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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1/04
    과제로 찍은 영상물(1)
    피에로
  2. 2007/08/19
    필견!!! <별빛속으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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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8/15
    열혈남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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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07/24
    만덜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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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07/22
    말죽거리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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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7/12
    200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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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07/12
    로제타를 다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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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6/27
    중경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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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6/27
    악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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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6/27
    스틸라이프
    피에로

과제로 찍은 영상물

 

<그에겐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12월17일. 대통령 선거가 불과 이틀남은 날, 수업 과제로 찍은 작품이다.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싶어도,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2007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는 20대 대부분이 그러했고, 또 사회적으로 이탈하거나 소외된 사람들 역시 삶은 불가피한 선택의 연속이다. 왠지 서울, 서울역전이라는 거대한 공간 안에 묻혀져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보초서는 경찰, 담배 꾸려는 사람, 100원 빌리려고 말시킨 사람, 청소부 아저씨 모두 실제 거기 있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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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견!!! <별빛속으로>

 

 

 

<별빛속으로>

연출 황규덕, 제작 스폰지

출연 정경호, 김민선, 차수연, 김C, 정진영, 장항선, 이수나 등

 

이 판타지 영화로부터 감독이 말하는 것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행복할지도 모르고, 슬플지도, 그리울지도, 외로워질지도.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미 성공한 것이다. 난 복받았나봐, 감독인 황규덕과 수십년의 나이차 20여학번 차이를 극복한 나머지 난 슬펐고, 그리웠고, 외로웠고, 행복했다.

 

장자의 호접몽에 대한 인상에서 시작된다. 호접몽은 장자의 꿈에서 장자는 곧 나비가 되어 세상을 훨훨 날았는데, 꿈을 깨고 나비가 장자인 것인지, 장자가 나비인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것. 꿈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이 모호함을 영화에서는 몽환적인 판타지 장르의 힘을 빌려 표현한다. 1979년, 누구나 외로웠고 누구나 슬펐던 시대, 이 영화는 1979년과 현재라는 시간의 벽을 부숴버린다. 주인공인 수영의 꿈 속의 현실과 꿈이 아닌 현실의 모호함의 경계도 부숴버린다.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것을 잊고 있었던 이들에게 질문이 던져진다.

 

"사는게 꼭 꿈 같지? 꿈이 아니라 거짓말 같애, 거짓말!"

 

감독 자신의 젊은 시절, 곧 분신으로 보이는 수영의 시간과 공간이 접혀지고 펼쳐진다.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제자들이 모인 강의실에서 그들을 보는 나이든 2007년의 수영(정진영 분)의 태도는 감독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로 느껴진다. "너희들이 지금 어디있는지 봐"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엔 너무 섬뜩한 설정이 숨겨져 있었다. 그 순간 감독에 의해, 영화에 의해 수영이 가르치는 대학생 제자들에게 투영되어있던 관객인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고 해야하나. 바로 그 지점에서 20년 넘게 차이나는 감독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마주치는 것만 같다. 1979년과 2007년이 이렇게 마주치는 것처럼 말이다.

 

독일 근대시도 술술 잘 읊고, 노래도 잘 부르고, 모든 것에 초연하기만 한 운동권 여자 선배 삐삐소녀. 그녀는 스물넷. 그녀는 정말 사랑한다면, 같이 따라서 죽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묻더니, 어느날 애국가가 울려퍼졌던 그 대학의 오후에, 대학가의 학생들과 팔뚝질을 올리는 그네들을 제지하는 얼굴없는 교수들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창문가에 홀연히 오른다. 확성마이크를 들고 노래 <흔들리지 않게>를 부른다. 그녀는 죽는다. 어디선가 많이 들러본 노래, 많이 본 장면. 고연전이라는 그 끔찍한 광경에서 푸른옷을 입고 있던 어색한 20대들에 의해 어색하게 불려졌던 그 노래가 다시 나와 만났다. 난 이 노래가 응원가인줄로만 알았다. 여기서 나와 삐삐소녀의 시간이 다시 깨어졌다.

 

거짓말처럼 다시 만난 삐삐소녀가 말한다. 숨을 쉬라고, 온 힘을 다 해 숨을 쉬라고. 감독 자신이 다분히 투영된 영화인만큼 그것은 언젠가 감독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어떤 뼈에 사묻히는 말이었을런지도 모른다. 또는 스스로에게 되내이는 말일지도, 그리고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고 동시대에 함께 무언가를 꿈꾸었던 옛 동지들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가 내게, 그러니까 영화관에 혹시 와서 자신의 영화를 보고있을지도 모를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버리면 편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말한다. 숨을 쉬라고. 이 영화는 매순간 이렇게 과거의 무엇과 현재진행형인 무엇, 그리고 미래의 무엇을 연결한다.

 

 "정신차리고 어떻게든 시간을 뚫고 살아남아야 해"

 

이 마술같은 대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삐삐소녀가 수영에게 한 이 말이 이 영화 전체의 주제와 정서를 관통하면서 영화 종반부에는 온 몸으로 흡수되어 돌아온다. 구성과 저 형이상학적 대사들이 뭔가 대단히도 엉켜있던 실타래를 풀어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간다. 밤하늘을 향해 쏘던, 청년들을 겨누었던 대공포 사격은 거짓말처럼 하늘 속에서 무수한 별빛이 되고, 피를 주룩주룩 흘리던 수형과 수지는 별빛속으로, 별빛속으로, 별빛속으로!!!

 

이 영화 <별빛속으로>, 모두가 보아야 할 영화다. 8월19일, 영화<화려한 휴가>가 500만을 돌파한 이 시점에 어쩌면 지금 저 상실감으로 가득찬 세대 386들은 <화려한 휴가>가 아니라 <별빛속으로>를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연기의 미흡함, 다른 부차적인 단점들은 모두 잊혀질만큼, 알수없는 위대한 힘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이 몽환적이고 짜임새있는, '색다른' 구성이 지금 우리 모두가 직면한 어떤 문제에 깊숙히 개입해 들어오는 것이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프로파간다적이지도, 명제적이지도 않지만 뭔가 잊고 있던 총체적인 감정, 시간, 공간 모두를 말이다. 억압된 현실에선 꿈조차 꿀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꿈이 역사로 돌아온다면? 이건 예술만이 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순간에는 이 영화가, "영화란 바로 꿈꾸는 모든 사람의 것"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잊혀지지 않는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돈이 정말 없지만, 어떻게든 극장에서 이 가난한 영화(전국 21개관 개봉. 그리고 점점 줄어드는 중. 그리고 제작비는 단 9억원! )가 사라지기 전에 꼭 또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만 든다. 이 9억짜리 영화가 350억짜리 애국영화보다 40배보다 더 많이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인 훌륭한 영화를 아낌없이 칭찬하고 또 칭찬하는 것을 실천하고 싶어 이렇게 다분히 주관적이고 흥분 섞인 글을 쓴다.



'별빛속으로', 김C / 박지윤, <별빛속으로 OST>

 

 

 

듣고 있나요 보고 있나요
느껴지나요 우리 사랑이
눈을 감으면 손을 잡으면 갈 수 있나요
별빛속으로
한 걸음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너를..

묻지 말아요 보지 말아요
생각만으로 알 수가 있죠
눈을 감고서 숨을 쉬어봐요
내 생각마저 모두 버려요
한 걸음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내게
생각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서 와요..

나는 나를 몰라요..
나는 나를 못 믿어..
나는 용기가 없어 허공에 내 몸을 맡겨요

<별빛속으로 (Feat.박지윤) - 김C (`별빛속으로` Main Theme)>

눈을 감고서 숨을 쉬어봐요
내 생각마저 모두 버려요
한 걸음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내게
생각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서 와요

나는 나를 몰라요..
나는 나를 못 믿어..
나는 용기가 없어 허공에 내 몸을 맡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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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남아

 

 

<열혈남아> ( cruel winter blues )

이정범 감독 작품

 

언젠가 대학로 어느 골목길을 지나다가 위의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포스터 정말 멋있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분위기, 감성 모든게 느껴졌다. 그치만 제목과 영화의 소재 자체의 진부함이 가져오는 어떤 거부감 때문에 굳이 찾아서 보지 않았고 나중에 dvd나오면 봐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어제는 며칠전 학교에서 빌려온 <열혈남아> dvd를 봤다.

 

이 영화를 언급할땐 내용 자체에 대해 말하기보단 이미지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 것만 같다. 그만큼 영화 자체가 갖는 분위기를 이미지로 담아내기 위해 치중한 작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겨울 벌교 벌판의 쓸쓸하고 슬픈 심상이 빨갛게 칠해져 영화 곳곳을 채워넣는다. 2002년 월드컵 응원 열기 속의 붉은 티셔츠를 입고 뛰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 속에서 반대방향으로 도망가다가 칼에 의해 어떤 무의미한 싸움의 복수를 당한 설경구의 친구 '민재', 붉은 벌판, 빨간 꽃무늬 티셔츠, 피, 붉게 충혈된 눈, 비오는 추운 겨울날 국밥집. 세상의 모든 슬픔을 지고서 망나니처럼 제멋대로 살면서 욕질과 폭력을 서슴치 않는 건달 설경구의 배경은 아주 적절하게 그려져있다. 미술로 따지자면 이 영화는 여느 한국 영화들 중에서도 상급에 속한다.

 

 

조폭, 아니 '건달'이라고 해야 좀 더 정확할 설경구와 조한선이 나오는 영화. 이 영화는 여느 조폭영화와는 다르다. 좀 더 진화했고, '인간'의 드라마에 치중했다고 해야하나. 예전에야 벌교에 가서 싸움 자랑하지말라는 말이 있었다지만, 이제는 세상 달라졌다고 말하는 벌교 할아버지의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진 않는다. 마치 벌교에서 벌어질 어떤 비극의 결과를 암시라도 하듯 말이다.

그러나 복수하러 간 그곳 벌교에서 설경구는 유사-엄마 나문희를 만났고, 알 수 없는 모성애를 느낀다. 설경구가 나문희에게 느끼는 모성애는 그리움, 슬픔의 정이다. 그리고 설경구의 어떤 혹시 올지도 모를 '밝은 내일'을 상징하는 듯한 다방 여자 심이영은 그에게 결국, 결코 올 수 없었던 미래 같은 것이었던 것 같다. 이 단순하지 않고 잘 짜여진 내러티브가 지나면서 망나니 마초 설경구는 어떤 못난이 남성의 슬픈 사연 쯤으로 상징화되어 용서된다. 나문희의 눈물에 의해서 용서되고, 마지막 씬에서 나문희의 대사 중 하나인, "쟤는 우리 둘째에요." 라는 말. 서럽듯 눈물 흘리며 죽어가는 설경구의 연기는 정말 최고였는데, 이 장면에서 설경구는 무언가에 의해 용서받은 듯하다. 나문희에게 설경구는 외롭고 쓸쓸한 삶, 그리고 남극에 있는 둘째아들이 죽었을것이라는 세간의 이야기와 동떨어져 혼자 단절된 체 살아가는 듯한 삶에서의 통로였고, 설경구에게 나문희는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행복, 유토피아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나문희의 첫째 아들에 대한 설경구의 선택이 그에게 또 하나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게다가 마지막 크레딧이 다 오를때까지 흐르는 그 멋진 음악까지!!

 

알리바이와 용서에 대한 여러가지 혐의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남자들의 단편을 대비해 보여주는 것만 같은 이 건달들의 결핍에 대해 이렇게 깊게 들어가 성찰한 대중영화는 많이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런 식의 '결핍'에 대해서는 김기덕식일수도 있고, 용서일 수도 있고, 비난이거나 방종, 비웃음일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얼마나 다층적으로 다루었는가이다. 이 영화는 다층적인 영화다. 이야기를 이끄는 힘에 있어서, 상업적인 선택보단 비겁하지 않고 졸렬하지 않은 방향을 택했다. 흥행할 수 있는 영화인데, 흥행 못한 것이 참 안타깝다.

 

p.s. 설경구, 나문희, 조한선의 연기는 아주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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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덜레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미국3부작 두번째 작품 <만덜레이>(2005)를 보았다. 덴마크 영화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라스 폰 트리에는 전세계적으로 독특한 자기 색깔을 지닌 작가주의 영화 작가로 알려져있다. 아쉽게도 그의 <어둠속의 댄서>와 같은 작품들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미국3부작의 첫번째 작품 <도그빌>은 개봉당시 극장에서 본 기억이 난다. 니콜 키드만의 훌륭한 연기와 연극적 요소의 극대화를 통해 미국에 대해 색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풀어낸 그 영화는 당시 칸에서도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고 한다. 아주 넓은 크기의 스튜디오 세트장 안 세팅된 dogville이라는 마을은, 집의 경계, 나무, 심지어 개집까지도 분필로 그려져있고, 저마다 훌륭한 연기자로서의 명성을 알려온 배우들이 자기 위치에서 뛰어난 판토마임 연기를 펼친다. 문을 열고닫을때 존재하지 않는 문이 그/녀들의 연기와 사운드 이펙트에 의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국 문화, 미국적 패러다임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브레히트적 구성으로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이 영화는 이미 만드는 당시부터 감독이 3부작 중 첫번째 작품이라고 밝혀 이후 작품들에 대한 기대도 많은 작품이었다. 또한 라스 폰 트리에는 "도그마95"라는 선언으로도 유명하다. 라스 폰 트리에를 주축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대략 리얼리즘에 대한 질감으로서의 자기 입장, 자기 철학을 지닌 것이었다. 예컨대 영화를 찍을때 모든 사운드는 실제 현장음으로만 해야한다든지, 조명장비는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든지의 규칙들은 이런 방식의 형식적 리얼리즘 선언을 통해 영화적 진정성을 지키려는 하나의 움직임이기도 했다. 과 동기들말로는 한국에서도 변혁 감독 같은 경우 <주홍글씨>를 통해 "도그마95"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주홍글씨>의 경우에는 그것이 "도그마95"의 정신과 얼마나 어울리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런 흐름의 수장과 다름없었고, 그의 좌파적 기질은 세계 영화계에 여러가지 이슈를 이끌기도 했다. 물론 헐리우드와는 다른 영역의 '영화계'에서 말이다. 어쨌든, 그런 그가 <도그빌>을 통해 이런 도그마95를 스스로 완전히 부정하고 깨부쉈다. 그는 "그때 내가 왜 그랬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만덜레이>는 <도그빌>과 비슷한 형식,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 말그대로 시리즈의 중간단계로서의 영화로 보인다. 극의 캐릭터는 <도그빌>의 '그레이스'(<도그빌>에서 니콜 키드만 분)의 그것과 연결되며 이어져있고, 다만 극의 무대는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남부의 어느 시골 마을 '만덜레이'로 바뀌어져있다. 이곳에서 '그레이스'는 링컨과 북군에 의해 이미 흑인해방이 선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백인 부르주아지 가족의 노예로 살고 있는 '만덜레이'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대단히 미국적인 무엇이었음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영화의 종반부에) 드러나는데, 예컨대 어떤 갱집단의 두목인 아버지로부터 분할받은 갱조직 부하들과 함께 총을 들고 위협하며,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그리고 자신이 알고있는 '정당하고 정의로운' 프로그램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백인 부르주아지 가족 '마님'의 책에 표시된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레벨1부터 레벨7까지의 여러가지 분할관리 시스템도 파괴하려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않고, 이는 그레이스와 만덜레이에 사는 흑인들에게 엄청난 시련으로 이어진다. 영화 종반부에 그레이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스스로 백인 학대자의 모습이 되어 한 흑인 남성에게 채찍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는데 이는 극적 전개와 그레이스의 감정에 따르면 다분히 이해되는 것이면서도, 이런 결말이 그레이스의 목적이나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임이 아이러니하게 드러난다. 방식과 수단으로서 정당하지 못한 시스템이나 구조(이는 즉 미국적 질서, 문화, 통제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필연적으로 비극과 의도와는 다른 비민주주의, 폭력을 낳는다는 식의 에두른 풍자인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오를때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흑인 억압의 역사들이 사진의 연속이라는 형식으로 흘러나온다. 영화적인 작위와 풍자가 현실로 뛰쳐나가며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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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잔혹사

 

상업영화적으로 대단히 탄탄한 내러티브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유하 감독 나름의 색깔도 있고 자기 목소리도 있고, 자기 반영적이기도 하고. 그러나 중간에 김부선인가? 아무튼 떡볶이집 주인 아줌마가 나오는 씬들은 정말 영화의 흐름을 깨고 갑자기 몰입이 중단되게하는 면들이 있지만, 그것만 빼면 나처럼 시각적으로 적정선에서 양심을 지키며 영화를 즐겁게 보고 싶은 '남성'마초 관객들에게 아주 괜찮은 영화이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20대에서 50대의 남성 팬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특히 마지막 시퀀스는 과거에 중고교시절 폭력적인 남자 중고교 학생 사회의 질서속에서 일진 이하 모든 남중고생들이 품었던 판타지를 대단히 섬뜩하고 선정적으로 분출해버린 장면이다.

 

이 시퀀스는 중고교시절을 억눌린 무엇에 의해 답답하게 지냈고, 그 억눌린 감정의 해방구를 찾지 못한, 그러니까 폭력적 억압에 맞선 대안 윤리가 아니라 폭력에 맞선 차악 폭력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정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다. 어쩜 그래???

우리도 중고교시절엔 정말 이소룡, 아니 그땐 토니 쟈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토니쟈처럼 근육을 키워서 싸움을 연습해서 다 패주고 싶었단 말이다. 교련선생부터 시작해서 교장, 교감, 재수없는 아저씨들, 싸움 못하는 아이들을 괴롭히는 폭력쟁이들 모두. 그러나 난 그냥 그 질서에 어우러져 또다른 가해자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말죽거리잔혹사는 더더욱 내게 카타르시스를 주었던 것 같다. 옳지 못한 카타르시스 말이다. 그건 해방의 감정이 아니다. 이 불순한 카타르시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죄가 아니다. 군사주의-마초이즘 경쟁지상주의에서 태어나 자라 훈련받은 우린,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키워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영화 말죽거리잔혹사는 그것이 대중-상업영화이어서 발생하는 한계의 지점에서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지점에서 결코 대안적이거나 체제비판적인 영화가 될 수는 없는 본질이 존재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고 해!"는 상업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분명하고 딱 거기까지만이다.

 

만약 작가가 김부선 캐릭터나 거시폭력에 맞선 미시폭력의 저항 등의 설정들이 리얼리즘적 구현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더라도, 둘 모두 효과는 리얼리즘의 의의보다 훨씬 뒤쳐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정적으로나 결과적으로 선정적인, 껄쩍찌근한 카타르시스를 동반하므로 그것 역시 거기까지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권상우 캐릭터가 너무 착하고 정의롭고 무적이다. 쫌만 안착했어도 좋았을텐데. 그래도 그의 저항이 이해될 정도의 극적 긴장감이 유지되는 시나리오 바탕이 충분히 되는데. 아쉽도다. 그래도 어쨌든 재밌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상업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감독이 만든 상업영화이긴 하다. 그런 점에서는 또 대단하게 느껴진다.

 

- 4년전에 과 싸이클럽에 썼던 <말죽거리잔혹사>에 대한 '호평'을, 일주일전 다시 감상한 이후 다른 느낌을 받고는 스스로 정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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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1.

오늘 본 영화

<허드서커 대리인>(94)

<바톤 핑크>(91)

 

코엔 형제의 두 영화를 나란히 보았다. 비교적 초기작들 이후의 작품들로 많이 알려진 영화다. 그러니까 학교 도서관에도 dvd가 꽂혀있는거겠지만. 인상깊었다. 특히 바톤 핑크!!! 허드서커대리인은 독특한 연출과 원작의 변주가 인상깊었다.

 

 

<화려한 휴가>, 용산CGV 시사회

 

시사회 표 한 장을 우연히 얻어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영화배우들의 열혈 팬 관객들이 대부분이어서 관람 분위기가 색다른 느낌이었다.

영화는 아주 평범하고 무난하게 촬영되었고, 편집도 그렇고. 영화 내용은 대중적이고 상업영화적인 요소가 다분하다고 생각했다. 100억짜리 영화를 찍을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찍어야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험(?)을 한다는건 정말 도박이고, 게다가 역사 드라마는 내용 역시 정말 중요하니까. 그리고 주제가 주제인만큼 대중적이어야만 한다는 강박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영화의 결말은 누구나 아는 내용이 아닌가.

여러가지 평범하고 무난한 느낌들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주제의 위대함 때문인지 영화 중반부 이후로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기대보다는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영화는 딴거 다 재끼고 흥행에 성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만큼 최근의 한국영화는 너무 어렵다. 100억짜리 영화가 망하면 엄청 타격이 클 것이다. 게다가 이건 최초로 80년 5월 광주 항쟁 그 자체를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니까.

이토록 제발 대박나라, 라고 의식적이고 기계적으로 염원한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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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를 다시 보고

다큐멘터리와 내러티브 극영화의 혼합,

영화적 경계를 허무는 현실,

 

나는 오늘날의 영화들에서 시도되는 이런 실험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이틀전 다르덴 형제의 99년작 <로제타>를 또 보았다. 세번째 봤을때의 느낌과 감흥은 첫번째, 두번째와는 또 사뭇 다르다. 이 영화는 로제타라는 어린 소녀가 겪는 일상의 엄혹한 문제에 대해 2시간 내내 꿈틀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영화 밖으로 뿜어져나오는 것 같은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이 영화를 본 친구는 새벽2시, 그 시간에 영화를 본 다음의 충격(?)에 놀라워했다. 그 친구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도 올해 초 처음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보았을때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내가 보던 식상한 영화들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로제타>, <더 차일드>, <프로메제>, <아들>!!! 일종의 21세기 현대 자본주의 도시안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사는 이들의 자화상이 계속 그려지면서 분해되어있던 그/녀들이 다르덴 형제의 작품들의 세계 속에서 결합되어 하나로 모아지는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의 변함없는 작업이 그들이 가진 무언가를 계속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이어져도 그 묶음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꼭 다르덴 형제 영화의 스타일처럼 허물어질 필요는 없다. 그것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고, 또 영원불멸할 진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스타일,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누가 그걸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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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 왕가위

 

 

쵝오!!!! 두 번째꺼 쵝오!!!! 조명도 거의 쓰지 않았고, 열흘만에 찍었다는데... 정말 왕가위는 천재다. 봐봐. 날려도 멋있잖아. 빛들어오는거봐. 앵글봐. 우린 계속 이렇게 말하며 <중경삼림>을 다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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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악의 꽃>, 끌로드 샤브롤, 2003

 

<의식>를 찍고 끌로드 샤브롤은 그 영화가 이 시대의 '마지막 공산주의 영화'라고 자평했다고 한다. 솔직히 그 말 속에 담긴 '마지막'이란 수사에 대해서는 동의 못하겠고, 어쨌든 근작 중 가장 걸작인 <악의 꽃>도 그의 영화의 주제적 범주를 넘어서는 영화는 아니다. <악의 꽃>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부르주아 가정의 치정, 원죄에 대한 심판을 스릴러라는 장르를 빌어 진행한다. 부르주아 가정 남성의 가부장성과 가식, 폭력성에 대해 미묘한 심리의 풍자로 보여준다. 스릴러가 지닌 대중 친화적인 느낌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내용을 잃지 않고 신랄하게 보여주는 면모가 누벨바그의 거장답다. 부르주아지 출신 작가주의 감독이 만들 수 있는 '공산주의'(자평이지만...) 영화는 이런 식일 수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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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STILL LIFE, 지아장커

 

작년도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작 <스틸라이프>. 시네큐브에서 개봉하기만을 기다리다 가서 보았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적 파괴에 저항하는 샨샤 사람들, 인간, 사랑, 풍경의 거대한 몸부림과 같았다.

풍경과 기억들이 저항한다.

영화가 '영화예술'이라는 매체로서 가장 위대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보여주는 듯 하다.

근데 난 평생 영화 이렇게 못만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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