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2> 대동단결선언 정신으로 되짚은 8.29

강응천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8-29 오전 6:11:52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1990년대부터 <한국생활사박물관>, <라이벌 세계사>, <지하철 史호선> 등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8.29가 사라졌다. 인터넷 검색창에 '8.29'를 쳐도, '8월 29일'을 쳐도 이날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진 날인지 알려주는 정보는 뜨지 않는다. 오히려 2010년의 8.29부동산대책이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오늘날 한국인이 맞닥뜨린 심각한 문제가 하우스푸어, 렌트푸어로 인한 가계 부채라는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니 그것도 매우 중요한 항목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그보다 100년 전에 있었던 1910년의 8.29가 이토록 철저하게 잊히고 있는 것은 분명 문제다.

8.29만이 아니다. 2주일 전인 8.15도 "바닷물도 춤을 춘다"던 흥분과 감동을 잊은 지 오래다. 충격과 분노, 회오와 다짐 속에 태극기 물결로 뒤덮이는 게 당연할 터인 8월이 그저 무덥고 짜증나고 집 걱정해야 하는 8월로 바뀌고 있다. '뜨거운 8월'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심심할 때마다 한 방씩 터뜨려주는 일본 우익 정치인들이다.

 

▲ 야스쿠니 신사. ⓒ강응천


역사의식 없는 일본 우익? 천만의 말씀

그들이 "위안부가 일본군에게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라든가 "나치에게 개헌 수법을 배우자"(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라면서 한국인을 도발하고 위협할 때마다 한국인은 불같이 일어나 8월의 그날들을 상기한다. 그리고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것인가, 일본 각료 가운데 몇 명이나 야스쿠니로 갈 것인가 등등에 촉각을 곤두세우다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못해 사죄드린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약 올리기에 한 번 발끈하는 것을 정점으로 한국인의 8월은 여느 연례행사가 그렇듯 서서히 사그라진다.

한국인에게 8.29와 8.15가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이라는 자각을 안겨 주는 '고마운' 일본 우익! 그들에 대해 한국 언론이 가하는 연례행사급 비판이 있다. "역사의식이 없다"라든가 "역사를 잊고 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정말 일본 우익은 역사의식이 없을까? 역사를 잊고 있을까? 천만의 말씀! 오히려 현대 세계에서 일본 우익처럼 철저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정치·사회 집단도 찾기 힘들다. 그들은 먼 옛날 임신한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한반도를 정벌했다는 전설의 여전사 진구황후에게 자신들의 역사적 생명을 가탁해 두고 있다. 8.29 직후 초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해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이던)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가 살아 있다면 오늘밤 이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라고 읊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그들의 역사적 멘토이다.

몇 년 전 8월 도쿄를 방문했다가 야스쿠니 신사에 들렀다. 숙소가 우연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 사건이 일어났던 그랜드팔레스호텔이었는데, 야스쿠니는 바로 그 근처에 있었다. 신사 앞에는 확성기를 달고 '북조선 분쇄', '북방 도서 탈환' 등의 구호를 적은 시위 차량이 도열해 있고, 신사의 지킴이를 자처한 것처럼 보이는 청년들이 시시때때로 모여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8월의 일본은 자숙하는 분위기일 거라는 지레짐작은 서점가를 방문했을 때 이미 깨져 있었다. 일본인에게 8월은 "반성하자, 8월"이 아니라 "아깝다, 8월!"이었다. 이길 수도 있었던 전쟁에 대한 회한을 가득 담고 복수를 다짐하는 듯한 책들이 서점의 판매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그런 분위기의 정점을 이루는 곳이었다.

그때 신사 내부와 '유슈칸'이라는 전쟁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문득 이런 상상을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는 이곳에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들의 위패가 합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만약 베를린 한복판에 히틀러와 괴링, 아이히만 등 나치스의 핵심 인사들을 추모하는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면 영국, 프랑스 등이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그 교회가 민간 시설이든 아니든, 독일 총리가 그곳을 참배하든 말든, 당장 철폐하라는 강력한 경고를 던지고 여차하면 선전포고까지 불사하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일본이 독일에 비해 뻔뻔하다는 생각보다는 한국과 중국이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참 관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곳, 야스쿠니 신사를 거점으로 일본 우익은 역사의식을 불태우며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들이 믿는 역사적 소명을 완수하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 역사를 잊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일본 우익에게 역사를 잊었다고 비난할 때 그 '역사'는 사실은 '도덕'이다. 나쁜 짓을 하면 벌 받는다는 기초 도덕이다. 그러나 역사는 나쁜 놈이든 좋은 분이든 길만 있으면 끝까지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도덕적인 훈계로 그런 경향을 막을 수는 없다. 내 길이 옳다면 역사 속에서 힘으로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인은 그것을 입증하기도 전에 역사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다.
 

▲ 야스쿠니 신사 지킴이를 자처하는 듯한 사람들. ⓒ강응천
▲ 야스쿠니 신사 앞, 일본 우익의 시위 차량. ⓒ강응천


역사 잊은 한국인…항일 투쟁은 사회 개조 투쟁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원인에 대한 구구한 설명을 차치하고 보면 1995년의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가 그 거대한 기억 상실의 기폭제이자 상징적 사건이었다. 치욕과 분노의 기억을 말끔히 날려 버린 그 폭거를 전후해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기괴한 이론이 백주에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이론을 주창한 뉴라이트에 따르면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일제의 식민 침략을 미화했다는 비판에 대해 그들은 변명한다.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수탈을 하려다 보니 한국 사회를 근대적으로 개조하게 되었다고. 그리하여 일제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한국에 근대적 제도가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것이 한국인의 잠재력을 일깨워 현대 한국의 고도성장을 가져왔다고 한다.

듣고 보니 소름이 끼친다. 뉴라이트가 현대 한국을 이끌어 온 엘리트들의 사고방식을 대변한다면, 현대 한국의 자본주의가 왜 이렇게 외설적이고 엽기적이고 자기 파괴적이 되었는지에 관한 답이 그들의 고백 속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뉴라이트를 포함한 보수 세력이 문제가 아니다. 진보를 자임하거나 진보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에도 8.15, 8.29 하면 싫증부터 내는 이가 적지 않다. 2000년을 전후해 '제국주의 대 민족'이라는 '이분법적' 대결 구도로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전통적 시각에 피로감을 나타내는 '진보학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식민지 시절에도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있었고 싫든 좋든 우리 근대의 단초들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데 주목하고, 열심히 모던보이, 모던걸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근대적 양상에 확대경을 들이댔다. 그 결과, 일본 우익의 대변지로 꼽히는 <산케이신문>으로부터 일본 통치 시대를 수탈, 억압, 저항뿐인 '암흑사관'으로 보지 않고 근대화에 의한 다양한 변화를 발굴해 재평가하려 한다는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8.29에서 8.15에 이르는 선조들의 험난한 역정을 '민족주의'의 좁은 틀에 가두고 보려는 외골수 시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얘기만 꺼내도 민족주의자나 주사파로 몰아가며 외면하는 '진보 세력' 일각의 풍조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일제와 맞서 싸운 선조들이 다 진보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의 진보 세력은 모두 다 일제와 싸웠다. 그들이 단지 이민족의 지배에 맞서 한민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만 그랬겠는가? 그들에게 일제는 조선 봉건 왕조와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적이었다. 항일 투쟁이 곧 사회 개조를 위한 투쟁이었다는 말이다. 현대 한국의 일부 진보 세력은 그 역사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가끔 그들이 어디에 역사적 기반을 두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 온 진보인가? 스웨덴에서 왔는가, 프랑스에서 왔는가, 일본에서 왔는가?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대동단결선언을 보라

우울한 8.29를 앞두고 경기도 의회가 '국기게양일 지정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국치일인 이날 조기를 게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반가운 일이다.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경기도민인 나는 조기를 게양하지 않기로 했다. 1917년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조소앙 등 14명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발기했다는 '대동단결선언'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융희 황제가 삼보(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8월 29일은 바로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저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한 때이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다."

이런 의미에서 8.29는 암울한 국치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인이 자기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대장정을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8.15부터 8.29까지의 2주간이 현대 한국인의 해방 주간이 되어 흥분과 다짐 속에 역사를 기억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강응천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