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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로치에바친다③ <티켓>, 켄 로치의 행복한 판타지

<티켓>, 켄 로치의 행복한 판타지
켄 로치에 바친다 ③
2006.11.09 / 원신연 (영화감독) 

<가발> <구타유발자들>을 만든 원신연 감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켄 로치의 영화로 그가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티켓>을 꼽았다. 더불어 자신의 단편 <빵과 우유>에 관한 사소한 오해도 덧붙인다.



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로 들끓던 2002년 봄. 서울의 한 독립영화제작집단 사무실에 도둑이 든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도둑은 재빨리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도둑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일명, 비디오테이프 도난 사건. 그 당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주면 절대로 받지 못한다는 아주 근거 있는(?) 의식들이 팽배해 있었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남다른 시선으로 그린다는 켄 로치의 소문을 접한 도둑은 그의 영화에 극도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 켄 로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체계적으로 영화 공부를 하지 못한 나를 가르치던 영화 스승은 바로 현실이었고, 그 현실을 반영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영화들은 날 진화시키던 유일한 활력이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도둑질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켄 로치의 유혹으로 인해 도둑이 된 내가 그때 훔쳐 본 작품은 철도 노동자들의 일상을 코믹하게 다룬 켄 로치의 2001년 작품 <협상가들 The Navigators>이었다. 철도 노동자들의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낸 켄 로치의 협상가들은 아프지만 푸근했고 익살스럽지만 가슴이 시렸다. 이후 난 자연스럽게 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켄 로치는 자신이 쌓아 올린 영화적 명성만큼 그 시선 또한 고집스러운 것으로 유명하다는 걸 영화로 증명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두 중년 실업자의 해프닝을 그린 <레이닝 스톤>(1993), 미국 로스엔젤리스에서 실제 일어난 환경 미화원 노조 결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빵과 장미>(2000), 켄 로치가 유일하게 만든 달콤 쌉싸래한 멜로영화 <다정한 입맞춤>(2004), 이탈리아 출신 감독 올미, 이란의 거장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만든 옴니버스영화 <티켓>(2005)까지, 내가 접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모두 하층민들의 일상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소위 할 말을 하는 영화들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중에 이것 하나가 있다. 내가 2003년에 만든 단편영화 <빵과 우유>가 켄 로치의 <빵과 장미>에 대한 헌사로 알고 그것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몇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원고 청탁을 하던 기자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빵과 우유>는 <빵과 장미>에 대한 헌사가 아니다. <빵과 우유>는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고 아직도 노동의 꺼리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헌사다. 켄 로치가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티켓>에 대한 헌사라면 모를까? 로마에서 열리는 유럽 챔피언스리그 축구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로마행 3등석 기차에 오른 스페이스 맨, 제임스, 프랭크는 베컴의 이름이 새겨진 붉은색 유니폼을 걸친 알바니아 소년을 만나게 된다. 청년들은 자신들을 용감한 스코틀랜드 청년이라고 소개하며 배고픈 알바니아 소년의 가족들에게 친절을 베푼다. 하지만 잠시 후 제임스의 열차 티켓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청년들은 알바니아 소년이 제임스의 티켓을 훔쳐갔을 거라 의심하며 알바니아 소년과 가족들을 도둑으로 몰아간다. <칼라 송>(1996) 이후 켄 로치와 함께 작업해온 폴 라베티가 각본을 썼고, 역시 켄 로치의 <달콤한 열여섯>(2002)으로 데뷔했던 세 소년이 스코틀랜드 축구팀 셀틱의 열혈 팬으로 출연하고 있다. 다른 두 감독의 작품과 비교해 켄 로치의 작품이 그 <티켓>이라는 제목에 가장 부합하고 있다.

<빵과 우유>에 홀로 등장하는 노동자는 힘겹게 열차를 지켜낸다. 그 노동자가 지켜낸 기차 속 인물들이 고스란히 타고 있는 듯한 옴니버스영화 <티켓>은 단순하지만 따뜻하고, 정치적이지만 소박한 영화다. 3등석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켄 로치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개인적으로 켄 로치의 영화 중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다. 내가 목격한 <티켓>은 배려에 관한 영화였으며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는 희망의 영화였다. <티켓>에서 켄 로치는 쓸데없는 감정을 불어넣지 않는다. 감정은 사람 안에 자연스럽게 생동하며 생동하는 감정은 보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티켓>은 빠르고 유쾌하지만 여백이 느껴지는 영화다. 시끌벅적 요란스럽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면 머릿속에 하얀 여백이 만들어진다. 켄 로치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만들어진 하얀 여백 안에 뭔가를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만들뿐이다. <티켓>은 거친 협곡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이제 막 날이 새고 있는 아주 잔잔한 새벽 바다를 만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길고 긴 여정의 끝에 서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해가 떠오르길 희망하게 만드는 바로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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