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의 밤, 다인씨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집에서 LMG어학원의 프랑스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밤 10시 반, 친척들이 있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이모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올라왔다. '계엄이래.'
"처음엔 '설마, 잘못 봤겠지' 싶었어요. 그러다가 뉴스도 찾아보고 막 뒤져보니까 난리도 아닌 거예요. 그때부터 수업이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어요.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눈이랑 귀가 작동하질 않고 일종의 붕괴 상태였던 거 같아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인씨는 방을 뛰쳐나갔다.
"너무 감정이 북받치는 거예요. 엄마한테 '나 (대학) 편입하려고 그랬는데, 나 이제 공부 좀 해보려고 그랬는데 학교 문 다 닫게 생겨서 어떡하냐'고… '내가 윤석열 뽑힐 때부터 알아봤다!' 이러면서 그때 감정이 되게 격양돼 있었어요."
우는 다인씨를 엄마가 진정시켰다. 회식에 갔던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자정쯤 세 가족이 함께 국회에 갈 채비를 했다. 운전대는 한 달 전 면허를 딴 다인씨가 쥐었다. 첫 장거리 운전이었다.
"아빠가 술을 마셔서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나 이제 동네는 좀 다닐 수 있어' 하는 정도였는데 갑자기 엄마가 '너 차 빨리 몰아. 지금은 차 별로 없을 거야'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길을 잘 모르는데 서울을 관통해서 차를 몰고 온 거죠. 그래서 저는 계엄인 상황에서도 너무 뿌듯하다… (웃음)"
어딘가로 진군하는 검은 군인들과 맞닥뜨리기를 여러 번, 곡절 끝 국회 정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1시를 넘어섰다. 누가 봐도 급히 튀어나온 흔적이 역력한, 때로는 담요 바람인 사람들 사이로 세 가족도 국회 앞을 지켰다. 그날은 '한국인의 피가 끓는' 다인씨가, 생전 처음 겪는 '눈이 도는' 경험이었다.
아무래도 경찰들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밀자!"고 말하는 다인씨를 엄마가 "조용히 해"하며 다독였다. 현대카드 건물 앞에서 군용차량들이 슬슬 철수를 준비하자 "어딜 가!"를 외치며 차를 에워싸는 성난 시민들 사이, 다인씨도 있었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들과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데 어디선가 아빠가 나타났다.
"아빠가 제 뒷목을 잡고 저를 무 뽑듯이 뽑아서 끌고 갔어요. '다인아, 운전해서 집에 갈 거니까 정신을 잘 차려야지' 하면서."
국회의원들이 표결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친 다인씨네 가족들이 국회 담벼락을 따라 차를 세워둔 여의도순복음교회 쪽으로 걸어가던 때였다. 여의도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군용차가 돌연 서강대교남단에서 우회해 다시 국회 방향으로 들어왔다. 이를 김동현씨가 맨몸으로 막아섰고, 가장 가까운 데 있던 사람이 다인씨였다.
"동현님이 너무 '혼자' 있었고, 제가 가장 가까운 데 있기도 했지만, 그냥 모든 차를 못 가게 막고 싶은 감정이 제일 컸어요. 여기서 지금 빨리 진상을 조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커서…"
차는 '부릉'하는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하겠다는 모종의 위협도 했지만, 꽉 붙들기 위해 차 범퍼의 구조물을 팔로 감싸 안았다. WP가 촬영한 영상에는 군인들을 향한 욕설로 추정되는 여러 고성이 '삐' 처리된 가운데, "김다인, 나와. 빨리 가자" 하는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렸을 때, 동네 놀이터에서 천방지축으로 놀 때 엄마가 '밥 먹자'며 부르는 소리와 흡사 톤은 비슷한데, 훨씬 결기에 찬 목소리다.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야, 공포가 들이닥쳤다.
"며칠 지나고 (계엄군이) 사람들 죽이려고 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어제도 (시신 수송) 가방을 수천 개 주문했다 이런 기사를 보니까 '뭐지, 내가 좀 겁이 없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그렇게까지 무섭거나 앞날이 걱정되기보다는 그냥 '죽기보다 더하겠나' 하는 심정이었어요."
계엄의 무게를 아는데, 어떻게 안 가요
서울 출생의 다인씨는 10살 때부터 12년가량을 강원도의 한 대안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다인씨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면 평범한데… 공교육을 받은 2030 여성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라 어딘가 소속되지 않고 떠도는 사람. 그랬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랑 친해질 수 있었던 사람"이라 소개한다. 최근까지 대학 편입 시험을 준비했지만, '네모판' 안에 '나'를 끼워 맞추는 삶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어제' 캐나다행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다.
계엄을 겪지 않은 2000년생 다인씨가 '계엄'이라는 말에 그만큼 즉각적으로 반응한 데는 대안학교에서 배운 진보적 가치의 덕도 컸다. 그러나 거기에 앞서 가족들의 영향이 컸다. "할머니‧할아버지,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아빠가 민주화운동을 하셨어요.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얘기를 많이 듣기도 했지만, 저는 엄마를 가장 가까이 봤으니까…" 라고 했다.
다인씨가 호명한 '할아버지'는 이해학(80) 성남주민교회 원로 목사다. 이 목사는 경기 성남에서 민주화 투쟁과 빈민 운동을 이끌며 7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주민교회를 개척했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유신 정권에 의해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될 당시 반대 투쟁의 주역으로 징역 15년에 처해졌다가, 39년 만의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인씨는 할아버지의 감옥살이로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이번에 그 차를 막은 걸 보고 할아버지가 '내 손녀 맞다. 너는 외가의 딸이 맞다' 이러시고, 할머니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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