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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인들의 "그려~"에 속으면 안 된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2/10/01 09:04
  • 수정일
    2012/10/01 09:0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대선현장③ - 대전] 대선 캐스팅보트 충청, 지지후보는 '비밀'

12.09.30 13:57l최종 업데이트 12.09.30 13:57l
박현주(nabi8)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심대평 전 자유선진당 대표. 두 사람은 한시절 충청권 '맹주'로 불렸다. (자료사진)
ⓒ 자유선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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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던 시절이 있었다. 깃발 색깔만 보고 찍어주던 유권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5년 3월 김종필 총재가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은 오랜 세월 동안 선거 때마다 녹색깃발로 출마한 후보를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으로 그대로 '꽂아주는' 괴력을 발휘했다.

경상도는 신한국당 또는 한나라당의 파란색으로 모두 덮였고, 전라도는 국민회의 또는 민주당의 노란색 물결이었으므로, 충청도 역시 한 가지 색으로 '앗쌀하게' 통일해줘야 '핫바지' 소리는 안 들을 거라 여겼을까?

공교롭게도 자민련은 파란색과 노란색의 혼합색인 초록색으로 당 깃발을 택했고, 충청도에서 초록색 깃발을 꽂고 입후보하면 즉시 고귀한 자리에 꽂히는 행운을 얻었다. 당으로서는 쾌거였고, 후보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정계진출의 기회였다.
처음엔 창당 개업발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개업 때 찾아온 손님들이 '꽂아주고 꽂히는' 맛을 잊지 않고 그 뒤로도 꾸역꾸역 몰려와 마침내 자민련은 충청도에서는 대박 정당이 되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표 몰아주던 시절

지난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지방자치 선거에서 광역단체장 4명, 기초단체장 23명, 광역의회의원 86명을 당선시켰고, 1996년 4·11총선(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50석을 얻음으로써 제2야당의 지위와 함께 국회 운영의 캐스팅보트까지 거머쥐었다. 1998년 6월 4일에 치러진 지방자치제 선거에서는 광역단체장 4명, 기초단체장 29명, 광역의회의원 82명을 당선시켰다.

자민련에 대한 충청민들의 지지는 그야말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전폭적인 지지였다. 후보 자질보다, 공약보다 우선한 것이 충청도 정당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선거는 2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묻고 따지게 됐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낙천낙선후보를 발표하였을 때, 그 명단에는 자민련의 많은 후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유는 거개가 부정부패 또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 때문이었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여파로 자민련은 2000년 총선에서 지역구 12석, 비례대표 5석으로 총 17석을 얻는 데 그치고 말았다. 4년 후인 2004년 총선에는 지역구에서 4석만을 확보하여 급격한 쇠락을 길을 걸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충청도 출신의 정치인이 자유선진당, 국민중심당 등을 창당했지만, 예전 자민련의 영화를 재현할 수 없었고 지방선거에서 승리하여 자치단체장이나 지역의회 의석 정도를 가져갈 뿐이었다. 충청도의 표심을 대변하던 초록색은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나뉘었다. 이같은 색분화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 치러진 총선부터 시작되었다.

▲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2000년을 기점으로 충청도에서는 특정정당이 몰표를 가져가던 현상이 사그라들었고, 2004년 총선이후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 대전충남총선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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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충청도의 선거 지형에 지진과 같은 변화가 생겼다.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은 충청인이 그해 4월 총선에서 자민련 대신 민주당을 선택케 했다. 이후 자민련의 부활은 이뤄지지 않았고 '꽂으면, 꽂히는' 기현상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후 보수 성향의 유권자는 파란색 깃발(새누리당 창당 이후엔 빨간색)을 진보성향의 유권자는 노란색 깃발을, 더 진보를 자처하는 유권자는 보라색 깃발을 각각 선택하면서 충청도는 그 누구도 당락을 예견할 수 없는, 감히 그 누구도 맹주 노릇을 할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캐스팅보트를 쥐었고, 정치권 시쳇말로 무주공산이 되었다.
충청도에서 웃는 자, 대통령에 오를까

캐스팅보트의 위력은 대선에서 가장 도드라진다. 대선 주자들은 충청도에서 만큼은 치열한 진검승부를 겨뤄야 한다. 그러나 충청도 사람들은 속을 내보이지 않기로 유명하다. 느릿느릿하게 하는 "그려~" 한 마디는 수긍의 의미도 되고, 반대의 의미도 되고, 망설임의 의미도 되고 결정의 의미도 된다. 오직 진실은 말을 한 사람만이 알뿐이므로 듣는 사람이 함부로 판단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현재까지 대선 흐름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당 문재인 후보, 오랜 고민 끝에 출마를 선언한 무소속 안철수 후보, 이렇게 치열한 3파전 양상이다. 그렇다면 충청인, 특히 대전시민은 이번 대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마운틴 고장', 즉 서산·논산·금산·예산·아산 등의 충남 출신 시민에게 그 답변을 듣기란 쉽지 않았다. 거개가 "글쎄 뭐..."로 일관하며 말을 아낀다. "이 사람은 이게 아쉽고, 저 사람은 저게 아쉽고" 하며 자기 의견을 똑 부러지게 밝히는 사람들은 거의 수도권이나 전라권에서 온 사람들이다. 대전은 토박이보다 인접한 충남, 충북, 전북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다. 수도권 출신들도 꽤 있고, 거리가 먼 경상권에서 온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렇다면, 대전 토박이들은 어떻게 뭐라 답했을까? 어느 토박이는 "후보들의 본 모습을 잘 몰라 판단하기 어렵다"라고 대답한다. "글쎄 뭐"보다는 구체적지만 "이 사람은 이게 아쉽고" 보다는 훨씬 신중한 답변이다. 어느 토박이는 이번 대통령 선거가 매우 기대되고 재밌다고 야단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다른 대선보다 대통령 후보 세 명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라서" 그렇단다. 딱 찍어놓은 후보는 없지만 박빙의 승부를 볼 것 같아 가슴 떨린단다.

지난 2월 10일, 자유선진당 이회창-심대평 두 전현직 대표가 당 분열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회창-심대평은 김종필 이후 충청권의 맹주 노릇을 했다.
ⓒ 자유선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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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을 모두 TK지역에 두고 혈혈단신으로 대전에 와서 산 지 30년이 넘은 어느 어르신은 이번처럼 찍을 사람이 없는 대통령 선거는 처음이라고 혀를 찼다. 어르신은 '정통 보수' 후보가 나온다면 그가 군소정당 소속이라도 찍어주겠노라고 했다.

다양성이 유권자를 자유롭게 한다

수도권 출신으로 결혼과 동시에 대전에 내려와 살고 있는 어느 주부는 아직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자기 의견을 한참 동안이나 조목조목 피력했다. 그런데 말미에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예전에는 충청도 사람들이 너무 이상했어요. OO당 이름만 들고 나오면 그냥 무턱대고 찍어주는 게 이해 안 가더라고요. 요즘은 좀 덜 그런 거 같던데..."

외지인들이 보기에도 초록색 깃발로의 통일은 이상했나? 이런 의아함에 충청인들은 으레 이렇게 반박한다.

"그럼 경상도와 전라도는 어떤겨? 똑같지 않은겨? 거기는 아직도 그렇잖여!"

사실 충청도가 지역색깔 놀음에서 가장 빨리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지역정당이 전국정당으로 크지 못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지역감정과 지역색깔이 토호세력의 비리만 불렀을 뿐 지역사회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음을 충청도의 유권자들은 지난 세월동안 명백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전과 충청도가 한 가지 정당색의 압박에서 벗어난 것은 축하받아야 할 일이다.
정치적 다양성은 후보와 유권자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 이제 충청인들은 대통령선거라는 축제를 맘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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