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12/30
    2006년 연말 소망 /김영진(FILM2.0)(1)
    피에로
  2. 2006/11/10
    형식주의에 대한 켄 로치의 입장
    피에로
  3. 2006/11/06
    쏘련 영화제작의 출발
    피에로

2006년 연말 소망 /김영진(FILM2.0)

FILM2.0

Column - 김영진의 러프 컷

 

2006년 연말 소망

2006.12.29 김영진 편집위원

 

 

연말을 맞아 신문사 영화담당 기자들의 전화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한 해 동안의 한국영화를 총평해달라는 것이다. 하나 마나 한 소리로 그들의 노동에 보탬을 주지도 못하면서 여하튼 올해는 별로 재미가 없는 시기였다고 생각했다. 평가할 만한 영화들은 꾸준히 공개됐지만 한국영화가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는 생각이 유난히 강하게 들던 한 해였다. 혹시 지난 몇 년간 한국영화가 보여준 대단한 성장세의 착시현상이 예술적으로 운이 좋았던 게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상대적으로 너무 많은 편수가 제작됐고 그만큼 어이없는 영화의 층이 두터워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연말을 맞아 타의에 의해 한 해를 결산하면서 왜 한국영화에 점점 열정이 떨어지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이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잔소리라고 여겨지고 면역이 생겨버린 탓에 하는 사람도 절실하지 않으니 듣는 사람은 오죽하겠느냐는 체념마저 생긴다. 수년 전부터 극장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기회가 날 때마다 떠들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과도기이니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올해는 <괴물>로 독과점 문제가 정점에 올라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영화계의 반응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기양양하게 현재의 질서를 즐기는 시장의 승리자들도 있을 것이다. 또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머지않아 시장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도 작금의 비정상적인 유통질서에 크게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은 모기 목소리만큼이나 영향력이 작아진 평단과 중년남자의 머리카락 숫자보다 많이 존재하지만 앵무새처럼 비슷한 소리를 되뇌는 상당수의 기자들을 무시하면서 역시 대중은 좋은 영화를 알아준단 말이야, 라며 흐뭇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제작비에 육박하는 마케팅 예산을 쓰고 5백만 관객 이상을 동원할 목표치로 광역개봉 방식을 택하는 것은 불문율이 됐다. 대박영화가 아니면 쪽박을 차겠다는 배수진이 대다수가 감내해야 하는 규칙이 됐다. 살금살금 관객의 호응을 얻어가며 장기 상영하는 사례 따위는 이 땅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됐다. 누가 먼저 대중의 관심을 끄느냐에 사활을 거는 이 시장은 불행하게도 너무 좁다. 단 한 번의 승부로 모든 것이 결정 난 끝에 하루 이틀 사흘 안에 영화의 흥행이 결정되고 나면 1등한 영화 외의 다른 영화들은 처분날짜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상품 회전율을 높이기 위한 멀티플렉스의 경영방침에 따라 좌판은 언제든지 신축성 있게 바뀌고 모든 것이 1등한 영화 위주로 돌아간다. 어제 개봉한 영화를 내일 극장에 가보니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뉴스감도 못 된다. 저마다 일등을 노리며 제작된 영화의 물량이 120편에 달했던 올해는 매주 두세 편의 한국영화가 불나방처럼 경쟁에 뛰어들었다 대다수가 나가떨어졌다. 이런 시장이 오래 지속된다는 게 이상하다. 따라서 이미 거품이 꺼질 기미가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영화사업 자체가 원래 위험성이 크고 도박성이 있는 것이지만 이 사업의 재미는 영화 자체의 힘으로 때론 예상치 않은 흥행을 거두기도 하는 데 있다. 또, 이 도박성 사업의 매력은 때로 질 줄 뻔히 알면서도 배팅을 하는 배짱이 용납이 될뿐더러 미담이 되기도 하는 분야라는 데 있다. 십수 년 전 지금은 한국영화의 주류가 된 젊은 영화제작자들이 막 충무로에서 자리다툼을 벌일 즈음엔 나름대로 각자 다른 방향에서 서로 모험을 벌인 측면이 있었다. 아직 산업화가 덜 된 탓인지는 몰라도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브랜드를 갖기를 원했다. 요즘에는 좋은 영화니, 예술영화니, 저예산영화니 하는 것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좋은 영화를 만들었네요, 라고 덕담하면 장사가 안 될 줄 알고 낙담하는 기묘한 반응이 목격된다. 이제 이 판은 누가 더 삼삼한 영화를 갖고 있는가, 누가 더 선수들끼리 봐서 부러운 영화를 만들었는가를 가늠하는 도박꾼들의 세계가 아니라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누가 더 한판 화끈하게 몰아갖느냐가 관심사인 시골장터의 투전판 같은 곳이 돼버렸다. 더 많은 판돈을 걸고 이긴 사람이 몽땅 판돈을 가져가는 이 판에서는 구력도 소용없다. 다른 곳에서 더 많은 돈을 ‘땡겨’ 한판 지르려는 투전판 심리가 더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든 잘 돼가려면 일급 전문가들이 잘 먹고 잘 살거나 최소한 작품 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구조는 돼야 한다. 영화계라면 좋은 영화, 품질이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이 잘 되는 사례를 거듭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싸이더스의 대표인 차승재는 젊었을 적 딱히 대박영화를 내는 제작자가 아니었는데도 충무로의 신망을 얻었고 그의 제작사 우노필름은 대중들로부터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았다. MK픽처스의 심재명 이사도 명필름 시절 민활한 기획력으로 대중의 신뢰를 받는 제작자였다. 이들의 영화는 고만고만한 영화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뚝 광채를 내는 뭔가가 있었다. 요즘은 누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어떤 브랜드 가치를 키워가고 있는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시장의 승리자들은 있겠지만 공적으로 영화의 가치를 말하는 목소리는 여간해서 듣기 힘들다. 비평적 상징 권력이라는 것은 길거리에 버려도 주워가질 것이 못 되었다. 홍상수가 한때 이 나라 젊은 영화과 대학생들의 우상이 되었던 것은 그의 영화가 흥행 성적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홍상수의 영화는 좋은 영화라는 상징적 권력만으로도 충무로에서 상당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영화인들의 존재요건이 아니다. 불과 십여 년 사이에 한국영화는 모험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돈이 많이 들어간 대다수 영화의 모험이 실패로 돌아간 탓도 크겠지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투자와 극장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대자본에 대해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시스템 탓도 크다. 영화인들은 그들의 전문성을 바깥의 투자자들에게 인정받는 데 실패했으며 투자자들과 매니저들의 입김에 휘둘리는 피고용인 비슷한 위치로 전락했다. 성공한 영화제작자들 가운데 투자배급업자들과 비슷한 위치에 오르고자 한 시도는 많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투자배급업계의 큰 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영화산업은 제작자들보다 배급업자들의 권력이 센 곳이 돼버렸다.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흥분보다는 대차대조표에 따른 계산만 있는 곳에서 영화의 멋은 풍겨날 수 없다. 올해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졌던 영화들 가운데 <가족의 탄생> <구타유발자들> <강적> <삼거리 극장> <망종> 등의 영화는 꽤 신경 쓴 타협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찍 버려졌다. (그런 점에서 <가족의 탄생>에 작품상을 주고 여타 정당하게 주목받지 못한 영화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의 투표결과는 떠들썩한 연말의 각종 시상식 결과 가운데 가장 나름의 개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타를 캐스팅하고 상당한 마케팅 예산을 투여했는데도 소모적인 일회성 개봉주기에 맞춰 재단하는 것은 자원낭비에 가까운 재난일 것이다. 성공이라고 말하기엔 멋쩍지만 그럭저럭 주목을 받은 <짝패> <비열한 거리>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등의 영화도 감독이나 배우의 브랜드 가치에 의존해 아슬아슬하게 시장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문제는 이런 영화들이 시장에서 실패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타협의 산물로 극장에 걸린 것인데도 충분히 음미될 만한 여유 없이 소비된다는 데 있다. 좋은 영화를 논하고 기억할 수 있는 우리의 문화적 체험의 폭도 자꾸 협소해져 간다. 어디서나 시장이 원하는대로 해야 한다는 시장주의자들의 주장이 대세를 잡는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되었지만 공공성의 확대라는 근대적 이념의 부실함은 곧 장기적으로 그 사회의 공동체적 기반을 갉아먹는다. 돈이 되는 것만 모두 우르르 쫓아가는 사회에서의 미래적 비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영화문화는 불행하게도 기존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첨예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곳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감성을 지닌 창작자들과 관객은 존재의 기반을 아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건 모든 이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이제 영화 자체를 말할 것이 아니라 영화를 둘러싼 수용 소비 환경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형식주의에 대한 켄 로치의 입장

 

“내용이 스타일을 결정해야만 한다. 영화는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카메라와 카메라의 스타일이 그것이 기록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보다 중요해져서는 안 된다.”

 

그의 영화의 내러티브는 철저히 현실적인 내용,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교훈적 패배의 역사' 그 자체이다. 지금껏 몇몇(왜냐하면, 스스로 좌파라 자칭하는 이들은 많지만, 엄밀히 따져서 '영화적으로' 좌파인 감독은 별로 없다.) 좌파 감독들이 영화로 투쟁하려했지만 켄 로치처럼 '투쟁'다운 투쟁을 하고 있는 감독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위의 사진을 찍은 카메라는 의도적이었던 것일까? 그들은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허.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촬영중인 켄 로치와 촬영 staff들.)




투쟁하는 작가주의의 최전선 켄 로치에 바친다 ④
[필름 2.0 2006-11-09 18:50]

현재의 감독 중 가장 실천적인 사회주의 감독 켄 로치는 역사적 거울을 통해 지금 노동계급의 우울과 좌절을 토로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구의 편에 서는가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역사가의 태도! 1995년, 켄 로치가 <랜드 앤 프리덤>을 완성했을 때 세계는 논쟁에 빠져들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둘러싼 미학적, 문화적 담론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는 1939년 실패로 각인된 스페인 내전에 관한 배반과 분노에 대한 기록이었고, 영화가 개봉되자 스페인 극장가에서는 관객들의 자발적인 토론이 형성되는 진풍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려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스페인의 역사는 망각의 늪으로부터 깨어나고 있었다. 한 평자가 켄 로치에게 왜 당신의 관심이 영국 노동계급으로부터 스페인으로 이전되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의 답은 명료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우리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감독으로서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역사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그것을 민중들에게로, 본연의 그들 것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 대답처럼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가 이미 <랜드 앤 프리덤>에서 보여줬던 역사가의 시선과 태도로 다시 한 번 무심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역사적 무대는 1920년 아일랜드다. 학살과 고문, 죽음과 고통으로 넘쳐나는 그곳에서 켄 로치는 스페인 내전의 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총을 들고 게릴라 투쟁의 한 전장으로 돌진한다. 그런 점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랜드 앤 프리덤>의 거울처럼 보인다. 전문 배우들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이 보여주는 역사적 한 순간들은 마치 뉴스릴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생생해 숨이 막히고, 조바심 쳐진다. 켄 로치의 태도와 방법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게릴라 전투의 소름끼치는 순간들이 지나가면, 역시나 예의 기나긴 토론들이 벌어진다.

내부의 적! <랜드 앤 프리덤>이 파시즘이라는 거대한 적을 넘어 좌파연대 그 내부에서 발생했던 균열과 종파주의에 대해 질문하고 반성했던 작품이었던 것처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역시 그들이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러나 대답은 역사적 아이러니로 돌아온다. 거대한 적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을 둘러싼 내부에서 발생한다. 한때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투쟁을 함께했던 형제들은 노선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살육하는 끔찍한 비참으로 치닫고야 만다. <랜드 앤 프리덤>의 마지막 장면이, 스페인 내전의 역사로부터 현재의 런던 시점으로 넘어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손녀딸이 스페인의 붉은 흙과 수건을 손에 쥐고 번쩍 쳐들며 새로운 연대와 희망을 상기시켰던 것임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번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보게 될 마지막 장면의 숨 막히는 암울함과 절망은 적이 당황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2000년대에 들어선 켄 로치의 영화적 행보에서 이미 목격된 것이기도 하다. 영국 철도산업 민영화 이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동료의 죽음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죄의식으로 관객의 마음을 짓눌렀던 2001년 작 <네비게이터>나, 세상에서 버려진 빈민가 아이가 결국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을 보여줬던 <스위트 식스틴>에서 우리는 이미 켄 로치의 비탄을 경험한 바 있다.

 

비극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즉 영국의 대처리즘 그리고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주도된 레이거노믹스 등으로 불리는 이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은 전 세계 노동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그것은 비단 실업과 구조조정이라는 작업장의 첨예한 생존권 싸움을 넘어 우리의 일상으로 표면화되고, 문화와 가치들로 회귀한다. 이에 저항하는 문화적 표상들의 싸움은 몹시 고립되고 외로워 보인다. 거의 모든 영화들이 폭력과 쾌락과 상품가치의 스펙터클에 포획돼 있을 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작가주의이자 좌파적 노선에 선 이들은 극히 적었다. 프랑스 노동계급의 삶을 드러내는 로랑 캉테나 알랭 기로디, 그리고 유럽의 변방 벨기에에서 역시 희망 없는 노동계급의 심리적 갈등과 윤리적 고뇌를 포착하는 다르덴 형제들처럼 그들은 매우 제한적인 이름들이다. 그나마 ‘세계 영화제’라는 특수한 시장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들의 영화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영국 내부로 들어갔을 때조차도 켄 로치의 이름은 독보적이다. 물론 마이크 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노동계급의 보다 깊은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건조함과 해방구 없는 절망 그 자체를 소묘한다.

그리고 이들과 다른, 이상한 또 하나의 트렌드가 있었다. 이른바 사회적 드라마라 불릴 만한 일련의 영화들은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를 비롯해 <풀 몬티> <브래스드 오프>처럼 영국 키친 싱크의 후예임을 자처함과 동시에 대처리즘의 폭력으로 시작된 80년대 영국사회의 비극을 유머와 로맨스라는 장르적 방식으로 흡수한다. 이중에서도 스티브 달드리의 이력은 흥미롭다. 그는 1984년 영국 탄광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던 바로 그 순간, 노동자들 곁에 선 증언자였다. 이 시기 켄 로치가 ‘1984년 파업에 동참한 탄광 노동자들의 노래, 시, 그리고 경험’이라는 부제의 다큐멘터리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Which side are you on?>를 연출하고 있었다면, 그는 연극 <돌이킬 수 없다 Never be the Same>로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고 있었다. <빌리 엘리어트>는 바로 그러한 경험에서 탄생한 영화였다. 그러나 그가 켄 로치와 다른 점은 그 기억과 경험을 영국식 장르라는 상업적 타협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은 탄광 출신의 소년이 성공해 화려한 발레 데뷔전을 치르는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싸움은 처절하게 패했고, 심지어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영국식 사회 드라마 영화들은 그 실패와 비참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유머와 해피엔딩으로 봉합한다. 켄 로치의 진정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단순함의 미학! 켄 로치를 폄하하는 평자들의 주요 논지는 그가 형식에 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허한 비판은 어느 누구보다도 형식 그 자체에 대한 자의식과 철학을 가진 그의 응답 아래 무가치해진다. “내용이 스타일을 결정해야만 한다. 영화는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카메라와 카메라의 스타일이 그것이 기록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보다 중요해져서는 안 된다.” 결국 그는 1969년 <케스>를 연출하며 만난 촬영감독 크리스 멩게스와 제작자 토니 가렛 등과 더불어 ‘꾸밈없고 소박하고 진지해지기 위한 가장 단순한 프레이밍’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설정한다.

사회주의자임과 동시에 원칙주의자인 켄 로치의 이러한 실천은 일회적인 작품들로만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길게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를 통해서도 하나의 실천적 궤적을 형성한다. 60년대 프리시네마 세대와 더불어 등장한 그는 지금껏 여전히 노동계급의 일상을 소묘하면서도 그 안에 배태된 사회구조의 모순과 폭력을 성찰한다. 그러한 여정이 변별점을 경유하게 되는 지점은 1995년에 연출한 <랜드 앤 프리덤>으로부터 <칼라 송> <빵과 장미> 등을 통하면서다. 영국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노동계급의 현실을 다루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스페인 내전의 역사로부터 식민지 니카라구아의 상흔으로, 그리고 첨단 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의 심장부 미국으로 넘어가 외국인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참여로 이어졌다. 이른바 새로운 인터내셔널리즘의 이러한 실천은 그러나 2000년대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블레어 정권의 영국에서 좌초되는 것처럼 보였다. “블레어 정권은 친미적이고 친자본적인 새로운 보수주의자”라는 그의 단언처럼, 그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행하는 살육을 영국이 여전히 아일랜드에 행하는 폭력으로 비유한다. 1990년에 연출한 <히든 아젠다>에 이어 두 번째로 아일랜드 문제를 전면화한 이번 작품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그는 다시금 역사가 현재를 돌파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상기한다. 그러나 돌파구 역시 단순하지 않음을 그는 안다. 그는 아마 이 영화를 연출하며 이 말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혁명에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더욱 힘겨운 문제는 혁명의 성공 그 이후에 닥쳐올 것이다.” 그가 베스트 영화로 손꼽는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에 나오는 한 혁명가의 말이다. 적은 거대한 괴물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에 익숙해지고 닮아가는 우리들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정지연(영화평론가)

기사제공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쏘련 영화제작의 출발

1908년 프랑스의 파테사가 [돈의 코자크병들]을 시작하면서 부터. 같은 해 최초의 러시아 영화 촬영소가 모스크바에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모든 필름의 공급과 장비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계속 수입되었다. 1917년  제정러시아 말기까지는 모스크바에 주요한 중앙 제작시설을 둔 20명 이상의 제작자가 생겨났다. 그렇다 할지라도 국내영화보다는 외국영화가 더 많이 상영되었다.

제정러시아에서 영화는 마치 다른 곳에 위치한 것처럼 대중적인 예술이 되지 못하였다. 극장도 별로 없었고, 표는 비쌌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영화관에 갈 능력이 없었다. 높은 문맹률은 인쇄된 자막을 일반적으로 부담스럽게 만들었고, 러시아 무성영화의 문학적/연극적 경향은 교육받은 중간계급에 영화를 한정시키는데 더욱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필름 다르 나 아돌프 주커의 유명한 연극 속의 유명 배우들과 다소 유사한 러시아 영화의 고도로 연극적인 전통은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ㅇ며 미국의 필름 보관소에 있는 몇몇 예들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더러 예외는 있지만 볼셰비키 혁명 후에, 대부분의 영화 제작자와 배우들은 가져갈 수 있는 모든 장비와 필름을 가지고 외국으로 떠났다.

교육상인 극작과 루나차르스키를 중심으로 한 영화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때까지의 영화와 보잘것없는 러시아 영화제작에 대해서 레닌은 정말로 탁월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고 하였다.

새로운 정부를 완전히 수립하는 데에는 약 5년(1918~1922)이 걸렸으며 영화산업이 생산성을 가지고 기능하는 데에는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23년 말까지 소련 내에서 상영된 영화의 13% 만이 소련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1919년에 구자본주의 경제와 그 정신상태가 사회주의 정부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모든 산업은 완전히 국유화 되었다.
같은 해에 새로운 소련 영화감독들을 양성하기 위해 모스크바 영화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그것은 세계의 영화학교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할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25년에는 국내 산업의 모든 면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해외의 배급체계를 정립하기 위해 소련 영화기업 합동이 형성되었다.

1919년 경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소련 영화는 당시 두 갈래의 창조적인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처음에 우익은 전통 연극의 상류계급 인물을 인민위원이나 농민들, 적군 병사들로 대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관습적인 방법과 형식을 사용하면서 오래된 연극적 전통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좌익은 내용 뿐 아니라 형식의 혁신에 있어서도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소련 영화는 보통 두명의 좌익 개척자들의 이론과 실험에서 나온 것들이다.

□ 베르토프
- 소련 영화감독들의 첫 작업은 뉴스릴과 기록영화이어야 한다는 레닌의 충고를 따름
- 1919년 키노 아이 그룹을 창설 & 성명서 발표 / "부지불식간에 포착되는 실체"
- 1922년 [키노 - 프라우다] 제작 : 매달 나오는 뉴스 필름으로서 23회동안 계속 됨
- 베르토프는 자신이 촬영하고 있는 행위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편집은 그의 작업에서 특별
  히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1920년대 초기 소련에서의 원자재 부족은 베르토프가 다른 영
 
화 필름의 끝부분에 남아있는 필름 조각들을 찾아내어 사용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하
  여 베르토프는 구제정러시아 떄의 뉴스 영화의 쇼트들과 새로운 쇼트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들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이 몽따쥬로 발전
  시킨 편집의 맹아적 형태였다.

□ 레프 쿨레쇼프
- 영화감독, 이론가, 대학강사, 모스크바 영화학교 교장
- 필름없는 카메라로 행해지는 일련의 연출실험들을 함으로써 생필름의 부족에 대처
- 영화의 구조를 알기 위해 기존의 영화들을 분석하고 재편집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냄
- 쿨레쇼프는 커팅을 통해 비직업배우가 세련된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과 전문배우
  들의 연기에 그들이 연기할 떄는 알지 못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

 

>>출처 '소련 영화의 예술성과 변증법 1925 ~ 1929' 中, 네이버카페 '사회당 게릴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