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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날 군용차 막은 여성의 이야기...WP보도에 안 나온 것

"'광장에 선 여자'가 디폴트값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질문은 '왜 여자는 광장에 서는가'를 넘어서 '왜 여자는 정치적인가'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책 <다시 만날 세계에서> 중) 책임지지 못할 저런 말을 써놓고, 자주 저 뜻을 머릿속으로 굴려 봤다. 세상이 광장에 나온 2030 여자들에 놀라고 기특해할 때, 나는 '우리는 우리가 놀랍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세상이 몰랐던(혹은 자주 잊었던), 이 '정치적인' 여자들의 기원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 광장을 바꾼 여자들을 만나 들은 말들을 싣는다.[기자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서강대교남단에서 지난해 12월 4일 국회 방향으로 가는 군용차를 막았던 김다인씨가 당시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 이슬기

<워싱턴포스트(WP)>가 찍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소셜미디어에 "이분 꼭 찾아주십시오"라며 올린 영상. 지난해 12월 4일 새벽 2시쯤, 서울 서강대교 남단에서 국회 방향으로 가는 군용차를 시민들이 막아섰다. 차를 막아선 최초의 시민인 검은색 패딩의 김동현(35) 씨가 차와 일대일로 대치하자, 어디선가 카키색 패딩 차림의 여성이 바람같이 달려와 이에 동참했다. 곧 2명의 시민이 더 합세해 함께 차를 밀었다. 그날 여의도행을 '움찔움찔'하며 고민하다 결국 집에 꼬박 있었던 나는, 계엄 시국에 국회로 뛰쳐나가 군용차 앞을 막아서는 마음을 곰곰 생각해 봤다. 어떤 마음이면 그럴 수 있을까.

지난 19일, 영상 속 '카키색 패딩' 김다인(25)씨를 만났다. 그가 군용차를 온몸으로 막던 바로 그 서강대교 남단의 카페에서. 다인씨는 계엄의 날 이후 처음 언론 앞에 섰다. 그는 사이버대에서 상담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자 카페 알바를 하는 2000년생 바리스타다.

"저한테 '무섭진 않으셨어요', '두렵진 않으셨어요' 이렇게들 물어보셨는데 사실 그때 너무 화가 나 있어서 그 (차에 탄) 군인을 그냥 빤히 볼 수밖에 없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 마음밖에 없었어요."

계엄의 밤… "모든 군용차를 못 가게 막고 싶었다"

지난해 12월 4일 국회 방향으로 가는 군용차를 막아선 김다인씨(왼쪽 두 번째 카키색 패딩) ⓒ 워싱턴포스트 동영상 캡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서강대교남단에서 지난해 12월 4일 국회 방향으로 가는 군용차를 막았던 김다인씨가 당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 이슬기

계엄의 밤, 다인씨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집에서 LMG어학원의 프랑스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밤 10시 반, 친척들이 있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이모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올라왔다. '계엄이래.'

"처음엔 '설마, 잘못 봤겠지' 싶었어요. 그러다가 뉴스도 찾아보고 막 뒤져보니까 난리도 아닌 거예요. 그때부터 수업이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어요.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눈이랑 귀가 작동하질 않고 일종의 붕괴 상태였던 거 같아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인씨는 방을 뛰쳐나갔다.

"너무 감정이 북받치는 거예요. 엄마한테 '나 (대학) 편입하려고 그랬는데, 나 이제 공부 좀 해보려고 그랬는데 학교 문 다 닫게 생겨서 어떡하냐'고… '내가 윤석열 뽑힐 때부터 알아봤다!' 이러면서 그때 감정이 되게 격양돼 있었어요."

우는 다인씨를 엄마가 진정시켰다. 회식에 갔던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자정쯤 세 가족이 함께 국회에 갈 채비를 했다. 운전대는 한 달 전 면허를 딴 다인씨가 쥐었다. 첫 장거리 운전이었다.

"아빠가 술을 마셔서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나 이제 동네는 좀 다닐 수 있어' 하는 정도였는데 갑자기 엄마가 '너 차 빨리 몰아. 지금은 차 별로 없을 거야'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길을 잘 모르는데 서울을 관통해서 차를 몰고 온 거죠. 그래서 저는 계엄인 상황에서도 너무 뿌듯하다… (웃음)"

어딘가로 진군하는 검은 군인들과 맞닥뜨리기를 여러 번, 곡절 끝 국회 정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1시를 넘어섰다. 누가 봐도 급히 튀어나온 흔적이 역력한, 때로는 담요 바람인 사람들 사이로 세 가족도 국회 앞을 지켰다. 그날은 '한국인의 피가 끓는' 다인씨가, 생전 처음 겪는 '눈이 도는' 경험이었다.

아무래도 경찰들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밀자!"고 말하는 다인씨를 엄마가 "조용히 해"하며 다독였다. 현대카드 건물 앞에서 군용차량들이 슬슬 철수를 준비하자 "어딜 가!"를 외치며 차를 에워싸는 성난 시민들 사이, 다인씨도 있었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들과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데 어디선가 아빠가 나타났다.

"아빠가 제 뒷목을 잡고 저를 무 뽑듯이 뽑아서 끌고 갔어요. '다인아, 운전해서 집에 갈 거니까 정신을 잘 차려야지' 하면서."

국회의원들이 표결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친 다인씨네 가족들이 국회 담벼락을 따라 차를 세워둔 여의도순복음교회 쪽으로 걸어가던 때였다. 여의도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군용차가 돌연 서강대교남단에서 우회해 다시 국회 방향으로 들어왔다. 이를 김동현씨가 맨몸으로 막아섰고, 가장 가까운 데 있던 사람이 다인씨였다.

"동현님이 너무 '혼자' 있었고, 제가 가장 가까운 데 있기도 했지만, 그냥 모든 차를 못 가게 막고 싶은 감정이 제일 컸어요. 여기서 지금 빨리 진상을 조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커서…"

차는 '부릉'하는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하겠다는 모종의 위협도 했지만, 꽉 붙들기 위해 차 범퍼의 구조물을 팔로 감싸 안았다. WP가 촬영한 영상에는 군인들을 향한 욕설로 추정되는 여러 고성이 '삐' 처리된 가운데, "김다인, 나와. 빨리 가자" 하는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렸을 때, 동네 놀이터에서 천방지축으로 놀 때 엄마가 '밥 먹자'며 부르는 소리와 흡사 톤은 비슷한데, 훨씬 결기에 찬 목소리다.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야, 공포가 들이닥쳤다.

"며칠 지나고 (계엄군이) 사람들 죽이려고 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어제도 (시신 수송) 가방을 수천 개 주문했다 이런 기사를 보니까 '뭐지, 내가 좀 겁이 없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그렇게까지 무섭거나 앞날이 걱정되기보다는 그냥 '죽기보다 더하겠나' 하는 심정이었어요."

계엄의 무게를 아는데, 어떻게 안 가요

서울 출생의 다인씨는 10살 때부터 12년가량을 강원도의 한 대안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다인씨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면 평범한데… 공교육을 받은 2030 여성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라 어딘가 소속되지 않고 떠도는 사람. 그랬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랑 친해질 수 있었던 사람"이라 소개한다. 최근까지 대학 편입 시험을 준비했지만, '네모판' 안에 '나'를 끼워 맞추는 삶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어제' 캐나다행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다.

계엄을 겪지 않은 2000년생 다인씨가 '계엄'이라는 말에 그만큼 즉각적으로 반응한 데는 대안학교에서 배운 진보적 가치의 덕도 컸다. 그러나 거기에 앞서 가족들의 영향이 컸다. "할머니‧할아버지,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아빠가 민주화운동을 하셨어요.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얘기를 많이 듣기도 했지만, 저는 엄마를 가장 가까이 봤으니까…" 라고 했다.

다인씨가 호명한 '할아버지'는 이해학(80) 성남주민교회 원로 목사다. 이 목사는 경기 성남에서 민주화 투쟁과 빈민 운동을 이끌며 7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주민교회를 개척했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유신 정권에 의해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될 당시 반대 투쟁의 주역으로 징역 15년에 처해졌다가, 39년 만의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인씨는 할아버지의 감옥살이로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이번에 그 차를 막은 걸 보고 할아버지가 '내 손녀 맞다. 너는 외가의 딸이 맞다' 이러시고, 할머니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2001년 이해학 성남주민교회 원로목사(가운데)는 서울시의 박정희 기념관 부지 제공을 규탄하는 시위에 나섰다. 앞의 유모차가 당시 1살이던 다인씨. ⓒ 김다인

2003년 광주 5.18 국립묘지에 있는 고 김종태 열사의 묘역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여한 3살 김다인씨. (왼쪽) ⓒ 김다인

아마도 다인씨의 인생 첫 집회였을 경험도, 할아버지와 함께였다. 2001년 이 목사가 서울시의 박정희 기념관 부지 제공에 반발해 집회를 이어갈 때, 피켓을 든 할아버지 앞 유모차에 앉은 아기가 다인씨였다. 어려서부터 5‧18 광주 묘역도 자주 찾았다. 주민교회 신도로 1980년 6월 9일 서울 이화여대 앞에서 5‧18의 진실을 알리며 분신한 고 김종태 열사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저는 세 살 때라 잘 모르는데 분위기가 굉장히 엄숙하고… 사람들이 막 웃다가 어떤 이야기를 기점으로 모든 사람이 울기 시작하는 그게 되게 힘들고 무서웠던 기억이 있어요."

묘역 앞에서 오열하는 열사의 어머니 뒤로, 영문 모르고 선 어린 다인의 옷 위에 그려진 성조기에는 엄마가 매직으로 적은 'NO WAR'가 선명하다.

가장 급한 불은 '페미니즘'

다인씨는 청소년 시절부터 미국산 소고기 반대 집회, 용산 참사 추모, 4대강 반대 집회, 세월호 진상 규명 집회와 학생 인권에 관한 집회 등에 나가는 '정치적인' 학생이었다. 선거 유세에 참여해 '빨갱이지?' 하는 소리를 면전에서 들은 기억도 있다. 그런 다인씨에게, 현시점 가장 급한 불은 '페미니즘'이다.

강남역 살인사건(2016년)과 혜화역 시위(2018년) 당시는 직접 관련 집회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뉴스와 책으로 접하며, 친구들과 자주 대화했다.

"그런 의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같은 성별(여성)이고요. 원래 겁이 많은데, 강남역 살인사건 있고 나서는 '나도 그렇게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라는 마음 때문에도 불안이 더 많아졌어요. 저녁에 다니는 것도 무서워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은, 다인씨에게는 믿을 수 없는 뉴스였다. 별다른 논리 구조도 없이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밀어 올리는 표심, 그 표심이 또래 집단에서 성별에 따라 큰 차이로 드러나는 현실이 당혹스러웠다.

"윤석열이 하는 말이 다 어이가 없었는데, 그 사람이 당선이 된 거예요. 그날 제가 코로나에 걸려 있었거든요. 너무 아픈데… 막 이렇게 옆으로 눈물이 진짜 나더라고요. 그 사람이 당선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20대 남성과 여성 득표율이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20대 대선 당시 출구 조사에서 윤석열 후보의 득표율은 20대 남성 58.7%, 20대 여성 33.8%로 정반대의 성향을 보였다)."

계엄 이후 열린 윤석열 탄핵 찬성 집회에는 10회 이상 참가했다. 다인씨에게 집회란 "너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나고 싶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집회를 빌미로 만났거든요. 같이 가서 놀기도 너무 좋고요. 계엄 이전에는 정치 얘기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감이 있었는데, 이후에는 자유롭게 할 수 있고요."

매주 주말은 집회 참석이 '디폴트'이기 때문에, 모든 일정은 집회에 맞춰 꾸린다.

"클럽에 가고 싶은데 집회에도 가야 하니까… 친구들이랑 광화문 집회 갔다가 이태원 클럽에도 갔어요.(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빠와 함께한 깃발 행진이다.

"제가 아빠에게 집회 투어를 시켜주면서 깃발 행진하고, 막걸리 딱 마시고 집으로 왔어요."

"이번 광장은 제 바운더리였어요"

12.3 내란 사태 당시 군용차를 막아선 여성 김다인씨. ⓒ 이슬기

다인씨에게 2030 여성들이 만들어 가는 광장과, 광장 이후에 대해 물었다.

- 2030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광장에 많았고, 집회 문화도 바꿨잖아요. 이유가 뭘까요.

"문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불편한 걸 많이 얘기하는 사람한테는 '그럼 네가 얘기해 봐' 이렇게 하게 되잖아요. 여성한테 너무 많은 의제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번 일을 계기로 민족의 명절처럼 다 모인 것 같아요. 계속 크고 작은 의제들이 이어져 와서 여성들 마음 속에는 항상 마음의 짐처럼 '나는 저기 못 갔는데', '난 여기까지 못했는데' 하는 것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내란 국면을 계기로 하나로 모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광장 이후의 정치'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세요.

"광장에서 이루어졌던 문화들이 똑같이 정치에서 이루어지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불편감이 있고, 이런 의제들을 해결해 주세요' 했을 때 정치인들도 광장에서는 순순히 따라줬다고 보거든요. 시민들도 그걸 이해하고 수용하는 게 굉장히 빨랐고요. 광장에서 김건희씨에 대해서 여성 혐오적인 발언이 나왔을 때, 페미니스트들이 '그런 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들이 수용이 되잖아요. 그게 문화를 바꾸는 거고 그게 곧 법을 바꾸는 거 아닐까… 그런 식으로 이해를 모두가 조금씩 한다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어렸을 때부터 줄곧 광장에 있었잖아요. 김다인에게 광장이란 무엇인가요.

"옛날에 나갔을 때랑 지금이랑 좀 다르다고 느껴졌는데요. 박근혜 탄핵 시기까지는 광장에 나가는 게 엄마‧아빠의 영향이 컸어요. 나가면 꼭 한 명쯤은 엄마‧아빠의 친구나 지인을 만나서 엄마‧아빠의 '바운더리(구역)'에 속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근데 이번 광장은 제 '바운더리'였어요. 그게 되게 감동적이었어요. 제가 광장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거? 정치적으로 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걸 내가 진짜 이해를 하고 활동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거 같아요."

계엄 날 국회에서는 화가 났고, 이후 집회에서는 줄곧 감동을 받았던 다인씨는 인터뷰 도중 자주 웃다가 울다가 했다. '바운더리'라는 얘길 하면서는 자신도 모를 눈물을 흘렸는데, 나는 정확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 광장의 주역인 다인씨가 부모님을 자신의 '바운더리'로 초대한 것이 2024년과 2025년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여름쯤 캐나다행을 계획 중인 다인씨는 "언어 능력을 더 키워서 많은 말을 하고 싶다"라고 했다. 그가 할 다채로운 말들이, 더욱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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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우리가놀랍지않다#2030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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