들은 영국이나 미국에 근거를 두고 있었지만 뉴 레프트 리뷰는 다른 국가의 저자들에게도 열려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본질과 접근법, 구조와 이데올로기는 국제적인 발행물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제, 이 저널은 더 이상은 없다. 물론 또 다른 저널이 같은 이름으로 발간되지만 이 간행물들은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180도 다른 개념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2000년 1월부터 뉴 레프트 리뷰는 편집인을 바꾸고 장정과 호수체계를 달리했다. 우리 앞엔 포스트모던한 양식의 제1호의 작은 연습책이 있다. "두번째 시리즈 (Second Series)"라는 부제는 이 시리즈가 앞으로 40년간 살아남은 다음, 세번째, 네번째의 시리즈가 또 있을 것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개념의 변화는 의미심장한 "갱신"(Renewal)이란 제하의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의 서문에서 선언되었다.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의 뒤를 이어 편집을 맡은 페리 앤더슨은 뉴 레프트 리뷰에 새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는 뉴 레프트 리뷰의 창간도 함께 했다. 편집진의 구성도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새로운 피의 수혈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혀 반대의 이야기이다. 우리 앞엔 그저 그들의 기획과 이데올로기를 바꾸기로 결정을 내린 똑같고 오래된 집단이 있다. 토니 블레어와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같은 정치가들의 상승세를 따라 이 새로움이란 말이 유행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1960년대에 신좌파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구현된 "구좌파"와 구별되는 아주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이 정치적 선명성은 신, 구 좌파의 공통점을 분명히 하는 구실을 했다.

21세기 전환점에서 상황은 바뀌었다. 새로움이란 발상은 다른 모든 생각의 대체물이, 또 어떠한 긍정적 자기동일성의 상징적 대체물이,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감으로 (때에 따라서는 그들의 양심에 따라서도) 새로움이라는 말을 거론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주문이 된다. 새로움에 근거한다면 무엇이든 정당화되지만 새로와 진다는 것이 더 나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게다가 새로움이 "궁극적인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건 더 중요한 점이다.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완전히 잊혀졌던 어떤 것은 다시 새로운 것이 된다. "새로운" 기획이나 "새로운" 생각에 대한 언급은, 그 기획이나 생각이 무엇인지를 (혹은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숨김없이 선언할 정치적, 지적 용기가 부족함을 보여준다. 그가 논설에서 신중하게 경고했듯이 페리 앤더슨이 토니 블레어의 지지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앤더슨의 관점에서는 블레어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블레어나 슈뢰더 그리고 유사한 "신 사민주의자"들은 전세계적인 범위의 신자유주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증명한다.

앤더슨에 따르면 이전에 뉴 레프트 리뷰의 초기 설립자들을 고무시켰던 세계를 변혁하는 오래된 기획은 효력을 잃었다. 세상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근본적 변화에 대한 시도들은 실패했다. 사회는 통합의 과정을 겪고 있다. 좌파에게 남은 것은 이 과정을 지켜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뉴 레프트 리뷰도 떠오르는 상황에 순응하여 오래된 전통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재건해야 한다. 세련된 영국 신사인 페리 앤더슨은 머드 6가의 편안한 사무실에 앉아서 좌파 기획의 붕괴에 대해 축 쳐져 논하고 있다. 그는 청년시절의 이상과 급진적인 과거를 부인하지 않을 만큼의 지적 정직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의 붕괴에 대해 애도하지 않을 만큼 냉정하다. 그가 뉴 레프트 리뷰의 첫번째 시리즈와 함께 1960년대의 기획을 묻어 버릴 준비가 되었지만 그의 서문에는 한 절, 한 문장의 정치적인 자기 비판도 포함되지 않았다.

다 좋다. 페리가 다른 젊은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영국의 사회적 사상과 정치적 생활을 혁명화하려던 시도와 그리고 지금, 그가 더 이상 아무 것도 전복시키려 제안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데 무슨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는가? 어떤 특별한 고통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가? 서구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이론 말고 실제로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가? 아무도 감옥에 갇히거나 분노한 군중 앞에 세워지진 않았다. 그들의 가정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그들의 도시도 폭파되지 않았다. 거리에서 최루가스를 마신 것도 아니고 수지가 안 맞아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이 살 형편이 안 되어서 출판사에 공짜 책을 구걸하려고 굽실거릴 필요도 없다. 그런 일은 동구나 제3세계에서는 일상적인 경험의 일부이지만 번영하는 서구에서는 아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떤 것도 학문적 엘리트들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주진 않는다. 앤드슨에겐 사회주의의 역사는 사상의 역사,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유행이 지난 사상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람시는 매력을 잃었고 그리고 사르트르는 잊혀졌다. 새로운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자는 회한도 없이 이것에 대해 쓰고, 마치 성공한 여성이 자신이 학생시절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던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급진적 과거에 대해서도 전혀 부끄러워함이 없다. 시대는 변했고 패션도 그렇다. 유토피안들의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와 혁명의 희망에 대한 평형추로 페리는 "타협하지 않는 현실주의(uncompromising realism)"를 내어놓는다.

이 현실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떤 쓰레기 같은 진실이라도 월 스트리트 저널에 나왔다면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좌파 운동의 붕괴를 승인하는 것 이외에 그 논설은 아무런 실재적인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거긴 아무런 분석도 없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반성이나 세계화의 모순과 역학에 대한 이해의 노력도 없다. 이 "분석"은 월 스트리트 저널과 그 경제학자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그림을 비판적으로 읽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그 주류 논설을 그대로 요약하는 데까지 갔다. 잘 봐줘도 이것은 전형적인 학교 훈련을 떠올린다. 전체를 읽은 다음 너의 말로 바꾸어 말하라. 이 경우 영감의 주요한 근원이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 학교의 주석자들이고 페리는 그들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는다. 좌파는 그가 보기에 "새로운" 어떤 것도 제안할 능력이 없다. "대조적으로 이 시대에 직접적으로 정치 건설 분야를 지휘하는 우파는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와 어디에 멈추어 있는지에 대한 한가지 풍부한 전망을 제시한다. 후쿠야마(Fukuyama)와 브레진스키(Brzezinski), 헌팅턴(Huntington)과 예르긴(Yergin), 루트웍(Luttwak), 프리드만(Friedman)이 계속 뒤를 이으면서. 이들은 유일하고 강력한 하나의 명제를 학문영역의 독자들이 아닌 폭 넓은 국제 공공 대중을 위한 유창하고 인기 있는 문체로 써내는 저술가들이다. 미국이 지금까지 실제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이 확신에 찬 양식은 좌파에서는 어떤 대응물도 찾을 수 없다."(19쪽.)

이것은 어떻게 앤더슨의 말이 러시아 공산당수 겐나디 쥬가노프(Gennady Zyuganov)의 발언을 반복(과장함 없이 말 그대로)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가 그의 인종차별적이고 민족적이고 반 마르크스주의자적인 태도에서 이런 방법으로 "근대성"을 세우려 내놓았던 발언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논쟁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헌팅턴이 앤더슨보다 더 나은 문체를 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난 어떤 차이도 모르겠다. 본질은 어쨌거나 다른 데 있다. 우리는 누가 더 많이 책을 찍어내게 하는지나 누구의 문장 구조가 더 멋들어진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 좌파는 주석자나 대중 인기 영합자로 모자란 적이 없다. 실제로 관련된 것은 어떤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이론적 토론이다. 그리고 여기선 후쿠야마와 헌팅턴은 무력하다. 20년전에 어떤 지식인도 브레진스키가 심각한 이론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제 그는, 헌팅턴, 절반은 잊혀진 후쿠야마와 나란히, 지식인의 정신적 선도자 경지에 거의 다다랐다. 이 저자들이 누리는 성공은 그들의 사상가로써의 어떤 장점과는 무관하다. 이것이, 이 현상이 사회학적이고 문화학적인 관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유다. 이것은 고찰되고 쓰여질 필요가 있는 주제지만 앤더슨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게다가 그는 그런 어리석고 "유행에 떨어진" 토론을 그의 저널에 허락할 생각도 없다. 타협하지 않는 현실주의는 최소한의 비판적 사고조차 없는 곳에서 구성된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이 세상을 설명했지만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앤더슨은 세상을 설명하는 것조차 필요 없고 그저 세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적에 대한 세련되고 신사적인 형태의 무조건적인 항복이다. 페리는 그의 칼을 부수어 버리고 승리자의 자비에 완전히 무룹꿇었지만, 진짜 신사답게 위엄과 양식을 갖추고 했다. 그는 물론 승리한 적들이 이 "의용군대"로 무엇을 할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 이론가는 자발적으로 그의 "상아탑" 속에 갇혔다. 바깥에 남겨진 우리들은 그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 생각은 실제의 운동과 마주칠 경험이 완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태어나며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데 사용된다. 좌파 운동은 위기에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급진적인 행동과 비판적 사고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요하다. 필요한 건 잘 구축된 전략과 최종 분석에서의 원리를 갖춘 견해와 윤리적 기초이다. 이 대신 페리는 "갱신된" 뉴 레프트 리뷰의 주석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논의하고 앞으로는 저자들이 좌파에 속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남아있는 건 오직 이름을 뉴 레프트-라이트 리뷰(New Left-Right Review)로 바꾸는 일 뿐이다. 신사가 노동조직가나 거리의 투쟁가가 될 수 없다는 건 명백하다. (비록 아주 이상하긴 하지만 이것이 20년 전에는 가능했다.) 그리고 누구도 이 "좌파"의 교수들에게 거리에서 경찰관들과 한 데 어울리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합당한 자신들의 책무, 비판적으로 생각하기에 바쁘기만 하다면 만족할 것이다. 우파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견해에 근거해 판단하기 위한) 우파와의 지적 연대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신화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근본적 접근법의 완벽한 논리적 귀결이다.

페리는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의 위기(러시아의 채무불이행,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봉기, 그리고 미국에서 1999년 가을 시애틀의 거리에서 그들의 힘을 보여준 새로운 좌파 대중의 운동에도)를 간신히 무시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심지어 이 현상들을 고찰한 저자들에 대해 조롱을 덧칠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좌파 상당 부분의 배신이나 겁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훨씬 첨예해질 것이다. 배신은 1914년 제2차 인터내셔널의 항복 문서에서 보듯이 역사적 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건의 윤리적 성격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예프게니 슈발츠의 일화들 중에 하나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사악한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나 누가 당신들을 탁월한 학생이 되도록 강요했는가? "갱신된" 좌파들은 신자유주의의 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좌파의 갱신은 필수불가결한 일로 보인다. 잡종 블레어-슈뢰더-쥬가노프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갱신자"들과의 단호하고 타협하지 않는 결별과 문자 그대로 우리 눈앞에 군집하고 있는 대중 운동으로 돌아서는 것으로 말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대체 이데올로기의 필요는 중대하다. 급진주의와 저항은 이론적 근거를 얻어야 한다. 지금은 지식인들이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적기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영향을 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페리의 논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결론부이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정치적 옳바름으로 더 많은 비서구쪽의 투고를 환영한다고 선언하다. 여기서 다시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구" 뉴 레프트 리뷰가 비영어 사용권과 비서구의 대표자들에 대해 페이지를 충분히 열어주는 데 실패했다고 헐뜯고 있다. 그러나 책꽂이의 "구" 뉴 레프트 리뷰 소장 목록에서 하나 꺼내어 보는 것으로 현실이 이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뉴 레프트 리뷰는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남한, 인도와 아프리카의 저자들을 포괄했다. 그러나 반면 "새" 뉴 레프트 리뷰는, 이 관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불가피하다. 왜 비서구 사람들이 그들 존재의 필수적 문제에 관한 노골적인 무관심을 보이는 저널을 위해 글을 써야하는가? 왜 대서양권 내부 그룹의 지식층에 속하지 않는 저자들이 그들에게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저널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가? 페리는 앵글로-색슨 문화의 지식인들의 지적 나르시시즘을 애도하고 있는데 그는 그것의 끝간 데를 보여준다. 진정한 신사는 물론 외국 학자들의 사상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만, 우리 외국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수사를 해야하는 역을 할당받았고, 더 나쁜 것은 이미 만들어진 문화적 문맥 속에 집어넣어져 "문명화된 토착민"의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이 전혀 아무런 지적인 요점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들이 전혀 서구 지식인들과 차이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외국 저자들의 글을 싣는가? 소련의 옛날 농담에 이런 게 있다. 인사팀장이 이야기하길 "우리가 라비노비치에게 일자리를 주었다고 그가 더 이상 유태인이 아니길 기대하지는 마라." 똑같은 이야기다.

만약 주변부 저자들의 글을 싣고자 한다면 그들이 서구의 전 급진주의자들의 허약함과 허영심에 그리 감명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진 마라. "구" 뉴 레프트 리뷰는 잡지의 개념과 세계관이 국제주의여서 서구에서 발행된다는 것에 따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새" 뉴 레프트 리뷰는 처음부터 그들의 완전한 지역적 발행물이라는 특성을 받아들인다. 황량한 미국의 대학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몇백명 되는 전 급진주의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이러한 저널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구" 뉴 레프트 리뷰는 유럽과 미국의 급진적인 문화의 최고를 대표했기 때문에 비서구 좌파들에게도 뭔가 가르쳐줄 것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널이 더 앵글로색슨적일 때 다른 나라의 우리들은 더 흥미를 발견했다. "갱신"된 뉴 레프트 리뷰는 페리의 서문으로 판단할 때, 이코노미스트나 월 스트리트 저널의 논설들을 "그들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제공할 듯 싶지 않다. 그러나 원본이 있는데 왜 다시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문화 담론은 문화들 간의 대화와 공통점이 없다. 나는 현대 중국 영화에 대한 유행하는 프랑스 비평가의 태도를 찾아내기 위해 영국의 저널을 읽는 데는 흥미가 없다. 이건 영화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문화의 사회학에 흥미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점은 단순히 이런 거다. 이미 수십개의 저널이 이 분야에 대해서 더 잘 분석하고, 더 상세하고, 더 전문적으로 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와 지식의 매개가 없다는 것이다. "구" 뉴 레프트 리뷰는 현대 마르크스 이론과 정치적 분석의 국제적 저널이었고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페리의 관점에서는 이 기획은 죽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건 아니다. 수백만이 틀리고 한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편집자 스스로가 신나게 승리에 차서 원래의 기획을 묻어버렸는데 우리가 왜 뉴 레프트 리뷰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페리 앤더슨이 이전의 뉴 레프트 리뷰와 다르게, 그것을 공격하고 새로운 저널을 만들 필요를 느낀다면 차라리 기존의 발행물을 폐간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더 정직했을 것이다. 나는 이 제목을 유지한 주요한 이유가 친숙한 상표명을 고수하려는 생각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한 행동으로 앤더슨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치적 지적인 좌표를 뉴 레프트 리뷰의 영향하에 형성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인간적 모욕을 주었다. 옛 이름을 새로운 저널로 그대로 이전함으로써 페리는 우리의 공통의 과거와 공유한 역사의 일부를 훔쳤다. 이것은 더 이상 용서될 수 없다. 제호와 장정이 바뀐 것은 좋다. 이것은 그의 직업적인 정직함을 보여준다. 상당한 수의 저자와 독자들에게 이것은 신호가 될 것이다. 친숙하고 아주 사랑 받던 저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부모가 그것을 죽였다. 새로운 저널은 월 스트리트 저널의 구독자들 중에 새로운 독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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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북한 핵보유 선언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

북한 핵보유 선언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
김택의 World Report <5>
김택     메일보내기
지난 10일 북한의 핵보유 선언 이후 외국의 언론들은 주로 서울이나 워싱턴 발 기사에 귀를 기울이며 속보의 형태로 주요 사실들을 자국에 알리고 있다. 일단 이번 호에서는 그 기사들을 취합하여 몇 가지를 소개하는 순서를 갖겠다. 먼저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2월 10일자 기사로, 미국의 외교에 대한 책 <세계를 바꿀 4년 : 조지 부시의 미국 2005-2008>의 저자인 전략연구 전문가 브뤼노 테르트레(Bruno Tertrais)와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http://www.liberation.fr/page.php?Article=274728) 이번 사태에 대한 나름의 뛰어난 요약 구실을 하고 있다.

리베라시옹 : 북한 정부가 핵무기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브뤼노 : 오늘날 누구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 것들을 종합해 보면 그것이 가능한 가설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핵실험을 단 한번이라도 했다면 평양이 핵을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90%의 확실성만을 이야기할 수 있군요. 이처럼 거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증거에 근거한 것입니다. 북한은 핵으로부터 방사능 연료를 처리하는 명백한 프로그램을 가동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선망에 연결되지 않았고 전기를 생산하는데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연료는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처리되었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002년 10월에 북한 정권은 비밀스럽게 두 번째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는데 그것은 우라늄을 농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핵 처리의 과정을 말해주는 가스의 방출이 검출되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2000년을 전후해서 그 이후로 북한이 몇 기의 핵을 생산할 능력을 갖게 되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반면 그들이 핵을 미사일에 탑재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리베라시옹 : 북한 외무성이 밝힌 대로 문제는 미국의 공격에 대한 자위인가요?

브뤼노 :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먼저 공격당할 것이라는 공포 속에서 사는 망상증적인 정권의 생존입니다. 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때 김정일이 몇 주일간 잠적했던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북한 정권은 2002년 1월 부시가 자신들을 ‘악의 축’에 포함시킨 것에 특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핵무장을 강화시키도록 했을 것입니다. 미국이 최근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선언한 것 역시 핵무기 개발 결정을 확고히 하는데 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리베라시옹 : 미행정부의 적의가 실제로 핵 프로그램에 대한 국제협상으로부터 북한의 탈퇴 결정을 설명해주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 역시 북한의 작전인가요?

브뤼노 : 그 역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10년 전부터 북한은 끊임없이 의견이 바뀌어 왔습니다. 그에 따라 협상은 몇 주 혹은 몇 달간 지연되었지요. 또 하나의 가설이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즉 평양은 핵무장을 포기해도 될 정도로 충분한 외교적 경제적 ‘일괄타결(paquet)’이 토론을 통해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을 수 있습니다. 즉 북한은 미국이나 중국과의 거래가 갖는 불확실성 대신 핵을 통한 확실성을 선택하는 것이 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리베라시옹 : 어떤 ‘일괄타결’이 평양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도록 해 줄까요?

브뤼노 : 외교적인 차원에서는 정권의 합법성을 완전히 승인하고 워싱턴이 정권을 전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해주는 것입니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와 달리 북한의 변화는 부시행정부의 공식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미국에 의해 보장이 주어진 상태지요. 북한은 막대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특히 에너지 문제와 관련하여서 예컨대 원유의 공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에 있어 미국과 함께 주요 역할을 맞은 중국은 에너지 수입 전체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북한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 중국의 입장은 양면적입니다. 중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고정점(point de fixation)을 유지하는 것이 이득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의 핵프로그램이 이웃 나라들에 도미노 현상을 가져오는 것 역시 피하고 싶어 합니다. 일본의 핵무장은 중국으로선 악몽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월 10일자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일본 극우파의 아직 전면화 되지 않은 속내를 약간이나마 엿보게 해준다.

북한의 핵보유 공식 발표가 있기 직전인 오늘 오후 보수적인 동경 도지사 신타로 이시하라와 인터뷰를 가졌다. “첫 번째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경제제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 역겨운 미사일을 동경에 쏘게 하는 겁니다.” 빈정대는 목소리로 그는 동경 최고의 고층빌딩에 자리한 자기 사무실에서 말했다. “그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시킬 능력은 갖고 있질 못하니까요” 그러한 미사일 공격에 일본이 어떤 응답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단지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더불어 북한에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국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2월 11일자 독일 일간지 타게스차이퉁(Die tageszeitung)의 분석이다.

중국의 경제적 지원은 북한의 생존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중국이 지금까지 북한을 지원했던 이유는 북한의 붕괴와 그로부터 야기될 난민들을 어떻게 하든 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미국은 중국 대신 북한에 압력을 넣어왔지만 핵무기를 보유한 것이 밝혀진 이상 중국이 압력을 더욱 행사하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중국의 북한 지원이 중단된다면 부시 정부 역시 지금까지 취해온 대북한 정책이 좌초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게 될 것이다.

△ 2월 14일자 독일주간지 슈피겔의 표지 “폭탄을 가진 미치광이 - 핵무장한 북한”
2월 14일자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북한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먼저 북한이 핵보유선언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한 분석을 들어보자.

이란과 북한을 악당국가로 지명한 것은 부시가 예측하지 못한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과 영국 연합국의 침공에 거의 대응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란과 북한은 그로부터 명백한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곧 정권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한 안전책은 폭탄이라는 점이다. 폭탄만이 독재자와 독재의 실존을 보증해준다. 이란은 핵무기를 갖기 위해 서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에 도달하려면 3년에서 5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물라(이슬람 성직자)의 나라는 복잡한 게임을 시도했다. 한편으로 미국이 외교를 위탁한 유럽과 협상을 벌이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적 관심사에 대한 참견을 허용하지 않는 결의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이란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아직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권력인 미국이 위협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 근처에 어떠한 핵무장 권력도 들어서는 것을 참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해둔 바 있다. 핵생산 시설을 군사적으로 한번 공격하는 것을 선택으로 보류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바로 이란이 갖지 못한 것을 북한은 이미 명백히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역할에 대해서 슈피겔은 타게스차이퉁과 약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곧 중국이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는 것이 북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만큼이나 북한이 붕괴되어 난민들이 중국국경을 넘는 사태는 중국에게 위협이 되리라는 것이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원조에 기대어 살고 있다. 미국, 유럽, 그리고 무엇보다 남한의 생필품 지원이 없다면 북한은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하지만 서울 말고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독재자에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80%의 소비품이 북경에서 오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의) 무역상대국 제1위이다. 중국의 실권자들이 지난 몇 달간 김정일에 대해 화를 내며 곧바로 핵문제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지만 김정일은 중국의 압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하다. 그는 중국이 평양정권의 붕괴를 남한만큼이나 두려워 한다는 것을 생각해둔 것 같다. 곧 수백만의 난민이 국경을 넘어 흘러 들어가면 중국정부가 불안정해지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들을 갖고 있을까? 일단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시 타게스차이퉁의 논거를 들어보자.

부시의 전략 역시 실제적으로 군사적인 행동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북한의 핵시설을 ‘외과적’으로 손보는 것은 의문시된다. 북한의 지하시설 위치가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을 미사일로 공격하느냐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중무장한 북한 정권은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남한의 거대한 수도 서울- 남한 인구의 40%가 살고 있다 -을 재래식 포격만으로도 파괴할 수 있다. 1994년 이미 미군은 연구를 통해 전쟁 시 90일내에 5만의 미군과 50만의 남한 인이 사망하게 되리라는 결과에 도달한 바 있다.

특히 북한이 보유했다고 주장하는 핵의 실제적 위협과 관련하여서는 슈피겔이나 뉴욕타임즈 는 그 위험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는 듯하다.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이 오늘날 2개에서 6개의 단순한 원자탄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평양은 핵탄두를 미사일에 탑재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은 어느 정도 확실하다. 처음에는 일본, 나중에는 알래스카나 북캘리포니아로 그 사정거리를 넓혀갈 것인가? 그렇다면 위험경보 1단계가 발효된 셈일까? 워싱턴에 소재한 우드로우 윌슨 국제협회의 셀릭 해리슨(Selig Harrison)같은 많은 미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폭탄을 만들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아직 ‘기술적 전제’가 충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슈피겔)

미국은 북한이 최대 8기의 핵폭탄을 가지고 있지만 한 번도 핵실험을 해보진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1년 전 로스 알라모스 핵무기 연구소의 전임소장 지그프리드 헤커가 영변을 돌아보고 왔다. 명백히 북한이 그들이 가진 핵무기의 위용을 믿게 할 목적으로 미국인을 초대한 것인데, 헤커 박사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북한이 작동 가능한 핵폭탄을 만들어서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을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뉴욕타임즈)

북한 핵보유 선언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상황이 전개될 것인 만큼 중요한 분석 기사나 심층취재가 다루어질 때마다 이 난을 통해 소개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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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일본 군국주의 부활기도에 대한 민노당-조선사회민주당 공동성명

<성 명>
일본 군국주의 부활기도에 대한 민주노동당-조선사회민주당 공동성명


일본의 군국주의 야망이 그 어느 때보다 노골화되고 있으며, 영토팽창과 역사왜곡 책동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일본 당국자의 <야스쿠니신사>참배가 계속되는 속에 정부각료들과 정치인들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 망언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가 하면, 시마네현 의회는 <독도의 날>조례를 제정하였고,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범죄를 전면 부정하는 역사교과서 왜곡이 본격화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언론에 의해 감행되어온 우익보수세력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침략역사 왜곡 책동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체의 평화를 깨는 행위이다.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과거범죄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고, 침략과 약탈의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대북 적대정책을 펼치고 있는 일본의 행위는 미일동맹 하에 진행되고 있다는데 더욱 큰 위험성이 있다.

일본 군국주의세력의 영토팽창 야망 실현을 위한 움직임에 의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지금, 남과 북, 해외의 우리겨레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기도에 대해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대응하여야 한다.


민주노동당과 조선사회민주당은 전민족의 분노와 의지를 담아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독도는 역사적 견지에서나 지리적 및 법률적 견지에서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논의할 여지도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영토이며,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강점과 식민지 지배역사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침략과 약탈의 역사라는 것을 거듭 명백히 선언한다.

2. 민주노동당과 조선사회민주당은 정의와 진리를 부정하는 일본의 독도침략과 역사왜곡 책동을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침해와 모독으로, 침략역사를 되풀이 하려는 군국주의 야망의 발로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로 엄중히 규탄한다.

3. 과거범죄에 대한 사죄와 보상은커녕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이 유엔안보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단호히 반대한다.

4. 민주노동당과 조선사회민주당은 일본우익세력들의 군국주의 책동을 막고,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온 겨레가 함께 나설 것을 호소한다.

일본은 지난날 일제가 한반도를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우리 민족에게 온갖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 과거범죄를 청산하려는 우리 민족의 의지를 똑바로 보아야 하며, <독도영유권>주장과 역사왜곡을 비롯한 군국주의 부활 기도를 즉시 중지하여야 한다.

민주노동당과 조선사회민주당은 민족자주, 반전평화, 조국통일의 기치아래 연대연합을 강화하고, 6.15공동선언 발표 5돌, 조국광복 60돌, 을사조약 체결 100년이 되는 올해에 자주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는데 적극 기여할 것이다.


2005년 4월 21일 서울, 평양
민주노동당 조선사회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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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연대]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노동계급의 입장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노동계급의 입장
    노동계급의 혁명정당을 건설하자 - 부시 낙선운동은 별 의미가 없다!  <2004-09-26 오전 9:16:49>

 

 

▶케리를 지지한 촘스키. 부시 행정부의 노골적인 반동적 정책 때문에 소위 좌익 운동권의 다수가 민주당 후보 케리를 지지하겠다고 나섰다.

올해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가운데 치러지게 되었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목적은 중동의 석유를 장악하여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작년 3월 19일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전쟁에서 미군은 거의 1천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이 민간인인 이라크인 사망자는 만 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현재 미국은 구 소련 영토였던 중앙아시아 유전지대에서 시작하여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만에까지 군사기지들을 설치해 놓고 있다. "테러대전"이 주요한 유전이나 송유관이 있는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사담 후세인이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되어온 "대량살상무기"와 이라크 전쟁은 애초부터 아무 관련이 없었다.
이라크 전쟁이든 "북핵" 문제이든 어느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제국주의 부르주아 정당은 국내의 계급전쟁과 해외의 제국주의 정복전쟁에 모두 열성적이다. 그러나 현재 이라크 전쟁은 이들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미국 지배계급의 중요한 분자들은 부시 행정부의 능력과 일방적 선제공격 노선에 크게 우려를 표시하면서 케리를 차기 대통령으로 내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은 나름의 논리가 있기 때문에 케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도 부시만큼 잔인하게 이라크인들의 정당한 저항을 제압하려할 것이다.
케리는 자신의 월남전 참전 기록을 들먹거리면서 자기가 부시보다 이라크 전쟁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병력을 4만 명 더 증강시키겠다고 약속하면서 부시가 북한에 대해 좀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열을 올려왔다.
이에 대해 맑스주의자들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항해야 한다. 또한 기형화되었지만 여전히 노동자국가인 북한을 방어하고 이라크 저항세력을 군사적으로 지지해야한다. 이 군사적 지지의 구체적 형태는 노동계급의 정치 총파업이다. 이것만이 도로, 항만, 공항 등을 봉쇄하여 제국주의자들의 전쟁 수행을 실제로 파탄시킬 수 있으며 노동자 인민에 대한 자본주의 억압 질서를 뒤흔들 수 있다. 또한 맑스주의자들은 이 투쟁 과정에서 이라크 저항세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회교 근본주의자들의 봉건 반동적 성격을 폭로하고 이라크 노동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만이 전쟁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모든 해악을 일소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임을 주장해야한다.


케리의 약속: '좀더 효율적인 전쟁'

지난 해 겨울 버몬트 주의 주지사 하워드 딘은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비난하면서 민주당의 초기 예비선거에서 놀랍게도 선두주자로 등장했다. 전쟁을 반대하는 대중의 정서가 대단히 강력하다는 사실이 그의 폭발적 인기로 증명되었다. 부시의 이라크 정책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대부분의 민주당 후보들에게 이것은 대단히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민주당 지도부는 긴장하여 딘이 대통령 후보가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언론을 동원하여 케리야말로 부시에 대항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떠들기 시작했으며 언론 발을 받은 케리는 별 볼일 없는 일개 후보에서 민주당의 유일한 대통령 후보로 치켜세워졌다.
이후 케리는 이라크에서 "현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도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승인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 문제에 대해 부시와 자신을 차별화 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케리는 부시의 선제공격론과 국제사회와의 공조 부재를 들고 나오면서 부시의 이라크 정책을 공격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유엔을 통해 다른 나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좀더 세련되고 부드럽게 전쟁을 수행하여 비용을 줄일 수도 있는데 부시의 막가파식의 외교 때문에 전쟁이 미국에게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초당적인 국내 정책: 내핍과 탄압 정책

미국의 지배계급은 언제나 이렇게 떠든다: 열심히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가 미국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하게 태어난 자들은 죽을 때까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1월 5일자 [네이션]지에 따르면 1973년에서 2000년까지 미국의 상층 10%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평균 수입이 7% 하락했다. 반면 상층 10%의 수입은 148% 상승했으며 최상층을 구성하는 0.01%의 수입은 599%나 상승했다. 더욱이 부시 대통령은 올해 들어 기업이윤, 주식 배당금, 소득 등에 대한 세금 삭감을 단행하여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더욱 부채질했다.
현재 1천만 명의 미국인이 적극적으로 일을 찾고 있는 실업자이고 수백만 명은 아예 구직을 포기하거나 저임금 비정규직을 유지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미국의 [경제정책연구소]에 따르면 새로 생긴 일자리의 평균 임금은 없어진 일자리의 평균 임금보다 15%나 낮다. 이 결과 제일 나중에 고용되고 제일 먼저 해고되는 흑인들의 실업률은 2003년 6월 현재 백인의 두 배이고 이들의 가계자산의 평균 가치는 백인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민주당은 자신이 흑인과 노동자들의 친구라고 오랫동안 거짓말을 해왔다. 민주당 후보 케리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4월 16일자 [뉴욕 타임즈]지 기사에 따르면 한 접시에 2만5천 달러나 하는 모금 파티에서 케리는 자기가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민주당 후보가 아니다"라고 공언했다. 더욱이 그는 구일일 테러 이후 부시가 제정한 반민주 악법인 애국자 법을 지지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었다. 미 지배계급의 나팔수인 [뉴욕 타임즈]지는 8월 17일자 보도에서 이렇게 인정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 들어가려는 시위대를 연방조사국(FBI)이 체포하여 심문한 행위는 현 공화당 정책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이다."


'부시만 떨어뜨리면 된다'?

부시 행정부의 노골적인 반동적 정책 때문에 소위 좌익 운동권의 다수가 민주당 후보 케리를 지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화씨 9/11]의 마이클 모어 감독이나 노움 챰스키 같은 학자 등이 이들의 케리 지지를 부추기고 있다. 모어 감독이야 원래부터 민주당을 지지해온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의 영화 [화씨 9/11]이 조명 발을 받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부시를 공격하면서 민주당에게 표를 몰아주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챰스키는 오랫동안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많은 글로써 폭로해 왔으며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를 반대하는 강력한 인물이라는 평을 들어왔다. 이 때문에 최근 그가 케리를 지지하겠다고 나선 것은 의외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런던의 [가디언]지 3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 나는 케리를 지지할 것이다. 물론 그나 부시나 국내외 정책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미국 대통령직의 성격상 작은 차이도 큰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일부 기회주의적 "사회주의" 조직들은 소비자 운동가인 랠프 네이더를 지지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그런데 정작 네이더 자신은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을 옹호할 뿐 사회주의자라고 공언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양당 독재체제"로 인해 중소 자본가들이 피해를 입어왔다고 주장했을 뿐 노동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다. 이와는 전혀 반대로 그는 20년 전에 자기가 소유한 잡지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 움직임을 깬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해고당한 노동자인 팀 쇼라크는 이렇게 말했다: "네이더는 민주당원처럼 보이기도 하고 인민주의자 냄새가 나기도 하고 사회주의자인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시야가 협소한 소부르주아 도덕주의자에 불과하다. 그는 소비자 운동보다는 자기 이미지 관리에 연연하는 기회주의자요 자유주의 골수분자요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자에 불과하다"([좌익 비즈니스 업저버]지, 1996년 10월).
사실 네이더는 많은 측면에서 부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도 4년 전에 그를 지지했던 국제사회주의자들(IS)은 지금도 "그가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노동조합의 권리를 옹호하며 팔레스타인 인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사회주의 노동자]지, 9월 25일). 무늬만 사회주의자인 이들에게 네이더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주장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제국주의 군대의 즉각 철수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대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주도로 미군이 계속 이라크에 주둔해야한다고 주장해야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제국주의 국제질서를 가장 앞장서서 유지하는 기관이다. 1990년 제 1차 이라크 전쟁 이후 작년까지 안전보장이사회의 이라크 경제 봉쇄 결의안이 미국 주도로 실행되면서 50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이 기본 의약품이나 식량이 부족하여 사망했다. 더욱이 이 기간에 미국과 영국은 역시 안전보장이사회의 비행금지구역 결의안에 의거하여 주기적으로 이라크를 공습하여 이라크의 산업 시설과 인명에 대한 파괴를 자행해왔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국제사회주의자들이 네이더를 대안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냉소적인 정치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자성: 혁명적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자!

챰스키를 비롯하여 스탈린주의 미국공산당, 미국 노총(AFL-CIO)의 관료 등은 "정치의 우경화를 막기 위해 민주당 후보 케리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시가 싫다고 케리를 지지할 경우 지난 30여 년 간 한결같이 우경화 해온 미국의 정치지형을 더욱 고착시킬 뿐이다. 노동자와 인민이 양당 체제에 적극적으로 도전하지 못하고 민주당의 포로가 되어 선거 때마다 민주당을 지지했기 때문에 이제 두 부르주아 정당의 차이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부시와 마찬가지로 케리도 애국자 법을 지지했고 팔레스타인 인민에 대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의 학살을 지지했다. 또한 그는 중국, 북한, 쿠바 등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의 자본주의 복귀를 주창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점령을 올바른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의 노동자와 인민이 그나마 누려왔던 민주적 권리를 "테러대전"을 위해 정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당선되어도 부자들에 대한 세금 감면, 노동자와 빈민에 대한 내핍 정책은 계속될 것이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민주당의 클린튼은 12년 간 지속된 공화당의 백악관 주인 독점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감축하고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자가 바로 그였다. 그가 재임한 8년 간 감옥에 갇힌 죄수의 숫자는 배로 늘었으며 이라크에 대한 경제 봉쇄는 계속되었다. 이 결과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 투표자 전체의 거의 50%에 달하는 1억 명이 선거에서 기권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다"며 정치 자체를 혐오하는 증상이야말로 미국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아주 중요한 버팀목이다. 자본주의는 필요하며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개량주의자, 공화당보다는 그래도 민주당이 덜 해롭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 및 사이비 사회주의자, 사회의 모순을 온갖 환상으로 은폐하는데 여념이 없는 부르주아 언론 등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의 모순은 언젠가 폭발하게 마련이다.
자본주의는 암과 같아서 그대로 내버려두면 사회와 인간을 파괴할 뿐이다. 자본주의와 암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진보적인 사회체제를 건설하기 위해서 자본주의는 타도되어야 한다. 이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 세력인 미국의 노동계급은 우선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 조직되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통해서만 자본주의가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럴 때에만 가난, 굶주림, 질병에 시달리는 절대 다수의 인류는 자본주의 시장질서의 족쇄에서 풀려나 진정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유일한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노동계급의 가장 의식적인 분자들은 혁명적 맑스주의의 전통에 입각한 강령과 투쟁 방식을 통해 혁명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이 길을 통해서만 미국의 노동자 인민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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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대]프랑스의 주35시간노동제는 실패작인가, 위대한 성과인가?

프랑스의 주35시간노동제는 실패작인가,
위대한 성과인가?



 

얼마 전 조선, 중앙, 동아 같은 자본가언론은 프랑스의 주35시간 노동제가 가장 대담한 개혁 중 하나였으나 가장 어리석은 조치가 되고 말았다는, 영국의 대표적인 자본가언론인 ≪파이낸셜 타임스≫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5년 전 10%에 육박하는 만성적인 실업난을 해소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으나 실업률이 전혀 감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경제성장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언론은 프랑스 자본가정부가 주 35시간인 근로시간을 48시간까지 연장할 수 있는 법안을 하원에 상정해 통과시킨 것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더 나아가 지난 20년 동안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조 가입자수가 급감(영국이 50%에서 30%로 떨어지고, 프랑스는 10% 이하로 하락하고, 독일은 35%에서 20% 정도로 추락)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나날이 급증하며, 아예 ‘노조’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부드러운 음악을 연상시키는 ‘베르디’나 ‘아미커스’(친구)와 같은 온순한 이름을 쓰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고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본가언론은 서유럽 노동운동이 세계화 시대의 첨예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낡은 전투적 노동운동의 옷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데 우리나라 노동운동 또한 세계적 흐름을 읽고 그에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은근히 종용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프랑스 주 35시간제는 실패작인가? 프랑스 노동자들이 주 35시간제 폐기에 맞서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는 모습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의 노동자들은 주35시간제를 둘러싼 프랑스의 계급투쟁 및 유럽 노동자운동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며, 어디로 전진해야 하는가?


주 35시간제는 가장 어리석은 조치였는가?


자본가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2000년 당시 사회당 정부는 ‘노동시간을 10% 줄이면 추가 비용 없이 약 7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마르틴 오브리 노동부 장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안이 발효됐지만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았고, 노동시간 감축으로 인건비만 올린 셈이 돼 경기 침체를 부추겼다.” “실업률도 도입 당시 10%에서 올해 초 9.9%로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만약 일자리를 늘리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정책이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실패했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상적 수치에만 몰두하는 극히 기계적인 사고일 뿐이다. 본질을 파악하려면 문제를 더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 보아야 한다.

만약 10명이 하루 10시간씩 노동을 하고 있던 상태에서 노동시간을 5시간으로 낮출 경우 기존의 생산량을 계속 뽑아내려면 20명을 고용하면 된다. 그 경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란 정책은 성공한 셈이다.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얻어서 좋고, 그 전까지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었던 취업 노동자들은 노동의 고통을 덜 수 있어서 좋다. 노동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멋진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이런 멋진 정책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절대 아니다. 노동자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그들의 힘이 커지고, 회사가 어려워지거나 불황과 공황을 맞았을 때 해고하기가 어렵고, 노동시간을 줄인 만큼 임금을 삭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그걸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남한에서 자본가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해왔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노동자들의 압력이 거세 어쩔 수 없이 ‘노동시간 단축’을 받아들여야 할 경우 자본가들은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자본가들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다른 지역, 다른 나라로 공장을 이전시킬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하는 대신 노동강도를 높이든지 아니면 기술 혁신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길을 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노동시간은 단축’됐지만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이 경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정책은 단순히 실패작이라고 볼 수 있는가?

여기서 문제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정책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탄 낸 자본가들에게 있다. 만약 노동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면 ‘잘못된’ 정책을 채택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책에 대한 자본가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부족했던 데에 있을 뿐이다. 노동자들에게 힘만 충분히 있었다면 ‘정리해고나 실업을 유발하는 일방적인 공장이전이나 노동강도 증대’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공장이전이나 기술혁신이 필요할 경우에도 그것이 노동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그대로 유지하고, 오히려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실패작’이라는 자본가들의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적 파산자, 백치들의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주35시간 노동제는 우리 시대에 노동자계급이 쟁취한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99년 기준으로 주당 50시간이나 된다. 98년 기준으로 보면 연간 2612시간으로 OECD 29개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하루 2~4시간 잔업은 기본이고, 휴일 특근까지 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기 때문에 주당 노동시간이 70시간이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평균 주당 50시간 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은 과로 때문에 ‘40대 사망률이 세계 최고’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온갖 산재로 몸이 성한 군데가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이런 노동자들에게 주 35시간제는 ‘꿈의 노동시간제’라고 할 수 있다. 주5일, 하루 7시간만 일하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얼마나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정치, 사회, 문화예술, 국제 등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가 그대로 존속하는 한 주 35시간제가 된다 해도 노동자들이 임금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 50시간 일하던 상태와 비교한다면 삶의 질이 훨씬 더 나아질 것은 틀림없다.

주35시간 노동제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이렇게 해서 획득된 여유 시간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사상을 학습하고 노동해방의 길에 대해 토론하면서 자신을 굳건한 주체로 단련시키고 조직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가령 50시간에서 35시간으로 단축된다면, 나머지 15시간으로 노동자들은 엄청난 전진을 이룩할 수 있다. 매주 3시간 정도의 학습시간, 3시간 정도의 토론시간, 3시간 정도의 조직화와 연대의 시간을 갖고 나머지 6시간은 휴식에 투입하더라도, 노동운동은 엄청난 전진을 이룩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맑스는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노동자계급 해방의 물질적 기초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물론 조건은 있다. 노동운동이 이렇게 획득한 시간들을 자본주의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노동해방적 관점에서 이 시간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전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시간들을 퇴폐나 향락, 자본주의적 소비, 가족주의적 협소함 속으로 해소시켜버린다면 노동해방을 향한 적극적 의미는 거의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것은 노동시간 단축을 노동해방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노동해방운동의 적극적 대응이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상의 점들을 고려할 때, 프랑스 노동자들이 피어린 투쟁을 통해 쟁취해낸 ‘주35시간 노동제’는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뚜렷하게 보여준 위대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프랑스 노동자계급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살고, 노동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프랑스 자본가정부가 주35시간제를 폐기하려는 것에 대해 ‘소중한 보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심정으로 완강하게 투쟁해 왔다.


원인은 자본주의 자체에 있다!


그런데 자본가계급에게는 이 제도가 ‘악마’ 같을 수밖에 없다. 전 세계 자본가계급은 자국의 노동자계급이 프랑스 노동자계급을 본받을까봐 두려워했다. 이들은 틀림없이 프랑스 자본가계급에게 계속 압력을 넣었을 것이다. 프랑스 자본가계급 또한 주35시간 노동제가 그들의 이윤을 삭감하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끊임없이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서 그들은 인건비가 프랑스의 1/10 정도에 지나지 않는 동유럽으로 공장을 이전시키고, 노동강도를 증대시키고 기술혁신의 성과를 인력감축의 수단으로 둔갑시키는 길로 나아갔다. 그에 따라 노동시간이 ‘주35시간’으로 줄어들었지만 ‘7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기지도 않았고, 실업률도 10%에서 거의 줄지 않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노동자에게 있는가 자본가에게 있는가? 당연히 자본가에게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이로운 주35시간제를 폐기하려는 것이 그들이 원래 심성이 ‘나쁜 놈’이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도 처자식에겐 ‘좋은 아빠’, ‘멋진 남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 자본가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 질서 자체는 이들로 하여금 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착취에 나서도록 몰아붙인다. 자본가들의 가정, 기업, 부, 지위의 안정성은 노동자 착취로부터 획득되는 것이며, 이 안정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착취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을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모는,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놈’이 되지 않을 수 없게 강력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가 촉진되면서 기업 간, 정부 간 경쟁은 더욱 격화됐다. 기업들은 피 말리는 시장쟁탈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건비 절감에 목을 매고 있다. 각 나라는 자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법정 노동시간을 늘리며, 각종 혜택을 주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프랑스 자본가들 또한 이렇게 격화되는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낮은 인건비, 더 고분고분한 노동자들을 찾아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려 한다. 프랑스 자본가들이 동남아 지역으로 공장을 이전시키려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한국 자본가들이 한국 노동자 평균 임금의 1/10도 안 되는 값싼(중국 6~12만원, 북한 7~10만원) 노동력을 찾아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듯이 프랑스 자본가들도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프랑스 자본가정부가 노동시간을 주35시간에서 주48시간까지 늘리려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만약 노동자계급의 반발이 거의 없다면 프랑스 자본가정부는 노동시간을 60, 70시간으로까지 늘리고, 임금을 지금의 70%, 60%까지, 아니 20~30%까지 로도 낮추려 할 것이다. 한마디로 자본과 정부의 이윤욕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

만약 기업들이 ‘온정적 태도’로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 상대적으로 짧은 노동시간, 강한 노조를 감수한다면 어떤 일이 기다리겠는가? 그것은 약육강식의 경제적 정글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부가 反기업정책을 강하게 펼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있는 기업들은 모두 해외로 빠져나가고 새롭게 들어오는 기업은 전혀 없어서 자본주의 국가경제가 무너져버릴 것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공장이전을 모색할 수밖에 없으며, 자본가정부는 공장이전을 막고, 자본가들의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 노동시간 연장, 임금 동결 및 삭감, 노조 무력화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과 정부가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이다. 그들에게 다른 것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가서 고기를 얻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을 뿐이다.

나날이 격화되는 경쟁, 강화된 착취가 본질적 특징인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한 상태에서라면 노동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경쟁에서 자기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고분고분 협조하는 것이다. 유럽의 대다수 노동조합들은 지금 그런 길을 가고 있다. 베르디, 아미커스(친구)라는 부드러운 이름을 쓰는 것은 노조가 자본가들에게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온순한’ 애완견 같은 태도를 취해 주인의 시혜를 받아 노예로서 계속 살아남겠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일자리가 최우선이기 때문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복지를 양보하겠다. 임금삭감, 연장근로도 OK'라고 하는 것도 모두 그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한 아무리 전투적인 노조라도 빠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운명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엔 살아남는 길이 아니라 더 빠르게 죽는 길이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 모든 회사의 노동자들이 고분고분 자본가들에게 복종할 경우, 격화되는 경쟁, 강화된 착취의 송곳이 노동자들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하게 외쳐야 한다. 대안은 오직 노동해방에 있을 뿐이라고.

우리는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주35시간 노동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겨냥한 공장이전 위협에 적극 투쟁하지 못하고, 노동강도 강화를 저지하며, 기술 발전의 성과를 노동자 자신의 것으로 쟁취하기 위한 더 적극적인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노동해방으로 상승시키기 위한 변혁적인 과업에 적극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 투쟁하는 프랑스 노동자들이 있다!


자본과 정권에 맞선 투쟁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노동자들,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온 온순한 노동자들은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받고도 투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생존권이 눈앞에서 강탈당하는 것을 본 많은 노동자들이 단결과 투쟁의 길에 나서기도 한다. 특히 투쟁의 전통이 있고, 노동자의식이 살아있는 곳에서는 자본의 공격이 거셀수록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 더욱 강하게 일어난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스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이번 주35시간제 폐기에 맞서 완강하게 투쟁했다. 2월 5~6일 주말에 프랑스 노동자들 50만 명이 ‘법정 근로시간을 주35시간에서 최대 48시간으로 늘리고’, ‘시간외 초과근무 제한도 연간 180시간에서 220시간으로 완화’하는 법안에 대해 격렬한 거리시위로 저항했다. 파리에서만 9만 명이 모일 정도로 열기는 상당했다.

이런 투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1995년 ‘뜨거운 겨울’을 기점으로 지난 10년 간 계속돼 온 공공서비스를 둘러싼 투쟁의 일부다. 1995년 당시 쥐페 자본가정부는 연금을 개악하려는 도발을 감행했다가 3주간에 걸친 거센 파업과 시위의 물결에 밀려 결국 개악안을 철회해야 했다. 그 뒤 프랑스 노동자들은 굴곡을 그리면서도 계속 투쟁을 전개해왔다. 대표적으로 2003년에 프랑스 자본가정부가 공격범위를 좁혀 교사들의 연금을 깎으려 하자 전체 교사의 절반 이상이 파업에 참가할 정도로 대규모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올해 1월에도 프랑스 전역에서 정리해고, 임금 삭감 등에 반대하는 행동 주간의 일환으로 우체국, 철도, 학교, 병원, 공무원 노동자 30만 명 정도가 투쟁을 전개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노동해방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한국의 자본가언론은 대단히 선정적으로 프랑스와 유럽노동운동에 대해 쓰고 있다. “문패 내리는 서구 강성노조”, “힘 빠진 서유럽 노동조합”, “유럽노조 강성은 옛말” 같은 선정적인 문구로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본가언론이 주장하려는 바는 ‘강성노조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므로 한국 노동운동도 전투성을 완전히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날로 첨예해지는 세계경쟁이 서유럽 노조운동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은 사실이며, 많은 서유럽 노조들이 그 압력에 굴복해 더 후퇴하고 있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런 서유럽 노동운동이 일방적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유럽 노동운동은 양극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자본주의의 경쟁압력에 굴종하는 노동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압력을 정면으로 거스르고자 하는 노동자들 또한 있다.

굴종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연장, 임금삭감안을 받아들이는 동안,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굴종하는 노동자들이 노조 이름을 포기하고 ‘친구’(아미커스)와 같은 온순한 이름으로 변신하는 동안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자’, ‘노동조합’이란 당당한 노동자의 이름을 쟁취하고 굳건히 사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한국의 특수고용직 노동자들, 공무원 노동자들을 보라).

노동운동이 패기를 잃었을 때 젊은 노동자들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기에 그 노동운동은 더욱 하락하게 된다. 반면 노동운동이 패기와 활력을 갖고 있을 때 젊은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희망을 찾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굴종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경쟁에 길들여지고 있는 동안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연장, 정리해고, 임금삭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프랑스의 한 우체국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우편 업무를 기업식으로 바꾸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체국만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이윤만이 중요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 다른 한 교사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윤을 위해 돈을 쓸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필요를 위해 돈을 쓸 것인가이다.” 또 다른 한 간호사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라파랭[프랑스 총리]은 ‘거리 투쟁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왜 안 되는가? 우리는 다수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라파랭은 사장과 은행가들을 위한 정치를 원한다. 우리는 그것을 반대한다.”

물론 프랑스에서 파업과 시위를 이끌고 있는 노총들에는 관료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이 관료들은 자본과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거대하고 강력한 연대파업을 작고 고립분산적인 단사별 파업으로, 파업을 시위로, 시위를 평화적인 캠페인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아직 비록 힘은 충분하지 않지만 이러한 관료들의 파업파괴에 맞서면서 현장에서부터 노동자대중의 투쟁을 성실하게 일구어내고, 조각난 단사 투쟁을 동아줄로 튼튼히 묶어내며, 투쟁의 요구를 확대하는 노동해방 투사들이 있다. 더불어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노동자투쟁을 자본주의 자체에 맞선 투쟁으로 발전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노동해방 투사들이 있다. 프랑스 노동운동의 미래는 결국 이 노동해방 투사들이 얼마나 올바른 정책과 헌신적 노력으로 지금의 투쟁을 이끌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전 세계 자본가계급은 “프랑스 주 35시간 노동제는 실패작”이라고 선언하며 전 세계 노동운동을 미친 듯이 공격해대고 있다. 이에 맞서 전 세계 노동자계급은 “프랑스 주35시간 노동제는 위대한 성공이었다. 우리는 이제 이 계급투쟁의 성과물을 온몸으로 사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주 35시간제를 폐기하고 노동자를 지옥으로 떨어뜨리려는 자본가계급을 쓸어버리고 노동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더 거대한 해일이 되어 휘몰아쳐가야 한다.”고 화답하고 이를 행동으로 입증해야 한다. 가라, 자본가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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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창립 선언문

'이론동인' 창립 선언문

이론  제1호
이론

진보진영이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적으로 신보수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로 표상되는 지배 세력의 공세 앞에서 진보진영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지난 수년간 격변해온 국내외의 실천적, 이론적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의 진보적 이론진영도 커다란 동요와 혼란을 겪고 있다. 실천진영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진보적 이론과 실천 속에서 부쩍 강화되고 있는 청산주의적 경향이 그 위기의 심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이 맞고 있는 위기가 다른 곳에서와 똑같은 양상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위기의 보편성과 현실성을 냉정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위기의 인정이 노동해방, 인간 해방을 위한 이론과 실천에 간직된 위대한 전통의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계승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위기 속에서 해방을 향한 역사의 새로운 순환을 준비하고, 이를 위한 이론적 작업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려고 이렇게 모였다. 최근의 이론적 정세에 대해 일단의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우리는 자신의 나태와 무능을 새삼 반성하면서도,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현재의 논쟁 지반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며,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보수화 및 반동화의 거센 물결을 막아내는 일에 일조하고자 한다.
진보적 이론의 외연과 내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며, 진보적 학문의 개별 분야를 뛰어 넘어 스스로를 '이론동인'으로 조직하든 우리는 현 상황에서 해낼 수 있는 주요한 공동 작업 형식으로서 동인지 『이론』을 창간한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진보적 이론 연구의 수준을 한층 더 높이고,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한층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992년 3월 21일

강내희 강명구 김기원 김세균 김수행 김재기
서관모 손호철 윤소영 이세영 정성진 정영태
정운영 정춘수 최갑수 최종욱 허석렬 홍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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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노동연대의 필요성 - 박준식

동북아 노동연대의 필요성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 네트워크는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다. 이 네트워크 속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정보이며, 그 다음이 돈이고 물건과 서비스와 공장들이다. 정보와 돈과 물건과 서비스와 공장들을 수시로 갈아 내우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네트워크의 중추 신경은 ‘글로벌 기업’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시간과 공간은 글로벌 기업들이 열어가는 네트워크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어가고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 속의 노동

더욱 놀라운 것은 네트워크의 이동 속도이다. 정보와, 돈, 물건, 서비스, 공장, 그리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점점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이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국민국가라는 정치적 공간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들이 세계적 생산 공장과 설비를 건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3년 정도면 충분하다. 이들보다 몸집이 훨씬 작은 중소기업의 공장과 설비를 이전하는 데에는 1년이면 족하며, 금융기관들이 사무실을 이동하는 데에는 1개월로 모든 작업이 마무리될 수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가장 이동 속도가 느린 것은 사람이다. 이른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인적 자원의 풀로부터 떨어진 사람들일수록 그들의 이동 속도는 늦어진다. 바로 이 속도의 차이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주도하는 기업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물자와 정보, 자금과 공장은 수시로 이전 가능하지만, 노동력은 같은 속도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동의 지역간 격차가 발생한다. 이러한 격차는 자본간 경쟁을 노동간 경쟁으로 전환시키는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 시장과 노동시장을 찾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존엄성과 고용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은 손쉽게 국경을 사이에 둔 노동자들 간의 피를 말리는 경쟁으로 탈바꿈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 노동-자본 ‘불균형’의 표본

오늘날의 동북아시아 지역은 이동하기 힘든 노동력과 이동이 자유로운 자본의 불균형이 만들어내는 고용과 삶의 위기를 보여주는 표본실이다. 버블 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한 일본에서는 지난 10여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기업들이 일본을 떠났으며, 이제 그 바톤을 한국이 이어받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본격적인 수교와 경제교류가 시작된 이후 진행된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 더욱 큰 탄력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동북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경제 구조의 엄청난 변화는 이 지역의 노동자들 모두에게 전례 없는 도전이 되고 있다.

동북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 통합으로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고용 위기와 오늘날 중국 의 노동현장에서 자행되는 저임금과 노동착취의 현실은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동일한 현상의 서로 다른 표현형들이다. 동북아 경제의 새로운 재편성은 한국사회의 고용문제, 노사관계, 경제 체제를 조만간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로 전환시킬 것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새로운 경제와 고용 환경에 대한 노동의 대응이다.

연대의 시야 넓혀야 할 때

동북아 지역에서 노동이 처한 위기를 감안할 때 ‘동북아 노동 연대’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로 볼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지역에 고정되어 그들만의 시각에 머물러 있는 노동 조직들이 최소한 동북아 지역에서 새로운 유대 관계를 확장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노동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 지역의 노동자들은 끝없는 상호 경쟁의 기제로부터 헤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을 둘러 싼 동북아 지역에서는 경제적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전개됐다.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이처럼 빨리 될 것으로 전망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우리나라의 공장들은 한 해에 수 백 개씩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경제 지리 구조 변화에 대한 노동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취약한 편이다.
 
동북아 지역의 노동자들이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서로를 잡아먹는 최악의 경쟁체제에 끌려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확장된 사회적 연대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준식 한림대 교수, 사회학  jsp@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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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책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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