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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독립국인가’ 40여년 전 미국 반도체 횡포, 한국 타격하나

1980년대 미·일 반도체 협정이 현재 미국 반도체법 직면한 한국에 전하는 시사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1년 4월 12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개최한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보이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AP
미국 반도체법은 사실상 한국 기업에 재무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과거 미국이 일본을 몰락시킨 조치와 유사한 점이 있다. 미국의 반도체 횡포가 40여년이 지나 재현되고 있다. 당시 일본과 현재 한국은 처한 상황이 다소 다르다고는 하나, 일본의 ‘잃어버린 시간’은 한국에 시사점을 준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법 보조금 신청 조건에는 신청 기업이 미국 정부에 재무 정보를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해당 조건은 과거 미국이 일본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기 위해 활용한 방법을 상기시킨다. 미국은 1986년 맺은 미·일 반도체 협정을 통해 수년간 일본 기업으로부터 재무 정보를 제출받은 바 있다. 일본 기업이 반도체를 원가 이하로 판매하는 덤핑으로 시장 점유율을 넓혀, 이를 막아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미국 상무부는 일본 기업 제조 원가를 조사해, 수출 가격을 규제했다. 일본 기업 제조 원가를 기초로, 이른바 공정시장가격(FMV, Fair Market Value)을 산정하고, 해당 가격 밑으로는 팔지 못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일본 전기주식회사(NEC)에서 반도체 사업 본부장을 지낸 기쿠치 마사노리는 최근 현지 언론 기고문에서 ‘매일 D램 생산 소요 시간을 정리해 미·일 양국 정부에 보고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다양한 제품이 동일한 라인에서 제조돼, 제품별로 장치·재료·인건비 등에 따른 부과율을 산출해야 했다.

일본 기업은 가격 결정권을 상실하게 됐다. FMV 적용으로 수익성을 일부 개선하는 효과가 있었으나, 타격이 더 컸다.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FMV를 적용받지 않는 삼성전자와 마이크론 등 한·미 기업이 싼 가격으로 점유율을 확보해 갔다. 신규 설비 투자 초기에는 원가 상승분을 FMV에 반영해 추가로 판매 가격을 올려야 했다. 일본 기업이 판매에 난항을 겪는 동안 한국과 미국 기업은 성장 기반을 마련했다.

마키모토 쓰기오 전 히타치그룹 최고경영자(CEO)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자사 제품 가격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지만, 당시는 그런 상황이 버젓이 통용됐다”고 언급했다.

현재 한국도 미국 조치에 따라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법상 생산시설 투자 보조금 신청을 위한 세부 지침 공개하면서, 엑셀 파일 예시를 첨부했다. 보조금 신청 기업은 예상 현금흐름 등 수익성 지표의 산출 근거를 검증할 수 있는 엑셀 파일을 제출해야 한다.

상무부 예시를 보면, 생산시설의 제품 단위당 가격을 연도별로 기재해야 한다. 원가 정보도 적어야 한다. 자본 비용에는 부지, 건설, 장비, 공사 관리비, 인프라 개선 등 항목이 있다. 세부적인 운영 비용 정보도 요구한다. 소재·소모품·화학재료를 비롯해 인건비, 판매관리비, 연구개발비로 항목을 세분화했다. 미국은 수율 정보도 요구한다. 상무부의 ‘사전 지원서 예시 재무 모델 백서’는 “월간 웨이퍼 생산량을 추정하는 방법에 대한 요약 설명을 제공해야 하며, 생산 수율에 대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수율은 반도체 경쟁력을 나타내는 핵심 지표로, 원가 정보 수준의 기밀로 관리된다.

삼성전자가 미국에 짓고 있는 건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이다. 소품종 대량 생산으로 현물시장에서도 거래되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파운드리는 개별 기업 간 수주 형태로 거래된다. 파운드리 공장의 제품 가격은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사 정보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파운드리 제품 가격이 공개될 경우 메모리 반도체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가격이 다른 기업에 공개된다고 가정할 때 일차적으로 피해를 보는 건 제품을 만드는 회사보다 주문하는 회사가 될 것”이라며 “고객사가 어떤 제품을 얼마에 주문했는지 공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객사들은 기밀 정보 유출 우려가 있는 파운드리 기업에 주문을 안 할 것이고, 수주받지 못한 파운드리 기업은 생산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파운드리 기업에게는 고객 정보 보호가 생명”이라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는 미국에 후공정(패키징) 공장 건설을 검토 중인데, 패키징도 수주 형태로 계약이 이뤄진다.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법 세부 지침에서 제시한 ‘예상 수익’ 자료 예시. ⓒ미국 상무부

‘마이크론 대체 금지’ 요구, 예삿일이 아니다

일본 기업에 대한 미국의 가격 통제는 1986년 체결된 미·일 반도체 협정에 담긴 조건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일본 반도체 시장을 외국 반도체 기업에 넓게 개방한다’는 조항이었다. 처음에는 ‘넓게 개방’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이었지만, 1991년 2차 협정에서 ‘향후 5년 내 일본 시장의 외국 반도체 기업 점유율을 2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문구로 구체화됐다. 당시 외국 기업 점유율은 10% 수준이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자국 산업 점유율을 낮추고 외국 기업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외국 기업을 홍보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일본 정부는 전산 처리를 위한 기업용 대형 컴퓨터를 이르는 메인프레임을 위시한 TV, CD플레이어, 비디오테이프레코더(VTR) 등을 만드는 전자기기 기업에 외국산 반도체 채용 비율을 높일 수 있도록 하라고 통보했다.

일본 반도체 기업은 점유율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발생할 미국과 마찰을 우려해 생산 확대를 주저했다. 반도체를 많이 팔 수 없으니 FMV 적용에 따른 D램 가격 상승효과를 누리는 데도 제한이 있었다.

마키모토 전 CEO는 인터뷰에서, 하타치 재직 당시 D램 영업 담당자에게 기술 제휴처인 한국 기업 제품을 고객사에 추천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했다. 그와 직원들은 ‘저희의 D램이 아니고, 한국 메이커 제품을 사 주셨으면 한다. 우리의 D램과 제조 기술은 호환되고, 물건은 같다’며 고객사를 돌려보내야 했다.

일본 기업환경연구센터는 ‘1990년대의 반도체 산업’ 보고서에서 “외국계(미국계) 반도체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일본 전자기기 기업은 외국계 기업의 반도체 구입을 강요당했고, 일본 반도체 기업은 스스로의 매출을 억제하게 됐다”며 “미·일 반도체 협정은 일본 기업의 투자·생산·수출 행동에 억제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최근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비슷한 조치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이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중국 판매를 금지할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부족분을 메우지 말 것을 미국이 한국에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보도대로 한국 기업의 중국 내 판매가 제한된다면, 마치 40여년 전 일본 기업이 그랬듯,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고객사에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나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제품을 권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단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는 현실화됐다. 최근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산하 인터넷 안보 심사판공실(CAC)은 마이크론 제품에 대한 검토 결과, 인터넷 안보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통신, 운송, 금융 분야를 포함한 핵심 정보 인프라 기업은 마이크론 제품 구매가 금지된다.

미국의 마이크론 대체 금지 관련 보도가 나온 건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직전이었다. 당시 FT는 “백악관 요청은 윤 대통령이 워싱턴에 도착하는 민감한 시기에 나왔다”며 “미국이 동맹국에 자국 기업의 역할을 요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짚었다. 미국이 한국을 힘으로 누르는 형국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국의 외압”, “과한 요구”라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해당 사안에 대해 정부 개입 불가 입장을 단호히 밝혀야 한다고 촉구하는 목소리가 컸지만, 구체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는 여전히 한 발 떨어져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지난 22일 기자간담회에서 마이크론 제재에 따른 정부 대응에 대해 “정부가 (기업에)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고 기업이 판단할 문제”라며 “기본적으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글로벌 사업을 하니 양쪽을 감안해서 잘 판단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당 발언을 두고 FT는 정부가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로 인한 시장 공백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울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해명에 나섰다. 산업부는 설명자료를 내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와 관련한 대응 계획에 대해 밝힌 바가 없다”며 “장 1차관 발언은 우리 기업들이 마이크론 제재와 관련된 제반 상황을 주시하면서 대응 방향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는 원론적인 취지였다”고 했다. 정부 차원에서 미국의 압박으로부터 기업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마키모토 CEO는 미·일 반도체 협정 이후 산업 현장 상황을 돌이켜보며 “일본을 독립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분노로 가득했다”고 언급했다. 현재 정부가 사안의 심각성 받아들이는 태도는 괴리가 있다.

 

 

 

지난해 2월 11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매너서스에 메모리 반도체 대기업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고 있다. 2023.04.01. ⓒ뉴시스

속절 없이 당한 일본, ‘제조 경쟁력’ 무기 쥔 한국

일본이 처음부터 미국의 과도한 요구에 순응한 건 아니다. 미국의 일본 압박이 시작된 건 미·일 반도체 협정 체결 1년 전인 1985년이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가 일본 반도체 기업을 통상법(슈퍼) 제301조 위배 혐의로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제소했다. 일본 전자 산업의 수입 장벽 탓에 미국 기업의 일본 시장 내 점유율 확대가 제한되고, 제3국 시장에서도 일본 기업의 덤핑으로 미국 기업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슈퍼 301조는 교역상대국의 불공정 무역 행위로 미국 기업이 피해를 볼 경우, 보복 조치를 발동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다. SIA의 제소 직후 미국 상무부는 일본 반도체 기업에 대한 덤핑 혐의 직권조사를 통해 보복 관세 가능성을 시사했고, 미국의 압박은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이어졌다.

1차 미·일 반도체 협정에서 일본 시장 개방 조항이 들어갔을 때, 일본 정부와 기업은 적극적으로 조처를 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목표 수치도 없었고, 미국의 보복 관세도 실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미국이 보복 관세를 강행하자 일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7년 미국은 일본 시장 내 미국 기업 반도체 점유율이 확대되지 않고 일본의 제3국 덤핑이 지속되고 있다는 이유로, 일본 PC와 컬러 TV 등 첨단 전자 제품에 100% 관세를 부과했다. 일본에 미국 시장 퇴출은 국가적인 문제였다. 반도체 내수 시장 보호를 고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91년 2차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된다. 미국은 일본 제품에 대한 보복 관세를 철회하기로 했다. 대신, 일본 시장 개방 조항과 관련해 외국 반도체 점유율을 ‘향후 5년 내’, ‘20% 이상’으로 하는 구체적인 목표 수치가 설정됐다.

현재 한국도 미국의 압력을 무시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미국 반도체법상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으면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미국 반도체법은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담겼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으면, 미·중 기술 패권 경쟁에서 미국에 등을 돌리는 의사로 여겨질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미국 보복 우려에 노출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미국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 참여 여부다. 미국이 설립을 추진 중인 NSTC는 글로벌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 허브 역할을 할 전망이다. 미국 전역의 연구 중심 대학과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연합해, 차세대 반도체 소재·공정·장비·부품 등을 테스트하고, 공동 R&D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국제 표준과 기술 로드맵을 설정하는 데 있어 독점적인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NSTC에서 빠진 기업은 자체 표준으로 제품을 만들다가 글로벌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다만, 한국은 무기가 있다. 메모리 반도체 생산 분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은 총 75% 수준에 달한다. 또한,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점유율은 15% 수준이다. 1위 TSMC(약 60%)와 격차가 있으나, 선단 공정 기술력은 비등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반도체 기업이 데이터센터, PC, 스마트폰 등 IT 제품 생산의 길목을 쥐고 있는 셈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지렛대로 활용해 미국의 무리한 조치를 완화하는 게 현재 정부의 외교 통상 분야 최대 과제다.

 

 

 

중국 시안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내부 모습(자료사진) ⓒ제공 : 뉴시스

반도체 협정·플라자 합의로 몰락한 일본

미국의 일본 제재 근저에는 세계 패권국 지위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깔려있었다.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자 미국 무역적자가 심화했다. 강달러는 미국의 수출 경쟁력 저하로 이어졌다. 1985년 미국은 세계 최대 채무국으로 전락하고 이듬해 반도체로 대표되는 첨단기술 무역에서도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미국은 같은 해 인위적인 미 달러 절하를 강행하기에 이른다. 플라자 합의다. 미국·프랑스·독일·일본·영국(G5) 재무장관은 미 달러를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에 대해 절하시키기로 한다. 플라자 합의 이후 2년간 엔화와 마르크화는 달러화에 대해 각각 65.7%와 57% 절상됐고, 일본과 독일의 수출 경쟁력은 급격히 악화했다.

특히 일본의 반도체 추격은 미국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반도체는 섬유, 철강, 자동차 등 전통 산업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미국은 전통 산업에서 일본이 추격해 올 때 기술집약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 집중하는 식으로 대응이 가능했으나, 반도체 추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반도체 경쟁력은 미래 산업 경쟁력을 나타내는 척도였으며, 군사 장비의 기반으로 국가안보와도 직결됐다. 1980년대 일본의 D램 시장 점유율은 80%에 달했다. 선단 기술에서도 미국을 앞질렀다. 반도체 수요 침체와 치킨 게임이 벌어지는 가운데 미국 기업은 대량 해고와 가동 시간 단축에 돌입했다. 인텔은 D램 사업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미국 민관이 합동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을 조여들어 간 이유다.

미국의 일본 제재가 일단락된 건 미·일 반도체 협정 이후 10년이 지난 1996년이다. 당시 3차 반도체 협정 논의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 시장 개방 목표치가 달성됐으며 덤핑도 일어나지 않아, 정부 개입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협정 폐지에 따른 외국 기업 점유율 저하와 덤핑 재발이 우려된다며 지속적으로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맞섰다. 협의체와 관련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일본은 미·일뿐 아니라 한국과 유럽, 대만을 포함한 세계반도체협의회(WSC) 설립을 제안한 반면, 미국은 양국 협의체를 주장했다. 미국이 한발 물러섰다. 일본 제안대로 WSC를 설립해 덤핑 방지를 관리하고, 개별 기업 참여는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합의했다.

미·일 반도체 협정과 플라자 합의로 점철된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 반도체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일본의 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은 1988년 50.3%(미국 36.8%)로 정점 찍었으나, 1990년대 들어 쇠퇴했다. 2019년에 이르러서는 점유율이 10%로 주저앉았다. 일본의 세계 10대 반도체 제조 기업은 1992년 6개에서 2019년 1개(키옥시아)로 줄었다. 엘피다 파산(2012), 도시바 낸드 사업부 매각(2017), 파나소닉 반도체 사업 철수(2019) 등 주요 기업이 잇달아 쓰러졌다. 일본은 기술력에서도 퇴보했다. 일본 내 반도체 공장은 2019년 기준 84개로 세계 1위지만, 대부분 선폭 40나노 이상으로 진부화·노후화된 상태에 머물렀다.

 

 

 

일본 반도체 기업 성쇄 ⓒ메리츠종금증권 리서치센터

다자체제로 빠져나간 일본, 한미·일 협력에 골몰하는 한국

현재 한국은 처지가 좀 다르다. 1980년대 일본은 미국의 직접적인 목표물이었던 반면, 현재 미국의 반도체 관련 조치는 중국 견제용이다. 중국의 첨단 반도체 기술 개발을 지연시키는 것이 미국 반도체법을 위시한 일련의 중국 제재의 1차 목적이다. 반도체는 첨단 기술 핵심의 지위에 있으며, 미·중 패권 경쟁의 최전선이다. 한국을 직접 겨냥한 것이라기보다 한국이 유탄을 맞게 되는 상황으로 보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문제는 미국 의도와 무관하게 한국 기업이 미국 반도체법으로 가장 큰 부담을 지게 된다는 점이다. 미국 반도체법 조건에서 동맹국에 대한 고려는 보이지 않는다.

업계가 꼽는 독소조항은 재무 정보 제출을 포함해 총 4개다.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미국 국방부 등 국가안보기관에게 생산 시설에 대한 접근권을 제공해야 한다. 재무 정보 제출과 더불어 기술 유출이 우려되는 조항이다. 공장 내 설비 배치는 생산 효율성과 수율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다. 미국과 초과이익 공유해야 한다. 초과이익을 낼 경우 보조금의 최대 75%를 미국 정부가 환수한다. 목표 이익에 미달할 경우 미국이 보전한다는 내용은 없다. 중국 내 생산시설 투자도 제한된다. 증설을 통한 웨이퍼 투입량 증가 폭이 향후 10년간 첨단 반도체는 5%, 범용 반도체는 10%까지만 허용된다. 생산량을 제때 늘리지 못하면 공장 수익성이 떨어진다. 삼성전자는 중국에서 자사의 낸드플래시 약 40%, SK하이닉스는 D램 약 절반을 생산하고 있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미국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맹국에 현실적 손해와 잠재적 위험을 감내하라고 강요하는 식이다.

미국의 견제 대상에 한국은 없는지, 미국 반도체법은 중국만을 노린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도 견제 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내놓은 ‘반도체법 규정·시행 관련 자주 하는 질문’ 보고서를 보면, 법안 배경으로 한국의 반도체 제조 능력을 언급했다. 보고서는 “반도체 생산에 있어 미국이 동아시아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공급망) 혼란에 취약하다는 점에 대해 많은 의원이 우려해 왔다”며 “이러한 우려는 일정 부분 미국 산업이 첨단 반도체 제조 능력에서 대만과 한국에 뒤처지고 있다는 것과 관련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 대한 미국 견제가 거세질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하이투자증권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를 가한 2019년 ‘80년 미·일 반도체 갈등 사례의 시사점’ 보고서에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육성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 간다면, 일본은 물론 미국마저도 한국 반도체 산업을 견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어 “현 상황이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을 둘러싼 한·미·중·일 간 경쟁이라면, 미·중 무역 갈등이 봉합돼도 향후 반도체 산업을 두고 미국과 일본의 규제가 장기화될 수 있다”며 “앞서 1980년대 시작된 미·일 반도체 갈등이 1990년대까지 지속된 사례에서 보듯, 향후 반도체 산업 주도권 경쟁은 단기간에 그칠 상황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확대 해석은 피해야 하지만, 미국 횡포에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일 반도체 갈등은 한국에 시사점을 전한다. 10여 년간의 반도체 갈등을 매듭지은 3차 협정에서 일본은 다자체제 기반의 WSC 설립으로 미국과의 양자 외교에서 벗어났다. 당시 미국과 협상에 참여한 마키모토 CEO는 언론 인터뷰에서 “양극 관계로부터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는 게 일본 측 생각이었다”며 ‘다극적 논의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공격받는 사태를 해소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현재 한국도 강대국 미국을 양자 체제 내에서 맞서기보다는 다자체제에서 입장을 전하는 것이 유리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한국이 미·일 동맹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는 한미·일 협력에 골몰하면서 미국에 대한 한국의 대항력을 스스로 약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다자무역체제를 대표하는 기구다. 미국이 중국 견제에 한국 기업을 동원하려는 여러 조치는 WTO 제소 사안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 특히 중국 내 마이크론 공백을 한국 기업이 메우지 말라는 내용은 문제 소지가 크다. 정부가 반도체 제조 경쟁력과 함께 WTO 제소 카드 등을 활용해 미국을 상대로 한 협상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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