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트라피스트 맥주를 생산하는 수도원은 9개 남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재작년 라 트라페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앞으로 트라피스트 맥주를 마시기 쉽지 않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양조장 관계자는 수도사가 되려고 하는 유럽인들이 없다고 털어놨다. 하긴, 아무리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어도 외부와 단절된 트라피스트의 삶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겠지.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봉쇄 수도원이다. 수도사는 베네딕트 성인의 규율, '일하고 기도하라'에 따라 자급자족을 수행한다. 수도원에서 생산하는 치즈, 와인, 맥주는 수행하는 이들을 위한 작은 노동의 대가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이유로 트라피스트 맥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 됐다. 수도원이라는 거룩하고 신비스러운 배경이 맥주를 프리미엄 상품으로 등극시켰다. 트라피스트 제품을 인증하기 위해 창설된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International Trappist Association)도 맥주가 아니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1960년 상업 맥주 양조장 밸텀이 트라피스트 이름으로 맥주를 출시하자 진정성 문제가 불거졌다. 벨기에 트라피스트 오르발 수도원이 즉각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생산된 맥주에만 '트라피스트 맥주'라는 이름을 허가했다. 단, 수도원 맥주 레시피로 상업 양조장에서 만드는 맥주는 '애비 비어'(Abbey beer)로 구분해 분쟁의 여지를 없앴다.
상표권 보호를 절감한 트라피스트 수도원들은 1997년 협회를 조직한 후, 세 가지 규정을 충족한 제품에만 육각형 ATP(Authentic Trappist Product) 라벨을 붙이도록 했다. 규칙은 다음과 같다. 모든 제품은 수도원 내에서 생산될 것, 모든 제품은 수도사의 관리 감독을 받을 것, 수익은 수도원 운영과 지역 공동체 발전에 사용할 것.
ITA는 수도원이 이 규정을 따르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관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라벨을 박탈했다. ATP 라벨은 트라피스트의 진정성을 나타내는 표식이 됐다. 사람들은 육각형 라벨을 통해 트라피스트 정신을 공감하고 소비했다. 현재 ATP 제품은 치즈, 와인, 맥주, 초콜릿, 벌꿀, 쿠키, 초, 비누를 포함 총 14종이 있다.
위기의 트라피스트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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