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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2/18
    기성회비 지못미
    피에로
  2. 2008/01/04
    과제로 찍은 영상물(1)
    피에로
  3. 2007/11/12
    맑스주의의 역사 강연회 웹자보
    피에로
  4. 2007/10/20
    폐쇄(2)
    피에로
  5. 2007/10/13
    탈당(2)
    피에로
  6. 2007/08/19
    필견!!! <별빛속으로>(4)
    피에로
  7. 2007/08/15
    열혈남아(5)
    피에로
  8. 2007/08/08
    '디워'가 싫은 이유(7)
    피에로
  9. 2007/08/07
    이랜드-뉴코아 투쟁 반드시 승리하고, 비정규악법 철폐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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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7/27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
    피에로

기성회비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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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로 찍은 영상물

 

<그에겐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12월17일. 대통령 선거가 불과 이틀남은 날, 수업 과제로 찍은 작품이다.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싶어도,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2007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는 20대 대부분이 그러했고, 또 사회적으로 이탈하거나 소외된 사람들 역시 삶은 불가피한 선택의 연속이다. 왠지 서울, 서울역전이라는 거대한 공간 안에 묻혀져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보초서는 경찰, 담배 꾸려는 사람, 100원 빌리려고 말시킨 사람, 청소부 아저씨 모두 실제 거기 있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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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의 역사 강연회 웹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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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끔 남기고 싶은 감정을 쓰는 미니홈피가 있고,

내 생각들을 쓰는 프로덕션 클럽이 있고,

진보블로그도 있는데,

여기에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할말이 없다.

그리고 난 술 마시는걸 너무 좋아하고 또,

구강 커뮤니케이션이 훨씬 좋으니까..

글 쓰는걸 좋아하지만,

목적의식적으로 쓰는 글은 이제, 아무래도 너무 어색해.

그리고 지금 내게 중요한건 의식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렌즈에서 스크린으로, 감정을 무한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과 죽음의 시인, 마야코프스키>라는 전기같은 책과

<마야코프스키 선집>을 샀다.

사랑과 죽음, 그리고 시와 예술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이 생각은 앞으로 죽을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난, 전진하고 있는거 맞겠지?

1년동안,

항상 뒷걸음질치는 기분으로 살았다.

난 겁쟁이에, 운동하다가 도망간 인간이지만,

 

내겐 다른 인생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이제 그만 술을 먹어야겠다.

그만 울고.

 

전진하고 싶다.

블로그질은 아마 오랫동안 안녕.

 

 

 

 

 

 

        세르게이 예세닌에게

 

 

 

                         -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당신은

          소위 말하는

                           저 세상으로 가버렸소.

공허감....

              별들과 부딪히며

                                      하늘을 날고 있구려.

선불도 없고

                 술집도 없으니

이제 맨정신이겠구려.

아니, 예세닌,

                  이는

                        조롱하는 말이 아니요.

내 목구멍에서 치미는 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주먹만한 슬픔의 덩어리요.

당신이

         칼로 벤 손목에 피를 흘리며

자기

      뼈가 든

                자루를 흔드는 모습이 보이는구려.

<그만두라!

               집여쳐라!

                            당신 제정신이야?

두 뺨을

          죽음의 창백한 빛으로

                                         물들일 참인가?!>

당신은 어쨌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소.

왜?

    무엇때문에?

                     정말이지 알 수가 없소.

비평가들은 지껄여대오:

                                  <이러

저러한

          이유로

                    그는 자살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 원인은

                                      인민과의 유대가 없어

그 결과

           과음을 일삼다가 죽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당신의 보헤미안 기질 대신

게급의식을

                심어주었더라면

게급의 영향으로

                       그런 과격한 짓은 피할 수 있었을거라는거요.

하지만, 인민이 어디

                             쉰 우유로

                                           목을 축이는가?

그들도 역시

                 술고래 아닌가.

그들의 말에 의하면

                           <초소파> 비평가가

                                                      당신을 감독했었더라면

당신은

         훨씬 풍부한 내용의

                                     시를 썼을 거란 얘기요.

도로닌처럼

                지겹고,

                          길게,

하루에

         수십 편씩

                      쓸 수 있었을 거라 말들 하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당신은 훨씬 일찍

                        목숨을 끊었을거요.

지겨워서 죽느니

                       과음으로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소?

목매단 동아줄도

                       펜나이프도

우리에게

            죽음의

                     원인을

                              밝혀주지 않소.

혹시

      <잉글랜드> 호텔에

                                 잉크가 있었더라면

당신은

         정맥을 잘라

                          그 피로 유서를 쓸 필요가 없었겠지.

흉내쟁이들은 기뻐했소:

                                  앙콜!

그들은 무리를 지어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징벌했소.

자살 건수를

                 증가시킬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잉크생산을

                         증가시킬 것이지!

이제

      당신의 혀는

                       영원히

                                꽉 다문 잇새에 끼여버렸소.

신비한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힘들고도

                                                             불편한 일이오.

언어의 창조자

                    인민은

소란스런

             주정쟁이 시인을

                                    여의었소.

사람들은

             과거의

                      장레식에서 읽었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조시를 바치고 있소.

그리고 언덕 위에

                        진부한 압운을

                                            말뚝처럼 박고 있소.

정말이지

             시인에게

                         그런 식으로 조의를 표해야 할까?

당신의 비석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소.
쩡쩡 울리는 청동비석,

                               혹은 깎아 만든 화강암 비석,

도대체 어디 있는가?

헌사니

         회고담이니 하는 쓰레기는

                                               이미

망각의 통 속에

                     처박혔소.

사람들은 당신의 이름을

                                  손수건에 코와 함께 풀어버렸소.

소비노프는

                당신의 말을 침으로 더럽힌 채

썩은 자작나무 아래서

                               없애버렸소.

<오 나의 친구여,

                       한 마디 말도,

                                         한숨도 없이>

어휴,

이 인간,

레오나드 로엔그리니치라는 작자와는

좀 다르게

             이야기를 해야하오.

나는 분연히 일어나

                            큰 소리로 소동을 피우겠소:

<집어쳐라,

               시를 우물거리는 짓거리,

                                                 꾸기적거리는 짓거리를!>

휘파람소리로

                   그들의 귀를

                                    마비시키고

할머니와

             어머니와 신과 영혼을 욕해주겠소.
재능도 없는 쓰레기들이

                                 옷자락을

                                              닻처럼      

휘날리며

             사라지도록,

꼬간 같은 비평가들이

                               콧수염 끝으로

행인들을 찌르며

                       혼비백산

                                    달아나도록.

쓰레기의 수는

                    여전히

                             줄지 않고

할 일은 많으니

                     서둘러야 하오.

우선

      삶을

            개조하고

개조한 뒤에

                 찬미해야 하오.

지금은

         글을 쓰기에 어려운 시대요.

그러나,

          당신들, 남녀 불구자들이여,

                                                 말해 보시오.

위대한 인물이

                    한 번이라도

남들이 밟았던 길,

                         안이한 길을

                                          택한 적이 있었던가?

언어는

         인간작 힘의

                          사령관.

행진!

       시간이 뒷전에서

                              폭탄처럼 터지게 하라.

바람이여,

             헝클어진 머리채만을

낡은

      시대로

               불어버려라.

우리의 지구는

                    잔치를 벌이기엔

                                            아직 부족하다.

그러니

         우리는

                  미래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어렵다.

 

                                                - 1926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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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당

 

말이 필요없다.

결코 변형될 수 없는 하나의 image가 내게 지시하고 있다.

매월 꼬박꼬박 저따위 정치엘리트들에게 활동비를 주느니 투쟁기금 박스에 돈을 넣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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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견!!! <별빛속으로>

 

 

 

<별빛속으로>

연출 황규덕, 제작 스폰지

출연 정경호, 김민선, 차수연, 김C, 정진영, 장항선, 이수나 등

 

이 판타지 영화로부터 감독이 말하는 것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행복할지도 모르고, 슬플지도, 그리울지도, 외로워질지도.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미 성공한 것이다. 난 복받았나봐, 감독인 황규덕과 수십년의 나이차 20여학번 차이를 극복한 나머지 난 슬펐고, 그리웠고, 외로웠고, 행복했다.

 

장자의 호접몽에 대한 인상에서 시작된다. 호접몽은 장자의 꿈에서 장자는 곧 나비가 되어 세상을 훨훨 날았는데, 꿈을 깨고 나비가 장자인 것인지, 장자가 나비인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것. 꿈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이 모호함을 영화에서는 몽환적인 판타지 장르의 힘을 빌려 표현한다. 1979년, 누구나 외로웠고 누구나 슬펐던 시대, 이 영화는 1979년과 현재라는 시간의 벽을 부숴버린다. 주인공인 수영의 꿈 속의 현실과 꿈이 아닌 현실의 모호함의 경계도 부숴버린다.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것을 잊고 있었던 이들에게 질문이 던져진다.

 

"사는게 꼭 꿈 같지? 꿈이 아니라 거짓말 같애, 거짓말!"

 

감독 자신의 젊은 시절, 곧 분신으로 보이는 수영의 시간과 공간이 접혀지고 펼쳐진다.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제자들이 모인 강의실에서 그들을 보는 나이든 2007년의 수영(정진영 분)의 태도는 감독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로 느껴진다. "너희들이 지금 어디있는지 봐"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엔 너무 섬뜩한 설정이 숨겨져 있었다. 그 순간 감독에 의해, 영화에 의해 수영이 가르치는 대학생 제자들에게 투영되어있던 관객인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고 해야하나. 바로 그 지점에서 20년 넘게 차이나는 감독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마주치는 것만 같다. 1979년과 2007년이 이렇게 마주치는 것처럼 말이다.

 

독일 근대시도 술술 잘 읊고, 노래도 잘 부르고, 모든 것에 초연하기만 한 운동권 여자 선배 삐삐소녀. 그녀는 스물넷. 그녀는 정말 사랑한다면, 같이 따라서 죽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묻더니, 어느날 애국가가 울려퍼졌던 그 대학의 오후에, 대학가의 학생들과 팔뚝질을 올리는 그네들을 제지하는 얼굴없는 교수들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창문가에 홀연히 오른다. 확성마이크를 들고 노래 <흔들리지 않게>를 부른다. 그녀는 죽는다. 어디선가 많이 들러본 노래, 많이 본 장면. 고연전이라는 그 끔찍한 광경에서 푸른옷을 입고 있던 어색한 20대들에 의해 어색하게 불려졌던 그 노래가 다시 나와 만났다. 난 이 노래가 응원가인줄로만 알았다. 여기서 나와 삐삐소녀의 시간이 다시 깨어졌다.

 

거짓말처럼 다시 만난 삐삐소녀가 말한다. 숨을 쉬라고, 온 힘을 다 해 숨을 쉬라고. 감독 자신이 다분히 투영된 영화인만큼 그것은 언젠가 감독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어떤 뼈에 사묻히는 말이었을런지도 모른다. 또는 스스로에게 되내이는 말일지도, 그리고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고 동시대에 함께 무언가를 꿈꾸었던 옛 동지들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가 내게, 그러니까 영화관에 혹시 와서 자신의 영화를 보고있을지도 모를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버리면 편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말한다. 숨을 쉬라고. 이 영화는 매순간 이렇게 과거의 무엇과 현재진행형인 무엇, 그리고 미래의 무엇을 연결한다.

 

 "정신차리고 어떻게든 시간을 뚫고 살아남아야 해"

 

이 마술같은 대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삐삐소녀가 수영에게 한 이 말이 이 영화 전체의 주제와 정서를 관통하면서 영화 종반부에는 온 몸으로 흡수되어 돌아온다. 구성과 저 형이상학적 대사들이 뭔가 대단히도 엉켜있던 실타래를 풀어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간다. 밤하늘을 향해 쏘던, 청년들을 겨누었던 대공포 사격은 거짓말처럼 하늘 속에서 무수한 별빛이 되고, 피를 주룩주룩 흘리던 수형과 수지는 별빛속으로, 별빛속으로, 별빛속으로!!!

 

이 영화 <별빛속으로>, 모두가 보아야 할 영화다. 8월19일, 영화<화려한 휴가>가 500만을 돌파한 이 시점에 어쩌면 지금 저 상실감으로 가득찬 세대 386들은 <화려한 휴가>가 아니라 <별빛속으로>를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연기의 미흡함, 다른 부차적인 단점들은 모두 잊혀질만큼, 알수없는 위대한 힘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이 몽환적이고 짜임새있는, '색다른' 구성이 지금 우리 모두가 직면한 어떤 문제에 깊숙히 개입해 들어오는 것이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프로파간다적이지도, 명제적이지도 않지만 뭔가 잊고 있던 총체적인 감정, 시간, 공간 모두를 말이다. 억압된 현실에선 꿈조차 꿀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꿈이 역사로 돌아온다면? 이건 예술만이 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순간에는 이 영화가, "영화란 바로 꿈꾸는 모든 사람의 것"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잊혀지지 않는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돈이 정말 없지만, 어떻게든 극장에서 이 가난한 영화(전국 21개관 개봉. 그리고 점점 줄어드는 중. 그리고 제작비는 단 9억원! )가 사라지기 전에 꼭 또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이 9억짜리 영화가 350억짜리 애국영화보다 40배보다 더 많이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인 훌륭한 영화를 아낌없이 칭찬하고 또 칭찬하는 것을 실천하고 싶어 이렇게 다분히 주관적이고 흥분 섞인 글을 쓴다.



'별빛속으로', 김C / 박지윤, <별빛속으로 OST>

 

 

 

듣고 있나요 보고 있나요
느껴지나요 우리 사랑이
눈을 감으면 손을 잡으면 갈 수 있나요
별빛속으로
한 걸음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너를..

묻지 말아요 보지 말아요
생각만으로 알 수가 있죠
눈을 감고서 숨을 쉬어봐요
내 생각마저 모두 버려요
한 걸음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내게
생각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서 와요..

나는 나를 몰라요..
나는 나를 못 믿어..
나는 용기가 없어 허공에 내 몸을 맡겨요

<별빛속으로 (Feat.박지윤) - 김C (`별빛속으로` Main Theme)>

눈을 감고서 숨을 쉬어봐요
내 생각마저 모두 버려요
한 걸음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내게
생각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서 와요

나는 나를 몰라요..
나는 나를 못 믿어..
나는 용기가 없어 허공에 내 몸을 맡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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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남아

 

 

<열혈남아> ( cruel winter blues )

이정범 감독 작품

 

언젠가 대학로 어느 골목길을 지나다가 위의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포스터 정말 멋있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분위기, 감성 모든게 느껴졌다. 그치만 제목과 영화의 소재 자체의 진부함이 가져오는 어떤 거부감 때문에 굳이 찾아서 보지 않았고 나중에 dvd나오면 봐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어제는 며칠전 학교에서 빌려온 <열혈남아> dvd를 봤다.

 

이 영화를 언급할땐 내용 자체에 대해 말하기보단 이미지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 것만 같다. 그만큼 영화 자체가 갖는 분위기를 이미지로 담아내기 위해 치중한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겨울 벌교 벌판의 쓸쓸하고 슬픈 심상이 빨갛게 칠해져 영화 곳곳을 채워넣는다. 2002년 월드컵 응원 열기 속의 붉은 티셔츠를 입고 뛰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 속에서 반대방향으로 도망가다가 칼에 의해 어떤 무의미한 싸움의 복수를 당한 설경구의 친구 '민재', 붉은 벌판, 빨간 꽃무늬 티셔츠, 피, 붉게 충혈된 눈, 비오는 추운 겨울날 국밥집. 세상의 모든 슬픔을 지고서 망나니처럼 제멋대로 살면서 욕질과 폭력을 서슴치 않는 건달 설경구의 배경은 아주 적절하게 그려져있다. 미술로 따지자면 이 영화는 여느 한국 영화들 중에서도 상급에 속한다.

 

 

조폭, 아니 '건달'이라고 해야 좀 더 정확할 설경구와 조한선이 나오는 영화. 이 영화는 여느 조폭영화와는 다르다. 좀 더 진화했고, '인간'의 드라마에 치중했다고 해야하나. 예전에야 벌교에 가서 싸움 자랑하지말라는 말이 있었다지만, 이제는 세상 달라졌다고 말하는 벌교 할아버지의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진 않는다. 마치 벌교에서 벌어질 어떤 비극의 결과를 암시라도 하듯 말이다.

그러나 복수하러 간 그곳 벌교에서 설경구는 유사-엄마 나문희를 만났고, 알 수 없는 모성애를 느낀다. 설경구가 나문희에게 느끼는 모성애는 그리움, 슬픔의 정이다. 그리고 설경구의 어떤 혹시 올지도 모를 '밝은 내일'을 상징하는 듯한 다방 여자 심이영은 그에게 결국, 결코 올 수 없었던 미래 같은 것이었던 것 같다. 이 단순하지 않고 잘 짜여진 내러티브가 지나면서 망나니 마초 설경구는 어떤 못난이 남성의 슬픈 사연 쯤으로 상징화되어 용서된다. 나문희의 눈물에 의해서 용서되고, 마지막 씬에서 나문희의 대사 중 하나인, "쟤는 우리 둘째에요." 라는 말. 서럽듯 눈물 흘리며 죽어가는 설경구의 연기는 정말 최고였는데, 이 장면에서 설경구는 무언가에 의해 용서받은 듯하다. 나문희에게 설경구는 외롭고 쓸쓸한 삶, 그리고 남극에 있는 둘째아들이 죽었을것이라는 세간의 이야기와 동떨어져 혼자 단절된 체 살아가는 듯한 삶에서의 통로였고, 설경구에게 나문희는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행복, 유토피아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나문희의 첫째 아들에 대한 설경구의 선택이 그에게 또 하나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게다가 마지막 크레딧이 다 오를때까지 흐르는 그 멋진 음악까지!!

 

알리바이와 용서에 대한 여러가지 혐의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남자들의 단편을 대비해 보여주는 것만 같은 이 건달들의 결핍에 대해 이렇게 깊게 들어가 성찰한 대중영화는 많이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런 식의 '결핍'에 대해서는 김기덕식일수도 있고, 용서일 수도 있고, 비난이거나 방종, 비웃음일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얼마나 다층적으로 다루었는가이다. 이 영화는 다층적인 영화다. 이야기를 이끄는 힘에 있어서, 상업적인 선택보단 비겁하지 않고 졸렬하지 않은 방향을 택했다. 흥행할 수 있는 영화인데, 흥행 못한 것이 참 안타깝다.

 

p.s. 설경구, 나문희, 조한선의 연기는 아주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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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가 싫은 이유

난 결코 영화를 보지 않고 그 영화를 비판하지 않는다. 스포일러를 접하더라도, 아무리 그 내용이 내가 존중하는 가치와 맞지 않다고 느껴지더라도, 영화를 직접 보지 않고 비판하는 것은 영화를 힘들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화를 만드는데에 땀흘리며 밤새며 노동한 이들의 노동의 의미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영화 <디워>는 아직 보지 않은 영화다. 그래서 영화의 내용이 부실하다든지, 연기가 엉망이다라는 등의 세간의 비난들은 아예 논외로 하고, '영화 그 자체인 <디워>'가 아닌 '디워 효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디워>는 마케팅을 위한 여러 액션들에 의해 영화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디워'로 시작된 자본, 애국주의, 세계화에 대한 불쾌한 심상들을 만들어 왔다. 심형래의 <디워> 마케팅은 다른 것보다도 오로지 애국주의에 기대왔는데, 이것이 한국 영화에 미칠 영향은 별로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다른 점들을 차치하고서, 하다 못해 장르로서 비주류라고 볼 수도 있는 '괴수영화'라는 평가 기준까지 제작자 스스로가 제낀 채 오직 '애국'과 '시장재패'라는 미명으로 영화와 영화를 보는 관객성의 모든 것이 장식됐다.

이처럼 무서운 효과가 따로 있을까? 심형래와 쇼박스는 이상한 논리로 으름장을 놓거나 협박했다. <디워>가 미국에서 전국 1500개관 릴리즈 상영이 될 것이라는 으름장, 그리고 <디워>가 망한다면 국가적으로 막대한 손실이라는 식의 논리였다. 아무래도 심형래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단 세계를 재패하고 싶은 유사-엘리트주의자로만 보인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이 개그맨 출신이라서 무시한다며 볼멘소릴 하고 목청 높이며 자신의 열정을 선전하지만, 난 오히려 그가 '돈'을 무기로 애국심 마케팅을 하며, 그간 영화적 진정성만으로 보이지 않는 영화제작 현장에서 영화가 아직 갖고 있을지 모를 무언가를 지켜온 이들의 모든 땀의 의미를 무시하는 효과만 만들고 있는, 유사-엘리트주의자이기 때문에 그가 싫다. 그, 그의 <디워>는 자본의 규모로 따지자면 엘리트-권력에 가깝다. 오히려 그가 개그맨 운운하는 것은 그의 또다른 마케팅 재료 중 하나로 보이기 까지 하다.

영화는 오직 그의 재료일뿐이고, 그는 자본주의 상품시장으로서의 세계를 재패하고 싶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영화가 세계를 재패하려면 영어로, 미국배우로, 막대한 자본으로, 유사-헐리우드 컴퓨터그래픽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미국이 아닌 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영화들의 문화적 가치를 '돈'이라는 가치 하나로 헐값으로 만들어버리는 효과를 만든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세계 곳곳의 고유성과 문화적 가치, 다양한 문화를 말살하고 있을때 '디워 효과'는 이른바 세계를 재패하려면 미국의 상품들과 똑같이 만들면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무기는 애국심, 애국주의다. 대중 심리를 이용하는 정도가 놀라울정도로 국가주의적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의 문화'산업'에서의 영화 이용이 이 정도까지 다다르게 된 것을 보고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디워>가 성공한다고 예술의 창조성이 진작되는지도 의문이며, 또 <디워>가 미국영화시장에서 선전한다고 한국영화가 발전한다는 논리도 무섭다. 디워가 순수 한국기술로 컴퓨터그래픽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떠들지만 실상 후반작업 크레딧 다수는 헐리우드 엔지니어들인 것을... 오히려 <괴물>보다 할리우드 후반작업 스탭이 더 많다고 하니... 뭔가 진짜 기술 진작을 가져왔다고 해도 그 자체로 영화의 모든걸 내세우는 모습이 석연찮은데 그것마저 거짓말이라니...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위해, 영화로 자기 목소릴 내기위해 빚도 지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고군분투하는 독립영화판의 진짜 비주류들의 땀이 허공으로 날라가는 듯하다. 비주류 감수성을 애국심이라는 엉뚱하고 비열한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하는 '디워 효과'에 맞서서 예술로서의 영화를 옹호하는 비주류들의 심형래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말 할리우드처럼? '디워 효과'는 대중에게 "영화에 대한 평가 기준은 영화가 얼마나 많은 돈으로 제작되었느냐, 얼마나 많이 흥행하느냐, 헐리우드 영화와 얼마나 닮았느냐이다"라고 무자비하게 선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디워>가 성공하든말든 이미 이런 식의 애국논리, 영화의 작품적 평가기준의 종말 등의 현상은 위기에 빠진 '한국영화'('한국영화시장'이 아닌, 한국'영화')를 더더더 깊은 수렁으로 빠드리고 말 것이다.

어차피 누군가는 다수 대중과 영화는 소통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고, 상업영화시장과 예술영화시장은 아예 양분되어있는거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아무도 좋은 영화를 소수만 보고 감흥받길 원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므로... 어떤 사람들은 영화마저 대중의 선택지를 좁히고 좁히고 또 좁히려고만 한다. 이런 악조건에서는 선택지를 무한히 넓히는 것도 의미있고, 선택지 중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더 많이 만들고 알리는 것도 의미있고, 그리고 선택지를 좁히려는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보면 세상이 암흑같고 비관주의가 몸 속 전체를 휘감더라도 의미있는 몸부림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디워 효과'를 보며 정말 한국 땅에 영화의 미래가 있을까, 짜증나기도 했지만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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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뉴코아 투쟁 반드시 승리하고, 비정규악법 철폐시키자!

이랜드-뉴코아 투쟁 반드시 승리하고,
비정규악법 철폐시키자!



며칠 전, 이랜드-뉴코아 투쟁승리와 비정규악법 철폐를 외치며 학생 3명을 비롯한 조합원들과 연대단위 활동가들이 서울지방노동청을 점거했다. 그동안 정부는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는 비정규직‘보호’법을 시행하여 이로 인한 많은 노동자들의 대량해고와 외주용역화의 가장 주범임은 물론이고, 이에 맞선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파업과 매장점거에 경찰공권력을 투입하여 이를 강제해산시킬 뿐이었다는 점에서 이 문제의 근본적이고 주된 문제를 낳아 온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이랜드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허울뿐인 비정규직보호법은 시행되기 전부터 오히려 더 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차별을 공고히 할 뿐일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시킨 정부와 사용자측은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투쟁이 한창 촉발되어 있는 시점에서도 “이 법을 잘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다”면서 축하 떡을 나눠먹고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닥친 이후에 노동의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비정규직이 이미 880만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신자유주의의 안착화로 인해 2007년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고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적인 빈곤과 불안정한 민중들의 삶 그리고 이로 인하여 갈수록 증폭되고 있는 서로에 대한 공공연한 분할선과 적대, ‘정치 그 자체의 위기’는 더 이상 억압할 수 없는 최소의 권리와 문제해결을 위한 소통마저 가로막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비정규직 확산 문제는 더 이상 비정규직 당사자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너무나도 무능력한 노무현 정권에게 책임이 있다!

비정규악법이 시행됨에 따라 무차별 대량해고 된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선택지로써 매장을 점거했을 때, 노무현 정권은 ‘불법’운운하며 여론을 호도하면서 홈에버 상암점과 뉴코아 강남점의 농성장에 신속하고도 매우 유능하게 공권력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끌어냈다. 미국 중심의 군사세계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조응하며, 결국 이에 따라 자국민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되고 한 명, 두 명씩 피살될 때에는 ‘금전적인 협상’ 운운하며 너무나도 무능하게 지켜만 보고 있던 노무현 정권이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울부짖을 때는 역설적으로 신속하게 공권력을 침탈하여 자신의 폭력적이고 반민중적인 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민중들의 삶을 눈꼽만큼도 책임질 수 없는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 가자.


이랜드투쟁 반드시 승리하고
비정규악법 철폐시키자!


2007년 여름, 신자유주의로 인한 한국사회의 갈등지점은 지금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시때때로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 곳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갈등지점은 일부 세력들이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자발적인 양보로써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지방노동청을 점거한 사람들이 외치는 것처럼 노무현 정권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고,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투쟁을 반드시 사수하고, 이 투쟁이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전략의 핵심정책 중 하나인 비정규악법에 맞선 전 민중들의 목소리로 확산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에 이랜드자본과 노무현 정권이 양보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랜드-뉴코아 투쟁 반드시 승리하고, 비정규악법 철폐시키자!
비정규악법 시행시킨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
비정규악법 폐기시키고 신자유주의 끝장내자!


성공회대학교 역사철학학회, 인터내셔널/ 원광대학교 행동연대, 진보를 향한 지성 터빛길, power of people/ 전주대학교 what, 회오리/ 우석대학교 교지 편집위원회/ 수원대학교 직접행동 네트워크 ACTION, 중앙동아리 새벽소래, 진짜철학연구회, 탈춤연구회/ 덕성여자대학교 여성학회 밥과 장미/ 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대, 사회학과 학생회, 사회학과 학회 자경/ 동덕여자대학교 총학생회, 동아리 연합회, 자연대학생회, 인문대학생회/ 연세대학교 법과대학학생회, 법과대학 노동법학회/ 전남대학교 학생행진(준)/ 인하대학교 학생행진(준)/ 연세대학교 학생행진(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인문대학생회/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생회, 동아리연합회, 경영대학생회,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사 대동반/ 경인교육대학교 총학생회/ 강원대학교 생활도서관/ 건국대학교 법대학생회, 평등-자유를 위한 건대모임, 법과대 향연, 생활자치도서관, 근현대사연구회 얼, 동아리연합회 착장비평분과, 인문사회과학분과/ 중앙대학교 총여학생회, 정경대학생회/ 세종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동아대학교 제24대 법대학생회/ 성신여자대학교 총학생회, 인문대학생회, 여성위원회 소리, 몸짓패 메이데이/ 홍익대학교 문과대학생회/ 성균관대 문과대 학생회, 사회대 학생회, 동아리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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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  
민글| 1993.11.01 | 312p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는 마야코프스키으 시 구절이고, 이 책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는 마야코프스키를 포함해 네루다, 빅토르 하라, 케터 콜비츠, 에이젠슈타인, 고다르 등 당대의 예술가 18人들에 대해 열여덞명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 등이 그/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짧게 서술한 것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열여덞명 중 내가 정말 좋아하는 케터 콜비츠, 오윤, 마야코프스키, 네루다, 고다르, 스콜세지, 브레히트가 있어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마지막에 알튀세르도 있는데 좀 뜬금없지만 예술과 문화이론, 이데올로기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여러 예술가들이 그의 철학을 따랐다는 점에선 그렇게 맥락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마야코프스키의 삶은 정말 인간적이고 처절하게 다가왔다. 그는 청춘을 불사를만큼 혁명을 위해 헌신했고 자신의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모두 바치고 불태웠다. 그리고 그러다가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배신당해 괴로워하고 울다가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어 자살했다. 러시아 혁명 이행기의 빈틈들이 만든 비극이고, 비극의 가장 불우하고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가 아닐까 싶다. 그는 멋진 예술가다.

고다르, 콜비츠, 네루다, 브레히트도 모두 대단하다. 그/녀들의 삶이 내 가슴에 마구마구 파고들어오는 것만 같다. 특히 그들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더더욱.

 

케터 콜비츠

 파블로 네루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루돌프 쉴리히터가 그린 베르톨트 브레히트 초상화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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