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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년 내 기온 2도 오르면…전쟁보다 큰 재앙"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5-19 오후 4:50:56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하승수 변호사를 만났다. 그동안 참여연대 소액주주운동, 사법개혁 운동, 풀뿌리 연대운동, 투명한 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운동 등 다양한 시민운동의 속에 그가 있었다. 지금 그는 지난해 10월 정식 정당으로 등록된 녹색당의 '녹색'가치를 이곳저곳 뿌리고 다니고 있다. 올해 7월에는 충남 홍성으로 귀촌을 준비 중이다.

"사실 조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절박하긴 하다. 마냥 천천히 갈 상황은 아니다. (중략) 기후변화 문제만 하더라도 앞으로 10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큰 계기를 만들지 못하면 굉장히 암울한 상황이 될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안 믿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비참한 일인지 알게 된다. (중략) 인류에게 생태적 지혜가 있다면 그때 가서 뒤늦게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문제다. 어느 정도의 마지노선을 지나버리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절박함과 위기감을 가지고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하승수 변호사는 환경의 문제가 단순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공동체를 위협하는 일이며, 다음 세대들에게까지 심각한 부담을 지우는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녹색당을 창당하는 일에 앞장섰다.

"처음에 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제안하고 틀을 잡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그 역할을 하는 거다. 거기까지만 내 몫이고 나머지는 실제로 참여하는 분들이 조직의 정체성과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사실 그 분들의 열정에 묻어가는 스타일이다."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사람이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지 깨달았다. (중략) '행복이란 날씨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정자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구나. 작은 동네 텃밭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것이구나'라는 걸 알았다. 만약 운동을 안 하고 변호사로 날마다 사무실에 앉아서 의뢰인을 만나는 생활을 했다면 참 불행했을 것이다. (중략) 사람들과 공동으로 살아가는 경험들을 통해서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구나. 진정한 행복이란 같이 어울려서 사는 거구나'를 경험했다."

지난날 학생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나만 혼자 행복할 수 없어 교수직을 벗고 다시 운동으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오늘도 하승수 변호사는 남이 행복하지 않으면 나도 행복하지 않은, 남이 불편하면 나까지도 불편해지는 '불편한 진실' 속에 살고 있다. 여전히 원자력 발전소 가동을 통한 에너지 생산이 전력 수급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 현실에서 '조급하지 않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문명의 전환'을 외치는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핵발전소에 전력을 공급하는 송전탑 건설을 두고 밀양주민들이 8년 동안 반대운동을 하고 있고, 작년 1월에는 농민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런 문제를 보며 마음이 어떤가?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재작년 10월 말 우연히 부산에서 밀양 주민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 그분들을 통해 송전탑
건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미 6년 동안 송전탑 반대 운동을 지속하고 있었고 그분들 스스로 송전탑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돼 있었다. 대화 중에 그분들이 '송전탑의 끝에는 원전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원전 반대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뒤 '내가 뭐 도울만한 일이 없을까'하는 생각만 하다가 작년 1월에 밀양 주민 한 분이 분신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인터넷뉴스를 통해 속보로 그 소식을 듣고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살던 분이 분신까지 했다는 것이 엄청난 일이지 않나. '그동안 얼마나 상처와 고통이 깊었으면 분신까지 했을까, 그동안 내가 너무 무관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송전탑을 반대하는 내용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분들이 느꼈을 소외감을 생각하니 자책감이 몰려왔다. 마침 밀양에 있는 이계삼 선생과 연락이 되어 사정을 물으니, 밀양 시내에 있는 시민단체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분들 역시 나와 비슷한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연대활동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사정을 자세히 알고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던 상황은 아니었던 거다. 그러는 사이에 밀양에서도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비단 밀양에서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점점 소수가 되면서 고립돼 가고 있다. 지역 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다 찬성 쪽에 서버린다. 결국 반대쪽에는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만 남는다. 좀 더 일찍 관심을 가지고 함께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쉽다.

자책감에 송전탑 건설 반대 현장에 나간 것인가.

일본 후쿠시마 사태를 계기로 사회를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우리 사회가 그나마 이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모든 것을 생각했는데, 후쿠시마 사고를 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이 사회가 유지가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밀양 송전탑 문제도 조금 늦기는 했지만 문제의 실체를 알고, 밀양 주민들을 만나 생생한 얘기를 듣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고 실제로 몸이 움직이게 되었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도 후쿠시마 사고가 굉장한 충격이었고 사회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동안 사회참여를 많이 해왔지만, 후쿠시마 사태 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후쿠시마 전에 우리 사회에서 내가 가장 많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은 환경문제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이런 의문도 문제가 심각해지고 나서야 갖게 되었는데, 1997년 IMF 위기가 발생한 뒤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것이 가지고 온 진짜 영향에 대해서 깨달았다. IMF위기 직후에는 우리나라 경제위기가 재벌중심의 경제체제가 낳은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재벌문제만 해결되면 한국사회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많은 시민단체에서 재벌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IMF 이후 재벌에 대한 경제력 집중은 훨씬 더 심해졌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뒤늦게 '그동안 우리가 사회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이슈와 현안만을 따라간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제위기 이후 10년 사이에 경제
성장, 돈, 부동산, 경쟁 같은 주제가 이 사회 전체를 지배해 버렸고, 사람들의 대화 주제조차도 바꿔버렸다.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문화와 의식까지 바꿔 버린 것이다. 시민운동은 이런 사회의 변화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그냥 터지는 이슈에 따라가기만 바빴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후쿠시마 사고를 보면서 받은 충격은 IMF 때 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등과 경쟁이 심해지는 것을 막고, 더 나은 사회로 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었는데, 후쿠시마 사고가 터진 후에는 '지금과 같이 생태·환경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으로는 문명이 유지가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사회의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슈만 따라가면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우리가 사회의 흐름을 읽고 흐름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법이나 제도 하나를 바꾸는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경제시스템, 가치관, 문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동안 시민운동이 전투(이슈)에서는 이기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전쟁(흐름)에서는 지고 있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이제는 우리가 큰 흐름을 바꿔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사회가 딛고 있는 문명의 전환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된 거다.


후쿠시마 사고 1년이 되는 작년 3월 11일까지, 2011년 12월 2일부터 매일 정오에 1시간씩 총 311시간 동안 광화문에서 신규원전 부지 선정 반대 1인 시위를 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의미 있는 결과들이 있었나?

자기 스스로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냥 생각으로 끝나버리는 게 있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는데 매우 느린 편인데(
웃음), 후쿠시마 사고를 보고 난 뒤 서너 달을 멍하니 있었다. 그 뒤 정신을 차려 '녹색당 같은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원전 반대 운동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조직도 없고 사람들도 모으기가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후쿠시마 사고로 나처럼 충격을 받았지만 이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완비되지 못한 상태다 보니 우선 1인 시위부터 하자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녹색당도 창당됐고 사람들도 많이 모였다.(웃음)

작년 3월 14일에 녹색당이 창당했지만 4월 총선에서 지지율 0.48퍼센트로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가 10월에 재창당 대회로 정식 정당으로 등록되었다. 이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정당으로서 자리매김하기까지 초기 녹색당 내에서 어떤 노력들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녹색당 창당을 위해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자기의 역량과 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녹색당의 틀을 짤 때 굉장히 개방적으로 짰고 최대한 그렇게 운영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말
보석 같은 분들이 녹색당에 참여해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녹색의 가치를 실천해왔던 분들이 많이 있었는데 앞으로 이분들이 녹색당을 통해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프레시안(최형락)

녹색당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녹색당이 지향하는 것은 '문명의 전환'이다. 화석연료와 원전에 의존한 문명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우리 사회를 점점 더 불평등하게 만든다. 화석연료와 원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에너지의 다수가 거대 기업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 시스템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소수의 기득권층일 뿐이고, 나머지는 다 피해자인 것이다. 원전 건설에 반대하는 시골 농민들, 원전에서 실제로 위험한 작업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면 이런 것을 더 실감한다. 원전의 위험, 최소 20만 년 이상을 보관해야 하는 사용 후 핵연료 문제, 기후변화 문제 등은 청소년과 청년들 같은 미래세대에 심각한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다. 이 자체가 정의롭지 않고 비윤리적이다. 이처럼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정의롭지 않은 문명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두르지 않고 긴 호흡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작년 총선 이후부터는 '지역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가자'라고 강조하고 있다.

정당의 역할 중에는 일정한 권력의지를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지지 세력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앞으로 정당으로서의 녹색당이 하게 될 역할은 무엇인가?

물론 녹색당도 정당이기 때문에 선거 때 후보를 내고 국회의원도 당선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녹색당의 목적은 아니다. 보통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정당의 목적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녹색당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많은 당원들이 탈당할 것이다.(웃음) 녹색당이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원전에 의존하지 않고,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으며, 청(소)년들과 미래 세대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특정 정치인이 4년, 5년이라는 짧은 임기 내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녹색당이 생각하는 정치는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이 과정에서 우리와 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동의할 수 있는 정책을 가지고 끊임없이 설득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는 자신들의 지지 세력으로 하여금 정치적 효능감을 맛보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녹색당이 한 석이라도 국회에 들어가 실제로 정책을 바꾸는 힘을 증명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나.

당연하다. 2016년 총선에는 꼭 녹색당 국회의원을 만들어야 한다.(웃음) 국회의원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방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이 돼서 우리가 생각하는 정책의 방향을 지역에서부터 실현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독일의 경우 녹색당의 지지율이 국가 차원에서는 15퍼센트 정도인데, 어떤 도시에서는 이미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있다. 거기에서는 녹색당이 추구하는 정책들이 현실로 되고 있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아, 이 방향으로도 갈 수 있구나'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녹색당이 국회의원을 배출해야 하고, 지역에서는 어떤 한 지역이라도 녹색당의 정책을 관철시킬 수 있는 정치적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에너지 문제, 먹을거리 문제, 농업 문제, 노동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에 관해 녹색당의 대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역이 참 중요하다.

녹색당원들이 정당 활동이 아니라 시민운동을 한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녹색당 안에는 기존 정당이나 정치권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운동과 정치가 다르듯 환경단체와 녹색당은 엄연히 다른데, 운동이 아닌 정치를 하는 정당으로서의 녹색당은 이러한 비판 앞에서 어떤가?

운동과 정치는 다르다. 하지만 녹색당의 정치가 기존의 정치와 똑같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정치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사회의 거대 담론이나 정치 현안만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녹색당은 우리 주변과 일상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많다. 이것이 바로 녹색당의 정치가 기존 정치와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가치와 비전을 거창하게만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도 이야기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선거로 대표자를 뽑아 맡기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다른 민주주의를 시도해 봐야 한다. 이번에 녹색당은 100퍼센트 추첨제로 뽑힌 대의원들로 구성된 대의원대회를 치렀다. 이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녹색당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인정했다. 처음에 우리가 추첨으로 대의원을 뽑는다고 했을 때, 지금까지 정치를 해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대의원을 추첨하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고 함께했던 당원들이 매우 즐거워했다.(웃음) 정당의 대의원 선출이 엄숙하지 않고 제비뽑기, 종이비행기 날리기, 뺑뺑이 돌리기를 통해 진행되는데 뽑는 사람이나 엉겁결에 뽑힌 사람이나 다들 좋아했다.

책임감 문제가 발행하지는 않나?

그렇지는 않다. 물론 갑자기 전화를 받았는데, 대의원으로 추첨됐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황당해하는 당원도 있었다. 그러나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한번 해보자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대의원으로서 스스로 책임감도 가지게 된다.

실제로 이번 대의원대회는 매우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지방에서 온 대의원들은 교통비도 지급하면서, 대의원대회가 녹색당의 최고대의기구이므로 중요한 역할임을 강조했다. 안건도 발의할 수 있도록 미리 안내했다. 그래서 추첨으로 뽑힌 대의원들이 발의한 안건들이 4개나 되었다. 안건 한 개는 현장에서 대의원 3분의1 이상의 동의를 얻어 발의되었다.

추첨제 대의원이라고 해서 책임감이 없으리라는 것은 선입견이다. 사실 권한이 주어지면 책임감도 가지게 된다. 문제는 그럴 수 있는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데 있다. 정당이나 노동조합, 시민단체에서도 선거를 통해서만 대의원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하면, 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책임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추첨제를 활용해서 누구에게나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그렇게 구성된 대의원들이 결정하는 것이 전체 당원들의 의사를 잘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고,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조직 전체의 책임성이라는 측면에서 봐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뉴질랜드에서 녹색당은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하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1996년 비례대표제로 선거개혁을 단행한 이후, 2011년 총선에서 지역구에서는 한 석도 못 얻었지만 정당득표율이 총 11퍼센트가 넘어 무려 14명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뉴질랜드의 사례가 한국의 녹색당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나?

녹색당은 이해관계나 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이 아니고, 가치를 중심으로 모인 정당이다. 생태환경, 평화, 인권, 민주주의, 사회정의 등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보고 모인 사람들인 것이다. 비례대표제가 확대되면, 사람들이 정당의 가치나 비전을 보고 투표할 수 있게 될 것이므로 정치가 많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을 비롯해서 지역구 소선거구제 중심의 선거제도를 가진 국가들을 보면 유권자들이 사표를 방지하기 위해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 투표하는 경향이 많다.

독일이나 호주, 뉴질랜드, 스웨덴 같이 녹색당이 강세를 보이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비례대표제 중심의 선거제도를 가진 국가들이다. 반면에 영국, 캐나다, 미국 등은 소선거구제로만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다 보니 녹색당이 고전을 하고 있다.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최근에야 지역구에서 1등을 해서 최초의 녹색당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웃음) 당선 가능성과 지역개발 욕구를 반영하는 선거제도에서는 거대 기득권 정당들이 힘이 세기 때문에 소수정당이 지역구에서 의석을 차지하기란 매우 어렵고 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영국의 경우도 브라이튼(Brighton) 지역에서 최초의 녹색당 국회의원이 배출되었는데, 이 도시는 녹색당이 시의회에서도 1당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이다.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영국의 다른 지역도 이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선거제도가 크게 바뀌지 않고서는 기득권 정치구조가 깨지기 어렵다. 다양한 정당들이 가치와 정책으로 경쟁하는 정치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독일식이든 스웨덴식이든 비례대표제의 전면 확대가 필요하다.

녹색당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 기준을 미래에 맞춰 움직이는 조직이다. 그만큼 앞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 같다. 무기력, 자포자기하고 싶을 때 어떻게 극복해 내는 편인가?

조급하면 지치는 것 같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조급하거나 불안할 때가 있는데(웃음) 굳이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조급해지면 판단을 잘못 하거나 행동이나 말에서 실수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편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 자기 주문을 거는 것이 '절대 조급하지 말자'이다.(웃음)

지난 1월 녹색당원들과 함께 풀뿌리정치 워크숍을 했는데, 어떤 한 모둠토론에서 나온 결론이 '조급하면 지는 거다'였다. 그게 맞다고 본다. 당원들도 우리가 아직 작은 정당이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운동이나 정치가 조급해지는 순간, 처음에 하려고 했던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그 운동이나 정치는 변질되고 조직은 무너지면서 정작 하려던 변화가 늦춰진다. 그렇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으면서 중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가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급함이 들 때는 없나? 어떤 부분에서 가장 위기감을 느끼는가?

사실 조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절박하긴 하다. 마냥 천천히 갈 상황은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기후변화 문제다. 기후변화 문제만 하더라도 앞으로 10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큰 계기를 만들지 못하면 굉장히 암울한 상황이 될 것이다.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300ppm 이하이던 것이 산업혁명 이후에 올라가기 시작해서 390ppm을 넘어섰다. 많은 전문가들이 마지노선이라고 이야기하는 450ppm이 되기까지는 10년에서 2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나온 보고서에서는 2050년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기후변화 상태가 2020년에 올 가능성이 높아졌고, 2100년에 도달할 것이라 했던 상태가 2050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생각보다 기후변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국은 기후변화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나라 중 하나이다. 그래서 녹색당 자체는 조급하지 않게 일을 해야 하지만, 녹색당이 해야 하는 일로 보면 상당히 절박한 상황이다. 얼마 전에 기상청에서 낸 보도자료를 보면, '2100년에 한반도 평균기온이 5.5도가 오른다'고 나왔더라. 그러면 사람들은 '이것은 2100년에 걱정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100년이 2050년으로 앞당겨질 수 있고, 10년∼20년 내에 2도가 오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기온이 2도가 오른다는 것은 재앙이다. 한반도에서도 벼농사를 비롯한 농업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식량위기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처럼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하고 있는 시스템은 이런 상황이 오면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아무도 준비하지 않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상황인 것을 모르고 있다.

이것은 마치 전쟁과 비슷하다. 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안 믿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비참한 일인지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기후붕괴·기후재난'이라고도 부른다. 인류에게 생태적 지혜가 있다면 그때 가서 뒤늦게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문제다. 어느 정도의 마지노선을 지나버리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절박함과 위기감을 가지고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변호사 시절 참여연대에서 권력감시운동을 하다가 '세상이 바뀌려면 사람들의 생활과 밀착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여 풀뿌리 운동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고 시작할 수 있었나?

솔직히 나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아니다.(웃음) 활동을 하다가 문제에 부딪치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식으로 살았다. 1996년에 처음으로 참여연대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그 때는 참여연대의 회원이 1000명이 안 되었는데 2000년이 됐을 때는 1만 명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 참여연대의 소액 주주운동은 정말 대단했다. 하루에 몇백 명 씩 회원이 가입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IMF 위기 직후에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불만을 터트리고 싶은데 해소할 데는 없고, 그 속에서 참여연대가 재벌을 상대로 '너희들 잘못이다'라고 해주니 거기에서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웃음)

그런데 참여연대 운동을 하면서 '과연 이렇게 한다고 우리 사회가 바뀔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참여연대의 운동방식은 주로 미디어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가 하는 주장을 기자회견이나 퍼포먼스 등의 방식으로 언론을 통해 보도되게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언론이 주목하는 운동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만, 언론이 보도하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것처럼 되었다. 이렇게 미디어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만 운동을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또한 2000년까지만 해도 신문사와 방송사마다 NGO 출입기자가 있었고, 이들과 시민운동은 굉장히 우호적인 관계였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신문에 NGO면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2001년 김대중 정부 때 언론사 세무조사를 하고, 여기에 시민단체가 찬성을 한 뒤부터 보수언론과 시민단체의 관계가 확 틀어졌다. 더 이상 언론을 통해 시민단체가 성장하기 힘든 환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운이 좋았다. 다른 운동의 흐름을 만났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조직하면서 해왔던 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바로 풀뿌리 운동이다. 1970년대 빈민운동으로부터 이어진 흐름도 있었고, 각 지역별로도 시민들의 참여 속에 만들어지는 흐름이 있었다. 이런 활동을 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한국사회의 시민운동이 풀뿌리 운동과 같이 가지 않으면 굉장히 공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풀뿌리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과거 '시민자치정책센터'라고 불렸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는 풀뿌리운동을 네트워킹하는 일을 시작했다. 나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 활동을 했고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도 연계해서 조례제정운동, 주민참여예산, 마을 만들기, 협동조합, 풀뿌리시민교육, 어린이·청소년 인권 등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사회에서 풀뿌리운동은 많이 발전하고 있다. 지역마다 다양한 풀뿌리 단체들이 생겼고 생활과 지역에 밀착한 다양한 활동들을 많이 하고 있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의 기반이 많이 확대된 것 같아서, 풀뿌리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온 한 사람으로서 무척 기쁘다.(웃음)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만나는 것과, 운동가로서 사람들을 만나는 삶이 있는데 어떻게 이 두 가지 삶을 병행할 수 있었나?

내가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때는 판사, 검사, 변호사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검찰과 법원에서 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연수원에 있을 때 검찰을 비판하는 글을 쓴 게 문제가 되어서다.(웃음) 이것저것 신경 쓰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냥 변호사를 하면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변호사와 시민운동을 병행하려고 해서 민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선배들이 있는 사무실에 가 변호사 일을 시작했는데, 하다보니까 둘을 병행하기가 참 힘들었다. 변호사 일에 집중하게 되면 시민운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시민운동을 제대로 하려니 변호사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웃음) 그래서 변호사 일을 2년 하다가 접고, 시민운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간에 다시 또 변호사 일을 반(反) 상근 정도로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주대학교 교수로 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 정체성이 활동가인가, 변호사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다.(웃음)

그동안 해온 시민운동을 뒤로하고 교수직으로 갈 때의 마음은 어땠나?

풀뿌리 운동 관련된 일을 하면서 변호사 일도 반 상근 정도하면서 생계를 해결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 당시 로스쿨을 준비하는 대학들이 늘어나면서 교수 자리가 생겼다. 두 가지 생각이 있었는데, 하나는 활동가와 변호사 일을 병행하기 힘들어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웃음), 다른 한 가지는 비(非) 수도권에 살면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제주대학교 교수 자리가 이 두 가지에 다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서 4년을 근무했다. 월급도 안정적으로 나오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즐겁고 굉장히 좋았다.(웃음)

교수직을 그만두기 쉽지 않았을 텐데, 왜 나온 것인가?

그만두기 쉽지 않았다.(웃음) 제주대학교에서의 교수 생활은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오래 했던 직업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웃음) 그만둘 때는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처음에는 왜 그만두고 싶었는지 나도 설명이 안 됐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까 정리가 되더라. 처음에는 대학에 간 것도 좋았고, 제주도에 있는 것도 참 좋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4년을 생활하는 동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면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가 일어났다. 그때 나만 편하게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제주도의 경우에도 강정 해군기지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대학교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고, 마음의 부담만 커지고 있었다.

또 하나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들이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 이렇게 가면 대학은 교수만 행복한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학부 수업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대학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취업과 앞날에 대한 막막함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모면서 마음이 아팠다. 실제로 졸업할 때가 되어 사은회를 한다고 해서 가면 진로가 결정된 졸업생들이 별로 없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한번은 친하게 지내던 남학생이 졸업을 하고 두어 달 후 밤에 나한테 전화를 했더라. 그런데 그 친구가 엉엉 울었다. 키도 크고 성격도 밝고 좋은 친구였는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우는데, '정말 대학이라는 것이 나한테만 좋지. 학생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 내가 있던 법학부가 로스쿨이 되었다. 그런데 로스쿨도 애초 취지와 달리 변호사시험을 위한 학원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학교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게 되었다. 대학도 결국 우리 사회 안에 있기 때문에, 사회의 흐름이 나쁜 방향으로 가면 대학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시민운동으로 돌아가자고 마음을 먹고, 대학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전에 서울에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라는 단체를 다른 분들과 함께 만들었는데, 다행히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이 있었다.(웃음) 막상 서울에 올라왔더니 세상이 많이 거칠어지긴 했더라.(웃음)

'나는 편한데 학생들은 행복하지 않은 것, 사회는 나빠지는데 대학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이 불편해서 박차고 나왔다'고 했다. 보통사람들은 좋은 집이나 좋은 직장이 없을 때, 혹은 돈이 넉넉하지 않을 때 불편함을 느낀다. 이에 반해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는 기준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이것은 '같이 행복해야 진짜 행복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대학에 있으면 그 대학에 있는 학생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것이다. 함께 느끼는 만족감과 행복감이 중요한 것 같다. 진짜 행복은 개인이 혼자 안정된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면서 그 안에서 서로가 행복한 관계를 맺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본래 무디고 느린 사람으로 사람과 사회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았다.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사람이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지 깨달았다. 풀뿌리 운동을 하면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들도 나나고, 함께 행사도 준비하고 텃밭도 가꾸고 하면서 '행복이란 날씨 좋은 날, 좋은 사람들과 정자에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구나. 작은 동네 텃밭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것이구나'라는 걸 알았다. 만약 운동을 안 하고 변호사로 날마다 사무실에 앉아서 의뢰인을 만나는 생활을 했다면 참 불행했을 것이다. 딸아이를 낳으면서 여러 사람들과 '공동육아 협동조합'을 했었는데, 그런 경험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구나, 진정한 행복이란 같이 어울려서 사는 거구나'를 경험했다.

2008년에 설립된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으로 있었다. 1998년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이후, 참여연대를 통해서 꾸준히 노력해 오다가 독립된 단체를 만든 것으로 안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시작하고 성과를 내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공부를 잘 안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일을 잘하는 편도 아니다.(웃음) 체계적이거나 계획적으로 하는 게 잘 안 된다.(웃음) 보통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을 보고 '이 사람들하고 하면 일이 되겠다' 싶으면 결정하고 하는 편이다. 정보공개센터도 그랬다. 처음 준비모임을 하는데 모인 분들을 보니까 일이 되겠더라.(웃음) 실제로 정보공개센터가 2008년 10월에 창립해서 지금껏 4년이 넘게 지나오면서 자리가 많이 잡혔다. 이것은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활동가들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회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표나 이사 같은 분들도 실질적인 역할을 하면서 함께 조직을 성장시켰다.

역시 일이라는 것은 좋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하면 잘되게 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별로 하는 게 없다.(웃음) 처음에 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제안하고 틀을 잡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그 역할을 하는 거다. 거기까지만 내 몫이고 나머지는 실제로 참여하는 분들이 조직의 정체성과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사실 그 분들의 열정에 묻어가는 스타일이다.(웃음)

변호사로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넉넉한 삶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활동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동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해 부인과 딸이 지지해주는 부분이 있나?

가족들 모두 내가 살고자 하는 기본 방향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동의해준다. 작은 공동체로서 가족이 함께 살면서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는 것도 있다. 그래도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과정 속에서 문제가 풀리는 것 같더라.(웃음) 삶으로 보면 좀 어려운 점도 있고 불편한 것도 있을 텐데 행복이란 게 물질에 있는 것만은 아니지 않나.(웃음)

올해 7월에 충남 홍성으로 귀촌하려고 하는데, 딸은 시골에 내려갈 생각이 없다고 하면서도 아빠·엄마가 내려가는 것은 인정한다.(웃음)

청년 하승수는 어떤 사람이었나?

늘 좌충우돌하는 삶을 살아왔다. 선배들과도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웃음) 고집이 세고, 해야 할 말은 하는 성격이라 가끔 부딪치는 일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심이나 악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분들이 나를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20∼30대는 그런 좌충우돌하는 경험을 통해서 계속 배웠던 것 같다.

원래 판사가 될 생각도 있었다. 처음 사법연수원에 들어갈 때는 이후에 법원에 들어가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웃음) 그런데 연수원을 수료할 때에는 법원 쪽으로는 가지 못했다. 사법연수원 내에 사법연수생들이 만들던 잡지가 있었는데, 잡지 편집부가 있었고 나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검찰의 역사를 다루는 기사를 맡았는데, 기사를 쓰려고 한국 검찰 역사를 보니 그동안 검찰이 잘한 게 없더라.(웃음) 그래서 솔직하게 한국 검찰은 별로 잘한 게 없고 옛날에 이러이러한 잘못을 많이 했다고 썼는데, 그것이 사법 연수원 내에서 문제가 되었다.

당시 사법연수원의 부원장이 검찰에서 파견된 분이었는데, 그분이 연수원에 있는 검찰 교수들을 전부 소집해서 이 기사는 못 내보낸다고 하면서 삭제하라고 했다더라. 나는 절대 못한다고 했고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일부 삭제·수정된 상태에서 기사가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이런 식으로 꽉 막힌 집단에서는 일을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참여연대에서 활동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변호사들의 탈세 문제가 많이 이슈가 되었다. 그래서 '변호사에 대해 부가가치세를 과세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나왔다. 지금도 변호사들이 어느 정도 탈세를 하겠지만(웃음) 그때는 정말 많이 했었다.(웃음) 참여연대 안에 있는 여러 팀 중에서 내가 있는 조세 개혁팀에서 이 이슈를 제기하면서 '변호사에게도 부가가치세를 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어떤 변호사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주장이었다. 그래서 미묘한 압력 같은 것도 있었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도 반대했지만, 우리 팀이 세게 밀어붙여 결국 변호사 부가가치세 과세 법안이 1998년에 국회를 통과해 변호사들도 부가가치세를 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말 많은 충돌과 갈등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좌충우돌의 과정이었다. 이제는 문제를 푸는 방법도 알게 되고 많이 유해졌다.(웃음) 부딪치는 과정에서 많이 배웠다. 지금은 어떤 사람은 나를 유하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고집이 세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지난날 재벌감시운동이나 사법개혁운동할 때는 누군가 나를 '불독, 독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웃음) 아마 요즘에도 영양댐 문제로 독하게 물고 넘어지니까 그런 별명이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웃음)

좌충우돌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 만큼은 후회되거나 내 잘못이었다고 느낀 적은 없었나?

사람들과 의견이 다른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중에는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관련된 것도 있고,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의 의견도 받아들여 조율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런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 참 어려웠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너무 불필요하게 세게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되더라.

요즘에도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다를 때에는, 어떤 부분이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인지 많이 생각하게 된다.

청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지금 사회라는 것이 워낙 청년들이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떻게 살라고 조언한다는 것이 오히려 미안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하겠다'라는 이야기 정도만 할 수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이계삼 선생이 보내준 <청춘의 커리큘럼>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결국 청년들 스스로 깨닫고 친구들의 손을 잡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이다."

나는 이게 맞는 것 같다. 내가 청년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청년들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나는 그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녹색당 내에서도 청년녹색당원들이 뭘 하겠다고 하면, 나는 '하시고 싶은 일을 하시라'고 말하는 편이다.

많은 청년들이 녹색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대다수 청년들은 산업사회가 주는 혜택과 도시생활에 길들어 흙과 자연, 느림과 나눔 등이 있는 녹색의 가치를 쉽게 동의하기 힘든 세대다. 그럼에도 이 청년들에게 녹색의 가치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는 뭔가?

작년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라는 텃밭활동을 하는 청년들을 만났는데 대부분이 도시에서 자란 청년들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들이 스스로 텃밭 가꾸기 모임을 하는 것을 보면서 '누구나 다 작은 경험을 통해 녹색의 가치를 깨닫고 긍정적이고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청년들이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자원봉사자로 가서 아이들에게 텃밭농사 교육을 한 보고서를 읽어봤는데, 초등학생들이 너무 즐거워하더라는 것이다. 처음에 지렁이를 보고 도망가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흙을 만지고 채소를 가꾸는 것을 참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이 아이들에게는 물론 본인들에게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보고서에 쓴 것을 보았다. 본인들이 너무 즐거워하면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청년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녹색의 가치라는 것은 우리가 상당 부분 잃어버리고 있었던 면이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막상 경험해보면 좋은 변화가 있다. 나도 상당히 도시화가 된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녹색의 가치를 몰랐지만, 텃밭이라도 가꿔보고 내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실천해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청년들도 비록 도시 생활에 익숙해 있지만 녹색과 관련된 활동에 참여해 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베란다에 작은 화분을 만들어 최소한 상추부터 가꿔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청년들 중에 이런 것을 물어보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청년들 안에 녹색의 가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것 같다.
 

ⓒ프레시안(최형락)



녹색당에는 일회용품을 쓰지 않거나,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채식을 하는 등 환경·생명 등의 이슈에 관심을 가지다가 당원이 된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개인의 삶에서 녹색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과 달리, 원전 폐지는 우리 사회구조적인 것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매우 지난하고 힘든 일이다. 녹색 당원들이 일상의 작은 문제들에서 출발해서 원전반대운동과 같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는 과정이 궁금하다.

녹색당원 중에는 여성 당원이 절반 이상인데, 이 중에는 주부도 있고 비혼(非婚) 여성도 있고 연령과 처지가 다양하다. 이분들이 녹색당에 가입하게 된 동기도 굉장히 다양하다. 원전에 반대하는 사람, 농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 채식을 하는 사람,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 등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녹색당 내에 어떤 변화가 있느냐 하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관심사들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것도 중요하구나'라는 걸 느끼면서 자신의 관심사가 넓어지게 된다. 신기한 것이 녹색당원들끼리 만나면 이야기가 잘 통한다. 원전에 반대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길에 버려진 동물도 돌보고 있고, 텃밭도 가꾸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이런 관심들이 모두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색'의 가치와 연결되는 문제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녹색당 안에서는 이런 삶의 문제들 어느 하나도 가볍게 취급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승수에게 자유란?

늘 가슴 뛰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유가 결핍되면 너무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자유는 공기와 비슷하다. 사람에게 '자유'가 없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시스템은 사람들을 자꾸 꽉 짜인 틀 속에 넣으려고 한다. 그래서 개인이 '자유'나 '행복'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자유'라고 할 때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자유'를 유보해야 하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야만 언젠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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