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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할 것인가, 말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말 것인가?
<빵과 장미>의 사회주의 감독 켄 로치
2002.05.29 / 이효인(영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랜드 앤 프리덤>의 스페인, <칼라송>의 니카라과, <빵과 장미>의 로스앤젤레스에선 혁명이 있었다. 켄 로치는 억압적 권력과 부당한 자본에 맞서 혁명을 옹호하고 카메라를 들이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의 시선은 혁명의 거죽을 뚫고 들어가 그 속내에 담긴 사람 사는 이야기에 맞춰진다. 이 고집불통 사회주의자가 걸어온 길 속엔 영화의 바깥으로 불거져나온 현실, 그리고 현실의 표면을 뚫고 고개를 드는 인간이 있다.

우리는 많은 로맨티스트들을 기억한다. 혁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있었던 체 게바라, 스페인 전쟁에 참여했던 외인부대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가 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온 외국 전사들, 알제리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전사한 영화학자 집안의 아들('영국 노동자 계급의 형성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의 저자인 E.P. 톰슨의 친형), 민족혁명과 공산혁명을 위해 싸운 후 억울하게 처형당한 김산 등, 이 로맨티스트들은 좌파 연합을 지지하면서도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언제나 반제와 반자본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영국의 감독 켄 로치 역시 그런 점에서는 로맨티스트다. 1936년에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노동자였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평생 노동자를 위한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TV 방송국에서 일하며 1964년부터 최근까지 약 서른 편이 넘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1965년에 만든 <캐시 집에 오다>는 BBC가 방영한 드라마 중 현재의 사회와 생활환경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린 드라마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16mm 흑백 필름으로 만든 것인데,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으며, 연기자들도 대부분 비전문적인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즉흥 연기가 많고 의도적인 극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했으며, 이것도 모자라 극의 흐름을 끊는 편집을 도입하여 마치 뉴스 릴처럼 화면이 거칠었다. 또 인터뷰 등 내레이션을 활용한 올 로케이션 촬영 등으로 인해 실제 현장의 긴박성과 감동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 드라마는 영국 전역에서 충격을 불러일으키면서 홈리스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을 이끌어냈다. 6백만 명의 시청자가 보았다는 이 드라마는 지금도 프로파간다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이 드라마에 대해 시네마 베리테(조금도 인위적인 요소를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철두철미하게 노력했던 프랑스 다큐멘터리 운동의 미학)의 영향도 받았지만 그보다는 뉴스 릴, 다큐멘터리, 뉴스 프로그램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의도는 시청자가 드라마를 뉴스처럼 받아들여서 그것을 현실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가 만든 영화로는 <불쌍한 암소>(1967), <케스>(1969), <가족생활>(1972), <블랙 잭>(1979), <외모와 미소>(1981), <조국>(1986), <숨겨진 아젠다>(1990), <하층민들>(1990), <레이닝 스톤>(1993),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1994), <랜드 앤 프리덤>(1995), <칼라송>(1996), <내 이름은 조>(1998) 그리고 <빵과 장미>(2000)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필모그래피를 한숨에 읽어내려가면 저절로 한숨과 감탄이 튀어나온다. 이 음험한 배신의 계절과 얄팍한 변절의 시절에도, 켄 로치는 정말 한결같다!

영국 노동자와 니카라과 전사들

하지만 켄 로치의 로맨티시즘은 단순과격형이 아니다. 그의 좌파적 입장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로맨틱한 면모는 삶의 복잡다단함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것이다. 그의 로맨티시즘의 뿌리에는 아나키즘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히 <칼라송>에서 그의 복잡한 사고는 잘 드러난다. <칼라송>은 니카라와 해방 투쟁을 위해 유럽으로 왔다가 혼자 영국으로 건너와 거리 공연을 하며 겨우 살아가는 칼라와 영국인 버스 노동자 조지의 이야기다. 장난처럼 시작된 칼라를 향한 조지의 사랑은 결국 둘을 니카라과로 가게 만든다. 1987년의 일이었다. 1979년 소모사 정권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가 2년 만에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실패한 지 약 10년이 지난 시기였다. 미국이 지원하는 반군(콘트라)과의 유혈전쟁을 니카라와 민중들이 더이상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던 칼라의 정신분열증의 배후에는 조국과 죽은 애인 안토니오에 대한 채무감이 있었다. 지도자였던 안토니오는 반군들에게 잡혀 먼저 혀를 잘렸고, 개머리판으로 허리가 부러졌으며, 그 다음에는 얼굴에 염산 세례를 당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조지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분개하자, 브래들리는 더 화난 얼굴로 수정해준다. "그게 아냐, 미국이 시킨 짓이야"라고. 브래들리는 니카라과에 파견될 CIA 요원들을 훈련시킨 간부로서 3년간이나 공작을 했던 인물이었지만, 이제는 니카라과 해방을 위해 싸우는 미국인이다. 그렇다고 조지가 니카라과 해방전선에서 바로 싸우지도 않았고 둘의 사랑이 성립되는 것도 아니었다. 미 제국주의에 대해 투쟁하다 지쳐버린 니카라과 여성과 '적당히 저항하는 영국 노동자' 조지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계곡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켄 로치는 이런 점에 대해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결론을 맺지 않고 브래들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말할 뿐이다. 조지의 분노와 칼라를 향한 사랑이 질적 변화를 일으키며 쉽사리 국제적 연대의 정치의식과 분노로 뻗어나가게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영국보다 '연대'가 중요했고, 계급적 권익을 위한 프로그램보다 아나키즘적 저항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조지의 칼라에 대한 사랑은 동정적이지만 강렬했다. 그러나 칼라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이 품고 있었던 것은 피로 맺은 전사끼리의 사랑이 훨씬 더 강렬하다는 사실이었다. <하층민들>에서 노동자들의 어떤 탈선과 비상식적인 행위에도 계급적 처지를 말하면서 그들을 옹호했던 켄 로치지만 <칼라송>에서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영국 노동자를 본다. <칼라송>에서 조지가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켄 로치가 쉽사리 혁명적 낙관에 빠지지 않고 문제를 단순하게 보지 않으며, 무엇보다 근본적인 모순에 대해 성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니카라과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지라는 영국 노동자, 영국이라는 강국,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얼마나 비겁하며 소시민적인가? 켄 로치가 정작 하고 싶었던 것은 니카라과의 실상과 그것에 아무것도 보태지 못하는 우리들의 뺀질뺀질한 지성에 대해 따귀를 올려붙이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나키즘, 국제적 연대, 그리고 영화의 힘

켄 로치의 아나키즘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억압적 권력에 저항하는 움직이는 전략일 뿐이다. 고정된 권력 체계를 부정하고 순간순간 모든 부정의와 모순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 그럼으로써 혁명은 단련되고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가 취하고 있는 아나키즘적인 전략이다. 그것은 당연히 국제적 연대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연대란 모든 억압과 침탈에 대한 투쟁을 위한 것이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켄 로치는 스탈린의 야심이 스페인에서 어떻게 민중을 배반했는가를 밝히며, 또 1936, 37년에 이상주의자들을 괴롭힌 것은 파시즘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공산당의 공식 노선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보다는 좌파 내부의 이단을 뿌리뽑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영국 사회당 지지자인 데이비드는 스페인에 내전이 벌어지자 연인 키티와 헤어지면서까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간다. 하지만 민병대에 배치된 데이비드가 처음 마주친 것은 격렬한 전투가 아니라 소극적인 대치 전선과 시가전, 지역 마을의 집단 농장 건설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 등이었다. 이후 데이비드는 또다른 몇 가지 일을 겪고 마지막 전투를 치른다. 그 전투에서 데이비드가 속한 민병대는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사수 명령에 의해 고립되어 있다가 결국 후퇴 명령을 받고 철수한다. 늦게 도착한 지원부대는 민병대 해산을 종용한다. 그들은 혁명적인 스페인 노동자당 품(POUM)의 지도부가 파시스트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품 소속 대원 몇 명을 체포하겠다고까지 공언한다. 스탈린이 스페인의 권력 관계 속에서 품을 제거한 것이었다. 이에 격렬히 저항하던 여자 민병대원이 사살되고, 데이비드는 붉은 머플러에 그곳의 흙을 담아 영국으로 돌아온다. 데이비드의 손녀가 그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편지를 읽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흙을 관에 붓는 것으로 끝맺는 이 영화는 전쟁 대작의 스펙터클 대신에 심란한 게릴라전과 언제나 난감한 정치적 태도에 대해 말한다.

즉흥 연기와 배우들의 자발성, 그리고 손녀를 통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듦으로써 과거에 대한 향수를 배제하고 지금 여기의 이야기임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미래에 관한 뜨거운 의지와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스페인 내전은 신자유주의와 새로운 팍스아메리카와 팍스유로파를 지향하는 서구 국가에 대항하는 3대륙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리고 현재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과제는 무엇인가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스페인 내전이란 사회주의 정당이 결코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함축적인 소재였던 셈이다. 60년 전의 스페인 역사가 현재진행형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켄 로치의 미학 혹은 영화 전략

"민중들이 그들의 두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화란 시나리오와 영화 속 인물들 사이의 변증법이다. 시나리오 속 인물들이 사실적이라면 영화 속 인물들도 사실적이어야 한다." 켄 로치의 이 말은 그의 미학을 명징하게 함축한다. 그에게 다큐멘터리는 빠른 기간 내에 만들 수 있는 팸플릿이며, 극영화는 소설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의 영화가 단순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또 촬영이나 편집에서 특별한 스타일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히려 스타일에 신경을 쓰는 순간 주제를 놓친다고까지 강변한다. 그야말로 강변에 불과하지만 그가 처한 직간접의 탄압적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그는 촬영장에서 실제 장면들을 리허설하지 않는다. 공유해야 할 기본 사항만 리허설하고 대개는 촬영하면서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조금씩 준다. 그리고 가능하면 실제 시퀀스 순서대로 촬영하며 스토리보드도 만들지 않는다. 카메라 위치, 렌즈의 종류, 배우의 움직임 등은 그의 머릿속에 있으며, 주로 로케이션 촬영을 하기 때문에 조명 또한 필요에 따라 약간만 사용된다. 그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하층민들>은 즉흥 연기와 기록영화적인 촬영의 대표적인 예다. 그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관객을 움직일 것인가를 대중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실천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미학은 철저하게 다큐멘터리적이며 단순명쾌한 것이다.

오히려 그의 과제는 복잡하게 영화적인 미학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현실과 싸우는 것이었다. 노조 지도자들이 대처에 대항하여 싸우지만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인 <지도력에 관한 질문>에서 그는 1980년대 영국 철강산업의 파업 효과를 분석하는 동시에 정치인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다큐멘터리 감독이 지녀야 할 균형감각이 결핍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조합 지도자들을 편파적으로 다뤘다고 형평성과 책임감의 결핍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결국 BBC의 채널 4에서도 방영되지 못했다. 그는 이것을 고도의 검열이라고 보았다. 그가 만든 유일한 정치 스릴러 <숨겨진 아젠다>는 IRA를 옹호하는 영화라는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 일부 상업 극장에서도 상영을 거부당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북아일랜드에서 실제로 자행된 영국의 공작 사건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역시 정치적 반대파들과 평론가들과 문화이론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가 "나이브하고 낡은 방식"에 매달린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비판 요지였다. 이후 그의 영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조국>의 제작은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의 합작으로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 켄 로치에게 검열과의 투쟁이란 곧 지배권력과의 투쟁이었다. 그에게 영화평론가들은 정부와 관점을 공유하는 '교묘한 검열관'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국이야말로 민중들을 교묘하게 통제하는 사회라고 보았다.

<빵과 장미> 혹은 단순한 진리와 복잡한 허위

하지만 그는 결코 희생정신으로 일그러지거나 심각한 예술가의 표정으로 대중들에게 나서지 않는다. 그는 <빵과 장미>에서도 서두르지 않으며 아주 단순하면서도 난처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세상에 불의가 횡행하고 있다. 이것을 인정할 것인가?" 또는 "행동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제목은 영화 종반에 나오는 플래카드 "We Need Bread But Roses Too"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영화는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월경한 사람들을 쫓는 거친 핸드헬드 카메라로 시작한다. 자칫 팔려갈 뻔했던 마야는 기지를 발휘하여 언니 로사를 만나고, 또 힘겹게 한 건물의 일용 청소부로 고용된다. 어느 날 마야는 그 건물에 침입했다가 도망치는 노동운동가 샘을 돕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자기 직장의 부당 노동 행위와 억압을 해결할 길을 모색한다. 건물 관리인들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위, 집회 참석, 파티장 급습 시위 등을 통하여 결국엔 자신들의 행위를 보호하게 된다. 하지만 파티장 급습 시위 등을 통하여 결국엔 자신들의 행위를 보호하게 된다. 하지만 파티장 급습 시위에서 경찰서로 끌려온 마야는 돈을 훔친 불법 체류자라는 것이 들통나서 강제 송환되고 만다. 이민국 버스를 타고 가는 그녀를 향해 사람들은 안타깝게 연대의 손을 흔든다. 버스를 향해 달려오는 로사를 향해 마야는 "조심해"라고 말하고, 로사는 "사랑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막이 오른다.

'순진한 너무나도 순진한, 고집불통의 사회주의자'. 언제나 켄 로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이 수식어에 전제되어야 할 말을 잊음으로써 냉소하거나 그를 무시하려고 든다. '지속적으로 너무나도 지독한, 부당한 자본의 억압'이 존속되는 이 세상이 변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불의에 눈감고 같이 안락하게 살자는 꼬드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켄 로치에 대해 적의를 드러낼 용기가 없거나 교묘한 사람들은 '단순한 형식'을 문제 삼는다. 하지만 그 역시 한때는 대안적 형식에 매료되었으며 그것을 극복한 후 이러한 스타일이 나왔다는 것은 간과되곤 한다. 즉 스타일이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험하다. 정치영화를 대표하는 코스타 가브라스의 드라마틱하고 크고 무거운 영화에 비해 그의 영화는 승리와 낙관보다는 패배하고 비관하는 인물 설정이 우선된다. 그리고 영웅적이며 독보적인 인물보다는 평범한 패배자, 집단적인 인물이 선호되는 것이다. 즉 가브라스가 현실을 영화라는 괄호 속에 넣는다면, 켄 로치는 영화로부터 현실을 끄집어내어 본문 속에 드러내는 것이다. <빵과 장미>의 플롯 속에는 그런 것들이 전략적으로 빼곡히 들어 있다. 피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단순한 것이지만, 실은 켄 로치의 일관된 미학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로사의 남편은 몇 년째 병석에 누워 있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로사는 작은 배신을 했으며, 대학생이 되려는 친구를 위하여 마야는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승리는 결코 장엄하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으며, 자주 주위에서 일어나지만 우리에게는 그냥 스쳐가는 일일 뿐이다. 켄 로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발을 걸고 넘어진다. "세상에 불의가 횡행하고 있다. 이것을 인정할 것인가?" 또는 "행동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말이다. 미국에서 작은 소재로 작업하는 것은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랜드 앤 프리덤>의 마지막 대사처럼 여전히 지속된다. "혁명은 전염병과 같다. 이곳에서 우리가 성공했다면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의 한 건물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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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로치에바친다① 켄 로치, 당신은 누구십니까?

켄 로치, 당신은 누구십니까?
켄 로치에 바친다 ①
2006.11.08 / 주성철 기자 

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개봉과 함께 ‘블루 컬러의 시인’이라 불리는 켄 로치 특별전이 열린다. 신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중심으로 바로 지금 켄 로치의 의미와 상징에 대해 생각한다.

2001년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는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가 상영됐다.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1979년 상영 버전보다 무려 40분 분량이 추가된 완전한 디렉터스컷이었다. 주인공들이 강을 거슬러가다 만나는 프랑스인 농장 장면이 완전히 새로이 추가됐으며, 윌라드(마틴 쉰)와 커츠(말론 브랜도)의 대화 또한 상당 부분 늘어났다. 이를 보고 나오던 한 비평가는 “완전판은 마치 켄 로치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영화 속 인물들이 전쟁에 대해 고뇌하고 치열한 토론을 벌이는 장면들이 꼭 켄 로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는 얘기다. 완전판에서 코폴라가 ‘유령’으로 설정했다고 하는 프랑스인들은, 그들에 이어 베트남을 침략한 미국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등장한다. 그보다 훨씬 세월이 흘러 만들어진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베트남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역시 언제나처럼 켄 로치의 장기가 빛을 발하는 토론의 영화다.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두고 여러 번에 걸쳐 나누는 격렬한 토론은 결국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 대화 속에서 켄 로치는 과연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나, 그 비극의 진원지는 도대체 어디였는지를 되묻는다.

닐 조던의 <마이클 콜린스>는 들으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쟁쟁한 작품들을 제치고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정확히 7전 8기의 과정을 거쳐 이 상을 수상한 그를 두고 작품성을 떠난 칸영화제의 예우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손쉽다. 정말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10년 전인 1996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역시 비슷한 시기의 북아일랜드 문제를 다룬 닐 조던의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칸영화제의 대답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실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도 마이클 콜린스의 이름이 직접 거론된다. 또한 그것은 최근 여러 변화의 양상들을 보여온 칸영화제가 앞으로도 켄 로치에 대해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마이클 콜린스는 1916년 더블린 부활절투쟁 숙청에서 살아남은 이후 아일랜드 해방투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전략가이자 테러리스트였다. 영화 속에서 드러나듯 북부 아일랜드를 제외한 독립을 인정, 내전을 초래한 런던협약의 협상 주인공이기도 하다. 실제로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평가는 아일랜드 내부에서도 상반되는데, 이 런던협약은 북아일랜드 해방을 위해 지금까지도 테러를 벌이는 IRA를 낳게 만들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데이미언(킬리언 머피)의 형이자, 우선 조약을 받아들이고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자고 주장하는 테디(페드라익 델라니)는 바로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은유다. 테디가 그러하듯 마이클 콜린스는 진심으로 실용주의 정치관을 신봉했지만 바로 거기에 비극의 핵심이 있었다.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 워너브러더스의 자본으로 북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다룬 <마이클 콜린스>가 만들어졌을 때, 북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영화비평가인 톰 콜린은 “이 영화의 가장 좋지 않은 점은 평화협정의 협상 과정과 아일랜드 대표들의 내부 논의는 전부 생략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켄 로치 역시 협상 과정 자체는 다루지 않지만, 아일랜드 대표 내부의 격렬한 토론을 마치 그의 이전 영화들을 보는 듯 그만의 장기를 펼치며 담아낸다. 그것은 이후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지게 되는 사건들의 핵심이자, 또한 우리가 켄 로치에게 기대하는 바이기도 했다. 데이미언을 중심으로 한 일파들은 공화국의 법정 판결과 기본적인 원칙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테디 일파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위해 군수물자를 대는 지주를 옹호한다. 독립운동에 나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나 농부, 상점 직원들이었다. 데이미언이 보기에 아일랜드 독립 이후 테디 일파가 그러한 지주와 자본가들을 위한 정책을 펼 것임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더구나 잉글랜드 측의 폭력을 과장하면서 아일랜드 내부의 폭력을 다소 은폐했던 <마이클 콜린스>와 달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 내부에서 자행된 끔찍한 폭력과 만행도 서슴없이 공정하게 담아낸다. 이렇게 켄 로치는 IRA가 탄생하게 된 근원으로 거슬러가면서 그 현재적인 의미까지 되묻고 있다. 그가 올해 칸영화제 수상소감 당시 “아일랜드의 상황은 지금의 이라크와 다르지 않다. 이라크를 탄압하는 미국과 영국의 태도는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태도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과거를 통해 현재의 이러한 모순들을 비판하고 싶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켄 로치의 변함없는 다짐

최근 켄 로치는 여러 중요한 변화들을 봐왔다. 영국은 보수당에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유로화가 출범했다. 어떻게 보면 오랜 시간 대처리즘에 맞서온 그에게 강력한 적수를 잃어버린 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어떤 변화의 조짐도 읽을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명멸하는 불빛>(1997)을 논외로 하자면 그가 토니 블레어 정권 출범 이후 첫 번째로 만든 영화는 <내 이름은 조>(1998)다. <내 이름은 조>에서 노동계급의 균열을 가져오는 문제는 실직이라는 현실과 마약이라는 새로운 유혹이다. 전자의 관점에서 <내 이름은 조>를 <풀 몬티>(1997)의 유쾌한 낙관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후자의 관점에서 <트레인스포팅>(1996)의 재기발랄함에 대한 충고라고 본다면 오히려 그는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다.

은밀한 낭만의 백일몽들만이 넘쳐나는 세상, 테크놀로지의 유령들이 횡행하는 스타일의 속도전 속에서 켄 로치는 여전히 정반대로 영화와 세계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소위 ‘명장면’을 만들어내지 않는 켄 로치의 스타일 그대로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지워나가는 시네마베리테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주로 비직업 배우를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것과 달리 <28일 후>(2002), <나이트 플라이트>(2005) 등에 출연한 스타 배우 킬리언 머피를 캐스팅했다는 사실이다. 과거 <레이디버드>(1994)에서 실제 여성 노동자였던 크리시 록으로부터 감동적인 연기를 끌어내 1994년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기고, <빵과 장미>(2000)에서 영어에도 익숙지 않고 미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오디션을 거쳐 뽑아낸 멕시코계 필라 파딜라에게 주연을 맡긴 경우와는 다르다. 또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단짝 시나리오 작가 폴 라베티와 함께 만든 유일한 과거형 영화이기도 하다. 가령 <칼라 송>(1996) 이후 <네비게이터>(2001)를 제외하고는 늘 켄 로치와 작업해온 폴 라베티는 실제로 학생 시절 LA에서 1년여 동안 머물면서 여러 명의 히스패닉 노동자들과 가깝게 지낸 경험이 있었기에 <빵과 장미>의 현실감 있는 투쟁의 과정을 그려낼 수 있었다. 더불어 <하층민들>(1990)과 <레이닝 스톤>(1993)처럼 현대 시제의 노동자들이 등장해 그들만의 실감나고 재치 있는 대사들로 채워진 영화도 아니다(미국에서 <하층민들>이 비디오 출시됐을 때 영화 속 영국 노동자 계급의 억양이 너무 강해서 따로 영어자막을 넣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도저한 사회주의적 이상을 바탕에 깔고 자본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을 노려보며, 대체 우리가 어떻게 이 조악하고 천박한 현실을 변혁시켜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켄 로치의 세계관은 결코 흔들림이 없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높은 이자에 신음하는 한 농부의 손을 들어주면서 ‘독립운동의 승리라는 결과를 위해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논리에 대항한다. 눈앞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평범한 농부와 노동자들의 권익을 맞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켄 로치는 언제나 시간과 공간을 달리 했을 뿐 막노동꾼들의 일상을 껴안으면서 범죄를 공모하고(<하층민들>), 딸에 대한 한 아버지의 소박한 희망을 들어주기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교사하고(<레이닝 스톤>), 자신의 모든 개인적 행복을 내팽개치면서까지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고(<랜드 앤 프리덤>), 너무나도 강고한 적 앞에 분노를 곱씹으며 뒤돌아서고(<칼라 송>), 멕시코로 강제 추방될 위기 속에서도 노조를 결성하기 위해 분투하면서(<빵과 장미>) 살아왔다. 결국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역시 과거형의 아일랜드의 독립운동 시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놓치고 있는 계급의 문제를 명쾌하게 되짚고 있는 것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역시 데이미언과 테디가 나누는 대화에 있다. “넌 어려서부터 이상주의자였어”라는 형의 말에 데이미언은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켄 로치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영화세계가 집약돼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향한 오랜 선입견과 오해를 향한 항변일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세계영화계의 이상주의자로 여겨졌고 또 그로 인해 지금껏 존경을 받아왔던 것이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언제나 현실을 과장하지도 않고 특별한 소재를 취하는 것도 아니면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저 옳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한 부지런한 영화감독일 뿐인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북아일랜드 소사

원래 영국에 살고 있던 민족은 기원전에 정착했다고 알려져 있는 켈트족이다. 켈트족이 살고 있던 영국에 대륙민인 앵글로 색슨족이 침입해 세운 나라가 바로 잉글랜드다. 그리하여 잉글랜드 지방에 살던 켈트족들은 대다수가 아일랜드 섬과 북부 스코틀랜드 산악지대로 이주해 각각의 나라를 세우고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거듭된 침략에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지는 못한 채 잉글랜드에 예속돼 있는 형태로 살아가게 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잉글랜드 군인이 아일랜드 사람들을 향해 ‘가톨릭을 믿는 돼지’ 운운하는데 원래 이들 나라의 국교는 가톨릭이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하기 위해 만들어낸 ‘성공회’라는 종교를 아일랜드에 강요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당연히 가톨릭을 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저항이 계속되지만 헨리 8세 이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 때까지 계속 진압되다가,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의 북부 얼스터 지방을 점령한 후 아일랜드 북부지방에 잉글랜드인을 이주시키게 된다. 영화 속에서 데이미언 일당을 밀고하는 악덕 지주가 바로 이들이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고 크롬웰은 다시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아일랜드는 다시 반항을 하지만 여전히 잉글랜드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고, 결국 모든 토지를 잉글랜드에 몰수당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연합국이 되고 공화정이 도입되는 20세기 초까지 큰 분쟁 없이 살아오던 아일랜드는 1차 세계대전을 시발점으로 다시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즈음이 바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다루고 있는 시기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신페인당’은 1919년부터 1922년에 걸쳐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급진적 정치 결사를 말한다. 1차 대전 발발 후(1916년 4월 부활절)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신페인당이 주축이 돼 무장봉기를 하지만 잉글랜드에 진압된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아일랜드는 얼스터(북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자치권을 주겠다는 영국 측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1922년 12월 런던에 간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를 사실상 분할하는 공화국 수립을 약속한 런던협약을 들고 와 아일랜드 자유국이 탄생한다. 그렇게 신페인당은 우익의 아일랜드 통일당과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좌익의 아일랜드 공화당으로 분리됐다. 신페인은 아일랜드어로 ‘우리 스스로’ 또는 ‘우리들만으로’라는 뜻이다. 하지만 협약 이후의 실권은 모두 잉글랜드 측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1932년 취임한 발레라 총리는 잉글랜드를 향한 항쟁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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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로치에바친다④ 투쟁하는 작가주의의 최전선

투쟁하는 작가주의의 최전선
켄 로치에 바친다 ④
2006.11.09 / 정지연(영화평론가) 

현재의 감독 중 가장 실천적인 사회주의 감독 켄 로치는 역사적 거울을 통해 지금 노동계급의 우울과 좌절을 토로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구의 편에 서는가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역사가의 태도! 1995년, 켄 로치가 <랜드 앤 프리덤>을 완성했을 때 세계는 논쟁에 빠져들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둘러싼 미학적, 문화적 담론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는 1939년 실패로 각인된 스페인 내전에 관한 배반과 분노에 대한 기록이었고, 영화가 개봉되자 스페인 극장가에서는 관객들의 자발적인 토론이 형성되는 진풍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려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스페인의 역사는 망각의 늪으로부터 깨어나고 있었다. 한 평자가 켄 로치에게 왜 당신의 관심이 영국 노동계급으로부터 스페인으로 이전되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의 답은 명료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우리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감독으로서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역사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그것을 민중들에게로, 본연의 그들 것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 대답처럼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가 이미 <랜드 앤 프리덤>에서 보여줬던 역사가의 시선과 태도로 다시 한 번 무심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역사적 무대는 1920년 아일랜드다. 학살과 고문, 죽음과 고통으로 넘쳐나는 그곳에서 켄 로치는 스페인 내전의 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총을 들고 게릴라 투쟁의 한 전장으로 돌진한다. 그런 점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랜드 앤 프리덤>의 거울처럼 보인다. 전문 배우들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이 보여주는 역사적 한 순간들은 마치 뉴스릴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생생해 숨이 막히고, 조바심 쳐진다. 켄 로치의 태도와 방법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게릴라 전투의 소름끼치는 순간들이 지나가면, 역시나 예의 기나긴 토론들이 벌어진다.

내부의 적! <랜드 앤 프리덤>이 파시즘이라는 거대한 적을 넘어 좌파연대 그 내부에서 발생했던 균열과 종파주의에 대해 질문하고 반성했던 작품이었던 것처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역시 그들이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러나 대답은 역사적 아이러니로 돌아온다. 거대한 적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을 둘러싼 내부에서 발생한다. 한때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투쟁을 함께했던 형제들은 노선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살육하는 끔찍한 비참으로 치닫고야 만다. <랜드 앤 프리덤>의 마지막 장면이, 스페인 내전의 역사로부터 현재의 런던 시점으로 넘어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손녀딸이 스페인의 붉은 흙과 수건을 손에 쥐고 번쩍 쳐들며 새로운 연대와 희망을 상기시켰던 것임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번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보게 될 마지막 장면의 숨 막히는 암울함과 절망은 적이 당황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2000년대에 들어선 켄 로치의 영화적 행보에서 이미 목격된 것이기도 하다. 영국 철도산업 민영화 이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동료의 죽음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죄의식으로 관객의 마음을 짓눌렀던 2001년 작 <네비게이터>나, 세상에서 버려진 빈민가 아이가 결국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을 보여줬던 <스위트 식스틴>에서 우리는 이미 켄 로치의 비탄을 경험한 바 있다.

비극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즉 영국의 대처리즘 그리고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주도된 레이거노믹스 등으로 불리는 이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은 전 세계 노동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그것은 비단 실업과 구조조정이라는 작업장의 첨예한 생존권 싸움을 넘어 우리의 일상으로 표면화되고, 문화와 가치들로 회귀한다. 이에 저항하는 문화적 표상들의 싸움은 몹시 고립되고 외로워 보인다. 거의 모든 영화들이 폭력과 쾌락과 상품가치의 스펙터클에 포획돼 있을 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작가주의이자 좌파적 노선에 선 이들은 극히 적었다. 프랑스 노동계급의 삶을 드러내는 로랑 캉테나 알랭 기로디, 그리고 유럽의 변방 벨기에에서 역시 희망 없는 노동계급의 심리적 갈등과 윤리적 고뇌를 포착하는 다르덴 형제들처럼 그들은 매우 제한적인 이름들이다. 그나마 ‘세계 영화제’라는 특수한 시장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들의 영화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영국 내부로 들어갔을 때조차도 켄 로치의 이름은 독보적이다. 물론 마이크 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노동계급의 보다 깊은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건조함과 해방구 없는 절망 그 자체를 소묘한다.

그리고 이들과 다른, 이상한 또 하나의 트렌드가 있었다. 이른바 사회적 드라마라 불릴 만한 일련의 영화들은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를 비롯해 <풀 몬티> <브래스드 오프>처럼 영국 키친 싱크의 후예임을 자처함과 동시에 대처리즘의 폭력으로 시작된 80년대 영국사회의 비극을 유머와 로맨스라는 장르적 방식으로 흡수한다. 이중에서도 스티브 달드리의 이력은 흥미롭다. 그는 1984년 영국 탄광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던 바로 그 순간, 노동자들 곁에 선 증언자였다. 이 시기 켄 로치가 ‘1984년 파업에 동참한 탄광 노동자들의 노래, 시, 그리고 경험’이라는 부제의 다큐멘터리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Which side are you on?>를 연출하고 있었다면, 그는 연극 <돌이킬 수 없다 Never be the Same>로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고 있었다. <빌리 엘리어트>는 바로 그러한 경험에서 탄생한 영화였다. 그러나 그가 켄 로치와 다른 점은 그 기억과 경험을 영국식 장르라는 상업적 타협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은 탄광 출신의 소년이 성공해 화려한 발레 데뷔전을 치르는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싸움은 처절하게 패했고, 심지어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영국식 사회 드라마 영화들은 그 실패와 비참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유머와 해피엔딩으로 봉합한다. 켄 로치의 진정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단순함의 미학! 켄 로치를 폄하하는 평자들의 주요 논지는 그가 형식에 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허한 비판은 어느 누구보다도 형식 그 자체에 대한 자의식과 철학을 가진 그의 응답 아래 무가치해진다. “내용이 스타일을 결정해야만 한다. 영화는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카메라와 카메라의 스타일이 그것이 기록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보다 중요해져서는 안 된다.” 결국 그는 1969년 <케스>를 연출하며 만난 촬영감독 크리스 멩게스와 제작자 토니 가렛 등과 더불어 ‘꾸밈없고 소박하고 진지해지기 위한 가장 단순한 프레이밍’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설정한다.

사회주의자임과 동시에 원칙주의자인 켄 로치의 이러한 실천은 일회적인 작품들로만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길게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를 통해서도 하나의 실천적 궤적을 형성한다. 60년대 프리시네마 세대와 더불어 등장한 그는 지금껏 여전히 노동계급의 일상을 소묘하면서도 그 안에 배태된 사회구조의 모순과 폭력을 성찰한다. 그러한 여정이 변별점을 경유하게 되는 지점은 1995년에 연출한 <랜드 앤 프리덤>으로부터 <칼라 송> <빵과 장미> 등을 통하면서다. 영국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노동계급의 현실을 다루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스페인 내전의 역사로부터 식민지 니카라구아의 상흔으로, 그리고 첨단 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의 심장부 미국으로 넘어가 외국인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참여로 이어졌다. 이른바 새로운 인터내셔널리즘의 이러한 실천은 그러나 2000년대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블레어 정권의 영국에서 좌초되는 것처럼 보였다. “블레어 정권은 친미적이고 친자본적인 새로운 보수주의자”라는 그의 단언처럼, 그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행하는 살육을 영국이 여전히 아일랜드에 행하는 폭력으로 비유한다. 1990년에 연출한 <히든 아젠다>에 이어 두 번째로 아일랜드 문제를 전면화한 이번 작품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그는 다시금 역사가 현재를 돌파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상기한다. 그러나 돌파구 역시 단순하지 않음을 그는 안다. 그는 아마 이 영화를 연출하며 이 말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혁명에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더욱 힘겨운 문제는 혁명의 성공 그 이후에 닥쳐올 것이다.” 그가 베스트 영화로 손꼽는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에 나오는 한 혁명가의 말이다. 적은 거대한 괴물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에 익숙해지고 닮아가는 우리들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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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로치에바친다③ <티켓>, 켄 로치의 행복한 판타지

<티켓>, 켄 로치의 행복한 판타지
켄 로치에 바친다 ③
2006.11.09 / 원신연 (영화감독) 

<가발> <구타유발자들>을 만든 원신연 감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켄 로치의 영화로 그가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티켓>을 꼽았다. 더불어 자신의 단편 <빵과 우유>에 관한 사소한 오해도 덧붙인다.



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로 들끓던 2002년 봄. 서울의 한 독립영화제작집단 사무실에 도둑이 든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도둑은 재빨리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도둑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일명, 비디오테이프 도난 사건. 그 당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주면 절대로 받지 못한다는 아주 근거 있는(?) 의식들이 팽배해 있었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남다른 시선으로 그린다는 켄 로치의 소문을 접한 도둑은 그의 영화에 극도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 켄 로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체계적으로 영화 공부를 하지 못한 나를 가르치던 영화 스승은 바로 현실이었고, 그 현실을 반영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영화들은 날 진화시키던 유일한 활력이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도둑질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켄 로치의 유혹으로 인해 도둑이 된 내가 그때 훔쳐 본 작품은 철도 노동자들의 일상을 코믹하게 다룬 켄 로치의 2001년 작품 <협상가들 The Navigators>이었다. 철도 노동자들의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낸 켄 로치의 협상가들은 아프지만 푸근했고 익살스럽지만 가슴이 시렸다. 이후 난 자연스럽게 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켄 로치는 자신이 쌓아 올린 영화적 명성만큼 그 시선 또한 고집스러운 것으로 유명하다는 걸 영화로 증명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두 중년 실업자의 해프닝을 그린 <레이닝 스톤>(1993), 미국 로스엔젤리스에서 실제 일어난 환경 미화원 노조 결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빵과 장미>(2000), 켄 로치가 유일하게 만든 달콤 쌉싸래한 멜로영화 <다정한 입맞춤>(2004), 이탈리아 출신 감독 올미, 이란의 거장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만든 옴니버스영화 <티켓>(2005)까지, 내가 접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모두 하층민들의 일상과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소위 할 말을 하는 영화들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중에 이것 하나가 있다. 내가 2003년에 만든 단편영화 <빵과 우유>가 켄 로치의 <빵과 장미>에 대한 헌사로 알고 그것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몇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원고 청탁을 하던 기자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빵과 우유>는 <빵과 장미>에 대한 헌사가 아니다. <빵과 우유>는 노동으로 일생을 보내고 아직도 노동의 꺼리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헌사다. 켄 로치가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티켓>에 대한 헌사라면 모를까? 로마에서 열리는 유럽 챔피언스리그 축구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로마행 3등석 기차에 오른 스페이스 맨, 제임스, 프랭크는 베컴의 이름이 새겨진 붉은색 유니폼을 걸친 알바니아 소년을 만나게 된다. 청년들은 자신들을 용감한 스코틀랜드 청년이라고 소개하며 배고픈 알바니아 소년의 가족들에게 친절을 베푼다. 하지만 잠시 후 제임스의 열차 티켓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청년들은 알바니아 소년이 제임스의 티켓을 훔쳐갔을 거라 의심하며 알바니아 소년과 가족들을 도둑으로 몰아간다. <칼라 송>(1996) 이후 켄 로치와 함께 작업해온 폴 라베티가 각본을 썼고, 역시 켄 로치의 <달콤한 열여섯>(2002)으로 데뷔했던 세 소년이 스코틀랜드 축구팀 셀틱의 열혈 팬으로 출연하고 있다. 다른 두 감독의 작품과 비교해 켄 로치의 작품이 그 <티켓>이라는 제목에 가장 부합하고 있다.

<빵과 우유>에 홀로 등장하는 노동자는 힘겹게 열차를 지켜낸다. 그 노동자가 지켜낸 기차 속 인물들이 고스란히 타고 있는 듯한 옴니버스영화 <티켓>은 단순하지만 따뜻하고, 정치적이지만 소박한 영화다. 3등석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켄 로치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개인적으로 켄 로치의 영화 중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다. 내가 목격한 <티켓>은 배려에 관한 영화였으며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는 희망의 영화였다. <티켓>에서 켄 로치는 쓸데없는 감정을 불어넣지 않는다. 감정은 사람 안에 자연스럽게 생동하며 생동하는 감정은 보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티켓>은 빠르고 유쾌하지만 여백이 느껴지는 영화다. 시끌벅적 요란스럽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면 머릿속에 하얀 여백이 만들어진다. 켄 로치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만들어진 하얀 여백 안에 뭔가를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만들뿐이다. <티켓>은 거친 협곡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이제 막 날이 새고 있는 아주 잔잔한 새벽 바다를 만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길고 긴 여정의 끝에 서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해가 떠오르길 희망하게 만드는 바로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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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로치에바친다② <케스>내 유년기의 추억

<케스> 내 유년기의 추억
켄 로치에 바친다 ②
2006.11.08 / 김태용(영화감독) 

<가족의 탄생>을 만든 김태용 감독은 켄 로치의<케스>를 보면서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렸다. 문제아지만 학교라는 닫힌 공간보다 더 너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소년의 표정에서 켄 로치 영화의 정수를 읽을 수 있었다.


<케스>는 영화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시절 처음 봤다. 친구가 좋다고 하기에 우연찮게 화질도 안 좋은 비디오로 봤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남들보다 켄 로치의 영화를 뒤늦게 접한 편인데 그 약발은 오래 갔다. 그리고는 <랜드 앤 프리덤>을 극장에서 봤다. 극장을 나오면서 함께 본 친구랑 아무런 말도 못했다. 충격과 여운으로 멍한 상태에서 말도 없이 걷다가 나였나, 그 친구였나 한번 말문이 터지는 순간 서로 앞 다퉈 영화에 대해 얘기하면서 술까지 마셨던 것 같다. 그 뒤로 <하층민> <레이디버드> 등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존경하는 켄 로치의 영화는 여전히 <랜드 앤 프리덤>인데, 뭐랄까 가장 사적인 나만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영화는 바로 <케스>다.

영국 북부 탄광촌에서 살고 있는 빌리는 어딘가 좀 독특한 아이다. 집과 학교 모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그는 힘겨운 유년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새끼 매 한 마리를 발견해 ‘케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키우게 되면서 삶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뒤에 나온 <빌리 엘리어트>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영화고 아이 이름도 우연찮게 똑같다. 하지만 나에겐 그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영화다. 이것저것 아무것도 못할 것 같고 나중에 커서도 여전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아이, 하지만 그 아이는 어떤 갈등 상황에 직면해서도 싸우지도 도망가지도 않으면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본다. 일탈과 저항도 없고 그렇다고 연민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소년은 자기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묘한 자신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재주 없는 사람의 자신감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쉽게 성장영화라고 정의할 수도 없다. 켄 로치의 영화를 보면 그런 느낌을 많이 받는데 그래서 다르덴 형제와도 연결되겠지만,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켄 로치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케스>에서부터 잘 살아 있는 것 같다.

내 기억을 떠올려보면 난 초등학교 때까지 굉장히 작았다. 우리 반 남녀 통틀어 가장 키가 작아서 늘 1번이었다. 고등학교 때 많이 컸고 지금은 완전 아저씨가 됐지만 당시의 나는 작고 왜소했고 여자애처럼 생겼었다. 그 흔한 반장, 부반장도 못 해본 정말 빌리처럼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물론 <케스>의 소년처럼 굉장히 문제아이진 않았지만 당시의 나는 연극 <춘향전>에서 춘향이를 연기했을 정도였다. 서른 살이 넘어 초등학교 동창회를 나간 적이 있는데 심지어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안다고 해도 영화감독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엄청 놀랐을 정도니까. 어린 내가 느꼈던 ‘저항하지 못하는 자존감’이라고 할까? 그 당시의 느낌과 관심들이 영화아카데미 시절 만든 단편 <열일곱>에 담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속에선 매를 날리는 장면이 가장 좋고 소년이 선생님과 헛간에서 얘기하는 장면도 좋다. "어떻게 길들였나" 하는 질문에 "길들이는 게 아니라 서로 훈련되는 거"라는 소년의 얘기가 핵심이다. 그는 이미 학교를 떠나 그 스스로 ‘교육’과 인간관계의 방식에 대해 깨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남들처럼 매가 무서운 게 아니라, 매에 대해 훌륭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매가 하늘을 날면 온 세상이 조용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나중에 <케스>를 다시 스크린으로 만나면서 그런 행복한 느낌을 온전하게 받을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무척 단순한 얘기지만 소년의 표정과 더불어 쉬이 잊히지 않는 영화다.

하지만 켄 로치는 감독으로서 닮기가 참 힘든 사람이다. 브라이언 드팔마나 데이비드 핀처 같은 경우는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그 스타일을 모방하거나 흉내 낼 수 있지만, 켄 로치는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어떻게 따라 하기는 힘든 사람이다. 그래도 그처럼 언제나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노동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늘 그 느낌으로 영화를 대하려 노력한다. 그가 나처럼 이러한 소재를 영화로 다룬다면 과연 어떤 관점으로 다룰까, 하면서 말이다. 스토리텔링의 영향을 받는다기보다 그 존재감이 너무나도 선명한 사람이다. 그것은 정말 영화감독으로서 부러운 점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실제 말하는 방식,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과 직업적으로 자신이 지향하는 것이 일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까. 차갑지만 냉소적이지 않고 낙관적이지만 어설픈 희망을 주진 않는다. 그가 지닌 정치적 관점과 입장을 떠나 세계를 보는 확고한 눈이 명확하다는 사실이 부럽다. 세상사람 누구나 명확한 지향점이 있어도 끊임없이 회의하게 되는데, 켄 로치 그 자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걸어왔는지 진심으로 한번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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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싸우는 작가주의에 대하여 (KINO1997.9.)

KINO September 1997
켄 로치 - 결코 내리지 않는 깃발 :
켄 로치, 싸우는 작가주의에 대하여
interview by LEE YOUNG-MI


진보적인 영화의 양심이라고 불리우는 켄 로치와의 장시간 인터뷰.
그의 데뷰작에서 미래의 영화까지 30년에 걸친 영화와 삶에 관한 이야기
 
켄 로치는 우리가‘다시’발견하는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입니다. 포스트모던한 신기루 속에서 대지에 발 내리고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노동계급의 영화를 만드는 켄 로치는 우리를 이끄는‘진정한’예술가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기꺼이 조감독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 존경받는 예술가, 대니 보일이 유일한 영국영화‘감독’이라고 부른 시네아스트, 그룹 오아시스가 그들의 노래로 오마쥬를 바친 감독에게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존경을 바치기로 합니다. 우리 세대의 마지막‘사회주의’감독 켄 로치는 놀랍게도 지금 이 곳에서 영화의 힘을 믿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작가일 것입니다. 그는 한번도 패배의 연대에 빠져들지 않았으며 ‘소수를 위한 맹세’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의 명제입니다. 켄 로치와의 첫번째 인터뷰를 키노는 진심으로‘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작 가 주 의 최 전 선 과 의 만 남 ? 그 두 번 째
 
켄 로치는 1936년 워릭셔의 뉴네톤에서 태어났다. 기계 숙련공인 아버지를 둔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노동계급에 두며 일생 노동계급을 위한 길을 밟기로 결심하였다. 대학에서 그는 실험연극 활동에 가담하였고 졸업 후 연극계에 뛰어들어 희극 레파토리 극단의 일원으로 버밍햄의 학교를 돌며 순회공연을 했으며, 60년대 초 BBC에 합류, 1964년 연출 데뷰작으로 경찰 시리즈물「Z-카 Z-Cars」중 세편을 만들었다. 이 드라마는 증가 일로에 있는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4명의 조사담당 경관이 팀을 구성, 두대의 순회차인 Z-카를 타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범 죄를 해결하는 내용이다. 사회적 코멘트가 담겨 있고 북부 지역 공장지대를 작품의 배경으로 하지만, 켄 로치는 이 프로그램 연출을“유용한 경험이었으나, 기본적으로 경찰을 PR하는 포맷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제한된 것이었다”고 술회한다. 이후 그는 65년 제작자 토니 가넷과 처음 만나 ‘수요 드라마(The Wednesday Play)’시리즈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정치의식을 공유하며 텔레비전을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매체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 시리즈의 목적을 ‘현재의 상황을 반영하는 드라마의 발굴’로 생각하고 형식면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경계선을 파괴한 다큐멘터리 드라마라는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였다. 그들이 최초로 주목받은 것은 이 시리즈의 하나인「정션 지역에서 Up the Junction」(65)로 런던의 클래펌 정션에 사는 세명의 노동 계급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주변 환경에 의해 빈곤한 지경에 빠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음 작품인「커밍 아웃 파티」(65)는 감옥에서 출감한 부모가 그들의 재결합을 자축하는 파티를 열고, 파티의 흥분 속에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일시적으로 잊게 되는 이야기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당신은 초기에 극영화를 시작하기 전까지 극단과 BBC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연극활동 및 TV 드라마 제작경험이 당신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글쎄, 나는 극단에서 오래 일하지는 않았다. 약 2,3년쯤. 대학을 졸업한 후였는데 처음엔 잠시 배우로 무대에 섰다가 연출 부문으로 옮겨 여러 편의 연극을 연출하였다. 연기 경험이 내게 준 이점은 배우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그들의 연기를 연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된 것이다. 어떻게 그들이 연기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어떻게 하면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그들의 반응이 어떤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영화를 연출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카메라에 대해 잘 아는 촬영감독과 사운드에 대해 잘 아는 녹음기사와 일하게 되지만 누구도 연기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지도야말로 영화감독 스스로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인 것이다. 나는 배우들과의 작업을 즐긴다. 그리고 배우들과 의 작업이야말로 매일매일의 연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이 극단활동에서 얻은 영향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연극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조안 리틀우드 Joan Littlewood 라는 훌륭한 연극연출가가 있었는데 나는 그녀의 작품들을 아주 좋아하였다. 그녀는 사회문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특히 노동계급을 위한 연극들을 많이 무대에 올렸다. 그녀는 노령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활동 중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BBC에서의 활동은 어떤 면에서 극영화를 만드는 것과 같았다. 나는 TV용 영화를 만드는 것이나 셀룰로이드 필름을 만드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점도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BBC에서의 경험은 극영화를 만들 때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당신은 토니 가넷과 함께 오래 일했습니다. 언제 그를 만났으며, 그와의 작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가 토니를 처음 만난 것은 BBC에서 아주 초기작을 만들 때였다. 그 때 그는 드라마의 배우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는 BBC에 스토리 에디터로 합류하여 우리는 약 15년 동안을 함께 일했다. 아주 긴 시간이다. 나는 토니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주 예리하고 비판적인 마인드의 소유자로 창의적인 사람이다. 또한 아주 충실하며 좋은 친구이다.
 

당신들은 영화제작에 관해 공통적인 관점을 가졌습니까?

>>그렇다. 우리는 둘 다 아주 비슷한 배경을 가졌는데, 둘 다 영국의 중부지방 출신이고, 두 사람 다 숙련 노동자 가정 출신이다. 당신이 누군가와 그토록 많은 공통점을 가질 경우, 당신은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비슷한 관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1964년, 흑백
프로듀서 데이빗 로즈 출연 브라이언 블래스, 조셉 브래디, 제임스 앨리스
북부 지역 공장지대를 순찰하는 Z-카를 탄 네명의 경관 이야기.
1967년<불쌍한암소Poor Cow>
1969년<케스Kes>
1971년<가족생활Family Life>
1979년<블랙잭Black Jack>
1981년<외모와미소Looks and Smiles>
1986년<조국Fatherland>
1990년<숨겨진계략Hidden Agenda>
1991년<하층민들Riff-Raff>
1993년<레이닝스톤Raining Stones>
1994년<레이디버드레이디버드Ladybird, Ladybird>
1995년<랜드앤프리덤Land and Freedom>
1996년<칼라송Carla’s Song>
영 화
1964년「캐서린Catherine」
「Z-카Z-Cars」중세가지에피소드
「젊은이의일기Diary of a Young Man」
1965년「A Tap on the Shoulder」
「큰모자를써라Wear a Very Big Night」
「세번의맑은일요일들Three Clear Sundays」
「정션지역에서Up the Junction」
「커밍아웃파티The Coming Out Party」
1966년「캐시집에오다Cathy Come Home」
1967년「두가지마음으로In Two Minds」
1968년「황금의비전The Golden Vision」
1969년「흑과백In Black and White」
「커다란불꽃The Big Flame」
1970년「일과후After a Lifetime」
1971년「일에대해말하자Talk About Work」
「평조합원들The Rank and File」
1973년「불운A Misfortune」(안톤체홉원작)
1975년「희망의나날Days of Hope」
1977년「석탄의가치The Price of Coal」
1979년「오디션Auditions」
1980년「지도력에관한한질문A Question of Leadership」
「사냥감지기The Gamekeeper」
1983년「좌파, 우파The Red and the Blue」
「지도력에관한질문들Questions of Leadership」
1984년「당신은어느편인가Which Side Are You On?」
1985년「전투는끝났지만우리의전쟁은끝나지않았다The End
of the Battle but Not of the War」
1989년「Time to Go」
「우드필로부터의관점The View from the Woodpile」
1991년「전보들Dispatches」
「아서의전설The Arthur Legend」
1995년「현대소유주들의어떤경우The Contemporary Case
for Common Ownership」
1996년「명멸하는불빛The Flickering Flame」
 
우리가 느꼈던 것은 우리들이 만드는 작품이 노동계급의 삶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우리는 민중이 어떻게 생활하게 되고 어떤 형태로 싸우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회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토니와 나는 둘 다 정치적이었고 맑시즘에 관심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같은 유머 감각을 가졌는데, 우리는 웃음이 정치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느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함께 하였다.
 

15년의 공동작업 후, 79년의 <블랙 잭>을 끝으로 당신들은 함께 작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니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10년간 로스앤젤리스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떨어져 작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주 만난다. 토니는 현재 영국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위한 드라마들을 제작하고 있는데 아주 성공적이다.
 
 
66년 토니 가넷과 함께 완성한「캐시 집에 오다Cathy Come Home」는‘BBC가 방영한 드라마들 중 현재의 사회와 생활 환경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린 드라마’로 작가 제레미 샌드포드가 수개월에 걸친 리서치를 통해 작품에 착수했다. 16미리 흑백필름으로 촬영한 이 드라마에서 다큐멘터리적 요소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캐시 역의 캐롤 화이트와 남편 역의 레이 브룩스 외에는 대부분 비전문 연기자들을 사용한 켄 로치는 즉흥연기, 극적인 요소의 철저한 배제, 의도적으로 극의 흐름을끊는 편집, 뉴스릴과 같은 거친 화면, 인터뷰 등 나레이션의 활용으로 인한 소격효과, 올 로케이션 촬영 등으로 실제 현장의 긴박성과 감동을 생생하게 되살려내었다. 「캐시 집에 오다」는 6백만명의 시청자를 TV 앞에 불러 들였으며 전 영국에 걸쳐 홈리스 문제에 대한 충격과 광범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다. 이드라마는 이탈리아 영화제에서 수상하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프로파간다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캐시 집에 오다 Cathy Come Home」는 예외적인 편집방식, 나레이션과 인터뷰의 사용 및 비전문 배우들의 기용 등 독특한 스타일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시네마 베리떼의 영향입니까?

>>시네마 베리떼로부터 약간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더욱 영향받은 것은 뉴스릴과 다큐멘터리, 뉴스 프로그램들로부터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한 것은 뉴스와 똑같은 영화였다(이 영화는 TV용이지만 16미리로 촬영되었다). 뉴스와 같은 효과를 갖는 영화, 즉 픽션과 함께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혼합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첨예한 분위기를 가지며, 사실적인 감각을 느끼게 하는. 그러자면 연극적인 연기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연기가 필요했다. 그런 형식을 사용한 이유는 시청자들이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이건 허구니까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없고“이건 사실이다. 따라서 이건 심각한 문제로구나”라고 느끼게 되었다.

「캐시 집에 오다」는 어떤 반응을 얻었습니까?
>>반응은 매우 좋았다. 전국에 걸쳐 홈리스 문제에 관한 광범위한 토론회가 개최되고 의회에서는 청문회가 열렸다. 그리고 우리는 주택장관을 방문하였다. 그것은 정말로 전국가적인 사건이었으며 매우 강한 효과를 얻었다.
 

「정션 지역에서」와「캐시 집에 오다」의 큰 성공 후에 당신은 극영화로 옮겨갑니다. 이동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극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동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TV 드라마와 극영화를 만드는 것 사이에 차이점이 없다고 생각하는지요?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같다. 어쨌든 대부분의 영화들이 요즘 텔레비전에서 상영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모든 영화는 텔레비전 영화이다. 단지 약간의 영화들만이 극장에서 시작할 뿐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둘은 같은 매체이다. 당신은 셀룰로이드에 영상을 새기고 그것들을 함께 결합시키는 것이다.
 

극영화로의 이동 후 당신과 관객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TV 시청자들과 극영화 관객들이 어떻게 다르다고 보시는지요?

>>내가 TV용 영화를 만들었을 때, 비록 이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 당시엔 단지 두 채널밖에 없었고 비디오는 아직 없었다. 따라서 그것을 시청하는 관객들이 천만명 혹은 천 이백만명 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그 드라마들을 즉시 보았고 때로 이것은 전국민적인 사건이 되곤 하였다. 이제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영화는 오래 지속된다. 예를 들어 <케스>의 경우, 그것은 극장을 통해 오랜 동안 상영되어 왔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한번에 보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그것을 오랜 기간에 걸쳐서 보게 된다. 그 점이 다른 점이다. 영화는 즉각적인 뉴스와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보다 오래 지속된다.

<불쌍한 암소 Poor Cow>에서는 고다르적인 요소가 발견되는데…. 당신은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까?

>>내 생각에 1960년대에는 모두가 프랑스 누벨 바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그들로부터 영향받지 않고 어떤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화의 문법에 그토록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진정한 영향이기보다는 유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우리들은 아주 젊었고, 영화를 이용하는 방법에 있어 성숙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영향이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종류의 영향은 곧 서서히 사라져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관해서 보다는 스타일에 대해 더 많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스트들이 길게 보아 더욱 더 영향을 가질 것이라고 본다. 나는 비토리오 데시카, 체코의 밀로스 포만, 이리 멘첼 등을 더욱 좋아한다. 나는 결국 그들에게서 더욱 많은 영향을 받았다.
 
「캐시집에오다」Cathy Come Home 1966년, 흑백, 75분
촬영; 토니이미, 출연; 캐롤화이트, 레이브룩스
남부 런던의 젊은 노동계급 커플의 이야기로 그들은 세 자녀와 함께 상대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나,
남편이 직장에서 사고를 당하면서 직장과 집을 모두 잃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폐가나 버려진 버스 등을 전
전하며 생활을 유지하나 홈리스들을 자신의 지역에서 몰아내려는 주민들의 방화로 거기서도 쫓겨난다. 캐시
와 아이들은 홈리스를 위한 호스텔에 유치되나, 남자의 거주는 허용되지 않으므로 가족은 헤어져 살게 되
고 캐시는 호스텔 내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아가며 생존을 위한 힘겨운 투쟁을 벌여나간다. 이 과정에
서 선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그녀는 거칠고 강팍한 여자로 변해가고 결국 그녀가 아이들을 부양할‘능
력과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합법적으로’아이들을 그녀에게서 빼앗아간다. 혼자가 된 캐시에게
남은것은절망뿐이다.

<불쌍한암소>Poor Cow 1967년, 칼라, 101분
촬영; 브라이언프로빈, 출연; 캐롤화이트, 테렌스스탬프, 존빈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불행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조이가 남편이 절도로 감옥에 수감되자 남편의 친구를 사귀며 행복을 맛보나 결국에는 그마저 감옥에 들어가버리고 생활을 위해 여러 밑바닥 직업을 전전한다는내용이다. 이영화는여성들에대한성적착취를비판하며, 여성의자유로운성적관계를 여성의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 또한 브레히트적인 자막과 주관적인 독백의 사용, 여주인공과 보이지 않는 인터뷰어 간의 토론 등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으나 형식과 테크닉에 가려져 감독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관객에게 센티멘탈한 감정적 동화를 주는데 그친다.
 
 
로셀리니는 어떻습니까? 그는 당신에게 영향을 주었는지요?
>>물론이다. 나는 로셀리니의 영화들도 좋아하였다.
 
 
켄 로치는 최초의 극장용 영화 <불쌍한 암소> 이후 토니 가넷과 함께 다시 TV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두 가지 마음으로 In Two Minds」(67), 「황금의 비전 The Golden Vision」(68), 리버풀 부두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커다란 불꽃 The Big Flame」(69) 등을 만들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그들은 케스트렐 Kestrel이라는 독립 영화사를 세워 두번째 극영화를 준비하였다. 베리 하인즈의 소설을 기반으로 크리스 멩게스에 의해 요크셔의 작은 광산촌을 배경으로 촬영된 <케스 Kes>는 켄 로치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파악된다. 그는 <케스> 이전의 자신의 초기 작품들을‘ 가능한한 비주얼하고 영화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형식과 새로운 스타일의 실험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케스>를 만들면서 그는‘그 모든 시도의 사용으로 어떻게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킬 것이냐’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케스>는 질감이나 분위기, 연기에 있어 여전히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띄지만 형식 면에서는 내러티브 구조를 따른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인‘소년과 애완동물’류의 영화가 빠지는 감상성에 결코 빠지지 않는다. <케스>는 대중의 열띤 호응을 얻었으며, 깐느의 비평가 주간에 선정되었고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서 수상하였다.
 

당신은 종종 <케스>가 당신의 작품 스타일 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변화하였습니까?

>>그 시점은 우리가 60년대 중반에 프라하에서 만들어진 몇편의 체코 영화들을 보았을 때였다. 그리고 나는 체코 카메라맨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촬영감독과 일하게 되었고 그가 크리스 멩게스였다. 크리스와 나는 둘 다 그 단순성에, 그들 영화의 분명한 단순성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보다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누벨 바그를 매우 화려하고 인위적인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내가 체코의 영화들에서 본 스타일보다 인간에 대해 따뜻한 관찰의 방법을 통해 그들을(노동계급을) 존중할 수 있는 스타일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품에 있어서는 형식이나 스타일이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닌지요? 혁명적인 내용은 혁명적인 형식에 담겨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용이 스타일에 관한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본다. 그리고 내용이야말로 영화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은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속에서 나온 핵심적인 생각을 중심으로 다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만일 당신이 어떤 특정한 스타일을 좋아하여 그것을 어떤 내용에 부적절하게 부과할 경우, 그 결과는 좋지않은 작품으로 귀결될 것이다.
 

당신은 헝가리의 감독 미끌로쉬 얀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과 사상의 맥을 비슷하게 갖는 그는 형식에 관해서는 당신과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나는 그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특히 초기 작품들을. 하지만 그의 후기 작품들은 너무 인위적이라고 느낀다. 카메라가 시종일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일종의 어지러움을 느꼈으며, 제발 카메라가 그냥 제자리에 서서 내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게 했으면 하고 원했다. 내가 위험하다고 느낀 것은 스타일이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보다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케스>를 기점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변화시킨 이유입니까?

>>그렇다. 아주 꾸밈 없이 소박하고 진지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단순한 프레이밍을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서. 단순성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명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것을 가장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말해야 한다.
 
 
<케스>Kes 1969년, 칼라, 112분
촬영; 크리스멩게스, 출연; 데이빗브래들리, 콜린웰랜드, 프레디플렛처
자신에게 무관심한 바람둥이 엄마와 난폭한 형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빌리는만화책과 작은물건을 훔치는일에서 생활의도피처를 찾는다. 학교 급우들은 외톨이에 왜소한 그를 괴롭히고, 선생들은 그를 미래의 노동자로 정형화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에 빌리가 감사와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한다. 조회 시간, 수업시간, 체육시간등빌리는그어느것에도관심이없고잘해내지도 못하여 곧잘 선생들의 표적이 된다. 직업 인터뷰를 받아 보지만 그의 미래도 광부인 아버지와 형의 행보를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이런 무의미한 생활은 어느날 그가 매의 일종인 팔콘의 새끼를 둥지에서 데려와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목적과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그는 이 매를‘케스’라 이름짓고 그의 학교 선생들이그에게 보이는대우보다 훨씬참을성 있고사랑과 존경이 넘치는 방법으로 훈련시킨다. 그런 그를 한 선생이 발견하고 빌리로 하여금 학급의 친구들에게 케스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한다. 처음에 빌리는 열성과 권위를 가지고 매에 관한 넘치는 지식으로 급우들 앞에서 자신감 있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그것이 그를 어떻게 이끌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면서. 하지만 이 아름다운 새와의 관계는 소년의 환경에서는 지속되기힘든 것. 그의 형은 사소한 분노로 케스를 죽인다. 슬픔과 좌절 속에서 빌리는 케스를 땅에 묻는다. 남은 것은 케스를 통해 그의 미래가 자신의 출신 계급과 가난, 가족의 불안정성과 지지의 부족으로인해제한될것이라는사실뿐이다.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단순성에 입각해 작품을 만들 생각입니까?

>>1960년도에 영국은 10퍼센트의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학생들을 한 학교에, 그리고 나머지 8, 90퍼센트의 학생들은 다른 학교에 배정하는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명백하게 그들 8, 90퍼센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였고 어떤 학문적인 야심도 가질 수 없었는데, 이러한 결정은 아이가 열한살때 이미 내려졌다. 생각해 보라. 한 아이가 열한 살일 때“너는 인생에 실패할 것이다”라고 결정지어주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교육제도에 대해 비판하였다.

 
<케스>에 등장하는 선생들은 학생들을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는데, 특히 체육선생의 경우 풋볼 시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심지어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영화는 코미디이다. 체육선생은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조크와 유머는 거기서부터 나온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보다 더 어린아이 같고 유치하다. 그는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으로, 영국 관객에게는 그들이 좋아하는 풋볼에 대한 관습적인 언급이 많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것은 익숙한 웃음에 관한 코미디이다. 즉 당신은 당신과 친근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케스> 이후 다시 BBC에 돌아온 켄 로치는「평조합원들 The Rank and File」(71)을 만들었다.「 평조합원들」은 유리 공장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지도자들에 반대하여 평조합원으로서 자신들의 산업적 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이야기로 한명의 노동자가 마르크스를 인용하는 마지막 장면 때문에 이를 염려한 BBC로 부터 목소리는 들리되 노동자의 모습은 화면에 보이지 않게 만들라는 압력을 받았다. 켄 로치는 주의깊게 이 장면을 두 가지 방법으로 다 촬영한 후 TV 방영을 위한 트랜스미션 직전에 원래의 버전으로 교체하는 수법으로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켰다. 케스트렐 사의 다음 극영화는 <가족 생활Family Life>(71)로서 켄 로치는 주인공을 포함한 연기자 전원을 리버풀의 주민들 중에서 선정하여 여러 주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토론하고 연기를 이끌어 낸 후 매일 세 시간씩 그 결과물을 촬영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민중들이 그들의 두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화란 시나리오와 영화 속 인물들 사이의 변증법이다. 시나리오 속 인물들이 사실적이라면 영화 속의 인물들 또한 사실적이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켄 로치는 <가족 생활> 이후 <블랙 잭 Black Jack>(79)에 이르기까지 약 9년간 극영화를 중단하고 TV용 영화들을 만들었다「. 희망의 날들 Days of Hope」(75)은 네 파트로 나누어진 시리즈물로 짐 알렌에 의해 쓰여졌으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부터 1926년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한 노동자 가족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는 과거사를 다룬 켄 로치 최초의 역사물임에도 그 정치적 상황과 투쟁의 성격이 1970년대 초반과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
 

<가족 생활 Family Life>(71) 이후 당신은 약 9년 동안 극영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극영화를 만들 만한 돈을 구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엔 채널 4가 생기기 전이었고 영국의 극영화는 미국영화를 모방해야 했다. 따라서 영국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텔레비전뿐이었다. 토니와 나는 1970년대에 여섯개의 TV용 영화를 만들었다. 한 그룹의 네 영화와 다른 한 그룹의 두 영화들을, 그리고 약간의 소품들도 연출하였다.
 

당신은 70년대 이후 많은 다큐멘터리들을 연출했습니다. 드라마와 비교해 다큐멘터리 연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극영화는 그것이 상영되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이 적어도 1년이나 2년이 걸린다. 다큐멘터리는 빠른 기간 내에 만들 수 있고 한 달이나 두 달 후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를 팜플렛이라고 한다면 극영화는 소설에 해당된다. 나는 다큐멘터리 연출을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아주 기본적인 영화제작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촬영감독 한명과 촬영조수, 녹음기사와 감독이 총멤버로서 차 한 대에 함께 타고 가서 영화를 만들어가지고 돌아온다. 하지만 극영화는 최소 20명이나 30명의 인원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오케스트라와 비교하면 현악 4중주에 해당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당신이 아주 직접적으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나는 이것을 아주 좋아한다. 다큐멘터리는 또한 진짜 상황에 관련되기 시작하면서 민중들과 접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가족생활>Family Life 1971년, 칼라, 108분
촬영; 찰스스튜어트, 출연; 샌디래트클리프, 빌딘, 그레이스케이브
완벽주의적이고 도덕적인 부모 밑에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로그녀의병의근원을파악하려는 실험적인 정신치료팀의 노력이 부모에 의해 거부되고결국그녀는병의원인보다는증상에 더관심을보이는전통적인행동주의치료법에 내맡겨지며 더더욱 자신을 잃어간다는 내용이다. 켄 로치는 여기서 가족이 계급사회 구조의 생산물이자 구조를 유지시키는도구라는관점으로문제를제기한다.

<블랙잭>Black Jack 1979년, 칼라, 110분
촬영; 크리스멩게스, 출연; 스티븐허스트, 루이스쿠퍼, 진프랜발, 필애스크햄
깐느영화제국제비평가상
레온 가필드의 소설을 각색한 <블랙 잭>은 18세기 요크셔를 배경으로 블랙 잭이라는 산적이 교수형에서 살아남아 어린 소년 톨리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유랑극단과 합류하면서 시작한다. 블랙 잭은 야수 같은 사나이로 톨리를 이용하는데 이들은 도중에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부모에 의해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소녀 벨을 구출하게 되고, 벨은 톨리의 따뜻한 보살핌에 힘입어 점차 정상으로 회복된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정신병동에 갇힌 그녀를 톨리와 그에게 감동한 블랙 잭이 구출한다. 켄 로치는‘역사물의 일반적인 관습에서 탈피’하여 사실적이지 않은 모든 테크닉들을 배제하고 다큐멘터리적인 거친 질감과 촛불과 램프 등 최소의 조명만을 이용, 18세기의 사실적인 배경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고있다.

<희망의 나날>Days of Hope 1975년, 칼라 4부작
촬영; 토니 피어즈 로버츠, 출연; 폴 코플리, 파멜라 브라이튼, 니콜라스 시몬즈
1914년부터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부터 1926년 총파업까지 한 노동자 가족의 역사를 다룬 4부작 드라마.
 

그렇다면 당신은 다큐멘터리가 당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 드라마보다 효과적이라고 보십니까?
 
>>글쎄, 그건 전적으로 당신이 무엇을 찍느냐에 달려있다. 그것들은 단지 매체일 뿐이다. 나는 다큐멘터리든 드라마든 형식은 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을 특정 방향으로 만드는 것은 당신이 말하는 내용이다.
 
당신은 앞으로도 다큐멘터리를 계속 만들 생각입니까?

>>그렇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극영화를 한편 만들고 다음엔 다큐멘터리를 한편 만드는 식이다. 사실 나는 몇 달 전에 리버풀의 부두 노동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한 편 만들었다. BBC와 프랑스 채널인 아르뜨가 제작했으며 50분 길이이다. 그것의 연출은 의미있었으며 즐거웠다. BBC와 프랑스 및 독일의 TV에서 방영되었고, 몇 군데의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켄 로치는 70년대 말, BBC를 떠나 독립 프로덕션인 ATV에서 여러 편의 TV용 작품들을 만드는데,「사냥감지기The Gamekeeper」(80)는 남부 요크셔의 한 철강노동자가 어떤 부자집의 사냥감지기로 일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옮겨갔다.「 지도력에 관한 한 질문 A Question of Leadership」(81)은 그의 최초의 다큐멘터리로 1980년 영국 철강산업의 파업 효과를 분석하고 있는데, 직접적으로 정치인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등 민감한 내용 때문에 기록영화 감독의‘균형감각’에 관한 문제제기를 불러일으켜 1981년까지 방영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발달된 고도의 검열의 한 형태로서 이후 켄 로치는 계속 이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본래 채널 4를 통해 방영하려고 만든 다큐멘터리「지도력에 관한 질문들 Questions of Leadership」(83)은 행동을 거부하는 조합 지도자들에 대한 평조합원들의 문제제기를 네 파트로 나누어 다루고 있는데, IBA(독립방송 윤리위원회)에 의해 조합 지도자들에 대한 불충분하고 편파
적인 관점으로 다루고있다는 평과 함께‘형평성과 책임감’의 결여를 강하게 비난받았다. 이 시리즈는 결국 방영되지 못하였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Which Side Are You On?」(84) 역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 반대파들에게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일군의 평론가들과 문화이론가들에 의해 그의 작품은 미학적으로‘나이브하며 낡은 방식’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같은 현실에서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려는 켄 로치는 자금 조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86년 만들어진 <조국 Fatherland>은 영국, 독일, 프랑스 자본의 합작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검열문제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 1980년대 정치적인 이유로 네편의 작품이 채널 4에 의해 상영 금지되었을 때 검열의 문제를 겪었다. 그것들은 정치적인 다큐멘터리들이었고 그 외에는 어떤 다른 이유도 없었다. 내 말은, 영화 속에서 누구도 옷을 벗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문제삼은 것은 민중들이 정치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 장면이다. 명백히 정치적인 검열이었다. 사실 모든 정부가 다 검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검열은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검열에 대항해 싸우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작가, 배우, 방송인 모두의 의무이다.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에 대해 오랜 기간 검열을 해왔다. 그들은 아일랜드 사람들 중 누가 말할 수 있는가와 말할수 없는가의 관리를 결정해 왔다(IRA의 멤버는 라디오나 TV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왔었다). 검열에 대해서는 맞서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권력에 관한 문제이므로.
 
어떤 작품이 검열문제를 가장 크게 겪었으며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지도력에 관한 질문들」. 그것은 노조 지도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리고 그들이 마가렛 대처에 대항하는 데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마가렛 대처는 엄청난 실업률을 만들어낸다. 노조 지도자들은 저항을 조직하는 것을 거부하고 싸움을 포기한다. 하지만 평조합원들은 싸우기를 원한다. 이것이 내용이었다. 검열은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는데, 우리가 공격한 노조의 지도자들이 정치적으로 파워를 가지고 있었고 힘
있는 친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처 집권 후에 영화에 대한 검열은 약화되었습니까? 아니면 강화되었습니까?
>>내 생각에 그것은 언제나 똑같았다. 검열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한 가지 형식으로 혹은 또 다른 방식으로. 왜냐하면 방송은 매우 강력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강력하다. 민중의 생각을 조절하는 것은 곧 그들을 조절하는 것이며, 현대에 있어 방송은 그러한 조절을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은 많은 비밀경찰을 둘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BBC를, 그리고 I TV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아주 교묘하고, 고도로 발달된 통제 방식인 것이다. 왜냐하면 최고의 통제 방식은 통제 대상이 자신들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뉴스가 특정한 방법으로 미리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영국 지배계급은 세계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통제 집단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모든 것이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냥감지기>The Gamekeeper 1980년, 칼라, 84분
촬영; 크리스 멩게스, 출연; 필 애스캠, 리타 메이, 앤드류 그로브, 피터 스틸
부잣집 사냥감지기가 된 철강노동자가 겪는 가진 가와 못 가진 자의 갈등.
 
<외모와미소>Looks and Smiles 1981년, 흑백, 104분
촬영; 크리스멩게스, 출연; 필애스크햄, 팜대럴, 그레이엄그린
공업도시 쉐필드에 사는 두명의 고교 퇴학자들이 군에 입대할 것인가, 아니면 실업자로 계속 남을 것인가라는 선택에 직면하여 한명은 군에 입대,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카톨릭을테러하는데가담하게되고, 다른소년은고향에남아 직장을 구하려고 노력하지만 좌절하는 이야기로 냉소적이거나 멜러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뉴욕 타임즈에 의해‘어떤 다른 감독의 작품보다도 한 민족의 집단적인 무의식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이 영화는 깐느영화제 경쟁부문에올랐으며, 이후 켄로치는약 5년동안 극영화의 공백기를가진다.

<조국>Fatherland 1986년, 칼라, 111분
촬영; 크리스멩게스, 출연; 게룰프파나크, 파비엔느베이브, 크리스틴로즈
1985년의 동독을 배경으로 동독 체제에서 저항가수로 활동하던 주인공이 더 이상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없는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서독으로 망명, 나찌 시대에 자신처럼 서방으로 탈출했던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이다. 주인공은 자유가 보장되리라고 믿었던 자본주의 서독에서도 자신에 대한 감시와 보고가 자행되는 현실과 자신의 노래를 오로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레코드 제작사에 회의를 느낀다. 결국 아버지를 찾지만 그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로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후 자신의 신념을 접고 나찌에 가담, 네덜란드에서 레지스탕스의 학살에 가담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아버지를 떠난다. 그는 서독에서 새로운 저항가요를 부르게된다.
 
<숨겨진 계략 Hidden Agenda>(90)은 어떠했습니까? 역시 검열문제를 겪었나요?
>>그렇다. 우리는 영국 내에서 돈을 구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미국에서 영화의 자본을 끌어왔다. 그리고 만들어진 후에는 영국의 언론과 정치인들에 의해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이 영화가 테러리즘을 옹호하며, IRA를 지지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이 시기는 걸프 전쟁(90~91)이 진행되던 때로 영국은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애국주의가 팽배했는데, 이 영화는 영국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극장들이 상영을 거부하였다.

 
정부를 위해 일하는 영화평론가들도 있다고 보셨는지요?
>>정부를 위해 일한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관점을 공유한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결코
직접적으로 정부를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더 미묘한 차원이다.

 
<숨겨진 계략>은 실제 사실입니까?
>>배경은 실제 사실이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허구이다. 여느 전쟁영화와 같다. 전투는 사실이지만 인물들은 허구이다. 또한 우리들은 실제 이름들을 사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법정에 서게 되고 얼스터 경찰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픽션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이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어쨌든 나는 아일랜드가 아주 흥미롭고 반복해서 다룰 만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RUC(로얄 얼스터 경찰)에 대한 묘사가 흑백논리로 편견에 치우친 것이 아닙니까?
>>아니, 나는 그것이 사실적이라고 본다. RUC는 거의 전적으로 한쪽 편에서(프로테스탄트 쪽에서) 나온 조직이다. 따라서 그들은 한쪽 편의 논리만을 대변하는 경찰력인 것이다. 그들은 실제 영국 안보 경찰(security forces, 국가보안을 담당하는 untiarmy 혹은 경찰)과 함께 진상이 은폐된 살해 사건들에 가담해 왔다. 이것은 절대로 사실이다.
 
 
1990년에 완성한 <숨겨진 계략>은 켄 로치의 작품 중 유일하게 정치 스릴러로서 장르 영화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짐 알렌의 시나리오는 잉글랜드인들에 의해 아일랜드에서 자행되는 숨겨진 계략을 파헤치고 있으며 극장 상영 후 보수계의 신문인「타임」은 영화가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으며 IRA를 옹호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이로 인해 사실과 허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80년대는 대처 이후 더욱 보수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의 작품이 검열과 자금조달 문제를 심각하게 겪으며 미학적 차원에서도 공격을 받는 등 감독 자신으로서도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모든 난관들을 이겨내고 90년대 들
어 감동적이고 작품성이 뛰어난 주옥같은 영화들을 만들어내었다. 켄 로치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하층민들 Riff-raff>(91)은 런던의 공사판에 모여든 각지의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대처리즘 치하의 비
전 없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켄 로치는 그 자신 생활을 위해 공사판 노동자로 일한 경험이 있는 희곡 작가 빌 재스의 시나리오에 전문배우와 비전문배우를 함께 기용, 즉흥적인 연기와 다큐멘터리적인 촬영으로 90년대에 접어든 노동자들의 상황과 절망, 그리고 연대를 이야기하였다. <조국>과 <숨겨진 계략>에서의 지나친 정치성이 그의 영화를 관객과 갈라놓았다면, 이 영화는 노동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들의 언어와 생생한 생활의 묘사,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노동계급에 의해 자신들의 영화로 받아들여지며 작품성 또한 높이 인정받았다. 특히 충격과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숨겨진계략>Hidden Agenda 1990년, 칼라, 108분
촬영; 클라이브티크너, 출연; 프란시스맥도만, 브라이언콕스, 브래드도리프
깐느영화제심사위원특별상
1982년의 북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영국의 한 고위 조사관이 IRA 동조자와 미국인 인권변호사의 의문의 죽음을 수사하던 중 IRA의 짓이라고 공식 발표된 배후에 RUC(로얄 얼스터 경찰)가 개입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은폐된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나, RUC의 조직적인 협박 앞에 힘의 한계를 느끼고 사건 피해자들을 뒤로 한 채 얼스터를 떠난다.

<하층민들>Riff-Raff 1990년, 칼라, 95분
촬영; 배리애크로이드, 출연; 로버트칼라일, 에머맥코트, 지미콜맨
절도혐의로 수감 생활을 마치고 막 출감한 스티비(로버트 칼라일)는 고향인 글래스고우를 떠나 런던으로일자리를찾아떠난다. 안전조건이나쁜대신고용인들의과거를묻지않는어느공사장에 취직하여 자신과 비슷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각처에서 몰려든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부자들을 위한 콘도를 짓는 일에 종사한다. 공사장의 안전기준은 끊임없이 의심되지만 아무런 대책도 마련되지 않으며 십장은 이 거친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들을 고안해 낸다. 그러나 조합도 경험도 없는 이들은 초보적이나마 자신들의 방법으로 연대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스티비는 벨파스트 출신의 삼류가수 수잔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함께 생활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다투면서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가지만 그 관계는 어머니의장례식에 다녀온스티비가마약을 하고있는 수잔을 발견하면서 결정적으로 깨어진다. 공사장에서는 안전사고로한동료노동자가추락하여 죽는사고가발생한다. 분노에 찬 스티비와 동료 한명은 다 지어진 빌딩에 불을지른다.

 
<조국>에서 당신은 캡션을 사용하여 스탈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구호로 표현하는 등, 많은 프로파간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영화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은 가장 덜 정치적인 것들이었다고 보는데요.
 
>>난 그 영화를 별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나리오는 매우 재미있게 쓰여졌었다. 하지만 나는 연출을 잘해내지 못했다. 그 때 나는 4, 5년 동안 극영화를 만들지 못했기에 약간 겁을 먹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최근에 만든 영화들이 보다 성공적이라고 본다. 그것들은 보다 직접적이고 단순하다. 그것들은 지식인 적인 무게를 많이 갖고 있지 않다. 중요한 점은 정치가 실제 인물들 속에 간접적으로 녹아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관객들이 영화의 전체를 통해 따라가게 되는 인물들의 감정적인 인생경로 속에 정치가 스며들어 있을 때, 메시지가 전면에 서는 게 아니라 실제 인물의 한 부분일 때 관객은 감동하게 되고 그 문제를 정치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초기 TV 드라마들에서부터 <하층민들>, <랜드 앤 프리덤>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연기지도 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당신은 배우들에게 미리 시나리오를 줍니까? 혹은 리허설을 사전에 하는지요?

>>우리는 프로덕션 과정이 시작되기 전, 각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등 공유해야 할 기본사항에 대해 리허설을 갖는다. 하지만 나는 실제 씬들은 리허설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촬영이 진행됨에 따라 배우들에게 조금씩 시나리오를 준다. 따라서 만일 놀랄 만한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이 있으면, 그것은 정말 그들을 놀라게 한다.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에서 그랬듯이.
 
 
그렇다면 당신은 촬영을 실제 시퀀스의 순서대로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우리는 도입 부분에서 촬영을 시작해 마지막 장면에서 촬영을 마친다.
 
 
당신은 즉흥연기를 많이 도입합니까?
>>배우들은 자신들이 즉흥적으로 연기를 해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즉흥연기는 그다지 많이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연기자들은 그것이 즉흥 연기인 것처럼 느껴야만 한다. 자발적인 것으로 느껴야 한다는 말이다.
 
 
<랜드 앤 프리덤>의 블랑카가 살해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의 연기는 정말 뛰어납니다. 어떻게 그들의 연기를 지도했으며, 그들은 전문연기자들입니까?
 
>>그들은 배우들이다. 그리고 그들 중의 대부분은 전문 연기자들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그들은 그 전쟁과 자신들의 배역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그 장면을 실제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처럼 느꼈다. 그리고 약간의 연기는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그 일이 벌어졌을때,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블랑카가 살해당하리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총에 맞았을 때, 모두가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 그것이야말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똑같은 반응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레이디버드레이디버드>Ladybird, Ladybir 1994년, 칼라, 101분
촬영; 배리애크로이드, 출연; 크리씨록, 블라디미르베가, 레이윈스턴
베를린영화제, 시카고영화제여우주연상
실제이야기에 기반하여만들어진영화이다. 리버풀의 네 아이의 엄마 매기는 어느날 런던에 있는 바에서 파라과이 출신인 호세를 만난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매기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폭력을휘두르던아버지와성장후계속비슷한남자들만사랑하여가정폭력에시달리고급기야매맞는여성의 피난처에도피했던과거, 이런그녀가어머니로서불안정하고부적격하다고판단한정부에의해네아이를빼앗긴 아픈기억들과 자꾸 부딪치게 되나 점차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매기의 임신으로 문제에 부딪친다. 호세가 비자만료로 이민관리국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이게 되고 그녀의 다섯번째 아이가 관계기관에 의해 강제로 보호되면서 매기는 엄마로서 자신의 아이를 부양하려는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크리씨록은연기경험이전혀없었음에도불구하고켄로치의연출력에힘입어강렬하고감동적인연기를펼쳐그해베를린영화제여우주연상을수상했다.

<레이닝스톤>Raining Stones 1993년, 칼라, 91분
촬영; 배리애크로이드, 출연; 브루스존스, 줄리브라운, 젬마피닉스
깐느영화제심사위원특별상
맨체스터의한가난한가장이어린딸의영세일(Holy Communion)을 맞아 딸에게 새 드레스를 사주고 싶어하여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그는 결국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는데 빌린 돈을 갚을 수 없자 고리대금업자는 집에 찾아와 아내와 어린 딸에게 행패를 부린다. 이에 격분한 주인공과 격투를 벌이는 끝에 고리대금업
자가사고로죽게된다. 신부를찾아가자신의죄를고백하며오열하는그를 보며 신부는 증거를 인멸해 주고 결국 그는 다시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찾게 된다. 깐느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이 영화는 전편에 가득한 유머와 스테레오 타입을 배제한 인물들의 생생하고 깊이 있는 묘사에 성공하고 있으며 사회의 정치 경제적인 무관심이 어떻게 성실한 사람들을 먹고 살기 위해 서로를 등치는 존재로 몰아가는가를 잔잔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주인공의 선함을 믿고 증거를 없애줌으로써 자신의 어린 양에게 진정한 평화를 안겨주는 신부의 예외적인 모습을 통해 현대에 있어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묻는다.
 
 
당신은 촬영 전에 스토리보드를 준비합니까?
>>나는 스토리보드를 만들지 않는다.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촬영 현장에서 어떻게 찍을지를 즉석에서 결정한다는 것인지요?
>>아니다. 나는 어떻게 촬영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있다. 카메라의 위치와 대체적으로 어떤 렌즈를 사용할지, 인물들이 어디로 움직일지 등을 미리 머리 속에 가지고 있다. 다만 카메라는 배우들이 어느 정도의 자유를 가질 수 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좋은 쇼트가 될 수 있는 방법으로 위치시킨다.

 
카메라와 조명, 편집 등 기술적인 테크닉의 사용에 관한 당신의 철학은?
>>글세, 그것은 철학이라기보다는 일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테크닉은 최소로 유지되어야 한다. 가능한 한 단순해야 한다. 배우들로 하여금 기술을 인지하게 해서는 안된다. 배우의 연기 행위는 절대적으로 자연스러워야 하며 그들 스스로 옳다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또는 그녀는 좋은 연기를 펼칠 수 있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 무언가 가짜인 것을 연기하게 한다면 그들은 좋은 연기를 할 수 없게 되고 영화는 가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스타일을 사람보다 중요하게 놓는 영화들, 즉 전체가 스타일인 영화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촬영하고 있는 대상은 거짓이며, 이것은 영화적인 거짓말인 것이다.

 
당신은 세트를 짓습니까?
>>주로 로케이션으로 촬영한다. 진짜 방들, 진짜 유리창 등 모든 진짜들 속에서.
 
 
실제 빛을 사용합니까?
>>그렇다. 때때로 필요에 따라 약간의 조명기를 첨가할 때도 있다.
 
그의 30년 작품경력을 통해 영국 내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해온 켄 로치의 노력은 1995년 들어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랜드 앤 프리덤>을 전환점으로 국제적인 무대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시나리오 작가 짐 알렌과 켄 로치는 이 영화에서 스탈린의 야심이 어떻게 스페인에서 민중을 배반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1936,7년에 이상주의자들을 괴롭힌 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공산당의 공식 노선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보다는 좌익 내부의 이단을 뿌리뽑는 데 있었다는 사실이다. 켄 로치는 스페인의 풍경을 배경으로 민중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성으로 생생하게 그려내며 흔히 전쟁 대작영화들이 보여주는 수 만명의 병사들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적은 수의 생동하는 개인들의 치열한 게릴라전을 보여줌으로써 살아있는 전투장면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또한 즉흥연기와 배우들의 자발성을 중심으로 한 연기지도로, 계획된 연기에서는 얻기 힘든 힘 있는 연기를 뽑아내었으며, 손녀를 통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듦으로써 과거에 대한 향수를 배제하고 지금 여기의 이야기임을 끊임없이 환기하여 패배주의가 아닌 미래에 관한 낙관적인 희망을 제시하였다.

켄 로치에게 있어 스페인 내전은 1990년대 말의 현재에 있어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과제가 무엇인가에 관해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현재 지향적인 역사해석인 것이다. 95년 이후 시선을 세계로 돌린 켄로치는 바로 다음 작품으로 한 영국 운수 노동자와 니카라과 출신 거리 댄서의 운명적인 만남과 그녀의 감추어진 개인사에 대한 접근인 <칼라 송>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 다시 한번 국제적인 문제에 관한 노동자 계급의 관심과 연대를 보여주었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남자 주인공은 수동적인 인물로 보입니다. <하층민들> 등 다른 영화들에서도 여자 주인공에 비해 남자 주인공들은 적극적이지 않거나 현상에 대한 즉자적인 반항을 하는 정도에 머무르는 인상을 주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다. 그는 공산당의 멤버로 스페인에 갔다. 그리고 영화 전체를 통해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가 공산당이 혁명을 배반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그의 당원증을 찢어버린다. 그것은 아주 능동적인 행동이며 적극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행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명백하게도 우리는 스페인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으므로 영어를 말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장인물의 여정을 그린다는 것이 중요했는데 단지 시간적, 신체적인 인생 여정뿐 아니라 정치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여정을 함께 다루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다. 나는 그가 수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훌륭한 행동주의자라고 본다.
 
 
<칼라 송>의 로버트 칼라일의 경우 노동 계급의 모델로서 나이스 가이로만 그려져 있어 살아 있어 보이지 않는데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랜드 앤 프리덤>을 다시 예로 들어보자. 그들 각각은 매우 개성적인 개인들이다. 미국인은 아주 개성이 강한 사람이고, 프랑스인 또한 매우 독특한 캐릭터이다. 그들은 아주 분명하게 성격지어져 있다.
 
 
스페인 내전이 현재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당신은 왜 그것을 당신 영화의 배경으로 선택했습니까?

>>스페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경우, 우리는 20세기의 역사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방 국가들은 파시즘을 묵인하고 견뎌내는 것을 참으로 기뻐했으며, 프랑코가 이겼을 때 이를  좋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결국에는 노동계급 편에선 것이 아니라 고용주들의 편에 섰다는 것과 공산당이 더 이상 혁명적인 당이 아니라는 것 즉 혁명을 파괴한 것이 공산당 자신이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학교나 신문들에서 듣고 배우는 사실, 그러니까 이 당시 소련이 서방세계를 침략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무기 산업이 극동 지역의 공산주의(소련이나 중국)와 적대적인 현실 때문에 유지되어 왔다는 해석 즉, 공산주의가 우리의 적이었기에 방위산업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스페인에서 혁명을 파괴한 것은 바로 공산당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스페인에서의 그 짧은 몇 달이 20세기 정치사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축소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
촬영; 배리 애크로이드, 출연; 이안 하트, 로사나 파스토르, 이시아르 볼랭, 톰 길로이
30년대 스페인 내전의 역사는 1990년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터내셔날에 대한 올곧은 찬가
 
<랜드 앤 프리덤>에서 96년의 <칼라 송>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노동계급의 새로운 국제적 연대와 진정한 혁명에 관한 낙관적인 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1990년대 들어 자체 붕괴되고, 전세계의 사람들, 특히 유럽에서는 맑시즘과 20세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이미 망각했거나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상황에서 스페인 내전과 니카라과를 다시 해석하는 것은 이상주의자의 향수가 아닌지요?

>>역사는 향수가 아니다. 역사는 왜 우리가 지금의 모습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왜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가 향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부르주아들에게 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설명해 주며 따라서 역사를 탐구하여 민중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되돌려 주는 것은 감독으로서 갖는 책임 중의 하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민중의 과거에 대한 생각을 조절할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의 현재를 재조정할 수 있고, 현재를 조정하게 되면 결국 그들의 미래를 바꿀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민중의 생각을 조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당신의 다음 작품 계획은 무엇입니까?
>>나는 새 영화를 막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칼라 송>을 쓴 폴 라버티 Paul Laverty의 시나리오로,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한 여자와 실업자들을 위한 풋볼 팀을 운영하는 어떤 남자와의 작은 이야기이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 이야기와 같은데, 처음엔 희극적으로 재미있게 시작하나 결국엔 아주 난폭하게, 폭력적으로 끝난다.
 
 
새 영화는 바로 직전의 두 영화처럼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까?

>>글쎄 정치적인 메시지라기 보다는 상황의 묘사라는 말이 더 맞을 듯 하다. 이 영화는 <하층민들>이나 <레이닝 스톤> 쪽에 더 가까운 스케일과 내용이 될 것이다.

 
97년,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선거에 승리하여 영국은 변화될 듯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화를 이 새로운 변화에 맞게 적용해 나갈 생각입니까?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노동당은 신보수당이기 때문이다. 노동당은 사업을 위한 정당이고, 미국과의 연합을 위한 정당이며, 자본을 위한 정당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변함없이 당신의 길을 가실 생각입니까?
>>그럴 생각이다.
 
당신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겠습니다. 장시간 인터뷰에 감사합니다.
 
 
<칼라 송>Carla’s Song
촬영; 배리 애크로이드, 출연; 로버트 칼라일, 오양카 카베쟈스
글래스고우의 운수 노동자 조지는 우연히 니카라과에서 온 여인 칼라를 만나,. 그녀를 통하여 니카라과의 현대사를 짓누르는 고통에 빠져들어간다.
 

켄 로치는 그의 초기작품에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을 일관되게 투쟁의 전면에 서서 자신의 작품을 무기로 해서 싸웠으며, 때로는 정서에 호소하는 작품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리며 그들의 잠자는 의식을 깨워왔고, 검열의 벽과 여러 차원의 탄압, 자금조달의 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해왔다. 스타일에 있어서도 자신의 내용을 가장 잘 반영하는 그만의 방식을 실험하고 변화시켜옴으로써 오늘의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언제나 한결같은 현재형으로 변혁에의 확신 속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켄 로치는 이 시대의 행동하는 작가로서 마땅히 우리의 중심에 놓여야 할 것이다.
(희귀한 초기작품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신 김영혜 님과 원고정리를 도와주신 스테판 밀러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KINO이영미
키노의 런던 특파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영미씨는 서울대 가정학과를 졸업했으며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편입, 92년 16미리단편영화 <또하나의생>을 완성했고 영국의 런던 인터내셔날필름스쿨에 재학하며<물과기름>을 연출했다. <물과기름>으로 제1회 서울 여성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으며 현재는 영국 국립영화학교에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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